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신세계 12월호에 기고한 것입니다.
에콜 드 파리의 선두자: 모딜리아니와 수틴
아메데오 모딜리아니Amedeo Modigliani(1884~1920)(모딜 17)
몰락한 유태인 은행가 집안에서 1884년 7월 12일 넷째 아이로 태어난 이탈리아 화가 모딜리아니는 11살 되던 해 여름에 늑막염을 앓았고 이것이 결핵으로 진행되어 36살의 나이로 요절했다.
14살 때 학교를 그만두고 화가의 화실에서 회화를 배우기 시작한 그는 22살 때 파리로 가서 매우 가난한 생활을 하다가 그곳에서 세상을 떠났다.
수틴과 더불어 에콜 드 파리의 대표적 인물이지만 생애에 거의 작품을 전시하지 않아 사람들의 주목을 받지 못했다.
결핵에 시달리고 술과 마약으로 찌든 삶을 살면서도 회화와 조각에 전념했으므로 사람들은 그를 낭만적인 천재로 보는 경향이 있다.
회화에서의 독창적 양식은 인물을 조각의 부조처럼 그리면서 배경으로부터 분리하는 것이다.
따라서 선을 중요시했으며 많은 대가들의 장점을 답습한 매너리스트라는 비판이 있지만 모델의 개성을 관람자에게 전달하는 표현은 매우 강렬하다.
샤임 수틴Chaim Soutine(1894~1943)(수틴 112)
가난한 유태인 집안의 열 번째 아이로 태어난 러시아 화가 수틴은 회화를 배우기 위해 가출했고 3년 후 19살 되던 해에 후원자의 도움으로 파리로 갔다.
러시아 출신 화가 샤갈, 모딜리아니와 친분이 두터웠으며 세 사람의 공통점은 가난한 유태인이란 것이다.
반 고흐의 말기 작품을 보고 감동한 수틴은 더욱 격렬한 감정을 드러내는 표현주의 회화를 추구했지만 미국인 콜렉터 반스가 1923년 100점을 구입해주기 전까지 그의 진가를 알아주는 화상이 없어 빈곤한 생활을 면치 못했다.
화가들 중에 가장 가난했다.
주기적으로 우울증에 시달렸으며 늘 불안해했고 자신의 작품에 만족하지 못해 전시회를 꺼려했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았다.
20세기에 접어들면서 파리는 예술의 수도로 부상했고 이런 위상은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할 때까지 지속되었다.
유럽 대도시에는 미술관이 30개 정도 있었던 데 비해 파리에는 무려 130개가 있었다.
외국으로부터 화가와 조각가들이 파리로 몰려들었고 그들이 주축이 되어 전개된 미술 활동을 가리켜 에콜 드 파리Ecole de Paris 혹은 파리 미술계라 한다.
파리에는 6만여 명의 예술가들이 있었고 삼분의 일 이상이 외국인이었다.
외국인이 파리로 몰려든 이유는 일하고 살기에 적당하며 다양한 배경을 가진 예술가들과 폭넓게 교통할 수 있어 창작하기에 자유로웠기 때문이다.
모딜리아니와 수틴을 포함해 외국 예술가들 샤갈, 파생, 키슬링은 프랑스 표현주의의 한 축을 이루었지만 이들에게 붙여진 별명은 ‘저주받은 화가 cursed painter’였다.
모딜리아니는 한 마디로 인본주의 화가로 현대 화가들 가운데 인간을 모티프로 지속적으로 그린 사람은 그밖에 없다.
그는 인간의 내면을 들여다볼 줄 알았으며 개인의 특성 혹은 특유의 심리적 면을 감성적으로 전달하는 데 귀재였다.
독창적 양식을 발견하기까지 그는 다양하게 영향을 받았는데, 조르조네, 티치아노, 루벤스, 프라고나르, 앵그르, 고야 등 옛 대가들과 당대의 유명한 화가와 조각가들 툴루즈-로트레크, 피카소, 세잔, 브란쿠시 등 여러 작가들의 작품을 분석했다.
이들의 양식을 차용하여 모델로 하여금 포즈를 취하게 한 점에서는 매너리스트였지만 모델의 개성을 과장하여 극도하게 표현하는 방법은 독창적이었다.
1906년 겨울 몽마르트르에 도착한 그는 피카소가 살고 있던 예술가들의 마을 바로 라브아르에 방을 얻었으므로 ‘피카소의 패거리’와 어울릴 수 있었다.
피카소의 초상을 그렸고 그에게 존경심을 표했지만 피카소는 “모딜리아니를 만나려면 몽파르나스 거리 코너에 가면 된다. 늘 취한 채 그곳에 있으니까”라고 빈정거렸다.
모딜리아니는 1915년 카페와 작업실에서 거의 매일 만나다시피 하는 친구들 수틴, 키슬링, 그리 등의 초상을 작은 크기로 그렸는데, 수틴의 초상화(모딜 34)가 가장 유명하다.
내성적이며 불안한 증세가 있고 촌티 나는 수틴을 적절하게 표현했다.
모딜리아니의 개인전이 1917년 10월 화상 즈보로스키에 의해 베르트 베일 화랑에서 열렸고 개막식이 막 끝날 무렵 경찰관들이 민첩하게 들이닥쳤다.
동네 주민이 ‘공연외설죄’란 명목으로 그를 고소했기 때문이다.
경찰관들은 누드화를 여러 점 압수했다.
그의 누드화를 두고 포르노라고 하는 논란을 말해주는 상징적 사건이다.
그는 자신의 작품이 물의를 일으킨 데 대해 오히려 만족해했다.
그 해 4월에 콜라로시 아카데미에 재학 중인 잔느 에뷔테른(모딜 73)을 만나 동거하고 있었으므로 행복한 시기였다.
그는 잔느를 모델로 많은 누드화를 그렸다.
잔느를 사랑했지만 술과 마약으로 의식이 몽롱할 때는 길에서 잔느의 머리카락을 잡고 그녀의 머리를 벽에 부딪치게 하는 등 과격했다.
초상화가 심리적인 면을 과장해 드러낸 것이라면 그의 누드화는 이상적이며 장식적이다.
여인은 매우 감각적이며, 평온해 보이고, 관람자를 빤히 쳐다보기도 하고 눈을 감고 반쯤 잠든 모습이며, 초상화와는 달리 개성이 전혀 드러나지 않는다.
성적으로 호감을 주는 부분을 잘 보이게 하려고 무릎 위까지만 그리는 것이 보통이고 배경의 침상이나 소파를 따뜻한 느낌을 주는 붉은색과 브라운색으로 처리했다.
약 서른 점을 그렸는데 중요한 누드화는 1917년부터 그린 것들이다.
이것들은 포르노라는 논란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비스듬히 누운 누드>(모딜 98)는 모델의 팔과 다리를 대각선으로 쭉 뻗게 한 것으로 모델이 자신의 모든 것을 관람자에게 내어주겠다는 의사를 표시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런 점을 강조하기 위해 모딜리아니는 무릎 아래의 부분을 잘라 관람자가 더 가까이서 볼 수 있도록 했다.
머리와 위로 뻗은 오른팔은 별로 중요하지 않게 취급되었으며 왼팔은 아예 보이지 않는다.
따뜻한 느낌을 주는 인체의 색이 감성적으로 안락한 인상을 주고 바탕의 붉은색으로 인해 인체가 두드러진다.
<쿠션 위의 누드>(모딜 99)도 동일한 의도로 그린 것이며 진한 검은 머리카락이 초록색 쿠션에 의해 더욱 드라마틱하다.
대각선 구도는 조르조네와 고야에 의해 이미 사용된 적이 있지만 모딜리아니는 성적 호감을 극대화하여 순수 회화가 관람자로 하여금 부끄러움을 갖지 않고서도 원하는 것을 바라볼 수 있게 해줄 수 있음을 시위했다.
모딜리아니는 결핵성 뇌막염으로 1920년 1월 24일 오후 9시경 샤리테 병원에서 죽었다.
잔느는 이튿날 새벽 4시에 자기 부모의 아파트 창문에서 몸을 던져 자살했는데, 그녀는 두 번째 아기를 임신한 몸이었다.
모딜리아니의 가까운 친구이며 화상 즈보로스키는 장례식을 마친 후 모딜리아니의 형 에마누엘에게 보낸 편지에 적었다.
“그의 건강이 걱정스러울 정도로 악화되기 시작했습니다. 당장 스위스의 결핵요양원으로 가라는 내 충고도 소용없었습니다. 그렇게 말하자 날 적으로 취급하고는 ‘설교하지마!’라고 대꾸했습니다. 별을 보고 꿈을 먹는 아이처럼 그에게 현실이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타계하기 7개월 전 모딜리아니는 창작에 불타고 있었다.
유일한 자화상(모딜 108)을 그렸는데 몹시 지친 모습이다.
죽기 전에 “사랑하는, 사랑하는 이탈리아여!”라고 중얼거린 것으로 전해진다.
고국으로 돌아가고 싶은 소원을 이루지 못하고 세상을 하직한 것이다.
수틴의 가장 유명한 작품은 <쇠고기>(수틴 184)이다.
소를 매단 장면을 처음 그린 화가는 렘브란트로 1655년에 <도살된 소>를 그렸다.
이런 전례를 따라 수틴은 경제적으로 어려운 형편임에도 불구하고 도살된 소를 한 마리 사서 작업실에 매달고 여러 점을 그렸다.
너무 오래 방치했으므로 악취가 진동해 동네 사람들이 진정서를 냈고 보건소에서 사람들이 나와 강제로 철거했다.
수틴은 며칠만 더 시간을 달라고 간청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렘브란트는 싱싱한 소를 그린 데 반해 수틴은 썩은 소를 그렸으며, 렘브란트는 사실적 묘사가 뛰어난 데 반해 수틴은 소를 화면에 가득 차게 하여 관람자의 시야를 엄습하게 했고, 강렬한 색으로 표현을 과장했으므로 사실주의와는 멀었다.
회화는 자의식이란 신념으로 자신의 느낌을 전달하는 데 더 역점을 두었으므로 반추상으로 나타났다.
그는 2년 전에 도살된 말의 머리와 시체를 화면 가득 차게 그린 적이 있다.(수틴 177)
수틴은 초기에 풍경화를 많이 그렸고 1920년대 초 동물의 시체를 주제로 그릴 시기에 초상화도 그렸다.
1920년대 초 기도하는 사람, 성가대원 등 기독교를 주제로 작품을 제작하면서 1924년경에 <성체 배령자>(수틴 181)를 그렸다.
모딜리아니가 모델의 개성을 드러내는 데 역점을 두었다면 수틴은 어떤 행위를 하기 위해 유니폼을 입었거나 직업적 유니폼을 입은 사람의 모습을 표현하는 데 역점을 두었다.
<성체 배령자>는 의식을 기다리는 흰 드레스차림의 소녀 모습을 묘사한 것으로 긴장하는 소녀의 모습을 표현했다.
빵 제조자, 요리사, 시동 등 직업 유니폼을 입은 소년들을 그리면서 일부러 몸체를 일그러뜨리거나 특이한 제스처를 취한 모습으로 묘사했다.(수틴 175)
이를 두고 유태인의 신비주의가 표현된 것으로 보는 시각이 있다.
이 시기에 눈으로 볼 수 있는 대상의 외양보다는 그 이면에 내재하는 본질 혹은 정신적 요소를 드러내려는 화가들이 있었고 수틴도 이들 가운데 하나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그러나 샤갈과는 달리 수틴은 유태인의 정체성을 나타내는 작품을 제작한 적이 없다.
그의 작품은 프랑스의 표현주의 화가보다는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표현주의 화가들의 작품과 유사하다.
작품에 나타나는 우울하고 절망적인 분위기는 그 자신의 내면의 모습이기도 하다.
<도판>
모딜 17 1902년경의 모딜리아니
모딜 34 모딜리아니, <샤임 수틴>, 1915, 나무에 유채, 36-27.5cm.
모딜 73 모딜리아니, <잔느 에뷔테른>, 1918, 캔버스에 유채, 100-65cm.
모딜 98 모딜리아니, <비스듬히 누운 누드>, 1917, 캔버스에 유채, 60-92cm.
모딜 99 모딜리아니, <쿠션 위의 누드>, 1917, 캔버스에 유채, 60-92cm.
모딜 108 모딜리아니, <자화상>, 1919, 캔버스에 유채, 100-64.5cm.
수틴 112 1930년대 중반의 샤임 수틴
수틴 184 수틴, <쇠고기>, 1925년경, 캔버스에 유채, 166.1-114.9cm.
수틴 177 수틴, <말의 머리와 시체>, 1923년경, 캔버스에 유채, 92.1-73cm.
수틴 181 수틴, <성체 배령자>, 1924년경, 캔버스에 유채, 81-47.9cm.
수틴 175 수틴, <맥심에 근무하는 시동>, 1927년경, 캔버스에 유채, 125.9-66c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