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인리히 뵐플린Heinrich Wolfflin(1864~1945)


그는 회화가 선적인 것으로부터 회화적인 것으로 발전했다고 했는데,
회화를 선적인 것과 회화적인 혹은 채색적인painterly 혹은 색면적인colour-field 것으로 양분했지만 그가 타계한 후 유행한 모노크롬 회화의 경우 이는 선적이지도 회화적이지도 않아 그의 이분법적 분류에 문제가 있음이 드러났고, 이를 아서 단토는 <예술의 종말 이후>에서 지적했습니다.

그가 회화적인 것으로 발전했다는 것은 추상을 염두에 두고 한 말로 이해됩니다.
뵐플린의 제자 빌헬름 보링거Wilhelm Worringer(1881~1965)는 박사논문 <추상과 감정이입>을 뵐플린에게 제출했는데, 보링거는 추상의 필연성을 주장한 사람입니다. 보링거가 논문을 쓸 당시 칸딘스키와 그의 추종자들이 뮌헨을 중심으로 추상 미술을 추구하고 있었고, 파리에서는 입체주의자들이 사물을 면으로 잘라 분석하는 반추상을 추구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주변의 변화 속에서 쓴 논문이라서 시대정신에 부합되었으며 따라서 보링거의 논문은 책으로 발간되어 재판을 거듭거듭하면서 유명해졌습니다.
제자의 이런 논문을 심사한 것으로 보더라도 뵐플린이 회화적으로의 발달을 주장한 것은 추상화되는 당시의 미술세계를 잘 알고 한 것으로 보여집니다.

뵐플린의 순수가시성의 다섯 도식은 유명하고 그의 이름은 빈 미술사 학파를 정초한 알로이스 리글Alois Riegl보다 더 유명하지만,
리오넬로 벤투리Lionello Venturi는 <History of Art Criticism>(1936)에서 뵐플린에 대해 이렇게 적었습니다.

"뵐플린의 사상은 리글보다는 훨씬 더 고도로 세련되어 있지만 독창성을 뒤떨어진다. 가장 중요한 점은 그의 취미가 르네상스와 바로크 미술에 한정되어 있고, 리글의 장점인 폭넓은 보편성을 지니고 있지 못하다는 점이다. 예를 들면 뵐플린은 프리미티브 파 화가들의 미술을 이해하지 못했으므로 그들의 미술에 관해 논할 때 그 미술의 딱딱함, 비긴밀성, 통일성의 결여 등에 관해 말하고 있다."

르네상스에 정통한 벤투리가 뵐플린을 이렇게 비판한 이유는 다음의 이유에서 입니다.

"부르크하르트가 그에게 문화사를 가르쳤고, 힐데브란트는 시각상의 역사를 가르쳤기 때문에 뵐플린은 문화사의 필요성과 미술에 있어서의 심리학적인 전통을 특히 민감하게 자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갖가지 역사적인 방법들을 병치한 결과, 그 방법들은 혼란스러워졌으며 여전히 불완전한 채로 남아 있게 되었다."

벤투리가 <History of Art Criticism>을 쓴 것은 미국에서였습니다.
이 책을 쓴 후 Johns Hopkins University의 객원교수로 초대되었습니다.
1955년에는 Columbia University에서 강의하기도 했는데,
벤투리의 시각은 다분히 미국적일 수 있고 그런 의미에서 스위스 미술사학자로 독일에서 활동한 뵐플린의 사상과는 다르며, 단토도 뵐플린을 비판했지만 미국식 비평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뵐플린에 대한 이런 비판도 있다는 걸 염두에 두고 그의 저서를 읽은 것이 유익할까 해서 하는 말입니다.
아무래도 나중 사람의 비판에 설득력이 있을테니까 말입니다.

뵐플린의 다섯 개의 도식은 동일한 현상에 대한 다섯 가지 관점으로 벤투리뿐 아니라 몇몇 사람들이 그의 도식 사용에 문제점을 지적하자 뵐플린은 불가피하게 수정했으며,
벤투리의 말을 빌면,
"뵐플린은 보다 신중하게 형식과 내용간의 날카로운 구별을 회피하면서 각각의 새로운 시각 양식 속에는 새로운 세계가 구체화되어 있다고 말하고 있다. 다르게 볼 뿐만 아니라 다른 것을 보고 있다. ...
여기에서 뵐플린은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 일체의 미술작품의 본원은 생명에 있는 것이지, 이전 시대의 미술작품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고려하지 못했다."

벤투리와 단토 외에도 뵐플린의 이론에 대한 비판이 있다는 걸 염두에 두고 읽도록 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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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가의 의무



제9장에서 아서 단토는 양식으로 작품을 구별하는 미술사의 개념을 부정한다.
그리고 그는 비평가의 의무를 언급했는데 비평가의 역할이 그 어느 때보다도 중요해졌기 때문이다.
어떤 의미에서 미술작품을 예술가 스스로 완성시키는 것이 아니라 비평가에 의해서 비로소 최종적으로 완성된다고 말할 수 있다.
그 이유는 미술이 이제 철학의 문제, 즉 비평가의 의무가 되었기 때문이다.
앤디 워홀의 작품이 예술철학자이면서 비평가인 단토에 의해 그 의미가 크게 부각된 것처럼 비평가에 의해서 의미가 크게 부각될 수 있기 때문이다.


1993년 로버트 라이만의 회고전과 더불어 패널토론회가 열렸는데, 사회자 로버트 스토어가 패널토론회 제목으로 ‘추상회화: 끝이냐 시작이냐?’를 정했다. 스토어가 이 같은 제목을 정한 이유는 회화는 죽었으며 라이만의 전형적인 흰색 사각형과 같은 작품은 회화의 내적 고갈의 증거로 받아들여진 데 있었다.
이런 인식은 당시 만연했다. 모노크롬을 회화의 최후 단계로 보는 시각이 팽배해 있었다.
그러나 단토는 이를 부정했다.
모노크롬 회화는 과거에도 있었고 1933년에도 있었음을 상기시켰다.
단토는 모노크롬 회화를 운운하며 회화의 종말을 주장하는 적은 자신의 예술의 종말론과는 본질적으로 다르다고 말한다.

모노크롬 회화는 말레비치에 의해 1910년대에 이미 소개되었다.
로버트 라우셴버그도 흰 캔버스를 작품으로 소개한 적이 있다.
그러나 모더니즘이 붕괴된 이후에 제작된 모노크롬 회화가 추상으로서 문제로 제기되었고 라이만의 흰색 사각형 그림이 논란의 대상으로 제기된 것이다.
그린버그가 추상회화를 미술사의 발전적 당연한 귀결로 보았기 때문에 모노크롬 회화, 즉 ‘추상회화: 끝이냐 시작이냐?’ 하는 논제로 떠오르게 된 것이다.


단토는 먼저 모노크롬의 역사를 말한다. 데 스틸De Stil 운동의 주역들은 세 가지 색채 빨강, 노랑, 파랑과 세 가지 비색채 하양, 회색, 검정만을 사용했다.
이런 색들에는 형이상학적 공명이 있다.
즉 세 가지 원색이 사용되었고 세 가지 비색채는 색채원뿔의 중심을 관통하는 축의 끝점과 중간점을 나타낸다.
재즈음악가가 되려고 했던 라이만은 흰색을 사용하기 전에 이차적 색상에 불과한 오렌지색과 초록색을 사용했다.
데 스틸의 화가들은 순수주의자들로서 원색과 비색채를 사용했으며 이는 관람자에게 형이상학적으로 받아들여졌다.
하지만 이차적 모노크롬이란 별 의미가 없다. 라이만이 무슨 이유로 흰색을 사용했는지 몰라도 그의 작품에는 형이상학적이며 우주론적 의미가 내포되어 있지 않다.
왜냐면 그가 흰색을 선택한 것은 오렌지색과 초록색을 선택한 것과 동일한 이유에서였기 때문이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외양적으로 동일한 종류의 그림이더라도 그것을 그리는 사람의 사고가 우연에 기인했다면 그의 작품은 중요하게 받아들여질 수 없다는 것이다.
오렌지색이나 초록색을 선택하듯 흰색을 선택한 것이라면 원색이 지닌 신플라톤주의적인 함축과 원뿔의 축이 함축하고 있는 기하학적 의미를 부정한 것이므로 겉으로는 데 스틸 화가와 같이 순수 모노크롬으로 보이더라도 미학적인 면에서 볼 때는 전혀 그렇지 않다는 점을 단토는 역설한다.


그의 이론을 변용의 문제에 확대 적용하면, 변용을 통해서 추구하려는 의미를 따로 두지 않은 채 우연에 의해 변용적인 작품을 제작했다면 이는 변용이 주는 철학적 해설이 그 작품에 없음은 물론이고 그런 내용을 부정한 것으로 간주할 수 있다.
말레비치는 흰색 위에 흰색 사각형을 그린 후 관람자가 순수 속으로 빠져들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라이만의 흰색 모노크롬은 말레비치의 작품과는 매우 다른 정당성과 의미를 지녔다고 말할 수 있다.
단토는 화가의 생각과 동기를 매우 중요하게 여긴다.
화가가 우연히 흰색 사각형을 그렸다면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별로 없다는 것이다.


단토는 자신이 고안한 양식모형style matrix을 통해 작품들 간의 친족성으로 양식적 특질quality을 고찰하는 방법을 제안한다.
그의 특질 부여는 <예술과 과학>의 저자 애드리안 스톡스로부터 유래한다.
모든 미적 특질은 명백하고 즉각적이지만 조건지배적인 것은 아니다.
또한 특질이 분명히 좋은 것이라거나 훌륭하다는 뜻과는 아무 관련이 없다.
단토는 뵐플린이 회화적malerisch(painterly)인 것과 선적인 것을 구별한 예를 들어 속성들에 긍정적 명칭을 부여할 수 있음을 지적한다.
뵐플린은 회화를 주로 색을 칠하는 회화적인 것과 색보다는 선을 중시하는 것으로 양분했지만, 어떤 작품의 경우는 회화적이라고 말하는 것이 불가능하며 그렇다고 선적이라고 말하는 것도 불가능한 경우가 있다.
라이만의 작품이 이런 경우에 속한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양식으로 작품을 구분하는 것은 가능하지만 이는 그 이상의 의미가 없고 단지 구별을 짓는 것뿐이다.


단토가 뵐플린의 방법을 예로 든 것은 그가 미술사를 양식의 역사로 기술했기 때문으로 뵐플린의 체계가 지닌 내적 결함을 지적하기 위해서였다.
뵐플린의 체계는 컬럼비아 대학의 교수 마이어 샤피로로부터 도전을 받기도 했는데 뵐플린의 양식적 구별의 도식이 성기 르네상스와 바로크 사이에 있는 매너리즘이라 불리는 중요한 양식에는 적용되기 곤란하기 때문이다.


단토는 다시금 워홀의 <브릴로 상자>를 상기시키면서 평범한 사물과 너무 닮았기 때문에 지각만으로는 둘 사이를 진지하게 식별해낼 수 없는 사례를 들어 친족성이 없는 작품의 경우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문제를 제기한다.
겉으로는 유사한 것들의 미학적 차이에 대한 관심이 단토로 하여금 미술비평의 길로 나서게 했다.
비평가로서의 단토는 작품을 대하는 태도에 관해 말한다.
비평가는 작품이 어떻게 세상에 나왔는지 설명할 수 있어야 하고, 작품들이 내놓는 진술에 의거해서 읽는 법을 배우고 평가해야 한다.
그리고 작품들이 모방적인지 형이상학적인지 형식주의적인지 아니면 도덕적인지를 판단해야 한다.


그는 말한다.
“To be a work of art 1) about something and 2) to embody its mean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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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신세계 12월호에 기고한 것입니다.

에콜 드 파리의 선두자: 모딜리아니와 수틴


아메데오 모딜리아니Amedeo Modigliani(1884~1920)(모딜 17)

몰락한 유태인 은행가 집안에서 1884년 7월 12일 넷째 아이로 태어난 이탈리아 화가 모딜리아니는 11살 되던 해 여름에 늑막염을 앓았고 이것이 결핵으로 진행되어 36살의 나이로 요절했다.
14살 때 학교를 그만두고 화가의 화실에서 회화를 배우기 시작한 그는 22살 때 파리로 가서 매우 가난한 생활을 하다가 그곳에서 세상을 떠났다.
수틴과 더불어 에콜 드 파리의 대표적 인물이지만 생애에 거의 작품을 전시하지 않아 사람들의 주목을 받지 못했다.
결핵에 시달리고 술과 마약으로 찌든 삶을 살면서도 회화와 조각에 전념했으므로 사람들은 그를 낭만적인 천재로 보는 경향이 있다.
회화에서의 독창적 양식은 인물을 조각의 부조처럼 그리면서 배경으로부터 분리하는 것이다.
따라서 선을 중요시했으며 많은 대가들의 장점을 답습한 매너리스트라는 비판이 있지만 모델의 개성을 관람자에게 전달하는 표현은 매우 강렬하다.


샤임 수틴Chaim Soutine(1894~1943)(수틴 112)

가난한 유태인 집안의 열 번째 아이로 태어난 러시아 화가 수틴은 회화를 배우기 위해 가출했고 3년 후 19살 되던 해에 후원자의 도움으로 파리로 갔다.
러시아 출신 화가 샤갈, 모딜리아니와 친분이 두터웠으며 세 사람의 공통점은 가난한 유태인이란 것이다.
반 고흐의 말기 작품을 보고 감동한 수틴은 더욱 격렬한 감정을 드러내는 표현주의 회화를 추구했지만 미국인 콜렉터 반스가 1923년 100점을 구입해주기 전까지 그의 진가를 알아주는 화상이 없어 빈곤한 생활을 면치 못했다.
화가들 중에 가장 가난했다.
주기적으로 우울증에 시달렸으며 늘 불안해했고 자신의 작품에 만족하지 못해 전시회를 꺼려했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았다.


20세기에 접어들면서 파리는 예술의 수도로 부상했고 이런 위상은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할 때까지 지속되었다.
유럽 대도시에는 미술관이 30개 정도 있었던 데 비해 파리에는 무려 130개가 있었다.
외국으로부터 화가와 조각가들이 파리로 몰려들었고 그들이 주축이 되어 전개된 미술 활동을 가리켜 에콜 드 파리Ecole de Paris 혹은 파리 미술계라 한다.
파리에는 6만여 명의 예술가들이 있었고 삼분의 일 이상이 외국인이었다.
외국인이 파리로 몰려든 이유는 일하고 살기에 적당하며 다양한 배경을 가진 예술가들과 폭넓게 교통할 수 있어 창작하기에 자유로웠기 때문이다.
모딜리아니와 수틴을 포함해 외국 예술가들 샤갈, 파생, 키슬링은 프랑스 표현주의의 한 축을 이루었지만 이들에게 붙여진 별명은 ‘저주받은 화가 cursed painter’였다.


모딜리아니는 한 마디로 인본주의 화가로 현대 화가들 가운데 인간을 모티프로 지속적으로 그린 사람은 그밖에 없다.
그는 인간의 내면을 들여다볼 줄 알았으며 개인의 특성 혹은 특유의 심리적 면을 감성적으로 전달하는 데 귀재였다.
독창적 양식을 발견하기까지 그는 다양하게 영향을 받았는데, 조르조네, 티치아노, 루벤스, 프라고나르, 앵그르, 고야 등 옛 대가들과 당대의 유명한 화가와 조각가들 툴루즈-로트레크, 피카소, 세잔, 브란쿠시 등 여러 작가들의 작품을 분석했다.
이들의 양식을 차용하여 모델로 하여금 포즈를 취하게 한 점에서는 매너리스트였지만 모델의 개성을 과장하여 극도하게 표현하는 방법은 독창적이었다.


1906년 겨울 몽마르트르에 도착한 그는 피카소가 살고 있던 예술가들의 마을 바로 라브아르에 방을 얻었으므로 ‘피카소의 패거리’와 어울릴 수 있었다.
피카소의 초상을 그렸고 그에게 존경심을 표했지만 피카소는 “모딜리아니를 만나려면 몽파르나스 거리 코너에 가면 된다. 늘 취한 채 그곳에 있으니까”라고 빈정거렸다.
모딜리아니는 1915년 카페와 작업실에서 거의 매일 만나다시피 하는 친구들 수틴, 키슬링, 그리 등의 초상을 작은 크기로 그렸는데, 수틴의 초상화(모딜 34)가 가장 유명하다.
내성적이며 불안한 증세가 있고 촌티 나는 수틴을 적절하게 표현했다.


모딜리아니의 개인전이 1917년 10월 화상 즈보로스키에 의해 베르트 베일 화랑에서 열렸고 개막식이 막 끝날 무렵 경찰관들이 민첩하게 들이닥쳤다.
동네 주민이 ‘공연외설죄’란 명목으로 그를 고소했기 때문이다.
경찰관들은 누드화를 여러 점 압수했다.
그의 누드화를 두고 포르노라고 하는 논란을 말해주는 상징적 사건이다.
그는 자신의 작품이 물의를 일으킨 데 대해 오히려 만족해했다.
그 해 4월에 콜라로시 아카데미에 재학 중인 잔느 에뷔테른(모딜 73)을 만나 동거하고 있었으므로 행복한 시기였다.
그는 잔느를 모델로 많은 누드화를 그렸다.
잔느를 사랑했지만 술과 마약으로 의식이 몽롱할 때는 길에서 잔느의 머리카락을 잡고 그녀의 머리를 벽에 부딪치게 하는 등 과격했다.


초상화가 심리적인 면을 과장해 드러낸 것이라면 그의 누드화는 이상적이며 장식적이다.
여인은 매우 감각적이며, 평온해 보이고, 관람자를 빤히 쳐다보기도 하고 눈을 감고 반쯤 잠든 모습이며, 초상화와는 달리 개성이 전혀 드러나지 않는다.
성적으로 호감을 주는 부분을 잘 보이게 하려고 무릎 위까지만 그리는 것이 보통이고 배경의 침상이나 소파를 따뜻한 느낌을 주는 붉은색과 브라운색으로 처리했다.
약 서른 점을 그렸는데 중요한 누드화는 1917년부터 그린 것들이다.
이것들은 포르노라는 논란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비스듬히 누운 누드>(모딜 98)는 모델의 팔과 다리를 대각선으로 쭉 뻗게 한 것으로 모델이 자신의 모든 것을 관람자에게 내어주겠다는 의사를 표시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런 점을 강조하기 위해 모딜리아니는 무릎 아래의 부분을 잘라 관람자가 더 가까이서 볼 수 있도록 했다.
머리와 위로 뻗은 오른팔은 별로 중요하지 않게 취급되었으며 왼팔은 아예 보이지 않는다.
따뜻한 느낌을 주는 인체의 색이 감성적으로 안락한 인상을 주고 바탕의 붉은색으로 인해 인체가 두드러진다.
<쿠션 위의 누드>(모딜 99)도 동일한 의도로 그린 것이며 진한 검은 머리카락이 초록색 쿠션에 의해 더욱 드라마틱하다.
대각선 구도는 조르조네와 고야에 의해 이미 사용된 적이 있지만 모딜리아니는 성적 호감을 극대화하여 순수 회화가 관람자로 하여금 부끄러움을 갖지 않고서도 원하는 것을 바라볼 수 있게 해줄 수 있음을 시위했다.


모딜리아니는 결핵성 뇌막염으로 1920년 1월 24일 오후 9시경 샤리테 병원에서 죽었다.
잔느는 이튿날 새벽 4시에 자기 부모의 아파트 창문에서 몸을 던져 자살했는데, 그녀는 두 번째 아기를 임신한 몸이었다.
모딜리아니의 가까운 친구이며 화상 즈보로스키는 장례식을 마친 후 모딜리아니의 형 에마누엘에게 보낸 편지에 적었다.

“그의 건강이 걱정스러울 정도로 악화되기 시작했습니다. 당장 스위스의 결핵요양원으로 가라는 내 충고도 소용없었습니다. 그렇게 말하자 날 적으로 취급하고는 ‘설교하지마!’라고 대꾸했습니다. 별을 보고 꿈을 먹는 아이처럼 그에게 현실이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타계하기 7개월 전 모딜리아니는 창작에 불타고 있었다.
유일한 자화상(모딜 108)을 그렸는데 몹시 지친 모습이다.
죽기 전에 “사랑하는, 사랑하는 이탈리아여!”라고 중얼거린 것으로 전해진다.
고국으로 돌아가고 싶은 소원을 이루지 못하고 세상을 하직한 것이다.


수틴의 가장 유명한 작품은 <쇠고기>(수틴 184)이다.
소를 매단 장면을 처음 그린 화가는 렘브란트로 1655년에 <도살된 소>를 그렸다.
이런 전례를 따라 수틴은 경제적으로 어려운 형편임에도 불구하고 도살된 소를 한 마리 사서 작업실에 매달고 여러 점을 그렸다.
너무 오래 방치했으므로 악취가 진동해 동네 사람들이 진정서를 냈고 보건소에서 사람들이 나와 강제로 철거했다.
수틴은 며칠만 더 시간을 달라고 간청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렘브란트는 싱싱한 소를 그린 데 반해 수틴은 썩은 소를 그렸으며, 렘브란트는 사실적 묘사가 뛰어난 데 반해 수틴은 소를 화면에 가득 차게 하여 관람자의 시야를 엄습하게 했고, 강렬한 색으로 표현을 과장했으므로 사실주의와는 멀었다.
회화는 자의식이란 신념으로 자신의 느낌을 전달하는 데 더 역점을 두었으므로 반추상으로 나타났다.
그는 2년 전에 도살된 말의 머리와 시체를 화면 가득 차게 그린 적이 있다.(수틴 177)


수틴은 초기에 풍경화를 많이 그렸고 1920년대 초 동물의 시체를 주제로 그릴 시기에 초상화도 그렸다.
1920년대 초 기도하는 사람, 성가대원 등 기독교를 주제로 작품을 제작하면서 1924년경에 <성체 배령자>(수틴 181)를 그렸다.
모딜리아니가 모델의 개성을 드러내는 데 역점을 두었다면 수틴은 어떤 행위를 하기 위해 유니폼을 입었거나 직업적 유니폼을 입은 사람의 모습을 표현하는 데 역점을 두었다.
<성체 배령자>는 의식을 기다리는 흰 드레스차림의 소녀 모습을 묘사한 것으로 긴장하는 소녀의 모습을 표현했다.


빵 제조자, 요리사, 시동 등 직업 유니폼을 입은 소년들을 그리면서 일부러 몸체를 일그러뜨리거나 특이한 제스처를 취한 모습으로 묘사했다.(수틴 175)
이를 두고 유태인의 신비주의가 표현된 것으로 보는 시각이 있다.
이 시기에 눈으로 볼 수 있는 대상의 외양보다는 그 이면에 내재하는 본질 혹은 정신적 요소를 드러내려는 화가들이 있었고 수틴도 이들 가운데 하나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그러나 샤갈과는 달리 수틴은 유태인의 정체성을 나타내는 작품을 제작한 적이 없다.
그의 작품은 프랑스의 표현주의 화가보다는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표현주의 화가들의 작품과 유사하다.
작품에 나타나는 우울하고 절망적인 분위기는 그 자신의 내면의 모습이기도 하다.


<도판>

모딜 17 1902년경의 모딜리아니
모딜 34 모딜리아니, <샤임 수틴>, 1915, 나무에 유채, 36-27.5cm.
모딜 73 모딜리아니, <잔느 에뷔테른>, 1918, 캔버스에 유채, 100-65cm.
모딜 98 모딜리아니, <비스듬히 누운 누드>, 1917, 캔버스에 유채, 60-92cm.
모딜 99 모딜리아니, <쿠션 위의 누드>, 1917, 캔버스에 유채, 60-92cm.
모딜 108 모딜리아니, <자화상>, 1919, 캔버스에 유채, 100-64.5cm.
수틴 112 1930년대 중반의 샤임 수틴
수틴 184 수틴, <쇠고기>, 1925년경, 캔버스에 유채, 166.1-114.9cm.
수틴 177 수틴, <말의 머리와 시체>, 1923년경, 캔버스에 유채, 92.1-73cm.
수틴 181 수틴, <성체 배령자>, 1924년경, 캔버스에 유채, 81-47.9cm.
수틴 175 수틴, <맥심에 근무하는 시동>, 1927년경, 캔버스에 유채, 125.9-66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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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r. Darcy에게


나폴레옹에 대한 평가는 역사학자들마다 다르지만 좀더 많은 학자들이 그를 위대한 혁명가로 간주합니다.
우리가 역사적 인물에 대해 평가할 때 잊어서는 안 될 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 인물이 활동하던 시기에 관한 것입니다.
이것은 역사공부의 필수적인 조건입니다.

나폴레옹에 대해 비판하는 학자들은 그가 투표에 의해 국민의 신임을 얻어 통령이 된 후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종신제 황제에 즉위한 것을 꼽으며 형제 누이들에게 왕위와 권력을 준 것을 비난합니다.
그러나 그가 활동하던 시기의 프랑스 상황을 알면 이해가 됩니다.
당시 유럽 전체가 왕정시대였습니다.
분명 힘을 내세워 왕권을 장악했음에도 불구하고 왕위를 세습하면서 권력자들은 자신의 권력이 신으로부터 왔다고 주장했고 거의 모든 국민이 왕권을 신성한 것으로 여기던 때입니다.
왕의 무한한 통치를 받는 것이 당연한 것으로 여기던 때였습니다.
왕권에 대한 도전은 그야말로 반역이고 죽을 죄로 알 때였습니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였지요.
분명 이성계는 군인으로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하고 스스로 왕위에 오른 사람이지만 사전에 '용비어천가'를 퍼뜨려 자신의 권력에 신성을 부여하고 왕위를 세습했습니다.
그렇게 조선시대가 시작되었습니다.

여하튼 평민 출신의 나폴레옹이 국민의 지지와 선거를 통해 최고의 권력자인 통령에 선출된 것은 당시 여간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그 자체만으로도 혁명입니다.
당시 프랑스의 재정상태가 몹시 나빴고 거의 모든 전쟁이 경제적인 이유로 발발했습니다.
제1차, 2차 세계대전이 그러했고, 월남전과 중동전이 그러했으며, 오늘날의 이라크 침공이 그러한 것과 마찬가지로 국가가 경제난에 빠지면 전쟁으로 가는 길밖에 없었습니다.
나폴레옹이 이웃나라를 침공한 것은 첫째는 경제적 곤경에서 벗어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평민이 왕이 되는 사례를 묵과할 수 없어 유럽의 모든 왕정 국가들이 단결하여 나폴레옹과 싸우게 된 것입니다.
루이 16세를 광장에서 단두대에 세워 국민이 보는 앞에서 죽이는 끔찍한 사건에 유럽의 모든 왕들은 치를 떨었던 것입니다.
평민도 국민의 지지를 받으면 왕이 될 수 있다는 프랑스의 사례가 다른 왕정국가에는 매우 위협적인 것이었습니다.
소위 말하는 국체와 국기를 문란하게 한 사건이었기 때문이지요.

나폴레옹은 재위 기간의 삼분의 이를 전쟁터에서 보냈습니다.
전쟁을 위해 타고난 사람처럼 보였습니다.
유럽 전체를 상대로 싸우면서 승승장구 했지요.
Dr. Darcy가 말한 대로 러시아 침공은 대실패였습니다.
히틀러도 동일한 우를 범했는데 추운 일기에 대국을 점령한다는 건 어려운 일이며 나폴레옹처럼 러시아의 심장부 모스크바를 점령했더라도 모스크바를 불지르고 달아나서 항복하지 않으면 승리한 것이 못됩니다.
결국 나폴레옹은 전쟁에서 승리했지만 많은 병력을 잃고 거의 패잔병처럼 돌아올 수밖에 없었으며 이는 결정적인 몰락의 원인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프랑스 국민은 여전히 나폴레옹을 지지했습니다.
그는 국민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은 지도자였습니다.
이것을 아는 것은 중요합니다.
그가 억지로 황제에 머무른 것이 아니라 90퍼세트 이상의 국민이 그가 황제이기를 바란 것입니다.
그가 프랑스 국민을 위해 싸웠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에 대한 평가는 나폴레옹 법전입니다.
당시 유럽에서 가장 민주적인 법이었습니다.
이혼법의 경우 여성에게 그만한 권리를 부여한 나라는 프랑스밖에 없었습니다.
평민도 공을 세우면 귀족이 될 수 있고 훈장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프랑스밖에 없었습니다.
오늘날에도 일부 나폴레옹 법전은 유효할 정도로 그는 국민의 편에 서서 국민을 위한 정치를 했던 것입니다.
그가 유럽을 통일했더라면 그러한 체계가 각 나라에 토착화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우선 모든 왕정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국민이 직접 자신들의 통치자를 선택할 수 있는 것이지요.
프랑스 혁명은 시민들이 바스티유 감옥을 부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시민들에 의해 혁명이 시작되었고 그 혁명을 유럽 전체에 적용하려고 한 혁명가가 나폴레옹이었습니다.

오늘날 군사전문가들이 실증을 통해 그의 최후의 전쟁 영국군에 대한 워털루 전투를 분석한 결과 그가 승리할 수 있었던 전쟁이었다고 말합니다.
그가 지휘를 부하 장군에게 맡기고 몇 시간 자리를 비운 것이 패인으로 꼽습니다.
왜 자리를 비웠을까?
나폴레옹이 결국 위암으로 죽은 것으로 봐서 당시 심한 위경련으로 도저히 지휘할 수 없었던 상황이 패인이었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역사에 '만약'이란 말은 아무 의미가 없지만 그가 승리했더라면 유럽에는 민주주의가 일찍 시작되었을 것입니다.
영국 여왕이 장차 왕이 될 아들과 함께 앵발리드를 찾아가 나폴레옹의 시신에 경의를 표현 것은 상징적으로 나폴레옹이 위대한 혁명가였음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나폴레옹은 위대한 혁명가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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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신문에 기고한 글입니다.


칸딘스키와 클레의 추상 미술

작품의 성격과 중요성을 감안하거나 저술을 통한 이론과 바우하우스에서의 교육이 미친 영향을 살펴볼 때 바실리 칸딘스키Wassily Kandinsky(1866~1944)와 파울 클레Paul Klee(1879~1940)는 20세기 전반기의 추상 미술 발달에 있어 가장 중요한 인물이다.
이들은 자연의 풍경이나 대상의 표현적 특징을 재현하지 않고 망막에 투영되는 실제 이미지에 상관하지 않은 채 회화 도구 본래의 표현적 속성을 살리는 데 역점을 둔 선구자들이다.
표현적 이미지를 창조하기 위해 선, 면, 색 등과 같은 회화 요소를 과학적으로 심리적으로 세밀하게 분석했다.
재현적 표현을 버리고 기하적 원근법을 없애며 색채와 형태의 한층 심오한 감각적 특성을 명확하게 다룸으로써 회화 공간을 창조했다.
자연에서 받은 감동을 전통적인 방법으로 표현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되자 논리적 사고가 아닌 갑자기 떠오르는 일종의 직관을 통해 회화와 자연은 각각 원리와 목적이 다른 두 개의 분리된 세계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이를 근거로 회화의 자율성에 관한 믿음, 즉 회화는 외부세계와의 어떤 유사성이 아니라 본래의 미학적 원리에 의해 지속되거나 존재한다는 신념을 갖게 되었다.
풍경화의 경우 폴 세잔과 마찬가지로 자연 앞에 서서 아무런 목적도 없이 그냥 바라본 장면을 그리는 것으로 세잔의 말대로 “개처럼” 바라본 자연, 혹은 어린 아이의 눈으로 바라보듯 목적을 가지지 않은 채 단순히 자연의 형태와 색채만을 경험하는 것이다.

칸딘스키는 1909년 여름부터 ‘즉흥’ 연작을 그리기 시작했는데 인물, 건물, 산 등의 형태가 불분명하다.
그것들은 기호의 기능을 한다. ‘즉흥’이란 제목은 가능한 한 자발적인 방법으로 그리고 의식적인 제어작용을 극소화한 상태에서 형태들을 창조했음을 시사한다.
‘구성’ 연작은 ‘즉흥’에 기반을 두고 계획적으로 확장시킨 것들이다.
이런 작품들은 기하적 추상과는 구분되며 추상에 이르는 또 다른 과정이며, 특기할 점은 기하적 추상과 칸딘스키의 비정형 추상을 적대적인 양식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인상’ 연작을 예로 들면, 칸딘스키가 1911년 1월 2일 아르놀트 쇤베르크의 음악회에 다녀온 후에 그린 <인상 III - 콘서트>가 있는데, ‘인상’은 외부세계에 대한 직접적인 인상을 표현하기 위해 선택한 제목이다.
시각적 인상뿐 아니라 비재현적인 방법으로 표현하는 모든 종류의 감각적인 인상을 의미한다.
청각적 인상과 시각적 인상을 동시에 표현한 것으로 형태와 색채를 콘서트홀의 분위기와 음악에 대한 상징으로 나타내면서 노란색과 검은색을 두드러지게 나타내기 위해 흰색으로 보완한 것이다.
검은색 면은 무대 위의 그랜드 피아노이며 왼편 여러 개의 작은 검은 곡선은 무대 가까이서 음악을 듣는 청중을 상징한 것이다.
피아노를 가운데로 양편의 흰 기둥은 실제 기둥이 아니라 소리기둥의 은유적 표현이다.
가장 인상을 주는 노란색은 콘서트홀을 가득 매운 쇤베르크의 소리이다.
노란색은 소리를 상징하는 색으로 그는 1909년에 무대 구성에 관한 글에서 <노란 소리>란 제목을 사용했다.
<인상 III - 콘서트>는 서로 영향을 주는 회화와 음악의 공감각을 표현한 것으로 이런 공감각은 20세기 초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클레의 작품에서도 빼어놓을 수 없는 요소이다.
칸딘스키는 악기의 소리를 색채와 연관시키면서도 음악과 회화에는 자체의 특정한 자원이 있다고 보았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전 칸딘스키는 신지학과 강신술에 심취해있었으며, 인지학 사상가 루돌프 스타이너의 가르침을 받아들였고, 신지학에 관한 많은 논문을 소장한 시인 스테판 조지를 중심으로 한 뮌헨 서클에 관련되어 있었다.
이런 배경 속에서 그는 내면의 경험 혹은 정신적 현상을 시각적으로 나타내는 일에 몰두했으며 <즉흥 21a>는 이런 환경 속에서 창안된 것이다.
1911년에 제작한 작은 유리그림 <태양과 함께>를 변형시키면서 흡족했는지 아니면 더 진전시키고 싶었는지 1913년에 <단순한 기쁨>이란 제목으로 다시 유화로 제작했다.
세 작품이 약간 다른 양식으로 제작되었으나 유리그림의 조형 언어가 사용했으므로 추상에 대한 그의 의도와 과정을 알 수 있다.

<태양과 함께>에 나타난 가파른 이중 언덕은 그가 종종 사용하는 고향에 대한 향수로 러시아 건축물을 올려놓기 위한 회화적 언덕이다.
왼편에 세 기사가 말을 몰고 언덕을 올라가고 하늘에는 검은 구름이 있으며 세 사람이 탄 배가 물결을 가르고 호수를 지나고 있다.
하단 오른편에 반은 동물로 보이는 두 형상이 화면 안으로 들어선다.
이 작품은 새로운 정신적 시대가 열렸음을 알리는 칸딘스키의 묵시론적 관념의 세계이다.
이 작품을 염두에 두고 <즉흥 21a>를 보면 이해가 수월해진다.
그는 <태양과 함께>에 나타난 섬세한 색채가 마음에 들어 약 18개월 후 동일한 주제로 큰 유화 <단순한 기쁨>을 그리게 되었다고 말했다.

<즉흥 21a>와 <단순한 기쁨>보다는 <태양과 함께>에서 각각의 회화적 요소가 더 구체적으로 묘사되어 있음을 본다.
<태양과 함께>의 상단 왼편 빛을 발하는 대각선으로 흰색을 칠해진 곳이 <즉흥 21a>에서는 붉은 태양이 삽입된 곳이다.
언덕 위에는 <태양과 함께>에서와 마찬가지로 둥근 지붕을 한 러시아 교회가 있다.
말을 몰고 언덕을 올라가는 세 기사는 여기에서 그리고 <단순한 기쁨>에서는 더욱 생략되었다.
노 젓는 세 사람의 모습도 역시 흐릿한 색으로 더욱 생략되었다.
<즉흥 21a>에서는 색을 문질러 흐릿하게 한 부분들이 많으며 <태양과 함께>에서의 밝은 색상들은 회색으로 덮어졌다.

칸딘스키와는 달리 클레는 재현적 이미지를 남긴 작품에서 왜곡하는 방법을 사용했으며 왜곡은 추상에 이르는 또 다른 방법이다.
아내에게 보낸 편지에 “진실을 제시하기 위해 고의적으로 왜곡되게 표현했다”고 적었듯이 본질에 접근하기 위한 방법으로 형태와 색채를 비자연주의 방법으로 사용했다.
그의 작품은 유머가 있고, 시적 위트가 있으며, 절도 있는 아이러니가 표현된 것으로 받아들여지지만 회화의 궁극적인 중요성을 갈망한 이상주의자였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그는 표현수단으로 숫자, 알파벳, 느낌표, 음악부호, 정지부호, 화살표, 별, 깃발, 눈, 심장 같은 형상적 상징적 추상적 기호를 많이 사용했다.
이런 기호적 언어를 사용함으로써 자연과 결부된 한계에서 벗어나 무한한 표현의 세계로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
기호와 상징은 다의적 의미를 지니기 때문에 하나의 논리적인 의미로 확정지어지지 않는다.
작품에 시적인 제목을 붙였으므로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클레는 <창조에의 고백>(1919)에서 “예술은 보이는 것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보이도록 만드는 것”이라고 적었다.

<급강하하는 새와 화살표>에서 급강하하는 새는 비행기처럼 보이며 그는 한 해 전에 <새-비행기>를 이런 형태로 묘사한 적이 있다.
비행기를 바라보며 새라는 생각이 든 것이다.
직사각형들을 연결시키면서 연결되는 부분에 점을 찍고 새의 다리를 그려 넣고 새의 머리를 달아 새도 되고 비행기도 되게 했다.
드로잉에서는 하단에 작은 화살표를 두 개 그려 넣었지만 수채화에서는 큰 화살표 세 개를 그려 넣어 하강의 방향을 가리키며 강렬한 인상을 주게 했다.
<하강하는 새>는 드로잉 <하강하고 활주하는 새>를 그린 후 구성을 정리하여 완성한 것이다.
그는 전쟁 중 독일군 비행학교에 복무하면서 1918년 3월 8일 폭격수 게오르그 슈미트의 비행기가 추락하는 것을 목격했다.
그는 일기에 적었다.

“이번 주 나는 세 차례에 걸친 치명적인 사건을 목격했는데 한 사람은 프로펠러에 부딪혔고 두 사람은 공중에서 충돌했다. 어제는 네 번째의 사람이 커다란 소리를 내면서 지붕 위로 거꾸로 곤두박질쳤다. 사람들이 사방에서 몰려들었다.”

일 년 후 클레는 그날의 사건을 머리에 떠올리며 이 그림을 그린 것으로 추정된다.
하강하는 새의 모양을 모사하면서 비행기에 13이란 숫자를 적어 넣고 오른편에 하강하는 방향을 화살표로 크게 그려 넣어 하강의 속도가 매우 빨랐음을 시사한다.
숫자 13은 비행기에 적힌 넘버일 수도 있고 불운을 상징하는 숫자이기도 하다.
화살표는 이후 그의 작품에 자주 등장하게 된다.

클레는 캐리커처 회화 작품도 많이 제작했으며, <배나무 아래의 남자>는 ‘감나무 아래서 감 떨어지기만 기다린다’는 우리나라 속담을 상기시키는 작품이다.
배나무 아래 한 사내가 두 다리를 길게 펴고 앉아서 배가 떨어지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그는 위를 쳐다보지도 않으며 배가 막 그의 무릎에 떨어지려고 한다.
그가 노동 없이 결실을 거두려는 운을 따르는 사람을 묘사한 것인지 더 이상 젊지 않은 사람의 성적 갈망을 조롱한 것이지 확실하지 않은데, 붉은 점이 있는 배가 여성의 젖처럼 생겨 후자의 해석도 가능해보인다.
나무와 인물 모두 붉은색, 오렌지색, 노란색으로 골고루 칠해졌고 나무 아래의 사람이 입고 있는 의상은 다이아몬드 무늬가 있는 광대가 입는 것이다.
일부 평론가는 이 작품을 클레의 화상 한스 골츠를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주장하는데, 노력 없이 클레의 작품을 팔아 이익을 챙긴 것을 조롱한 작품으로 해석한 것이다.
클레는 화상 알프레드 플레트하임의 50회 생일에 선물로 주기 위해 1928년에 <무제>란 제목으로 펜과 잉크로 드로잉하면서 배 혹은 여성의 젖을 펀칭백으로 바꾸었다. 


작품블루 도판 33 칸딘스키, <인상 III-컨서트 Impression III-Concert>, 1911, 캔버스에 유채, 77.5-100cm.
블루 도판 43 칸딘스키, <즉흥 21a Improvisation 21a>, 1911, 캔버스에 유채, 96-105cm.
블루 도판 55 칸딘스키, <태양과 함께 With Sun>, 1911, 유리그림, 30.6-40.3cm.
타센 105 칸딘스키, <단순한 기쁨 Simple Pleasure>, 1913, 캔버스에 유채, 109.8-119.7cm.
아브람 94 클레, <급강하하는 새와 화살표 Birds Swooping Down and Arrows>, 1919, 수채화, 21.3-26.7cm.
아브람 97 클레, <새-비행기 Bird-Planes>, 1918, 종이에 연필, 21.8-27.4cm.
아브람 98 클레, <하강하는 새 Falling Bird>, 1919, 수채화, 펜과 검정 잉크, 16.2-18.7cm.
아브람 99 클레, <하강하고 활주하는 새 Falling and Gliding Bird>, 1919, 크레용, 28-22cm.
아브람 134 클레, <배나무 아래의 남자 The Man Under the Pear Tree>, 1921, 수채화, 36.5-24.8cm.
아브람 135-1 클레, <무제 Untitled>, 1928, 펜과 잉크, 29-23.5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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