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천의 현대미술관에서 5명의 작가에 관해 강의했습니다.
한 명씩 글을 올리겠습니다.

로스 블렉너Ross Bleckner(1949~)


뉴욕 태생의 블렉너는 N.Y.U.에 재학할 때 화가가 되기로 결심하고 1972년 캘리포니아 아트 인스티튜트에서 수학한 후 1973년 뉴욕으로 돌아왔다.
1989년 밀워키 미술관을 비롯한 미국 순회전을, 90년에는 취리히 미술관을 비롯한 유럽 순회전을 가졌고, 휘트니 비엔날레에 여러 차례 참가했으며, 1995년 뉴욕의 구겐하임 미술관에서 첫 회고전을 가졌다.


블렉너는 옵아트를 사용한 신경향 작품을 제작했다.
옵아트는 텍스타일 패턴, 선물포장지와 매우 유사해지면서 종말을 맞았는데, 블렉너는 옵아트가 맹목적인 숭배의 대상으로 전락하는 것을 막기 위해 심리적 요소를 불어넣어 관람자의 기억 혹은 경험에 의한 의미가 되게 했다.
그는 추상을 상황에 들어맞도록 하기 위해 언어를 사용했는데 그가 붙인 제목이 상황을 한정한다.
그는 제목에 <신은 오지 않을 것이다>(1983), <우리의 서클>(1987), <기사 없는 밤>(1988), <다섯 번째 성찰의 삶>(1989) 등을 붙여 언어를 통해 관람자의 심리를 자극했다.
그는 옵아트를 차용하는 것은 시각을 자극하는 옵아트의 기교가 심리적으로도 자극제가 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는 추상을 배경으로 사용하여 재현적인 요소가 끊임없이 다양한 의미로 해석되기를 바란다.

빛은 그의 작품에 매우 중요한 요소로 작용한다.
그는 자연의 빛을 재현하기도 하고 물감을 통해 물리적인 빛이 방사하게도 했으며 이런 점을 1994년 작품 <추모 I Memorial I>(아트 76)에서 볼 수 있다.
<추모 I>는 세로 가로 244cm 305cm이다.
이렇듯 작품이 크기 때문에 빛의 효과는 더욱 강렬하다.
그는 <추모 I>에서 동일한 트로피와 비행하는 비둘기를 반복해서 그린 후 빛에 의한 트로피의 반사와 비둘기의 흰색 그리고 군데군데 흰색 물감에 의한 물리적 빛의 방사가 한데 어우러지게 했다.
그래서 이 작품에서 빛은 단순한 자연의 빛이 아니라 종교적이고 초월적인 빛으로 받아들여지게 된다.
어두운 색과 밝은 색의 심한 대비 속에 여기저기에서 섬광처럼 번쩍이는 빛의 반사는 매우 극적이며 관람자에게 신비로움을 느끼게 해준다.
그는 그림에 에이즈로 희생된 사람들의 이름을 적어 넣어 망자들의 혼을 자유롭게 비행하는 비둘기에 비유했다.
흰 비둘기를 기독교 종교화에서 평화와 성령의 도상으로 그가 망자들의 혼을 비둘기에 비유한 것이다.
트로피는 망자들의 기념물이면서 승리를 상징한다.


블렉너는 1986년에 에이즈로 희생된 사람들의 혼을 위로하는 제의적 그림을 그린 후 제목을 <8122+1986년 1월 현재>(현대 345)라고 붙였는데,
향로에 화환을 올려놓고 그 위에 투명한 망사를 씌운 것 같이 보이도록 한 후 장미 한 송이를 올려놓았다.
그는 그림 네 귀퉁이에 8 2 2 1이란 숫자를 검은 색으로 적었다.
8221이란 숫자는 1986년 1월 현재 에이즈로 사망한 사람들을 가리킨다.
그는 추상 공간에 향로, 트로피, 새, 화환, 샹들리에, 성배, 리본, 촛불 등을 그려 넣었는데, 이런 것들은 전통적인 도상으로 상징적 의미를 지닌 이미지들이다.
그가 사용한 이미지들은 대가들의 작품에서 따온 것들이며, 섬광의 효과, 표면에 입힌 광택의 효과 등도 차용한 것들이다.
그 밖에도 그는 신문, 잡지, 책 등 닥치는 대로 자료를 수집하여 사용했으며 자신이 직접 찍은 사진을 사용하기도 했다.
차용은 컨템퍼러리 아트에서 용인된다.


블렉너 작품의 특징은 양면성으로 비극적인 감정과 키치의 양극을 함축하고 있는 점이다.
예를 들면 그가 <추모 I>에서 사용한 이미지 트로피는 망자의 기념물로서 비극적인 감정을 일으키게 하면서 동시에 승리의 상징이며, 비둘기는 평화를 상징하지만 죽음을 상징하기도 한다.
<8122+1986년 1월 현재>에 사용한 화한은 축복과 애도 모두에 사용되는 이미지이다.
이런 점은 신경향의 대표적인 예술가 제프 쿤스에게서도 발견되는데 그는 키치의 이미지를 역설적인 방법으로 사용한다.
그러나 쿤스는 자신의 작품에 어떠한 역설적인 점도 없다고 부인하면서 “그것은 내게 있어서 비극적 감정이다”라고 말한다.
키치kitsch는 독일어로 ‘값싸게 하다’ ‘감상적으로 만들다’라는 의미의 동사 verkitschen에서 나온 말로 ‘천박한 쓰레기’를 의미하며, <옥스포드 독일문학사전>(1976)에는 “원래 감상적인 중, 장편 소설과 시, 그런 경향의 시각예술 작품 등 덧없고 쓰레기 같은 작품에 적용되었다”고 적혀 있다.
팝 아티스트들은 키치의 사용으로 고급 미술과 저급 미술 사이의 경계를 흐리게 만들었다.
컨템퍼러리 아트에서 키치의 역설적인 사용이 고급 미술과 저급 미술의 구분을 더욱 어렵게 만들고 있다.


신경향에 나타나는 이런 양면성은 네오-지오와 신표현주의의 특징을 모두 수용한 데서 생겨났다.
신야수주의로도 불리는 신표현주의Neo-Expression!ism는 격렬하고 폭력적이며 거친 회화에 붙여진 명칭으로 프랑스에서는 자유 구상으로 이탈리아에서는 트랜스아방가르드로 알려졌다.
1970년대 말에 등장한 회화 운동으로 재료를 처리하는 거친 방식과 강렬한 감정적 주관성을 특징으로 한다.
신표현주의 회화는 크기가 크고 짧은 기간 내에 제작되며 키퍼의 경우 지푸라기를 사용했고, 슈나벌의 경우 깨진 도자기를 화면에 부착했다.
보통 구상적이며 폭력과 죽음을 모티프로 하는 경우가 많지만 이미지는 진동하는 표면 효과에 흡수된다.
그러나 평론가들은 신표현주의자들이 전통 기법을 모두 무시하고 일부러 형편없게 작품을 제작한다고 비난했다.
신표현주의의 일부 작품에 ‘배드 페인팅 Bad Painting’이란 명칭이 붙여졌고 ‘평크 아트 Punk art’와 ‘어리석은 페인팅 Stupid Paintong'이란 명칭은 ‘배드 페인팅’을 대신하는 용어들이다.
신표현주의 작품을 판단하는 기준은 우선 감정적 가치를 위해 의도적으로 조야함을 추구한 ‘배드 페인팅’인지 단순히 쓰레기와 같은 ‘배드 페인팅’을 제작한 것인지를 판단하는 것이다.


네오-지오Neo-Geo는 신기하학적 개념주의Neo-Geometric Conceptualism의 약어이다.
네오-지오는 신표현주의의 주정주의에 반발하여 1980년대 중반 뉴욕에서 일어난 운동이다.
그들의 회회, 조각, 또는 제작품들은 공통적으로 차갑고 비개성적이다.
이 그룹의 가장 잘 알려진 작가가 제프 쿤스이다.
쿤스는 다다의 레디메이드를 재생시킨 진공청소기와 같은 소비 상품을 전시했다.
많은 평론가들은 이들의 작품을 냉소적이며 공허한 것으로 본다.


자신의 작품에 나타난 양면성에 대해 블렉너는 “이런 양면성이 명확한 상징을 제공하기보다 문제점을 두드러지게 한다”고 말했다.
블렉너가 사용하는 도상들은 그의 말대로 문제점을 제시할 뿐이기 때문에 궁극적 화해와 희망을 주지 않는다는 점에서 19세기 상징주의 회화와는 구분이 된다.
일반화된 의미를 전복시키는 점에서 그의 작품은 ‘알레고리 충동’의 전형이며 다의성을 추구함으로써 일관성을 와해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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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터 핼리Peter Halley(1953~)


뉴욕 태생의 핼리는 예일 대학에서 미술사를 공부하고 뉴올린스 대학에서 미술실기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1984~87년 애슐리 비커튼, 제프 쿤스, 마이어 바이스만 등과 함께 갤러리 인터내셔널 위드 모뉴먼트Gallery International with Monument를 결성하고 네오-지오 운동을 전개했다.
1991~92년 보르도, 로잔, 마드리드, 암스테르담의 현대 미술관에서 순회전을, 1997년에는 뉴욕의 모마에서 개인전을 열었고, 베네치아 비엔날레, 휘트니 비엔날레, 카셀 도쿠멘타 등 국제전에 참가했다.
<기하 형상의 위기>(1984) 등 많은 글을 발표했고 1988년과 1997년에 모음집이 출간되었다.


대학 재학시절 개념주의와 후기 미니멀리즘에 관심이 많았던 핼리는 대학원 실기 수업을 마치고 유럽을 여행한 뒤 1980년 뉴욕으로 돌아왔다.
그는 평론가들과 예술가들의 독서 그룹에 참여하면서 당시 화단을 비판적인 입장에서 바라보게 되었다.
그는 1981년 평론가의 입장에서 글을 발표하면서 작품 활동도 병행했다.
표현주의와 같은 오래된 경향이 지속적으로 유행하는 것을 더욱 더 획일화되어가는 과학기술문명 사회에 대한 거부의 증표로 해석했다.
그러나 핼리는 구상 양식의 부활이라는 반항적 태도의 신표현주의에 동조하지 않으면서 그들과는 정반대의 노선을 선택했는데, 테크놀로지에 기반을 둔 유토피아니즘의 상징인 기하적 형상 자체를 사용하여 그것의 허구를 드러내고자 했다.
그는 기하적 추상을 패러디했다.
문화의 양태를 기술문명과 관련시키면서 핼리는 1984년 <기하 양식의 위기>란 제목의 논문에서 기하적 추상을 산업사회의 발전 단계와 관련시킨 후 과거 기하적 추상이 함축하고 있던 이상주의가 허구였음을 지적했다.
프랑스 이론가들의 후기 구조주의에 영향을 받은 그는 기하적 형상들을 선험적 이상으로 보지 않고 문화사 속에서 그것들의 의미 변화에 주목하는 구조주의 접근을 시도했다.
그는 1970년대 이후 기하적 형상들이 과거와는 달리 억압적인 구조를 의미하게 된 상황에 주목했는데, 이는 미셸 푸코Michel Foucault의 저서 <규율과 처벌: 감옥의 탄생 Discipline and Punish: the Birth of the Prison>(1977)으로부터 받은 영향이다.


산업사회의 질서정연한 시스템을 기하적 구조에 근거한 억압 모형으로 본 푸코는 산업혁명 이후 생산성의 극대화를 위해 공장, 학교, 병원, 주택 등 모든 공간이 기하적 형상으로 구획되고 그것들이 통로와 도로로 연계되어 모든 활동이 측정되며 관리되어 왔다고 주장했다.
이런 기하적 시스템은 환경뿐만 아니라 시간기록표, 챠트, 그래프 등 기능적인 시스템에까지 확장된다.
따라서 인간은 감옥에 감금된 것처럼 정해진 시각에 아파트, 사무실, 공장으로 지속적으로 움직이며 총체적인 감시와 통제의 상황에 속에 놓이게 된다.
과거 기하적 추상 화가들이 이상적인 세계와 논리적 개념의 모형으로 간주한 기하적 형상들이 실상을 억압의 도구였던 것이다.


핼리는 이런 자각이 미니멀리즘에서 시작된 것으로 보았다. 후기 미니멀리즘에서 이런 비판이 더욱 노골적으로 표면화되었는데, 로버트 스미스슨은 순수 기하 형상과 산업사회의 기하적 풍경을 대비시켰으며 리처드 세라는 기하적 형상을 쓰러질 것처럼 불안하게 세웠다.
장 보드리야르Jean Baudrillard의 <시물레이션(모조품) Simulations>(1983)에서 영향을 받은 핼리는 매스미디어가 지배하는 후기 산업사회가 도래한 것을 자각하고 주체와 객체의 구분이 사라졌음에 주목했다.
이를 푸코는 ‘억압 confinement’으로 본 데 비해 보드리야르는 ‘개입 deterrence’으로 보았다.
후기 산업 환경에서는 단위 공간과 통로로 이루어진 엄격한 구조에 디지털 네트워크와 같은 유동적 정보 시스템이 가세해 인간들이 자신들도 모르게 획일화된 기호의 장 속으로 빠져들게 된다는 것이다.
보드리야르는 사회를 거대한 시물레이션(모조품)으로 보았다. 실재real와 모델model이 사라진 혹은 모델이 실재를 대신하는 기호의 장으로서 그곳에서는 모델들의 순환적인 반복만이 있을 뿐이다.


이런 모조품에 대한 경험은 생산보다는 소비의 경험으로 핼리는 미술도 이런 기호들의 수동적인 소비를 실천하는 행위로 보았다.
그에게 미술품은 더 이상 개인의 구체적인 경험과 관련된 특수한 오브제가 아니라 사회에서 통용되는 상품과 같은 모조품인 것이다.
감옥을 연상시키는 방과 통로로 이루어진 핼리의 작품들은 푸코의 ‘억압’이며 보드리야르의 ‘개입’ 모델로 일종의 모조품이다.
그는 전자화된 사회적 공간을 디지털 필드와 같은 모조 공간으로 만들었다.
외견상으로는 그의 작품이 순수 기하 추상으로 보이지만 사실은 과학기술 문명의 도형diagram이다.
제목이 순수 기하 추상화가 아님을 시사하는데 <굴뚝과 통로가 있는 감옥과 방>(1985), <데이글로 감옥>(1982), <세 개의 통로가 있는 푸른 방>(1986) 등이 그 예이다.(현대 334, 337 아트 211, 212, 213)
그는 데이글로, 아크릴, 롤라텍스, 파이버글라스 등의 공업 재료들을 사용하여 기하적 형상의 초월적 의미의 가능성을 부정했으며 판화기법, 롤러로 미는 방법, 수공작업을 조수에게 맡기는 익명의 공정도 동일한 효과를 위해서였다.
그는 전통 기하 추상을 모조하는 패러디를 통해 기하적 형상에 초월적 관념이나 이상이 내재해 있지 않음을 보여주려고 했다.
그의 작업은 기하 추상의 신화만 패러디하는 것이 아니라 모조 시스템으로서의 사회적 문화적 상황도 재현하는 것이다.
기하 추상의 순수성을 모조가 무너뜨렸고 선구적 기하 추상 화가들의 미래에 대한 낙관주의가 기술 문명에 의해 무너졌다.
데이글로의 형광색과 합성 롤러텍스 표면 처리가 특징인 그의 대형 기하적 구성 작품들은 패러디이며 몬드리안, 알버스, 스텔라, 저드 등에 대한 포스트 모던적, 시뮬레이션적 비판이다.


1990년대 중반부터 핼리는 디지털 필드에 전념하면서 컴퓨터 페인팅을 여러 개 출력하여 붙이는 벽지 작업을 시작했다.
그는 컴퓨터 회로도, 만화 이미지, 키치 문양을 차용함으로써 외견상으로 상당한 변화를 보이고 있다.
그러나 무한한 복제 가능성을 열어놓음으로써 이전 작업의 연장선상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미니멀적 기하 추상에 키치를 차용하여 모더니즘의 형식주의를 비판하는 그의 작품은 네오-지오, 모조 추상, 모조주의 등으로 불린다.
컴퓨터 출력물, 컴퓨터 회로의 모방, 세포구조의 드로잉, 도로와 공항 활주로 설계도 등 도식적인 기하 형태를 통해서 핼리는 추상 미술이 순수하게 자기 참조적self-referential인 양식이 아님을 보여주며 20세기 초부터 모든 과학 영역에 자리 잡은 수학적 모델링의 중요성을 밝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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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미언 허스트Damien Hirst(1965~)


영국 브리스톨 태생의 허스트는 리즈에서 성장했고 그곳 미술학교에서 수학한 후 1986~89년 골드스미스 대학에서 공부했다.
1988년 골드스미스 대학 동료들과 함께 기획한 ‘프리즈 Freeze’ 전시회를 시작으로 화단에 등단했는데 이는 yBa(young British artists)의 전신이 되었다.
그들은 런던 남동쪽의 버려진 창고에서 그룹전을 열었다. 1991년의 첫 개인전에서 죽은 상어를 포름알데히드 용액에 담고 모터를 부착하여 움직이게 했다.
그는 1995년에 런던 테이트 갤러리가 매년 최고의 작가에게 수여하는 터너상을 수상했다.


yBa의 기수인 허스트는 메멘토 모리memento mori로 유명한데 이는 그가 죽은 상어를 포름알데히드 용액에 담은 작품을 통해 “네가 죽을 수밖에 없음을 기억하라 Remember that you must die”는 죽음의 경고를 했기 때문이다.
동물의 사체를 오브제로 사용한 그는 ‘미스터 데드’ ‘악마의 자식’ ‘컬트 조각가’ 등 다양한 별명을 얻었다.
그는 관람자가 보고 싶어 하는 것을 주저 없이 만들어 상업적으로 성공했다.
진부한 사물을 오브제로 사용하는 데서 뒤샹과 보이스의 선례를 따랐으며 대중매체와 소비문화에 정통한 데서 제프 쿤스와 같은 미국 포스트 팝아티스트의 선례를 따랐다.
yBa의 멤버들은 좀더 과격했는데 매스미디어와 상품의 세계뿐만 아니라 성, 폭력, 마약 등의 사회적 문제를 다뤘다.
현실적 이익을 챙기는 데 기민한 그들은 접근하기 쉬운 미술을 지향했으므로 비판의 기능을 잃은 문화적 상대주의자들로 전락할 위험을 안고 있었지만 기존 제도와 밀접한 거리를 유지할 줄 아는 탁월한 경영 감각도 가지고 있었다.
허스트가 yBa의 기수가 될 수 있었던 것은 그만큼 더 융통성이 있고 대중이 원하는 볼거리가 무엇인지 파악하는 탁월한 능력을 갖추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영국 미술 시장에 영향력이 막강한 찰스 사치Charles Saachi가 허스트의 작품에 높은 상품성을 발견한 것이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허스트는 동물의 사체와 의료도구에 이르기까지 차용의 폭을 넓히면서 독자적인 기호를 만들어냈다.


허스트가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고급문화 취향과 대중적 센세이셔널리즘 모두에 부응했기 때문이다.
1990년대의 미술이 대중에게 다가가지 않고서는 살아남을 수 없음을 안 그는 영화, 뮤직비디오, TV 및 잡지광고, 출판, 각종 상업도안 등의 사업을 병행했을 뿐만 아니라 약국이라는 레스토랑을 운영하면서 “좋은 사업이 가장 훌륭한 예술”이란 앤디 워홀의 경구를 실천했다.
그는 자신의 이름이 대중매체에 빈번히 오르내릴 수 있도록 노력했다.
이런 점 때문에 일부 평론가들은 그를 충격만을 노리는 기회주의자로 보고 그의 작품이 베이컨, 팝아트, 포스트 팝아트, 개념미술, 미니멀리즘 등을 적당히 섞은 절충주의 작품으로 간주했다.
그러나 그의 작품이 죽음과 밀접한 관계를 맺으면서 그에 대한 비난은 설득력을 잃었다.


그의 작품에 죽음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우기 시작한 것은 살충제에 죽어가는 파리와 소의 머리를 함께 설치한 <백년>, <천년>(1990)과 같은 초기 작품에서였다.
그 후 그는 동물의 사체를 통째로 또는 절단하여 포름알데히드 용액 속에 넣었으며, 수술도구, 약, 해부모형이 진열된 의료함, 시체와 해골의 모형을 제작하면서 고급문화 취향에 부응하여 현학적인 긴 제목을 붙였다.(아트 227)
많은 그의 작품은 죽음에 대한 공포와 강박증을 표현한다.
죽음에 대한 그의 공포와 강박증은 상어를 포름알데히드 용액 속에 넣은 작품 <살아 있는 사람의 마음속에 있는 육체적 죽음의 불가능성>(현대 225)에서 시작되었다.
사치의 작품 주문을 받은 허스트는 오스트렐리아의 상어잡이에게 전화를 걸어 죽은 상어를 주문했다.
그는 상어를 유리장에 넣고 모터를 이용해 움직이게 했다.
이 작품은 영원한 삶을 꿈꾸는 낭만적 제목과는 거리가 멀다.
그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떨칠 수 없으면서도 죽음에 이르는 고통에 대한 관음증voyeurism을 바라는 관람자의 요구에 부응했다.


예술이란 이름하에 죽음의 장면을 엿보게 하는 작품은 소, 양, 돼지 등을 토막 내어 전시한 작품들에서 극에 달했다.(아트 226)
1992년 터너상 수상작으로 이듬해 베네치아 비엔날레 출품작 <분리된 어머니와 아이> 그리고 황소 머리에 붙인 제목 <열두 제자>(1994)는 동물이 대역이 되어 인간의 죽음을 연기한 작품들이다.
2000년에는 시체해부침대에 아담과 이브를 눕힌 작품 <아담과 이브(에덴동산에서 쫓겨난) Adam & Eve(Banished from the Garden)>(나우 203-1)를 통해 피할 수 없는 죽음을 상기시켰으며, 사지가 유리판으로 사등분된 채 공중에 떠도는 안구가 돌출된 해골에는 <죽음은 부적절하다>(현대 227)라는 제목을 붙였다.
인체를 등장시키지 않은 채 삶의 무상함을 표현한 작품도 있는데 <죽음과 죽는 과정에 대한 불가해한 공포>에서 먼지 낀 낡은 가구, 소파를 찌름으로써 거세공포를 일깨우는 톱, 녹물 또는 체액이 흐르는 듯한 유리창, 널린 의학서적 등은 우리의 삶에 필연적으로 드리운 죽음의 그림자를 은유적으로 묘사한 작품이다.
이런 죽음의 이야기들은 그의 유리장식장 속에 넣어지며 유리장의 프레임은 예술의 경계를 지키는 형식의 틀이 된다.
허스트는 프레임을 “덧없는 삶을 에워싸는 조각”을 제작하기 위한 장치라고 했다.
밀폐된 공간이 현실로부터 분리되어 그의 이야기는 더욱 극적이 되며 관람자는 관음증적 충동을 안심하고 즐기게 된다.
이로서 허스트가 말한 “예술은 실재적이기보다는 연극적”이라는 사실이 입증된다.


허스트의 죽음 이야기는 죽음에 이르는 고통을 극복하려는 의학과 그것이 내포한 사회심리적 의미로 진전되었다.
그는 병리학, 약학, 법의학, 범죄심리학에 관한 책들을 읽고 이를 작품에 응용한다.
그는 ‘이론, 가설, 방법, 접근, 가정, 결과, 그리고 발견’이란 명제로 전시회를 열고 카탈로그에 법의학 저널에서 발췌한 글을 구사한 보고서 형식의 글을 싣고 평론가의 글과 함께 병리학자의 평문을 실었다.
사체 사진을 비롯한 각종 법의학 자료 사진과 작품 도판을 나란히 실었다.
그는 의료도구나 재료를 단순히 차용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에 내재한 복합적 의미도 함께 차용한다.
산부인과와 시체실을 재현한 작품은 병원에서 시작해서 병원에서 죽는 현대인의 삶을 조명한 것이다.
각종 의료장비를 갖춘 병원에서는 인간의 생명을 그래픽으로 보여준다.
생명이 병원에서 관리됨으로써 자연적이지 않고 추상적이 되며, 의료가 소비행위가 되고 약품은 상품이 된다.
<삼위일체 Trinity>(2000)는 약리학, 생리학, 병리학 등 의학의 각 영역이 맹목적인 믿음의 대상으로서의 값비싼 토템으로 나타난 작품이다.
인체의 해부모형의 <찬가 Hymn>(2000)(나우 201)는 거대한 토템이다.
<약국 Pharmacy>(1992)(아트 228)은 “모든 약품은 탄생과 죽음 사이에 있다”는 자신의 말을 시각화한 설치작품이다.
그는 대량생산되는 알약으로 화면 선반을 가득채운 후 <공허>(현대 230, 231)란 제목을 붙였다.
그는 약품을 초사실적 물신이 되고 있음을 보여주며, 제약산업은 병을 극복하기보다는 자신의 영역을 넓히는 데 더 목적을 두고 모든 음식물을 대치할 때까지 사업을 확장할 것이다.


허스트는 <잃어버린 사랑 Lost Love>(나우 202)은 산부인과 진료실을 물고기들이 헤엄치는 유리장식장으로 만든 작품으로 성적 쾌락과 출산의 고통을 현실의 잔인함으로 표현한 것이다.
그는 목걸이와 반지를 유리장식장에 넣어 성적 쾌락과 출산을 상징했다.
여기에서 물고기는 태아로 물은 양수를 상징한다.
물고기는 남성의 성기와 다산을 상징하며 또한 자궁fishy vagina(비린내 나는 질)이란 말을 연상시킨다.
그가 사용한 물고기는 아프리카 강에서 사는 어류이다.


<약사로서 자화상에 집중 Concentrating on a Self-Portrait as a Pharmacist>(나우 203)에서 그는 자신을 흰 약사 가운을 입은 초상화로 소개했는데 화실 속의 유리장식장 속에 갇힌 모습이다.
그의 표정은 냉소적이지도 절망적이지도 않지만 희망적이지도 않다.
그는 의학이 구원의 신화를 만들어내지만 동시에 불길한 컬트 문화를 만들어낸다는 점을 관람자에게 인식시키려고 하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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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리야 카바코프Ilya Kabakov(!933~)


우크라이나 태생의 카바코프는 1943~57년 모스크바와 레닌그라드(현재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미술을 공부한 뒤 1956년부터 어린이 책에 삽화를 그리는 일을 했다.
1960년대에 서방에 알려졌고 1992년 카셀 도쿠멘타와 1993년 베네치아 비엔날레에 참가했으며 1992년부터 뉴욕에 정착하여 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구소련 시대에 스탈린은 유럽식 모던 아트를 탄압하며 사회주의 사실주의Socialist Realism을 공식 미술로 육성했다.
스탈린 체제하에 비공식 미술은 지하에서 명맥을 유지할 수밖에 없었다.
구소련 출신 작가로 1960년대에 서방에 알려진 그는 구소련의 사회적 상황을 재현함으로써 유토피아를 위한 정책들이 허구였음을 드러냈다.
탄압을 피하기 위해 그는 은유적 우회적인 방법으로 메시지를 전달하는 개념적 작품을 제작했다.
작품에 이야기를 담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런 은유적, 우회적, 이야기적인 경향은 독일이 통일되기 전 동독 출신 화가들에게서도 나타났다.


카바코프가 국제적으로 주목받게 된 것은 1980년대 초 사회 체제에 대한 비판을 설치를 통해 표현하면서부터였으며, 1980년대 말경부터는 총체적 설치total installation를 통해 구소련의 아파트나 공공시설을 재현함으로써 실제 상황을 그대로 전달하는 방법을 택했다.
이런 예가 1988년의 설치 <자신의 아파트에서 우주로 날아간 남자>이다.(모던 419)
구소련에서는 몇 가구가 부엌과 침실을 공동으로 사용하는 것이 보통이었으므로 개인의 삶과 집단의 목표가 한데 어우러져 있었다.
카바코프는 로버트 스토르Robert Storr와의 인터뷰에서 가장 전형적인 ‘러시아의 정신 Russian mentality’은 ‘다른 사람들 속에서의 삶 life among others’이란 말로 은유적으로 비판했으며 인터뷰 내용은 1995년 1월 <아트 인 아메리카>에 실렸다.
<자신의 아파트에서 우주로 날아간 남자>에는 구멍 뚫린 천장이 있는데 강압적인 체제로부터의 탈출을 원하는 러시아인의 염원을 표현한 것이다.
공동생활을 통해 늘 감시당하는 비극적 삶의 현장 세 벽에는 선전포스터들이 가득 붙여져 있다.
붉은색 아파트 공간에는 몇 개의 가재도구가 있을 뿐이며 도저히 휴식을 취할 수 없는 억압된 공간이다.
침대의 용수철의 반동을 이용해 아파트 주인은 우주로 날아갔고 그가 벗어놓은 신발만 그곳에 남아있다.
카바코프의 자전적인 이야기처럼 들리는 이 설치작품은 그의 ‘10가지 특성 Ten Characters’ 시리즈 가운데 하나이다.


러시아의 억압적 체제의 ‘10가지 특성’ 중 또 하나는 카바코프의 <재능 없는 예술가 The Untalented Artist>(현대 267)에서 나타난다.
공동아파트에서 거주하며 작업한 결과물이다. 오른편에 카바코프의 글이 적혀 있다.

“그는 작은 마을 공장에 근무하는 무명 장식예술가로 공공건물을 장식하는 일을 한다.
그의 그림은 이 나라에 산재하는 동일한 종류의 그림들과 마찬가지로 보통 수준이다.
하지만 그의 작품에는 그만의 특징이 아주 조금 있다.
이 예술가는 본래 재능 없는 예술가는 아니었다.
진부한 규정이 순발력과 예술적 야망을 모두 소멸시킨 건 아니다.
어떤 작품은 명령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신을 위해 그려진다.”


카바코프의 글은 그 자신과 구소련에서 작업하던 동료에 관한 것이다.
<재능 없는 예술가>에는 세 점의 그림이 각각 벽에 기대어 있는데 모티프와 양식이 다른 두 그림이 위 아래에 있다.
두 명이 공동으로 작업했음을 보여준다.
카바코프는 주제를 명령하는 당의 간부와 예술가의 합작품이라고 말한다.
당이 제공하는 주제는 사회주의 이념이 내재하는 희망찬 사회 현상을 밝게 사실적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화가는 자신의 느낌이나 판단을 보태어서는 안 된다.
매우 억압된 상태에서 기술적으로 작업하는 것이다.
카바코프의 말대로 예술가들도 모든 러시아인과 마찬가지로 순종하는 행복한 삶을 살아야 한다.
예술가는 자신의 개성이 드러나지 않게 중도적 입장에서 ‘집단의 감각’을 작품에 반영해야 한다.


개인의 자유가 허락되지 않는 구소련을 카바코프는 1992년 카셀 도쿠멘타 IX에 설치한 <화장실 The Toilet>을 통해 고발하고 1993년 베네치아 비엔날레에 설치한 <러시아 전시관 The Red Pavilion>을 통해 러시아 정부를 싸구려 매음굴로 묘사했다.
그는 전시관에 핑크색을 칠하고 별로 장식했다.
그는 같은 해 군대식 혹독한 교육기관인 구소련의 학교를 잔디가 무성하게 자란 곳에 버려진 폐허의 모습으로 재현하기도 했다.
그가 설치한 교실 내부에는 독재자 스탈린의 초상이 걸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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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코 모리Mariko Mori(1967~)


도쿄 태생의 모리는 1986~88년 분카 패션 학교에서 패션디자인을 공부했다.
1988~89년 런던의 비암쇼 미술학교, 1989~92년 첼시 미술학교에서 수학하면서 패션모델과 디자이너 일을 병행했다.
1998년 제네바에서 개최된 ‘미술과 공공’ 전시회를 시작으로 2002년 프라다 재단의 후원으로 도쿄 현대미술관에서 개최된 ‘정토 Pure Land’ 전시회까지 수차례의 개인전과 순회전을 가졌다.


1996년 <마지막 출발 Last Departure>(아트 350) 퍼포먼스를 찍은 시바크롬 사진에는 미래세계 속의 만화주인공 같은 의상을 한 모리가 있다.
배경은 알루미늄, 나무, 회색빛 알루미늄을 사용하여 가상의 미래세계가 설치되어 있다.
모리는 자신이 출현한 작품을 몇 겹의 층으로 구성하여 움직이는 느낌을 주는 사진으로 인화한 후 음악을 바탕에 깐 비디오로 제작하며 마지막으로 삼차원의 영상으로 만든다.
모리는 자신을 예술작품으로 만들며 음악과 패션세계에 출현한 스타로 스스로를 찬양한다.
그녀는 스타의 수명이 매우 짧다는 것을 알고 있다.
퍼포먼스를 마치면 모리는 자신의 의상을 최소한 25년 이상 볼 수 없도록 커다란 플렉시스글래스 캡슐 속에 넣고 봉한다.


모리는 현실에 스스로를 조각품으로 등장하여 가상과 현실이 교차하는 곳에 또 다른 유토피아heterotophia가 있음을 말한다.
그녀는 만화 같은 의상을 하고 상점 앞에 서서 유토피아에 대한 믿음이 필요함을 몸소 시위한다.
1994년 작품 <나와 함께 놀아요>(현대 324)는 게임 화면에서 나온 여전사의 모습으로 상점 앞에 자신을 조각품처럼 세웠는데 지나치게 낙관적이며 흥미로운 방식으로 표현하는 것이라서 장난이란 느낌을 준다.
모리는 인공 바닷가에 푸른 비늘 의상을 한 인어의 모습으로 나타나 옆으로 길게 누웠다.
<사랑의 엔트로피 Entropy of Love>(아이콘 111)라고 제목을 붙인 이 작품은 높이 305cm에 가로 120cm의 사진 다섯 장을 2cm 간격으로 유리와 패널에 병렬시킨 것으로 사진에서의 인어 모습으로 출현한 것은 성gender의 문제를 제기한 당대 일본의 대중적 우상이면서 만화영화에 등장하는 사이보그cyborg를 패러디한 것이다.
사이보그는 우주 공간처럼 특수한 환경에서도 살 수 있게 신체기관의 일부가 기계로 대치된 인간이나 생물체를 말한다.


극락세계를 연출한 1996~98년의 작품 <정토 Pure Land>(현대 325)와 1997년 작품 <열반 Nirvana>(현대 326)은 가상현실이다.
모리는 가상현실에 가상의 인물로 등장한다.
<정토>에는 중생에게 복과 덕을 내리는 여신 깃쇼텐吉祥天이 연꽃 위에 떠 있고 여신으로 출현한 모리는 피안을 바라보고 있다.
여신의 주변에는 요정들이 구름을 타고 악기를 연주하고 있어 낙원임을 알 수 있다.
이것은 모리와 컴퓨터그래픽 로봇들이 사해를 배경으로 합성된 사진이다.
이 장면은 이승을 초월한 낙원이란 느낌보다는 낯익은 디지털 기호들이 등장하는 최면 공간이다.
<열반> 또한 해탈을 체험하기 위한 가상현실이다.


<정토>와 <열반>이 가상 최면의 공간인데 반해 1999년 작품 <꿈의 사원 Dream Temple>(나우 305)은 현실에서 직접 체험할 수 있는 최면 공간이다.
이 사원은 소금으로 만든 흰색 선禪 정원을 지나 도달하게 되는 호류지의 유메도노텐을 모델로 만든 꿈에서나 볼 수 있는 사원이다.
관람자는 각도에 따라 색이 달라지는 유리로 된 사원의 공간 속에 들어가 우주와 생명의 현상을 보여주는 삼차원 영상을 보고 향내가 풍기는 가운데 음악을 들으며 4분 44초 동안 명상의 시간을 갖게 된다.
이것은 미래의 사원으로 가상현실을 경험한 현대인에게 적합한 사원이다.
이와 유사한 사원은 앞서 1998년의 작품 <쿠마노 Kumano>(나우 306)에서 나타났다.
다섯 장의 사진을 연결시키고 이미지들을 삽입한 것으로 높이 305cm 가로가 610cm이다.
<열렬한 욕망 Burning Desire>(나우 307) 또한 같은 크기의 합성 사진으로 현실에서의 해탈 체험을 염원하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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