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평가의 의무
제9장에서 아서 단토는 양식으로 작품을 구별하는 미술사의 개념을 부정한다.
그리고 그는 비평가의 의무를 언급했는데 비평가의 역할이 그 어느 때보다도 중요해졌기 때문이다.
어떤 의미에서 미술작품을 예술가 스스로 완성시키는 것이 아니라 비평가에 의해서 비로소 최종적으로 완성된다고 말할 수 있다.
그 이유는 미술이 이제 철학의 문제, 즉 비평가의 의무가 되었기 때문이다.
앤디 워홀의 작품이 예술철학자이면서 비평가인 단토에 의해 그 의미가 크게 부각된 것처럼 비평가에 의해서 의미가 크게 부각될 수 있기 때문이다.
1993년 로버트 라이만의 회고전과 더불어 패널토론회가 열렸는데, 사회자 로버트 스토어가 패널토론회 제목으로 ‘추상회화: 끝이냐 시작이냐?’를 정했다. 스토어가 이 같은 제목을 정한 이유는 회화는 죽었으며 라이만의 전형적인 흰색 사각형과 같은 작품은 회화의 내적 고갈의 증거로 받아들여진 데 있었다.
이런 인식은 당시 만연했다. 모노크롬을 회화의 최후 단계로 보는 시각이 팽배해 있었다.
그러나 단토는 이를 부정했다.
모노크롬 회화는 과거에도 있었고 1933년에도 있었음을 상기시켰다.
단토는 모노크롬 회화를 운운하며 회화의 종말을 주장하는 적은 자신의 예술의 종말론과는 본질적으로 다르다고 말한다.
모노크롬 회화는 말레비치에 의해 1910년대에 이미 소개되었다.
로버트 라우셴버그도 흰 캔버스를 작품으로 소개한 적이 있다.
그러나 모더니즘이 붕괴된 이후에 제작된 모노크롬 회화가 추상으로서 문제로 제기되었고 라이만의 흰색 사각형 그림이 논란의 대상으로 제기된 것이다.
그린버그가 추상회화를 미술사의 발전적 당연한 귀결로 보았기 때문에 모노크롬 회화, 즉 ‘추상회화: 끝이냐 시작이냐?’ 하는 논제로 떠오르게 된 것이다.
단토는 먼저 모노크롬의 역사를 말한다. 데 스틸De Stil 운동의 주역들은 세 가지 색채 빨강, 노랑, 파랑과 세 가지 비색채 하양, 회색, 검정만을 사용했다.
이런 색들에는 형이상학적 공명이 있다.
즉 세 가지 원색이 사용되었고 세 가지 비색채는 색채원뿔의 중심을 관통하는 축의 끝점과 중간점을 나타낸다.
재즈음악가가 되려고 했던 라이만은 흰색을 사용하기 전에 이차적 색상에 불과한 오렌지색과 초록색을 사용했다.
데 스틸의 화가들은 순수주의자들로서 원색과 비색채를 사용했으며 이는 관람자에게 형이상학적으로 받아들여졌다.
하지만 이차적 모노크롬이란 별 의미가 없다. 라이만이 무슨 이유로 흰색을 사용했는지 몰라도 그의 작품에는 형이상학적이며 우주론적 의미가 내포되어 있지 않다.
왜냐면 그가 흰색을 선택한 것은 오렌지색과 초록색을 선택한 것과 동일한 이유에서였기 때문이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외양적으로 동일한 종류의 그림이더라도 그것을 그리는 사람의 사고가 우연에 기인했다면 그의 작품은 중요하게 받아들여질 수 없다는 것이다.
오렌지색이나 초록색을 선택하듯 흰색을 선택한 것이라면 원색이 지닌 신플라톤주의적인 함축과 원뿔의 축이 함축하고 있는 기하학적 의미를 부정한 것이므로 겉으로는 데 스틸 화가와 같이 순수 모노크롬으로 보이더라도 미학적인 면에서 볼 때는 전혀 그렇지 않다는 점을 단토는 역설한다.
그의 이론을 변용의 문제에 확대 적용하면, 변용을 통해서 추구하려는 의미를 따로 두지 않은 채 우연에 의해 변용적인 작품을 제작했다면 이는 변용이 주는 철학적 해설이 그 작품에 없음은 물론이고 그런 내용을 부정한 것으로 간주할 수 있다.
말레비치는 흰색 위에 흰색 사각형을 그린 후 관람자가 순수 속으로 빠져들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라이만의 흰색 모노크롬은 말레비치의 작품과는 매우 다른 정당성과 의미를 지녔다고 말할 수 있다.
단토는 화가의 생각과 동기를 매우 중요하게 여긴다.
화가가 우연히 흰색 사각형을 그렸다면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별로 없다는 것이다.
단토는 자신이 고안한 양식모형style matrix을 통해 작품들 간의 친족성으로 양식적 특질quality을 고찰하는 방법을 제안한다.
그의 특질 부여는 <예술과 과학>의 저자 애드리안 스톡스로부터 유래한다.
모든 미적 특질은 명백하고 즉각적이지만 조건지배적인 것은 아니다.
또한 특질이 분명히 좋은 것이라거나 훌륭하다는 뜻과는 아무 관련이 없다.
단토는 뵐플린이 회화적malerisch(painterly)인 것과 선적인 것을 구별한 예를 들어 속성들에 긍정적 명칭을 부여할 수 있음을 지적한다.
뵐플린은 회화를 주로 색을 칠하는 회화적인 것과 색보다는 선을 중시하는 것으로 양분했지만, 어떤 작품의 경우는 회화적이라고 말하는 것이 불가능하며 그렇다고 선적이라고 말하는 것도 불가능한 경우가 있다.
라이만의 작품이 이런 경우에 속한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양식으로 작품을 구분하는 것은 가능하지만 이는 그 이상의 의미가 없고 단지 구별을 짓는 것뿐이다.
단토가 뵐플린의 방법을 예로 든 것은 그가 미술사를 양식의 역사로 기술했기 때문으로 뵐플린의 체계가 지닌 내적 결함을 지적하기 위해서였다.
뵐플린의 체계는 컬럼비아 대학의 교수 마이어 샤피로로부터 도전을 받기도 했는데 뵐플린의 양식적 구별의 도식이 성기 르네상스와 바로크 사이에 있는 매너리즘이라 불리는 중요한 양식에는 적용되기 곤란하기 때문이다.
단토는 다시금 워홀의 <브릴로 상자>를 상기시키면서 평범한 사물과 너무 닮았기 때문에 지각만으로는 둘 사이를 진지하게 식별해낼 수 없는 사례를 들어 친족성이 없는 작품의 경우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문제를 제기한다.
겉으로는 유사한 것들의 미학적 차이에 대한 관심이 단토로 하여금 미술비평의 길로 나서게 했다.
비평가로서의 단토는 작품을 대하는 태도에 관해 말한다.
비평가는 작품이 어떻게 세상에 나왔는지 설명할 수 있어야 하고, 작품들이 내놓는 진술에 의거해서 읽는 법을 배우고 평가해야 한다.
그리고 작품들이 모방적인지 형이상학적인지 형식주의적인지 아니면 도덕적인지를 판단해야 한다.
그는 말한다.
“To be a work of art 1) about something and 2) to embody its mean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