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학원 그리고 조선 미술 전람회



당시 일본 서양화단을 보면,
1907년에 개설된 문전에서 백마회 계열의 소위 일본 외광파가 아카데미즘으로 자리를 잡기 시작한 1910년, 타카무라 코타로는 『녹색의 테양』에서 개성과 주관을 강조했고,
같은 해 창간된 잡지 『백화 白樺』는 세잔을 비롯하여 르누아르, 반 고흐, 고갱 등 후기인상주의를 소개하고 있었다.
이후 1914년 이시이 하쿠데이石井柏亨를 중심으로 이과회에 결집한 젊은 예술가들은 재야단체의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속속 새로운 사조를 도입, 이식하게 되었으며,
1910년대의 야수주의, 입체주의, 미래주의를 거쳐 1920년대에는 프로레타리아 미술, 초현실주의의 도입에 이르게 되었다.
제국 미술 학교가 개교할 시기에는 이러한 개성과 자유, 주관의 시대가 시작된 지 오래된 때였으며, 이와 관련하여 서양에서 갓 들어온 새로운 사조에 많은 예술가들과 일반인들이 주목한 때였다.


귀국 후 유학생들의 전시활동은 선전 참가와 재야단체의 조직 및 참여로 나타났는데, 130명 중 선전에 참가한 사람은 서양화, 동양화, 조각, 공예 네 부문에서 31명뿐이었다.
그들은 오히려 재도쿄 미술 협회전에 적극 참여했다.
이 전람회는 제국 미술 학교 출신들이 주축이 되어 동경에 유학한 화가들이 모여 1938년에 창립전을 가진 후 여섯 차례에 걸쳐 전람회를 개최했다.
제국 미술 학교 출신 작가들은 해방 후 대학과 중고등학교 등의 교원으로 활동했으며 20여 명은 월북했다.


문화 학원

문화 학원은 1921년 건축가 니시무라 이사쿠西村伊作가 화가 이시이 하쿠테이石井柏亨과 함께 동경의 간다神田에 설립한 학교였다.
이사쿠는 자산가로서 유화를 그리며 도자기를 만드는 취미가 있었다.
창립시 2교실과 무용실 겸 강당만으로는 협소하여 1923년 목조 4층의 건물을 증축했지만 낙성 직후의 관동대지진으로 화를 입어 창립시의 영국 민가풍 건물과 일본 정원이 소실되었다.
관동 대지진은 약 340만 명의 사상자를 낸 가공할 만한 천연재해였다.
대학부에 본과(현재의 문학부)와 미술과가 설치된 것은 1925년이었다.
교장 이사쿠의 필화를 시작으로 정부의 탄압이 날로 강해졌고 1943년 마침내 “일본의 국시에 맞지 않다”는 이유로 폐쇄명령을 받았으며 건물은 군에 징용되었고 교장은 전쟁반대와 불경죄로 구치되었다.
1946년 전쟁이 끝남과 동시에 군에 징용되었던 건물이 풀리고 교장의 불경죄와 학교의 폐쇄령도 자연 해소되었다.
문과와 미술과가 이듬해 재개되었다.


이사쿠는 1963년 78세로 타계했고, 1931년부터 학감으로 아버지를 도왔던 장녀 니시무라 아야가 교장에 취임했으며 장남 西村久二가 이사장에 취임했다.
西村久二의 설계에 따라 1966년에 지상 5층, 지하 1층의 신교사가 낙성했다.
1985년 고등학교 과정에 상당하는 예술과가 설립되어 도자과와 함께 문화 학원 예술 전문 학교로 인가 받았다.
1988년에는 전문 과정 미술과가 추가되고 2002년에 고등 과정 예술과와 전문 과정 미술과는 각기 오차노미즈에 있는 문화 학원의 고등 과정 미술과와 전문 과정 미술과로 통합되었다.
1930년대 우리나라 유학생이 입학할 때만 해도 입시시험은 형식적이었고 동경 미술 학교만 제외하고 지망하면 모두 입학할 수 있었다.
동경 미술 학교는 징병이 면제되었기 때문에 입학 경쟁이 매우 높았다. 문화 학원은 교복이 없었으며 자유로운 분위기의 학교였다.


조선 미술 전람회

일본 근대 미술과 미술 학교는 조선 근대 미술이 뿌리를 내리는 온상이었고, 조선 화단을 이끈 대부분의 주역들이 일본 유학파들이었다.
비록 일본으로 유학을 오지 못했더라도 조선의 작가들은 조선에 체류하던 일본인 작가와 일본으로부터 유입된 미술 관련 서적을 통해 서양의 근대 미술을 알고 이해하게 되었다.
일제 시기에 이들 대부분의 활동무대는 일본 총독부가 1921년 12월 27일에 설립한 조선 미술 전람회(선전)였다.
선전에 출품할 수 있는 자격은 조선에 6개월 이상 거주해야 하는 것으로 조선 거주 일본인 화가들이 자신들의 활동무대로 삼았다.
서예를 제외한 모든 분야의 심사위원들이 일본에서 초빙되어 왔으며 처음에는 주로 동경 미술 학교 교수들이 초빙되었다.
따라서 일본 화풍이 두드러질 수밖에 없었다.
1922년에 발간된 『제1회 조선미술전람회 도록』에는 선전 개최의 의의를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 오랫동안 폐정에 시달려 온정이 모자라는 처참한 생활을 해 온 조선도, 제국의 시정 이후 정치가 잘 되어 문명의 혜택이 해를 거듭할수록 넓게 각종 방면에 많은 변화를 보여주고 있는데,
예로부터 중요한 미술의 관계에는 그다지 적극적인 시설을 연구하지 않은 것은 매우 유감스러운 감이 있다.
미술장려를 위한 전람회의 개최는 우리들이 다년간 부르짖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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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미술 전람회의 모델 살롱


조선 미술 전람회(약칭 선전)는 문화 정책의 담당 부처인 문부성文部省이 프랑스의 18세기 살롱을 모델로 1907년에 만든 문전文展을 본따서 만든 것이다.
문전은 1919년에 제전(제국 미술 전람회)으로, 1937년에 신문전(신문부성 미술 전람회)으로, 1946년에 일전(일본 미술 전람회)으로, 1969년에 개조 일전으로 명칭이 바뀌었다.
선전은 총독부의 문화 정치의 일환으로 창설된 것이다.
1944년까지 23회나 계속된 선전 서양화부의 심사위원을 역임한 일본인 서양화가들은 근대 일본 서양화사에서 뚜렷한 사람은 별로 없었다.
동경 미술 학교의 아카데믹한 교수급 화가들이 주로 위촉된 심사위원들은 조선인의 출품작이 민족적 현실이나 일제하의 저항정신, 그 외의 엄숙한 인간의 실존문제나 역사의식, 사회의식 등에 관심을 보이기보다는 단순한 자연미의 재현으로서의 향토주의 풍경 또는 표현미 자체만을 추구한 인물화, 정물화에 그치도록 작용했다.
일본에서 향토 연구를 주도한 민속학의 주요 그룹 명칭이 향토회였다.
향토란 말은 일본에서 폭넓게 사용되고 있었다.


살롱Salon

프랑스 왕립 미술 아카데미를 구성하는 작가들의 전람회가 살롱이다.
이 명칭은 루브르 궁전의 아폴론 살롱에서 전람회가 열린 데서 유래했다.
17세기에 루이 14세의 정치고문·재무장관 콜베르Jean-Baptiste Colbert(1619~83)와 화가 르 브룅Charles e Brun(1619~90)에 의해 왕립 회화·조각 아카데미가 창설된 이래 전람회는 1737년부터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기까지는 2년마다 열렸고, 그 이후에는 해마다 열렸다.
살롱은 파리에서 대중에게 공개되는 유일한 전람회였으므로 이를 통해 아카데믹한 관제 미술이 세평을 손쉽게 통제할 수 있었다.
전람회의 참가를 거절당한 독창적인 예술가들의 항의가 거세지자 나폴레옹 3세는 1863년에 낙선자들을 위한 살롱(살롱 데 르퓌제)을 개최하라고 명했다.
1881년에 살롱은 프랑스 예술가협회로 재편되었으며, 전년도 출품자들 중에서 심사위원을 선출했다.
이 새로운 조직도 참신하고 독창적인 예술가들에 대해서는 여전히 배타적이었다.


일본인 심사위원들은 진취적이고 혁신적인 조형 탐구나 시도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1943년의 『문화조선』에 기고한 윤희순의 미술시평 ‘선전 앞에서’에 이런 지적이 있다.


… 조선의 일반적 미술형태란 것은 하나의 범주를 만들게 하면서 어떤 질곡 속에 맴도는 결과를 가져왔다.
즉, (동경의) 문전, 이과전에의 동경과, 거기에서 위촉되어 온 심사원을 해마다 맞이한다는 것은 하나의 공통적 제작주형을 낳게 한 것이다.
즉, 그 심사원들은 각기 예술태도가 다름에도 불구하고 선전 작가에 대한 요구와 장려는 하나로 집중돼 있다.
“조선의 로컬 컬러를 내라!”고 하는 것이다.
작가들은 어떻게 하면 가장 이색적인 로컬 컬러로써 작품에 영광을 가져올 수 있을까 고심했던 것이다.
… 실로 예술적 차이는 제재題材 그 자체보다는 제재를 어떻게 다루었느냐에서 빚어지는 것이겠으나, 그보다도 먼저 마음가짐에 따라 제재 선택이 정해지는 것이 아니겠는가.
향토에 대한 참다운 이해와 사랑을 수반하지 않은 작가, 혹은 지성이 저열한 작가는 향토색을 풍속 그림엽서으로밖에는 표현하지 못할 것이다.


학생도 포함된 신인 작품 공모경연전으로서의 선전은 초기의 서예와 사군자를 제외하고 모든 부문 동양화, 서양화, 조각, 공예의 심사위원들이 주최측인 일제 총독부가 위촉한 일본 작가들이었다는 사실은 심사위원의 의식에 따른 일본색 만연과 추종을 낳게 한 직접적인 요인들 중 하나였다.
특히 동경 미술 학교 출신들은 해방 후 창설된 대한민국 미술 전람회(국전)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여 동경 미술 학교에서 배운 아카데믹한 보수 성향을 드러냈고 이런 성향은 한동안 국전의 성격으로 나타났다.
그리고 동경 미술 학교 출신 상당수가 대학 미술 교육에 전념하여 해방 후 한국 미술 교육에 있어 일익을 담당했다.


1930년대 후반 이후 일본의 여러 미술 학교들 중 가장 많은 조선 유학생들이 다닌 학교는 제국 미술 학교였다.
이 학교 출신들은 해방 이전에 재동경 미술 협회전을 비롯하여 선전과 일본의 주요 전람회에서 활발하게 활동했으며, 해방 후에는 국전에 적극적으로 가담하기보다는 중고등학교 미술교사, 대학 미술과 교수 등으로 후학 양성에 노력했다.
특기할 점은 중국의 꿔화國畵와 일본의 니홍가日本畵 호칭처럼 조선의 전통 회화를 주체성 있게 한화韓畵 혹은 조선화로 지칭하지 못하게 서양화의 대어對語로서 동앵화란 용어가 일제에 의해 고착되어 진 것은 1922년에 시작된 선전의 운영규정에서부터였다.
제1부를 동양화부로 정함으로써 그 용어가 그 후 전통 조선화 혹은 한국화를 의미하게 된 것이다.
식민지 시대에 강제로 사용된 이 용어는 해방 후에도 반성 없이 사용되었다.
한국화의 전통은 고구려의 고분 풍속화(예술철학 234)를 기원으로 고려 이래 사군자화, 18세기의 진경산수화, 풍속화 등이었지만 이런 데서 한국화의 정체성을 찾으려는 노력은 없었다.


이광수는 1916년 10월 31일과 11월 2일에 『매일신보』에 기고한 ‘동경유신, 문부성 전람회기’에서 옛 조선 회화는 주제가 다양하지 못했기 때문에 이제는 신선하고 당대의 생활과 관련된 장면들을 그려야 함을 역설했다.
문학 평론가 변영로도 안중식과 조석진 화풍의 동양화는 보수적이고 생명력이 없으며 다시 태어날 필요가 있다고 평했다.
그는 화가들은 자신들이 살고 있는 시대의 시대정신을 관찰하고 이해할 필요가 있으며 미술은 당대 사회와 문화를 반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서양 사실주의 사조에 근거를 둔 두 사람의 요구와 주장은 당시 문학의 주류가 사실주의였으므로 그런 맥락에서 이해된다.


제1회 선전은 1922년 6월 1일 서울 현재의 저동 영낙정에 있던 상품진열관에서 개최되었다.
조선인 출품작가는 김용진, 현채, 이한복, 오세창, 최린, 안종원, 고희동, 심인섭, 지운영, 노수현, 변관식, 이상범, 허백련, 김은호, 이용우, 나혜석 등이었고
심사위원은 동경에서 건너온 세 사람과 조선인으로 이완용, 박영효, 박기양, 이도영, 서병오, 김돈희, 정대유, 김규진 등이었다.
수상으로는 2등상에 허백련의 <추경산수>,
3등상에 심인섭의 <묵죽>,
4등상에 김은호의 <미인승무도>, 이용우의 <고성춘심>이었다.
오세창의 전서는 서예부에서 2등상을 받았고 최린의 <난>은 동양화부에서 입선했다.


조선인으로 무심사 참고품을 낸 서화가는 이도영, 김규진, 김돈희, 정대유였다.
선전 초기에 1~4등으로 수상하던 시상제도가 1926년 제5회전 때부터는 특선제로 바뀌었다.
동양화부에서 연 4회 특선으로 추천작가가 된 사람은 김기창, 장우성, 정말조뿐이다.
김기창과 장우성은 낙청헌에서 김은호의 지도를 받던 친구 사이이고 정말조는 일본 경도 회화 전문 학교를 나온 화학도로 일본에 거주했으므로 조선말보다는 일본말을 더 잘 했다.
어쩌다 서울에 와도 조선인과는 별로 어울리지 않았다.
선전에 참여할 때에도 일본에서 제작한 것을 출품하고 서울에서는 일본인으로 선전에 심사참여한 마쓰다 마사오松田正雄의 집에 묵었다.


조선에 거주하는 일본인 화가들도 상당수 있었으며, 동양화부에서 두각을 나타낸 화가들로는 가와무라 겐뽀川村憲邦, 에구치 게이시로江口敬四郞, 타나까 후미꼬田中文子, 이마다게이 이치로今田慶一郞 등이었다.
가와무라는 광주에서 직장생활을 하면서 시장풍경이나 엿목판을 메고 가위 치는 모습 등 토속적인 풍속화를 주로 그렸다.
이마다게이는 나이가 지긋한 사람으로 관리였으며 타나까는 인물, 꽃 등을 주로 그렸다. 이들은 선전의 추천 작가가 되었다.


추천 작가는 되지 못했지만 선전에서 몇 차례 특선한 동양화가는 정종여, 배렴, 이유태, 조중현, 이응로, 허건 등이었다.
서양화가로 추천작가가 된 사람은 이인성, 심형구, 김인승, 박영선 등이었다.
김중현은 동양화와 서양화를 넘나들며 특선을 수상했다.
선전에서 일본인 화가들을 제치고 특선을 한 사람은 이마동, 김종태, 박득순, 김흥수 등이었다.
조각에서는 윤효중, 김경승, 조구봉, 윤승욱 등이 특선을 수상했다.
늦게 생긴 공예부에서는 김재석, 강창원, 이세영 등이 두드러지게 활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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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도



강세환은 노년에 “근일에는 그대(김홍도)의 그림을 얻은 사람이 곧 나에게 와서 한두 마디의 평어評語를 써주기를 요구하였고 궁중에 들어간 병풍과 권축에도 내 글씨가 뒤에 붙은 것이 더러 있다.
‘그대와 나는 나이와 지위를 무시하는 친구’라고 하여도 좋을 것이다”라고 하여, 두 사람이 일생 제자이자 동료, 그리고 서로 존중하고 인정해주는 화단의 지기로 지냈다.

김홍도가 본격적으로 활동한 18세기 후반은 중인 세력이 안정되어가던 시기였고, 정조는 등극하면서 규장각을 세워 문풍文風을 크게 진작시켰으며, 박제가(1750~1815)와 같은 서얼 출신의 학자를 검서관檢書官으로 임명하는 등 중인층의 신분상승을 통한 정계진출을 용인했다.
문헌상으로 중인中人의 칭호가 나타난 것은 인조(1623~49) 때였고, 신분변동은 18세기에 이루어졌지만, 화원의 경우 안경이 호군직에 최경이 당상관에 임명되어 예외적으로 사족士族의 관직을 받은 사례가 있다.
이런 상황에서 중인 출신 김홍도는 어려서 표암 강세황으로부터 그림을 배웠다.
강세황은 김홍도와의 관계를 훗날 말했다.

“내가 사능과 사귄 것이 전후 대개 세 번 변하였다.
처음에는 사능이 어린 나이에 우리 집에 드나들어 혹은 그 재능을 칭찬하기도 하고 혹은 그림 그리는 요령을 가르쳐주기도 했고, 중간에는 한 관청에 있으면서 아침 저녁으로 서로 대했으며, 나중에는 함께 예술계에서 노닐어 지기의 느낌이 있었다.”

김홍도는 산수, 인물, 도석道釋, 영모, 화조, 어해, 사군자, 누각 등 모든 화두에 능했으며,
특히 당시 생활상을 그려내는 풍속인물화에 뛰어났고, 신선과 고승을 그리는 도석화는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그의 작품 전반에는 그가 살았던 세상의 태평한 기상이 스며 있으며 자기 문화를 존중하던 시대의 자긍심이 깃들어 있다.
우리나라는 자연 중심의 예술을 추구했으므로 인물화보다는 산수화가 더 큰 비중을 차지하고 인물화의 경우에는 종교화, 초상화, 기록화 등에서와 같이 부처, 도인, 성현, 군자, 충신, 열부 등 이상적인 인물과 역사적·교육적으로 존경의 대상이 되는 권계주의적勸戒主義的 인물들이다.
종종 미인도와 사녀도仕女圖가 그려졌지만 지배층에 국한된 취향의 반영이었다.
김홍도의 풍속화를 통해서 권계주의는 사라지고 서민들이 그림에 주인공으로 등장하기 시작했다.


김홍도의 영모화는 매우 다양했는데 개, 고양이, 호랑이, 소, 말, 사슴, 다람쥐, 양, 박쥐, 까치, 백로, 학, 메추리, 구욕새, 참새, 꿩, 꾀꼬리, 매, 닭, 오리 등 20여 종에 달한다.
그의 그림 밑바탕에는 서법이 깔려 있는데 늘 중봉中鋒의 원리를 지켰으며 어느 경우에도 편봉偏鋒을 쓰지 않았다.
그의 필선은 획에서 나온 것이므로 필선에 처음과 끝이 있다.
따라서 준법에도 선과 관련이 있는 피마준과 하엽준 같은 선묘에 치중하고 있다.

스승 강세황은 『표암고豹菴稿』에 김홍도에 관해 적었다.

찰방 김홍도는 자가 사능士能이다.
어릴 적에 내 집에 드나들었는데 눈매가 맑고 용모가 빼어나서 익힌 음식 먹는 세속사람 같지 않고 (신선 같은) 기운이 있었다.
이제 사능의 사람됨을 보면 얼굴이 준수하고 마음가짐은 깨끗하여 보는 이는 모두 (사능이) 고상하게 속세를 넘어섰으며 시중 거리에 흔한 자잘한 무리가 아님을 알 것이다.
품성이 또 거문고와 젓대의 전아한 음악을 좋아하니 매번 꽃피고 달밝은 저녁이면 때때로 한두 곡조를 연주하여 스스로 즐겼다.
그 기예가 막바로 옛사람을 좇을 수 있는 것은 물론이고 그 풍채와 정신이 우뚝하니 멀리 빼어나서 진·송의 훌륭한 선비 중에나 (그 짝을) 구할 수 있을 것이다.
사능은 음률에 두루 밝았고 거문고, 젓대며 시와 문장도 그 묘를 다하였으며 풍류가 호탕하였다.
매번 무딘 칼날을 치며 슬피 노래하는 마음이 들 때면 북받쳐서 혹은 몇 줄기 눈물을 흘리기도 하였으니 사능의 마음은 스스로 아는 이만 알 것이다.
들으니 그 거처는 책상이 바르고 깨끗이 정돈되어 있으며 계단과 뜨락이 그윽하여 집안에 있으면서도 곧 세속을 벗어난 듯한 생각이 든다고 한다.
세상의 용렬하고 옹졸한 사람들은 겉으로는 사능과 더불어 비록 어깨를 치고 네나거리를 하지마는 또한 사능이 어떠한 인물인지 어찌 알 수 있으랴.


김홍도는 진경산수를 종종 그렸는데 1788년 정조의 명령을 받고 영동의 사군을 여행하고 <영동사군첩 嶺東四郡帖>을 그렸다.
이때의 여행을 통해 금강산의 명소들을 화폭에 담게 되었다.
그가 금강산을 여행한 지 7년 후인 1795년에 그린 것이 <총석정도 叢石亭圖>이다.
김홍도의 진경산수화는 18세기 후반과 19세기 초에 화가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자연환경에 따라 각 나라 그리고 각 지역의 회화가 다르다는 점을 일찍이 히폴리트 텐느가 『예술철학 Philosophie de l’art』(1882)에서 언급한 적이 있다.

건조한 나라에서는 선이 주조가 되고 그것이 사람의 주의를 끈다.
산에는 웅대한 몇 층의 건물이 하늘로 솟아오르는 것처럼 모든 대상이 투명한 공기 속에 선명하게 부조된다.
그러나 플랑드르의 평탄한 눈에는 사물의 윤곽이 뚜렷하지 못하고, 거기에는 언제나 공기 속에 눈에 보이지 않는 수증기가 떠있다.
주가 되는 것은 색조뿐이다.
풀을 뜯고 있는 암소, 목장 속에 있는 지붕, 난간에 기대고 있는 사람의 모습이 다른 모습의 일부로서 보일 따름이다. 대상은 서서히 그 모습을 나타내고, 갑자기 주위에서 뛰쳐나오지 않는다.
사람들은 전체의 가감과 농담에 감동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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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신세계 백화전 정기간행물에 기고한 것입니다.

정선과 정수영의 산수화


조선 후기 최고의 산수화가 정선(1676~1759)의 호는 겸재謙齋, 난곡蘭谷이며 서울 청운동에서 태어났다.
13세에 아버지를 여의고 늙은 어머니를 모셨다.
서울 근교의 양천 현감, 대구 근처의 하양 현감 등을 지냈는데 현감은 종6품의 지방장관직이다.
그는 금강산을 여러 번 답사했고, 전국 방방곡곡에 그의 발걸음이 미치지 않은 곳이 없다고 말할 정도로 여행을 많이 했으며 절경을 화폭에 담았다.
1756년 화가로서는 파격적인 가선대부지중추부사라는 종2품에 제수되었다.
세거한 사대부 집안에서 태어났고 몇 대에 걸쳐 과거를 통해 출세하지 못한 가난하고 문벌이 변변치 못한 양반이었으나 뛰어난 그림재주로 인해 관료로 추천받았으며 마침내 화단에 명성을 얻게 되었다.

정선의 화제는 당시 기행문의 소재였던 금강산, 관동지방의 명승, 그리고 서울에서 남한강을 오르내리며 접할 수 있는 명소들과 그가 실제 지방 수령으로 근무하던 여가에 묘사한 것들이다.
그 밖에도 자기 집과 가까운 서울 장안의 사철 경치, 특히 인왕산 동북 일대의 계곡과 산등성이들이 화제가 되었다.

회화 기법상으로는 전통 수묵화법이지만 채색화의 맥을 이어받기도 했으며, 나름대로 필묵법을 개발했는데 이는 자연미의 특성을 깊이 관찰한 결과이다.
그의 회화 기법은 다른 화가들에 비해 다양하며 정밀묘사법에서부터 간결하고 활달한 사의화까지 있어 자연에서 얻은 인상을 나름대로 재구성하는 과감성과 회화의 원리를 발전시키는 등 여러 단계의 작품을 보여주었다.

정선과 정수영의 산수화를 보통 문인화라고 하는데 문인화의 개념은 중국에서 성립된 것으로 소동파(1036~1101) 등의 북송 문인들에게서 시작되어 동기창의 남종화 주창에서 구체화되었다.
문인은 곧 사대부라는 등식이 성립되던 시기였다.
문인화란 회화를 직업으로 삼지 않는 사대부들이 여가 혹은 여흥으로 자신들의 의중을 표현하기 위해 그린 회화를 말한다.
문인화는 형사形似보다는 사의寫意를 강조하는 것이 보통이지만 선비 회화는 좀더 포괄적 의미를 지닌다.
선비는 시류에 구애받지 않는 자유스러운 성향을 지니고 있으므로 양식의 범주에서 문인과는 구별이 된다.
문인화에서는 정신성과 주제의 상징이 중요한 요소로 부각되며 일정한 표현 양식, 즉 북송의 미법米法, 원대의 황공망, 예찬으로 대표되는 필법 등이 따라야 할 준칙처럼 되어 있다.
하지만 이런 제한에서 벗어난 선비 회화에는 표현에 수반되는 다양한 준법이 활용될 뿐 아니라 유머, 파격 등 가능한 표현 대상을 선택한다.
그러므로 선비 회화라는 틀 속에서의 우리나라 문인화는 중국식 유형 밖의 것으로 선비의 개성적 특성이 자연스럽게 드러난다.

사물을 정밀묘사 혹은 사실적으로 표현하는 회화양식은 고려 중기에서 조선 말까지 두드러진 화풍이었다.
사물을 세밀하게 묘사하는 것을 자연의 본체, 생명의 본질인 신神으로 보고 전이傳移하는 전신傳神을 실현시키는 것으로 인식했다.
천연 그대로 모사된 회화에서 천지의 조화를 볼 수 있기 때문에 이런 양식을 입신入神과 득신得神, 신필神筆과 신품神品 등의 평어로 최고의 경지와 가치로 간주했다.
명말의 동기창(1555~1636)은 『화지畵旨』에 전신을 기운생동하는 문인 산수화를 구현하는 화결畵訣로 중시한다는 내용의 글을 기술했다.
우리나라에서도 전신론은 고려시대의 대각국사 의천(1055~1101)에 의해 초상화의 정예精藝로 인식되었다.

정선은 남종화풍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자신의 독특한 양식을 만들어낸 후 진경산수화를 창출했다.
정선이 진경산수에서 초기부터 미법을 바탕으로 하고 있음은 부인할 수 없으나 정선은 양식의 해석력이 뛰어날 뿐 아니라 독자적인 필법이 매우 강해 미법이 거기에 묻히다시피 되었다.
정선은 17세기의 정신계를 지배한 성리학의 배경 속에서 조선이 곧 세계 문화의 중심이라고 생각하던 조선중화주의에 입각하여 국토의 아름다움과 민족 문화의 우수성에 대한 자긍을 고차원적인 회화미로 표출해낸 진경산수를 완성시킴으로써 회화를 통해 사상성을 고조시켰을 뿐만 아니라,
기법에 있어서도 문인산수화의 고전적 준법인 미점과 피마준 등을 이용하는 한편,
북종화의 부벽준의 변형이라고 할 빗발준을 개발하여 적극적으로 구사하는 과감성을 보였다.

17세기에 이르러서 강백년(1603~81)이 “범회사귀전신凡繪事貴傳神”이라고 했듯이 전신傳神은 회화가 중시하는 창작론으로 확대되었고 문인 화가이자 평론가 표암豹菴 강세황(1713~91)은 진경을 표현하는 개념으로 사용했다.
이렇듯 전신론은 조선 후기에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졌다.
이하곤(1677~1724)은 시를 짓는 것과 초상화를 그리는 것은 같다면서 적었다.

“눈썹 하나 머리털 하나라도 닮아야 비로소 어떤 사람을 묘사했다고 일컬을 수 있다. 눈썹 하나 머리털 하나라도 닮지 않으면, 아무리 정교하게 그렸다 하더라도 신정과는 상관없게 되니 어찌 그 사람을 묘사했다고 할 수 있겠는가.”

이런 관점에서 이하곤은 겸재 정선의 <해악전신첩海嶽傳神帖>을 평했다.

“무릇 그림에서 전신은 어려워 70~80%만 형을 닮게 나타내도 고수라 할 수 있다. 정선의 금강산도들은 신의 전이도 이루어지고 형사도 모두 얻었다.”


그러나 18세기 화가들 중 남종화 발전에 가장 기여한 강세황은 진경산수화가 실재 경관을 닮아야 한다고 강조했음에도 불구하고 정선의 진경화풍이 획일화, 상투화되었다고 비판했다.
당대에 최고의 명성을 얻은 정선의 진경산수에 비판을 가한 것이 특기할 만하다.
강세황은 정선의 화풍을 잘 알고 있었고 “정겸재가 우리나라 실경을 제일 잘 그린다”고 파악하고 있었다.
그러나 자신의 염격한 기준을 적용하여 평가할 가치도 없다며 다음과 같이 혹평했다.

“정선은 평소에 익숙한 필법을 가지고 마음대로 휘둘렀기 때문에 돌 모양이나 봉우리 형태들을 포함하여 일률적으로 열마준법으로 함부러 그렸기 때문에 그가 진경을 그렸다고 말할 수조차 없다.”


강세황이 이렇게 혹평한 것은 확신에 찬 자신의 진경관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인데, 진경은 습관적인 필치를 벗어나 장면마다 적합한 화법으로 그려야 한다는 것이다.
영·정조英·正祖 시대에 활동한 강세황은 시詩 서書 화畵의 삼절三絶로 ‘예원의 총수’로 불리었다.
그는 문인화가 신위申緯(1769~1845)와 대표적 화원 김홍도의 스승이다.
신위는 조선시대 사대부들 중에 “산수의 명가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더러 있으나 사생寫生(화조·화훼)하는 사람은 전연 이름 있는 사람이 없다. … 400년간 강표암 상서 한 분만이 뛰어나게 그렸다”고 하여 강세황을 조선 사생의 독보적인 존재로 평가했다.
강세황은 수많은 서화평을 남김으로써 명실공히 당대 최고의 평론가로서 독보적인 존재였다.
당시만 해도 조선에는 감식·감상에 높은 안목과 적극적인 관심을 기울인 사람이 없었으므로 강세황은 감식 분야에서도 선구자였다.

18세기에 형성된 조선 남종화는 19세기를 전후하여 점차 토착화되었는데 이런 특징을 지우재 정수영(1734~1831)의 산수화에서 발견할 수 있다.
정수영은 하동인으로 초명이 수대遂大, 자가 군방君芳, 호가 지우재之又齋이며 시서화와 기행을 즐긴 선비 화가이다.
정인지의 후손으로, 백리척百里尺을 사용하여 근대식 지도를 제작한 것으로 유명한 실학자이자 지리학자 정상기(1678~1752)의 증손자이다.
정수영은 과거나 관직에 나아가지 않고 지리학의 명문인 집안의 전통을 좇아 기행과 탐승으로 시 서 화에 몰두하여 일생을 보냈다.
진경산수화에 심취한 정수영의 회화 세계는 자유분방한 필치와 유탄 사용, 거친 독필로서 강한 개성의 독자적인 화경을 지녔다.
그는 남종화와 진경산수를 함께 특이한 화풍으로 그렸으며, 남종화 중에서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여기에 소개하는 <방황공망산수도倣黃公望山水圖>이다.
화면 우편 여백에 ‘방자구필의 지우재倣子久筆意 之又齋’라고 적혀 있어 정수영이 원말 4대가의 한 사람인 황공망의 필의를 방倣해서 그린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 작품이 황공망의 작품과 거리가 있어 여기서 말하는 방은 모방이 아니라 필의만을 참조한 것임을 또한 알 수 있다.
수기법과 피마준법의 사용에서 황공망의 영향이 감지되지만 구도, 공간처리, 각진 윤곽선, 약간 푸른기가 도는 가라앉은 색조와 먹의 효과는 정수영 특유의 개성적인 화풍이다.
그의 작품은 정선의 진경산수화풍을 비롯하여 강세황 등 선배들의 화법을 바탕으로 했음을 보여준다.


도판

정선1 정선, <금강산도>, 견본담채. 고려대 박물관 소장

17세기 후반부터 18세기 초반까지 우리나라 회화에는 한국적 특징을 가장 잘 드러내는 진경산수화와 풍속화가 성행했다.
성리학의 독자성을 주창한 문인들의 국수적인 입장에서 관념산수화를 떠나 구체적인 우리나라의 산천을 모티프로 삼는 진경산수화의 태동은 화단의 큰 변혁으로 보아야 한다.
이 새로운 양식을 개발한 화가가 정선이다.
왼편에 가까이 산을 그리고 오른편 멀리에 봉우리들을 그린 구성은 원근을 나타내기 위한 것으로 이런 식의 풍경화는 일찍이 벨기에 화가 브뢰헬에게서도 나타나 동서양 모두 전형적인 풍경화의 구성임을 알 수 있다.
김창흡(1653~1722)이 화면 우측에 “멀리 보는 것이 가까이 보는 것보다 낫다”라고 적은 대로 정선은 가까이서 본 금강산의 절경들을 한눈에 볼 수 있도록 한데 모아 화폭에 담았다.
정선은 일만이천 봉우리 주위의 숲이 우거진 산들을 짙은 먹의 미점으로 장식하고 녹색으로 덧칠했으며 그렇게 해서 화강암의 금강산과 대조를 이루게 했다.
이것은 다시점에서 바라본 장면을 새의 눈으로 중앙을 중심으로 한데 모아지게 한 것으로 그가 다양한 장소에서 스케치한 것을 참조하여 인위적으로 구성한 것이다.
이런 구성 방법은 과거에 없던 일로 매우 탁월한데, 이 점을 강세황이 인정하지 않은 것은 아쉽다.
화면 좌우에는 조구명(1693~1737)과 김창흡이 제발을 각각 4행씩 나누어 썼고, 상부 중앙에 겸재의 관서가 있으며, 바로 그 아래 겸재의 음각방인이 있다.
상단 오른편의 제발은 다음과 같다.


산은 속과 겉으로 나누어서 보게 되는데,
한쪽은 정신이 수려한 것을 보고,
다른 한쪽은 규모가 얼마나 크냐를 본다.
그리고 이 둘이 합쳐졌을 때
만옥의 못자리가 되는 것이다.
대체로 산은 멀리서 보는 것이 가까이서
보는 것보다 낫고, 두 번 와서 보면
처음 볼 때보다 더 낫게 보인다.
그래서 이 늙은이는 이리 둘러보고
저리 둘러보고 예닐곱 차례나 행장을 꾸려 왕복했던 것이다.


상단 왼편의 제발은 다음과 같다.

초나라 남쪽에는 사람은 적고 돌이 많다.
하늘과 땅이 영기를 모은 곳으로 돌과
사람이 누가 수가 더 많은가를 항상
다투는 곳이기도 하다.
내 이 일만이천 금강산 봉우리를 쳐부수어
일만이천 금강한을 모조리
갖고 싶은 것이다.


정선2 정선, <청풍계도>, 견본담채. 고려대 박물관 소장

청풍계는 현재 청운동 일대이다.
정선은 이곳을 여러 점 그렸는데, 간송미술관 소장의 <청풍계도>는 64세 때에 그린 것이다.
여기에 소개하는 고려대 박물관 소장품은 간송 소장품과 비슷한 시기에 그린 것으로 추정된다.
필치가 원숙한 경지에 이른 작품이다.
빗발준으로 처리한 화강암질의 검은 너럭바위와 지그재그식의 속필로 마무리한 수지법에서 그의 개성을 느낄 수 있다.
햇빛을 받아 훤히 드러나는 바위와 검은 바위의 명암 대조가 공간감을 느끼게 한다.
이 작품에는 제작연대가 적혀 있지 않고 견재의 관서와 겸재의 음각방인, 원백의 양각방인이 화면 위 오른편에 있다.


정선3 정선, <청풍계도>의 부분

정선4 정수영, <방황공망산수도倣黃公望山水圖>, 지본담채. 고려대 박물관 소장

정수영의 산수화에는 중국 명, 청대 화보의 영향이 크다.
그러나 그는 화보를 그대로 그리기보다는 중국 화가들의 화법을 근거로 하여 자신의 독특한 화의를 표현하려고 했다.
이 작품에는 ‘방자구필의仿子久筆意’, 즉 원대의 화가 자구 황공망의 운필 방식을 따랐다고 적혀 있지만 정수영이 보았을 것으로 짐작되는 <고씨화보顧氏畵譜>에 실린 황공망의 산수화와 비교하면 왼편의 높은 산 이외에는 유사한 점이 없다.
이렇듯 독창적인 작품이지만 당시에는 옛 대가의 작품을 방작한다고 적는 것이 관행이었다.
정수영이 남종화의 원류를 따른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지우재’라는 관서와 ‘군방’, ‘지우재인’이라고 쓰인 두 개의 백문방인이 있다.


정선5 정수영, <산수도>, 지본담채. 고려대 박물관 소장

정수영은 산수화, 특히 기행, 사생의 진경산수화를 많이 제작했는데, 이런 면모는 지리학 연구의 가풍과도 관련이 있다.
당시 진경산수의 일반적인 경향인 겸재 정선 화풍의 양식화를 배제하고 독특한 구도, 갈필의 암준법과 담청색의 사용 등으로 자신의 독자적인 문인화풍을 이루었다.
이 작품에는 크기가 비슷한 두 개의 산봉우리를 짙은 연무대烟霧帶로 분리하여 상하로 배치한 독특한 구도가 있다.
여러 번 끊어지며 이어지는 갈필로 모든 경물을 묘사하고 약간의 농담 변화가 있는 담청색을 군데군데 가하여 더없이 깔끔하고 담백한 효과를 냈다.
인적이 없는 산골에서 물가의 정자에 홀로 앉아 물을 바라보며 명상에 잠긴 선비의 모습이 맑은 산수 묘사와 더불어 탈속의 분위기를 한층 더해준다.
관서는 없으나 ‘군방’이라는 정수영의 자를 새긴 백문방인이 있다.
왼편 상단에 다음과 같은 화제가 적혀 있다.

나무숲에 녹음 우거지고
철새들 소리가 달라지면
그게 또 너무나 좋아서
그 사람 자칭 태고적
사람이라고 한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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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 와서 활동한 최초의 서양인


러일전쟁 직후 제국주의 단계로 진입한 일본은 조선 경제를 식민지적으로 개편하여 화폐금융체계를 예속시키고 철도·해상운수 부문 등을 정비했다.
회사령을 통해 조선인 자본가의 성장을 저지했으며 토지조사사업으로 막대한 국유지를 창출하고 이를 일본인 농장과 회사에 헐값에 불하했다.
이로써 조선은 일본 제국주의의 상품판매시장, 식량·원료공급지로 전락했다.
자본주의적 관계는 철도·항만 등 교통운수부문, 원료가공업 등과 같이 제국주의 경제에 봉사하는 일부 부문에서만 발전했다.


개항 이후 다양한 전문직에 종사하던 서양인들이 우리나라에 왔고 외교관, 선교사, 기술자, 교사, 상인 등 많은 서양인들이 한국에 체류하면서 서양 문물의 유입과 접촉이 다채로워졌다.
우리나라에 와서 활동한 최초의 서양 화가는 영국인 헨리 사베지 랜더Henry Savage Lander이다.
랜더는 1890년 12월 28일에 제물포에 도착하여 서울에서 3개월 동안 체류하면서 그림을 그렸다.
새로운 재료를 가지고 그림을 그리는 그에 대한 소문이 장안에 퍼지자 고종이 그를 불러 그림을 그리게 한 것으로 전해진다.
그리고 랜더에 이어 외교관의 부인으로 추정되는 스코틀랜드 출신의 여성 콘스탄스 테일러Constance J. D. Tayler가 1894년부터 1901년 사이 서울을 여러 차례 방문하여 그림을 그렸다는 기록이 있다.
테일러는 1901년 한국을 떠나기에 앞서 고종황제를 알현했다.


네덜란드계 미국인 휴버트 보스Hubert Vos(1855~1935)는 1899년 동남아를 여행하던 중 서울에 왔다.
보스는 서울에서 한 달가량 머무는 동안 미국 공사관에 유숙했으며 공사의 주선으로 고종황제와 훗날 순종이 될 황태자의 초상화를 유채로 그린 후 상금으로 1만 원을 받았다.
두 초상화는 덕수궁에 소장되어 있었는데 1904년 화재가 발생했을 때 타버렸다.
보스는 당시 중추원 의관이었던 민상호(1870~1933)의 초상도 그렸다.
보스는 프랑스의 유명한 아카데믹 화풍의 대가로 종교화와 원시인들의 삶을 담은 상상화를 그린 페르낭 코르몽Fernand Cormon(1845~1924)으로부터 수학했고, 런던으로 가서 부유층 인사들의 초상을 그렸으며, 시카고 박람회에 네덜란드 왕실의 커미셔너로 임명되어 미국으로 갔다.
그 후 인종에 관심이 생겨 1895년부터 약 10년 동안 일본, 인도네시아, 자바, 중국, 그리고 우리나라에 오면서 여러 인종을 모델로 초상화를 그렸다.
그는 중국에서 여러 중국 관리를 그렸고 서태후의 초상도 그렸다.


보스가 떠나고 이듬해 1900년 프랑스 대사 콜랭 드 플랑시Collin de Plancu의 추천으로 프랑스 세브르Sevres 출신 도예가 레미옹Remion이 정부의 초청으로 서울에 왔다.
프랑스 대사가 중간 역할로 조선과 프랑스 협력의 공예 미술 학교를 설립하기로 하고 관립 공예 미술 학교의 초빙 교사로 채용하기 위해 레미옹을 초청한 것이다.
그러나 약속된 학교 개설은 여러 사정에 의해서 실현되지 못했다.
공예의 중요성은 개화세력의 한 사람 장지연이 1899년 10월 2일과 이듬해 4월 25일자 『황성신문』에 기고한 글에서 발견되는데, 그는 공예를 부활시켜 나라가 부강해지도록 해야함을 역설했다.
조선은 1893년 처음으로 시카고 만국박람회에 참여했고 1900년 파리에서 개최된 만국박람회에도 참여하면서 도자기, 비단, 놋그릇, 목가구, 보석, 병풍, 악기, 다양한 공예품들을 소개했지만, 파리 만국박람회를 참관한 민영찬의 말대로 조선의 물품은 너무 수준이 낮아 외국인의 호기심을 받자 못해 매매에 있어 실패했다.


공예 미술 학교는 설립되지 못했지만 1908년에 전통 공예의 수준을 높이기 위해 한성 미술품 제작소가 세워졌다.
한성 미술품 제작소는 금속, 목공예, 도자기, 염직 등으로 분야를 나누고 도안과 디자인에 의한 새로운 방법으로 제작했다.
비록 일본인 기술자의 지도를 받았지만 숙련된 장인들을 양성하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한국 공예사에 획기적인 전환점을 마련했다.


레미옹은 약 4년 동안 조선에 머물면서 한성법어학교에 불어교사로 재직했는데, 고희동은 1899년 이 학교에 입학하여 4년 동안 레미옹으로부터 프랑스어를 배웠다.
그는 우연히 레미옹이 에밀 마르텔Emil Martel을 모델로 그리는 것을 보고 서양화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서양화는 서울에 체류한 일본인에 의해서도 알려졌는데 일본인 화가 아마쿠사 신라이天草神來가 일찍이 1902년에 남산 기슭에 화실을 갖고 있었고, 키요미즈 토운淸水東雲은 정동에 강습소를 차렸다.
또한 코지마 젠자부로兒島元三郞가 관립한성사범학교 도화교사로 일본으로부터 왔다. 1910년대에는 많은 화가들이 와서 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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