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리야 카바코프Ilya Kabakov(!933~)


우크라이나 태생의 카바코프는 1943~57년 모스크바와 레닌그라드(현재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미술을 공부한 뒤 1956년부터 어린이 책에 삽화를 그리는 일을 했다.
1960년대에 서방에 알려졌고 1992년 카셀 도쿠멘타와 1993년 베네치아 비엔날레에 참가했으며 1992년부터 뉴욕에 정착하여 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구소련 시대에 스탈린은 유럽식 모던 아트를 탄압하며 사회주의 사실주의Socialist Realism을 공식 미술로 육성했다.
스탈린 체제하에 비공식 미술은 지하에서 명맥을 유지할 수밖에 없었다.
구소련 출신 작가로 1960년대에 서방에 알려진 그는 구소련의 사회적 상황을 재현함으로써 유토피아를 위한 정책들이 허구였음을 드러냈다.
탄압을 피하기 위해 그는 은유적 우회적인 방법으로 메시지를 전달하는 개념적 작품을 제작했다.
작품에 이야기를 담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런 은유적, 우회적, 이야기적인 경향은 독일이 통일되기 전 동독 출신 화가들에게서도 나타났다.


카바코프가 국제적으로 주목받게 된 것은 1980년대 초 사회 체제에 대한 비판을 설치를 통해 표현하면서부터였으며, 1980년대 말경부터는 총체적 설치total installation를 통해 구소련의 아파트나 공공시설을 재현함으로써 실제 상황을 그대로 전달하는 방법을 택했다.
이런 예가 1988년의 설치 <자신의 아파트에서 우주로 날아간 남자>이다.(모던 419)
구소련에서는 몇 가구가 부엌과 침실을 공동으로 사용하는 것이 보통이었으므로 개인의 삶과 집단의 목표가 한데 어우러져 있었다.
카바코프는 로버트 스토르Robert Storr와의 인터뷰에서 가장 전형적인 ‘러시아의 정신 Russian mentality’은 ‘다른 사람들 속에서의 삶 life among others’이란 말로 은유적으로 비판했으며 인터뷰 내용은 1995년 1월 <아트 인 아메리카>에 실렸다.
<자신의 아파트에서 우주로 날아간 남자>에는 구멍 뚫린 천장이 있는데 강압적인 체제로부터의 탈출을 원하는 러시아인의 염원을 표현한 것이다.
공동생활을 통해 늘 감시당하는 비극적 삶의 현장 세 벽에는 선전포스터들이 가득 붙여져 있다.
붉은색 아파트 공간에는 몇 개의 가재도구가 있을 뿐이며 도저히 휴식을 취할 수 없는 억압된 공간이다.
침대의 용수철의 반동을 이용해 아파트 주인은 우주로 날아갔고 그가 벗어놓은 신발만 그곳에 남아있다.
카바코프의 자전적인 이야기처럼 들리는 이 설치작품은 그의 ‘10가지 특성 Ten Characters’ 시리즈 가운데 하나이다.


러시아의 억압적 체제의 ‘10가지 특성’ 중 또 하나는 카바코프의 <재능 없는 예술가 The Untalented Artist>(현대 267)에서 나타난다.
공동아파트에서 거주하며 작업한 결과물이다. 오른편에 카바코프의 글이 적혀 있다.

“그는 작은 마을 공장에 근무하는 무명 장식예술가로 공공건물을 장식하는 일을 한다.
그의 그림은 이 나라에 산재하는 동일한 종류의 그림들과 마찬가지로 보통 수준이다.
하지만 그의 작품에는 그만의 특징이 아주 조금 있다.
이 예술가는 본래 재능 없는 예술가는 아니었다.
진부한 규정이 순발력과 예술적 야망을 모두 소멸시킨 건 아니다.
어떤 작품은 명령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신을 위해 그려진다.”


카바코프의 글은 그 자신과 구소련에서 작업하던 동료에 관한 것이다.
<재능 없는 예술가>에는 세 점의 그림이 각각 벽에 기대어 있는데 모티프와 양식이 다른 두 그림이 위 아래에 있다.
두 명이 공동으로 작업했음을 보여준다.
카바코프는 주제를 명령하는 당의 간부와 예술가의 합작품이라고 말한다.
당이 제공하는 주제는 사회주의 이념이 내재하는 희망찬 사회 현상을 밝게 사실적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화가는 자신의 느낌이나 판단을 보태어서는 안 된다.
매우 억압된 상태에서 기술적으로 작업하는 것이다.
카바코프의 말대로 예술가들도 모든 러시아인과 마찬가지로 순종하는 행복한 삶을 살아야 한다.
예술가는 자신의 개성이 드러나지 않게 중도적 입장에서 ‘집단의 감각’을 작품에 반영해야 한다.


개인의 자유가 허락되지 않는 구소련을 카바코프는 1992년 카셀 도쿠멘타 IX에 설치한 <화장실 The Toilet>을 통해 고발하고 1993년 베네치아 비엔날레에 설치한 <러시아 전시관 The Red Pavilion>을 통해 러시아 정부를 싸구려 매음굴로 묘사했다.
그는 전시관에 핑크색을 칠하고 별로 장식했다.
그는 같은 해 군대식 혹독한 교육기관인 구소련의 학교를 잔디가 무성하게 자란 곳에 버려진 폐허의 모습으로 재현하기도 했다.
그가 설치한 교실 내부에는 독재자 스탈린의 초상이 걸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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