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완용이 서화미술원 원장에 취임했으며
1918년 서화협회를 결성할 때 명칭에 대해 이견이 상당히 분분했다.
고희동은 “명칭이야 어떻게 되었든 일만 제대로 하면 되지 않느냐”고 푸념했다는데, 고희동은 서화 대신 미술을 사용할 것을 고집했지만 대부분의 중견 작가들이 서화를 고집하여 서화협회로 정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대부분의 중견 작가들이 미술이란 명칭을 기피한 데서 서양 양식을 받아들이기에는 당시 사회가 전통에 매여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미술美術은 Beaux-Art 또는 Fine Art에 대한 번역으로 ‘아름다움을 구사하는 기술’이란 뜻이다.
이것은 일본 메이지 유신 이후 번안된 많은 개념들 중 하나이다.
서화란 명칭은 한동안 공존하다가 사라지고 미술이란 명칭이 널리 통용되었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도화라는 명칭이 사용되었으며 미술 교사를 도화 선생으로 불렀다.
미술이란 명칭이 보편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선전이 열리고부터였다.
미술은 서화와 도화와는 달리 회화, 조각, 건축, 공예를 모두 아우르는 포괄적인 개념이다.
명칭에서도 당시 서양 양식의 유입에 대한 사회의 거부반응이 어떠했는지 짐작된다.
서화협회가 결성된 배경에는 1911년 봄 윤영기가 설립한 서화미술원이 있다.
윤영기는 묵란墨蘭을 그리던 문인화가로 흥선대원군으로부터 묵란법을 배워 대원군의 필법 그대로의 난초 그림을 그리며 왕실과 고관대작들과 친분이 두터운 사교에 능한 인물이었다.
시대 변화에 대응하기 위해 후진 양성을 목적으로 서화미술원 설립에 착안한 야심을 가진 인물이지만, 한일합방 전에 조선 검거 세력으로 군림한 일제 통감부에까지 지원을 간청할 정도로 민족의 현실을 외면한 비열한 서화가였으며 한일합방 후에는 일부 매국귀족들의 도움을 받아 이 단체를 설립했다.
당시 『매일신보』는 백작 이완용과 자작 조중응, 남작 조민희 등이 서회미술원에 보조금을 냈다는 기사를 실었다.
서울 종로구 중학동 근처 한 건물을 빌어 1911년 3월 22일 많은 한묵인사翰墨人士가 모인 가운데 개원식을 거행했다.
윤영기는 설립 취지를 다음과 같이 밝혔다.
“어떤 이는 비난하기를 서화란 하나의 기예에 불과한데 어째서 하루라도 없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냐고 한 사람도 있겠으나 이것은 글씨와 그림이 문장의 도道와 함께 삼절三絶을 이루어 예술분야에 함께 참여하는 것이라는 것을 모르는 말이다.
문장을 없앨 수 없다면 서화는 또 어떻게 가볍게 다룰 수 있겠는가.
… 글씨와 그림은 그 시대의 인심과 기풍을 나타내는 것이 있다.
그러므로 그것이 세도世道의 승강昇降과 문화 성쇠에 관계되는 것이 적지 않다.
여러분이 서화미술원을 찬조하여 이룩할 것을 자기의 임무로 생각하고 학생 20명을 뽑아 보내서 미술을 가르친다.
이것은 또한 옛 전통을 살리며 후학에게 길을 열어주는 훌륭한 일이다.”
윤영기가 설립한 서화미술원은 몇 가지 사업과 운동을 남긴 채 그의 재정적 지원을 맡고 나선 이완용에 의해 또 다른 미술단체와 미술학원으로 변질되었다. 한일합방조약 체결을 맡았던 이완용이 서화미술원 원장에 취임했으며 그는 이 단체에 매국내각의 공동 역신 조중응과 조민희를 포함한 일부 귀족층 인사들을 끌어들였다.
서화미술원은 사라지고 서화미술회가 생겼다. 윤영기의 존재는 사라졌고 대신 이완용이 추진한 서화미술회가 부각되었다.
윤영기가 이룩한 공적은 없더라도 그가 최초로 미술이란 말을 사용했다는 사실은 미술사에 남게 되었다.
윤영기의 주도하에 운영되던 경성서화미술원은 이완용이 주동이 되어 표면상에는 이왕직을 내세웠지만 실제에 있어서는 서화를 즐기던 친일 계열의 귀족들을 이끌어서 미술학원을 탄생시킨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