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미언 허스트Damien Hirst(1965~)


영국 브리스톨 태생의 허스트는 리즈에서 성장했고 그곳 미술학교에서 수학한 후 1986~89년 골드스미스 대학에서 공부했다.
1988년 골드스미스 대학 동료들과 함께 기획한 ‘프리즈 Freeze’ 전시회를 시작으로 화단에 등단했는데 이는 yBa(young British artists)의 전신이 되었다.
그들은 런던 남동쪽의 버려진 창고에서 그룹전을 열었다. 1991년의 첫 개인전에서 죽은 상어를 포름알데히드 용액에 담고 모터를 부착하여 움직이게 했다.
그는 1995년에 런던 테이트 갤러리가 매년 최고의 작가에게 수여하는 터너상을 수상했다.


yBa의 기수인 허스트는 메멘토 모리memento mori로 유명한데 이는 그가 죽은 상어를 포름알데히드 용액에 담은 작품을 통해 “네가 죽을 수밖에 없음을 기억하라 Remember that you must die”는 죽음의 경고를 했기 때문이다.
동물의 사체를 오브제로 사용한 그는 ‘미스터 데드’ ‘악마의 자식’ ‘컬트 조각가’ 등 다양한 별명을 얻었다.
그는 관람자가 보고 싶어 하는 것을 주저 없이 만들어 상업적으로 성공했다.
진부한 사물을 오브제로 사용하는 데서 뒤샹과 보이스의 선례를 따랐으며 대중매체와 소비문화에 정통한 데서 제프 쿤스와 같은 미국 포스트 팝아티스트의 선례를 따랐다.
yBa의 멤버들은 좀더 과격했는데 매스미디어와 상품의 세계뿐만 아니라 성, 폭력, 마약 등의 사회적 문제를 다뤘다.
현실적 이익을 챙기는 데 기민한 그들은 접근하기 쉬운 미술을 지향했으므로 비판의 기능을 잃은 문화적 상대주의자들로 전락할 위험을 안고 있었지만 기존 제도와 밀접한 거리를 유지할 줄 아는 탁월한 경영 감각도 가지고 있었다.
허스트가 yBa의 기수가 될 수 있었던 것은 그만큼 더 융통성이 있고 대중이 원하는 볼거리가 무엇인지 파악하는 탁월한 능력을 갖추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영국 미술 시장에 영향력이 막강한 찰스 사치Charles Saachi가 허스트의 작품에 높은 상품성을 발견한 것이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허스트는 동물의 사체와 의료도구에 이르기까지 차용의 폭을 넓히면서 독자적인 기호를 만들어냈다.


허스트가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고급문화 취향과 대중적 센세이셔널리즘 모두에 부응했기 때문이다.
1990년대의 미술이 대중에게 다가가지 않고서는 살아남을 수 없음을 안 그는 영화, 뮤직비디오, TV 및 잡지광고, 출판, 각종 상업도안 등의 사업을 병행했을 뿐만 아니라 약국이라는 레스토랑을 운영하면서 “좋은 사업이 가장 훌륭한 예술”이란 앤디 워홀의 경구를 실천했다.
그는 자신의 이름이 대중매체에 빈번히 오르내릴 수 있도록 노력했다.
이런 점 때문에 일부 평론가들은 그를 충격만을 노리는 기회주의자로 보고 그의 작품이 베이컨, 팝아트, 포스트 팝아트, 개념미술, 미니멀리즘 등을 적당히 섞은 절충주의 작품으로 간주했다.
그러나 그의 작품이 죽음과 밀접한 관계를 맺으면서 그에 대한 비난은 설득력을 잃었다.


그의 작품에 죽음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우기 시작한 것은 살충제에 죽어가는 파리와 소의 머리를 함께 설치한 <백년>, <천년>(1990)과 같은 초기 작품에서였다.
그 후 그는 동물의 사체를 통째로 또는 절단하여 포름알데히드 용액 속에 넣었으며, 수술도구, 약, 해부모형이 진열된 의료함, 시체와 해골의 모형을 제작하면서 고급문화 취향에 부응하여 현학적인 긴 제목을 붙였다.(아트 227)
많은 그의 작품은 죽음에 대한 공포와 강박증을 표현한다.
죽음에 대한 그의 공포와 강박증은 상어를 포름알데히드 용액 속에 넣은 작품 <살아 있는 사람의 마음속에 있는 육체적 죽음의 불가능성>(현대 225)에서 시작되었다.
사치의 작품 주문을 받은 허스트는 오스트렐리아의 상어잡이에게 전화를 걸어 죽은 상어를 주문했다.
그는 상어를 유리장에 넣고 모터를 이용해 움직이게 했다.
이 작품은 영원한 삶을 꿈꾸는 낭만적 제목과는 거리가 멀다.
그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떨칠 수 없으면서도 죽음에 이르는 고통에 대한 관음증voyeurism을 바라는 관람자의 요구에 부응했다.


예술이란 이름하에 죽음의 장면을 엿보게 하는 작품은 소, 양, 돼지 등을 토막 내어 전시한 작품들에서 극에 달했다.(아트 226)
1992년 터너상 수상작으로 이듬해 베네치아 비엔날레 출품작 <분리된 어머니와 아이> 그리고 황소 머리에 붙인 제목 <열두 제자>(1994)는 동물이 대역이 되어 인간의 죽음을 연기한 작품들이다.
2000년에는 시체해부침대에 아담과 이브를 눕힌 작품 <아담과 이브(에덴동산에서 쫓겨난) Adam & Eve(Banished from the Garden)>(나우 203-1)를 통해 피할 수 없는 죽음을 상기시켰으며, 사지가 유리판으로 사등분된 채 공중에 떠도는 안구가 돌출된 해골에는 <죽음은 부적절하다>(현대 227)라는 제목을 붙였다.
인체를 등장시키지 않은 채 삶의 무상함을 표현한 작품도 있는데 <죽음과 죽는 과정에 대한 불가해한 공포>에서 먼지 낀 낡은 가구, 소파를 찌름으로써 거세공포를 일깨우는 톱, 녹물 또는 체액이 흐르는 듯한 유리창, 널린 의학서적 등은 우리의 삶에 필연적으로 드리운 죽음의 그림자를 은유적으로 묘사한 작품이다.
이런 죽음의 이야기들은 그의 유리장식장 속에 넣어지며 유리장의 프레임은 예술의 경계를 지키는 형식의 틀이 된다.
허스트는 프레임을 “덧없는 삶을 에워싸는 조각”을 제작하기 위한 장치라고 했다.
밀폐된 공간이 현실로부터 분리되어 그의 이야기는 더욱 극적이 되며 관람자는 관음증적 충동을 안심하고 즐기게 된다.
이로서 허스트가 말한 “예술은 실재적이기보다는 연극적”이라는 사실이 입증된다.


허스트의 죽음 이야기는 죽음에 이르는 고통을 극복하려는 의학과 그것이 내포한 사회심리적 의미로 진전되었다.
그는 병리학, 약학, 법의학, 범죄심리학에 관한 책들을 읽고 이를 작품에 응용한다.
그는 ‘이론, 가설, 방법, 접근, 가정, 결과, 그리고 발견’이란 명제로 전시회를 열고 카탈로그에 법의학 저널에서 발췌한 글을 구사한 보고서 형식의 글을 싣고 평론가의 글과 함께 병리학자의 평문을 실었다.
사체 사진을 비롯한 각종 법의학 자료 사진과 작품 도판을 나란히 실었다.
그는 의료도구나 재료를 단순히 차용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에 내재한 복합적 의미도 함께 차용한다.
산부인과와 시체실을 재현한 작품은 병원에서 시작해서 병원에서 죽는 현대인의 삶을 조명한 것이다.
각종 의료장비를 갖춘 병원에서는 인간의 생명을 그래픽으로 보여준다.
생명이 병원에서 관리됨으로써 자연적이지 않고 추상적이 되며, 의료가 소비행위가 되고 약품은 상품이 된다.
<삼위일체 Trinity>(2000)는 약리학, 생리학, 병리학 등 의학의 각 영역이 맹목적인 믿음의 대상으로서의 값비싼 토템으로 나타난 작품이다.
인체의 해부모형의 <찬가 Hymn>(2000)(나우 201)는 거대한 토템이다.
<약국 Pharmacy>(1992)(아트 228)은 “모든 약품은 탄생과 죽음 사이에 있다”는 자신의 말을 시각화한 설치작품이다.
그는 대량생산되는 알약으로 화면 선반을 가득채운 후 <공허>(현대 230, 231)란 제목을 붙였다.
그는 약품을 초사실적 물신이 되고 있음을 보여주며, 제약산업은 병을 극복하기보다는 자신의 영역을 넓히는 데 더 목적을 두고 모든 음식물을 대치할 때까지 사업을 확장할 것이다.


허스트는 <잃어버린 사랑 Lost Love>(나우 202)은 산부인과 진료실을 물고기들이 헤엄치는 유리장식장으로 만든 작품으로 성적 쾌락과 출산의 고통을 현실의 잔인함으로 표현한 것이다.
그는 목걸이와 반지를 유리장식장에 넣어 성적 쾌락과 출산을 상징했다.
여기에서 물고기는 태아로 물은 양수를 상징한다.
물고기는 남성의 성기와 다산을 상징하며 또한 자궁fishy vagina(비린내 나는 질)이란 말을 연상시킨다.
그가 사용한 물고기는 아프리카 강에서 사는 어류이다.


<약사로서 자화상에 집중 Concentrating on a Self-Portrait as a Pharmacist>(나우 203)에서 그는 자신을 흰 약사 가운을 입은 초상화로 소개했는데 화실 속의 유리장식장 속에 갇힌 모습이다.
그의 표정은 냉소적이지도 절망적이지도 않지만 희망적이지도 않다.
그는 의학이 구원의 신화를 만들어내지만 동시에 불길한 컬트 문화를 만들어낸다는 점을 관람자에게 인식시키려고 하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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