김동인의 소설은 예술을 위한 예술
김동인이 1937년에 발표한 소설 『광화사 狂畵師』는 미술과 화가의 관계를 극단적인 낭만적 모습으로 보여준 작품이다.
소설의 주인공 솔거는 죽음에 의해 작품을 완성하며 이는 마침내 화가 자신의 광기로 귀결된다.
이처럼 단편적이나마 미술이 우연한 영감이나 광기, 죽음 등과의 연관 속에서 이해되었다는 점에서 김동인이 그려낸 화가의 모습은 다분히 서양의 근대 미술에 대한 인식을 반명한 것이다.
그의 소설은 예술을 위한 예술, 즉 서양에서 말하는 순수미술관을 반영한 것이다.
미술이란 말이 문헌에 처음 나타난 것은 1884년 『한성순보』에서였다.
이 신문 17호에는 ‘아국 송보각회 회액 俄國 頌補各會 會額’라는 기사가 실렸는데, 각국의 문화실태를 소개한 것으로 여기서 ‘음악학교’ 및 학회와 함께 ‘미술국 美術局’이라는 새로운 단어가 등장했다.
전후에 아무런 설명 없이 미술국이란 단어가 사용된 것으로 보아 미술이란 단어가 그 이전에 이미 도입된 것으로 짐작된다.
19세기 말에 도입된 미술이란 용어는 1915년에 이르러 순수미술의 개념으로 확립되었다.
안확은 1915년 『학지광 學之光』에 기고한 글 ‘조선의 미술’에서 조선의 미술을 회화, 조각, 도기, 칠기, 건축, 의관무기衣冠武器 등으로 나눠 설명한 후 “이상의 유품을 미술안으로 관하고 다시 개괄적으로 언하면 소위 순정미술에 속할 자는 회화 조각이오 기타는 미술적 의장意匠을 표한 준미술 혹 미술상 공예품이라 할지니라”라고 함으로써 순수미술Fine Art로서의 순정미술을, 공예품을 포함하는 준미술과 구분했다.
안확은 두 번째 절 ‘조선 미술품을 감’이란 글에서 문화사를 연구할 때 물질적 측면과 더불어서 “정신적 방면으로는 인격적 의식의 활동 즉 철학과 예술 등을 관찰”해야 한다고 언급했다.
그는 미술의 정신적 측면을 강조했고 ‘철학과 예술 등’이란 말로 미술의 독자성을 전제했다.
그러나 같은 글에서 그는 미술이 온갖 공업의 발달을 위한 기초로 보았고 또한 미술과 문명과의 관계 속에서 “미술을 통해 국가의 흥망을 가늠할 수 있다”고 주장하여 이전의 미술 담론과 동일한 견해를 피력하기도 했다.
이에 비해 전통 서화는 원래부터 어떤 사용가치에 의해 규정되었던 것이 아니라 서양인들이 말하는 순수미술로서의 독자성을 확보하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도입 초기에 기술 혹은 실용성과 분리될 수 없었던 미술 개념, 그리고 새로운 기술을 획득한 신지식인으로서의 예술가에 대한 인식이 전통 서화가들과 양립할 수 없었던 이유였다.
그러나 1910년대 이후 서양화에 대한 인식이 달라졌으며 서화가도 과거 화원이나 문인화가들과는 변별되었다.
1911년에 설립된 경성서화미술원京城書畵美術院은 미술이란 용어가 들어간 단체로서 이런 의미에서 이전과 이후를 가르는 하나의 첨점尖點이었다.
그러나 1913년 평양에서 창설된 기성서화미술회에서도 보듯 서화와 미술이 함께 사용된 데서 서화와 미술은 구별되었다.
서화를 전통 양식에 의한 것으로 미술을 서양 양식에 의한 것으로 구별한 것이다.
경성서화미술원의 교수 내용은 여전히 서와 화를 위주로 하는 것이었으며, 교수방식 역시 『개자원화보 芥子園畵譜』를 모사하거나 각 글씨체를 임서臨書하는 전통 방식으로 이루어졌지만, 1911년 4월 2일자 『매일신보』에 발표한 창립 취지서에서 서화가들은 근대적 자기인식을 명확히 드러냈다.
“어떤 이는 비난하기를, 서화란 하나의 기예에 불과한데, 어째서 하루라도 없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냐고 할 사람도 있으나, 이것은 글씨와 그림이 문장의 도와 함께 삼절을 이루어 예술 분야에 함께 참여하는 것이라는 것을 모르는 말이다.
…
더구나 글씨와 그림은 그 시대의 인심과 풍기를 나타내는 것이 있다.
그러므로 그것이 세도의 승침丞沈과 문운의 성쇠盛衰에 관계되는 것이 적지 않다.
여러분이 또한 이를 찬조하여 이룩할 것을 자기의 임무로 생각하고 학생 이십 명을 뽑아 이 원에서 미술을 가르친다.
이것은 또한 옛 전통을 살리며 후학에게 길을 열어주는 훌륭한 일이다.”
취지서에서 그들이 글 쓰고 그림을 그리는 행위를 문명개화 담론에서 생긴 미술 개념을 유지하고 동시에 자신들의 존재를 직업화가 대 문인화가라는 구분을 떠나 사회적 임무를 부여받은 전문인으로서 인식했음을 알 수 있다.
서화미술원이란 명칭에서 시서화 일치 사상의 기반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자신들의 정체성을 상실하지 않기 위해서는 서양 문명을 대표하는 미술 개념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던 서화인들의 미술에 인식을 짐작할 수 있다.
서화미술회가 해체된 후 서화협회를 결성할 때 명칭에 미술이란 용어가 빠지기는 했지만, 『서화협회회보』 제1권 제1호에 밝힌 대로 “조선 미술의 침쇠함을 개탄하야 전 조선의 서화가를 망라하고 신구서화의 발전과 동서미술의 연구와 향학 후진의 교육, 공중의 고취아상高趣雅想을 증장”기키는 것을 목적으로 삼았음을 볼 때, 이들 역시 미술이라는 보다 상위의 범주 안에서 자신들의 활동을 인식했다고 할 수 있다.
경성서화미술원의 창립으로부터 서화협회의 창립에 이르는 예술가 단체의 형성은 미술 행위에 독자적이고 자율적인 가치를 부여하면서 스스로의 존재를 전문화시켰다는 점에서 전대미문의 근대적 양상으로 이해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