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터 핼리Peter Halley(1953~)
뉴욕 태생의 핼리는 예일 대학에서 미술사를 공부하고 뉴올린스 대학에서 미술실기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1984~87년 애슐리 비커튼, 제프 쿤스, 마이어 바이스만 등과 함께 갤러리 인터내셔널 위드 모뉴먼트Gallery International with Monument를 결성하고 네오-지오 운동을 전개했다.
1991~92년 보르도, 로잔, 마드리드, 암스테르담의 현대 미술관에서 순회전을, 1997년에는 뉴욕의 모마에서 개인전을 열었고, 베네치아 비엔날레, 휘트니 비엔날레, 카셀 도쿠멘타 등 국제전에 참가했다.
<기하 형상의 위기>(1984) 등 많은 글을 발표했고 1988년과 1997년에 모음집이 출간되었다.
대학 재학시절 개념주의와 후기 미니멀리즘에 관심이 많았던 핼리는 대학원 실기 수업을 마치고 유럽을 여행한 뒤 1980년 뉴욕으로 돌아왔다.
그는 평론가들과 예술가들의 독서 그룹에 참여하면서 당시 화단을 비판적인 입장에서 바라보게 되었다.
그는 1981년 평론가의 입장에서 글을 발표하면서 작품 활동도 병행했다.
표현주의와 같은 오래된 경향이 지속적으로 유행하는 것을 더욱 더 획일화되어가는 과학기술문명 사회에 대한 거부의 증표로 해석했다.
그러나 핼리는 구상 양식의 부활이라는 반항적 태도의 신표현주의에 동조하지 않으면서 그들과는 정반대의 노선을 선택했는데, 테크놀로지에 기반을 둔 유토피아니즘의 상징인 기하적 형상 자체를 사용하여 그것의 허구를 드러내고자 했다.
그는 기하적 추상을 패러디했다.
문화의 양태를 기술문명과 관련시키면서 핼리는 1984년 <기하 양식의 위기>란 제목의 논문에서 기하적 추상을 산업사회의 발전 단계와 관련시킨 후 과거 기하적 추상이 함축하고 있던 이상주의가 허구였음을 지적했다.
프랑스 이론가들의 후기 구조주의에 영향을 받은 그는 기하적 형상들을 선험적 이상으로 보지 않고 문화사 속에서 그것들의 의미 변화에 주목하는 구조주의 접근을 시도했다.
그는 1970년대 이후 기하적 형상들이 과거와는 달리 억압적인 구조를 의미하게 된 상황에 주목했는데, 이는 미셸 푸코Michel Foucault의 저서 <규율과 처벌: 감옥의 탄생 Discipline and Punish: the Birth of the Prison>(1977)으로부터 받은 영향이다.
산업사회의 질서정연한 시스템을 기하적 구조에 근거한 억압 모형으로 본 푸코는 산업혁명 이후 생산성의 극대화를 위해 공장, 학교, 병원, 주택 등 모든 공간이 기하적 형상으로 구획되고 그것들이 통로와 도로로 연계되어 모든 활동이 측정되며 관리되어 왔다고 주장했다.
이런 기하적 시스템은 환경뿐만 아니라 시간기록표, 챠트, 그래프 등 기능적인 시스템에까지 확장된다.
따라서 인간은 감옥에 감금된 것처럼 정해진 시각에 아파트, 사무실, 공장으로 지속적으로 움직이며 총체적인 감시와 통제의 상황에 속에 놓이게 된다.
과거 기하적 추상 화가들이 이상적인 세계와 논리적 개념의 모형으로 간주한 기하적 형상들이 실상을 억압의 도구였던 것이다.
핼리는 이런 자각이 미니멀리즘에서 시작된 것으로 보았다. 후기 미니멀리즘에서 이런 비판이 더욱 노골적으로 표면화되었는데, 로버트 스미스슨은 순수 기하 형상과 산업사회의 기하적 풍경을 대비시켰으며 리처드 세라는 기하적 형상을 쓰러질 것처럼 불안하게 세웠다.
장 보드리야르Jean Baudrillard의 <시물레이션(모조품) Simulations>(1983)에서 영향을 받은 핼리는 매스미디어가 지배하는 후기 산업사회가 도래한 것을 자각하고 주체와 객체의 구분이 사라졌음에 주목했다.
이를 푸코는 ‘억압 confinement’으로 본 데 비해 보드리야르는 ‘개입 deterrence’으로 보았다.
후기 산업 환경에서는 단위 공간과 통로로 이루어진 엄격한 구조에 디지털 네트워크와 같은 유동적 정보 시스템이 가세해 인간들이 자신들도 모르게 획일화된 기호의 장 속으로 빠져들게 된다는 것이다.
보드리야르는 사회를 거대한 시물레이션(모조품)으로 보았다. 실재real와 모델model이 사라진 혹은 모델이 실재를 대신하는 기호의 장으로서 그곳에서는 모델들의 순환적인 반복만이 있을 뿐이다.
이런 모조품에 대한 경험은 생산보다는 소비의 경험으로 핼리는 미술도 이런 기호들의 수동적인 소비를 실천하는 행위로 보았다.
그에게 미술품은 더 이상 개인의 구체적인 경험과 관련된 특수한 오브제가 아니라 사회에서 통용되는 상품과 같은 모조품인 것이다.
감옥을 연상시키는 방과 통로로 이루어진 핼리의 작품들은 푸코의 ‘억압’이며 보드리야르의 ‘개입’ 모델로 일종의 모조품이다.
그는 전자화된 사회적 공간을 디지털 필드와 같은 모조 공간으로 만들었다.
외견상으로는 그의 작품이 순수 기하 추상으로 보이지만 사실은 과학기술 문명의 도형diagram이다.
제목이 순수 기하 추상화가 아님을 시사하는데 <굴뚝과 통로가 있는 감옥과 방>(1985), <데이글로 감옥>(1982), <세 개의 통로가 있는 푸른 방>(1986) 등이 그 예이다.(현대 334, 337 아트 211, 212, 213)
그는 데이글로, 아크릴, 롤라텍스, 파이버글라스 등의 공업 재료들을 사용하여 기하적 형상의 초월적 의미의 가능성을 부정했으며 판화기법, 롤러로 미는 방법, 수공작업을 조수에게 맡기는 익명의 공정도 동일한 효과를 위해서였다.
그는 전통 기하 추상을 모조하는 패러디를 통해 기하적 형상에 초월적 관념이나 이상이 내재해 있지 않음을 보여주려고 했다.
그의 작업은 기하 추상의 신화만 패러디하는 것이 아니라 모조 시스템으로서의 사회적 문화적 상황도 재현하는 것이다.
기하 추상의 순수성을 모조가 무너뜨렸고 선구적 기하 추상 화가들의 미래에 대한 낙관주의가 기술 문명에 의해 무너졌다.
데이글로의 형광색과 합성 롤러텍스 표면 처리가 특징인 그의 대형 기하적 구성 작품들은 패러디이며 몬드리안, 알버스, 스텔라, 저드 등에 대한 포스트 모던적, 시뮬레이션적 비판이다.
1990년대 중반부터 핼리는 디지털 필드에 전념하면서 컴퓨터 페인팅을 여러 개 출력하여 붙이는 벽지 작업을 시작했다.
그는 컴퓨터 회로도, 만화 이미지, 키치 문양을 차용함으로써 외견상으로 상당한 변화를 보이고 있다.
그러나 무한한 복제 가능성을 열어놓음으로써 이전 작업의 연장선상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미니멀적 기하 추상에 키치를 차용하여 모더니즘의 형식주의를 비판하는 그의 작품은 네오-지오, 모조 추상, 모조주의 등으로 불린다.
컴퓨터 출력물, 컴퓨터 회로의 모방, 세포구조의 드로잉, 도로와 공항 활주로 설계도 등 도식적인 기하 형태를 통해서 핼리는 추상 미술이 순수하게 자기 참조적self-referential인 양식이 아님을 보여주며 20세기 초부터 모든 과학 영역에 자리 잡은 수학적 모델링의 중요성을 밝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