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 Darcy에게
나폴레옹에 대한 평가는 역사학자들마다 다르지만 좀더 많은 학자들이 그를 위대한 혁명가로 간주합니다.
우리가 역사적 인물에 대해 평가할 때 잊어서는 안 될 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 인물이 활동하던 시기에 관한 것입니다.
이것은 역사공부의 필수적인 조건입니다.
나폴레옹에 대해 비판하는 학자들은 그가 투표에 의해 국민의 신임을 얻어 통령이 된 후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종신제 황제에 즉위한 것을 꼽으며 형제 누이들에게 왕위와 권력을 준 것을 비난합니다.
그러나 그가 활동하던 시기의 프랑스 상황을 알면 이해가 됩니다.
당시 유럽 전체가 왕정시대였습니다.
분명 힘을 내세워 왕권을 장악했음에도 불구하고 왕위를 세습하면서 권력자들은 자신의 권력이 신으로부터 왔다고 주장했고 거의 모든 국민이 왕권을 신성한 것으로 여기던 때입니다.
왕의 무한한 통치를 받는 것이 당연한 것으로 여기던 때였습니다.
왕권에 대한 도전은 그야말로 반역이고 죽을 죄로 알 때였습니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였지요.
분명 이성계는 군인으로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하고 스스로 왕위에 오른 사람이지만 사전에 '용비어천가'를 퍼뜨려 자신의 권력에 신성을 부여하고 왕위를 세습했습니다.
그렇게 조선시대가 시작되었습니다.
여하튼 평민 출신의 나폴레옹이 국민의 지지와 선거를 통해 최고의 권력자인 통령에 선출된 것은 당시 여간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그 자체만으로도 혁명입니다.
당시 프랑스의 재정상태가 몹시 나빴고 거의 모든 전쟁이 경제적인 이유로 발발했습니다.
제1차, 2차 세계대전이 그러했고, 월남전과 중동전이 그러했으며, 오늘날의 이라크 침공이 그러한 것과 마찬가지로 국가가 경제난에 빠지면 전쟁으로 가는 길밖에 없었습니다.
나폴레옹이 이웃나라를 침공한 것은 첫째는 경제적 곤경에서 벗어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평민이 왕이 되는 사례를 묵과할 수 없어 유럽의 모든 왕정 국가들이 단결하여 나폴레옹과 싸우게 된 것입니다.
루이 16세를 광장에서 단두대에 세워 국민이 보는 앞에서 죽이는 끔찍한 사건에 유럽의 모든 왕들은 치를 떨었던 것입니다.
평민도 국민의 지지를 받으면 왕이 될 수 있다는 프랑스의 사례가 다른 왕정국가에는 매우 위협적인 것이었습니다.
소위 말하는 국체와 국기를 문란하게 한 사건이었기 때문이지요.
나폴레옹은 재위 기간의 삼분의 이를 전쟁터에서 보냈습니다.
전쟁을 위해 타고난 사람처럼 보였습니다.
유럽 전체를 상대로 싸우면서 승승장구 했지요.
Dr. Darcy가 말한 대로 러시아 침공은 대실패였습니다.
히틀러도 동일한 우를 범했는데 추운 일기에 대국을 점령한다는 건 어려운 일이며 나폴레옹처럼 러시아의 심장부 모스크바를 점령했더라도 모스크바를 불지르고 달아나서 항복하지 않으면 승리한 것이 못됩니다.
결국 나폴레옹은 전쟁에서 승리했지만 많은 병력을 잃고 거의 패잔병처럼 돌아올 수밖에 없었으며 이는 결정적인 몰락의 원인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프랑스 국민은 여전히 나폴레옹을 지지했습니다.
그는 국민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은 지도자였습니다.
이것을 아는 것은 중요합니다.
그가 억지로 황제에 머무른 것이 아니라 90퍼세트 이상의 국민이 그가 황제이기를 바란 것입니다.
그가 프랑스 국민을 위해 싸웠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에 대한 평가는 나폴레옹 법전입니다.
당시 유럽에서 가장 민주적인 법이었습니다.
이혼법의 경우 여성에게 그만한 권리를 부여한 나라는 프랑스밖에 없었습니다.
평민도 공을 세우면 귀족이 될 수 있고 훈장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프랑스밖에 없었습니다.
오늘날에도 일부 나폴레옹 법전은 유효할 정도로 그는 국민의 편에 서서 국민을 위한 정치를 했던 것입니다.
그가 유럽을 통일했더라면 그러한 체계가 각 나라에 토착화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우선 모든 왕정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국민이 직접 자신들의 통치자를 선택할 수 있는 것이지요.
프랑스 혁명은 시민들이 바스티유 감옥을 부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시민들에 의해 혁명이 시작되었고 그 혁명을 유럽 전체에 적용하려고 한 혁명가가 나폴레옹이었습니다.
오늘날 군사전문가들이 실증을 통해 그의 최후의 전쟁 영국군에 대한 워털루 전투를 분석한 결과 그가 승리할 수 있었던 전쟁이었다고 말합니다.
그가 지휘를 부하 장군에게 맡기고 몇 시간 자리를 비운 것이 패인으로 꼽습니다.
왜 자리를 비웠을까?
나폴레옹이 결국 위암으로 죽은 것으로 봐서 당시 심한 위경련으로 도저히 지휘할 수 없었던 상황이 패인이었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역사에 '만약'이란 말은 아무 의미가 없지만 그가 승리했더라면 유럽에는 민주주의가 일찍 시작되었을 것입니다.
영국 여왕이 장차 왕이 될 아들과 함께 앵발리드를 찾아가 나폴레옹의 시신에 경의를 표현 것은 상징적으로 나폴레옹이 위대한 혁명가였음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나폴레옹은 위대한 혁명가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