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미술 전람회의 모델 살롱
조선 미술 전람회(약칭 선전)는 문화 정책의 담당 부처인 문부성文部省이 프랑스의 18세기 살롱을 모델로 1907년에 만든 문전文展을 본따서 만든 것이다.
문전은 1919년에 제전(제국 미술 전람회)으로, 1937년에 신문전(신문부성 미술 전람회)으로, 1946년에 일전(일본 미술 전람회)으로, 1969년에 개조 일전으로 명칭이 바뀌었다.
선전은 총독부의 문화 정치의 일환으로 창설된 것이다.
1944년까지 23회나 계속된 선전 서양화부의 심사위원을 역임한 일본인 서양화가들은 근대 일본 서양화사에서 뚜렷한 사람은 별로 없었다.
동경 미술 학교의 아카데믹한 교수급 화가들이 주로 위촉된 심사위원들은 조선인의 출품작이 민족적 현실이나 일제하의 저항정신, 그 외의 엄숙한 인간의 실존문제나 역사의식, 사회의식 등에 관심을 보이기보다는 단순한 자연미의 재현으로서의 향토주의 풍경 또는 표현미 자체만을 추구한 인물화, 정물화에 그치도록 작용했다.
일본에서 향토 연구를 주도한 민속학의 주요 그룹 명칭이 향토회였다.
향토란 말은 일본에서 폭넓게 사용되고 있었다.
살롱Salon
프랑스 왕립 미술 아카데미를 구성하는 작가들의 전람회가 살롱이다.
이 명칭은 루브르 궁전의 아폴론 살롱에서 전람회가 열린 데서 유래했다.
17세기에 루이 14세의 정치고문·재무장관 콜베르Jean-Baptiste Colbert(1619~83)와 화가 르 브룅Charles e Brun(1619~90)에 의해 왕립 회화·조각 아카데미가 창설된 이래 전람회는 1737년부터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기까지는 2년마다 열렸고, 그 이후에는 해마다 열렸다.
살롱은 파리에서 대중에게 공개되는 유일한 전람회였으므로 이를 통해 아카데믹한 관제 미술이 세평을 손쉽게 통제할 수 있었다.
전람회의 참가를 거절당한 독창적인 예술가들의 항의가 거세지자 나폴레옹 3세는 1863년에 낙선자들을 위한 살롱(살롱 데 르퓌제)을 개최하라고 명했다.
1881년에 살롱은 프랑스 예술가협회로 재편되었으며, 전년도 출품자들 중에서 심사위원을 선출했다.
이 새로운 조직도 참신하고 독창적인 예술가들에 대해서는 여전히 배타적이었다.
일본인 심사위원들은 진취적이고 혁신적인 조형 탐구나 시도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1943년의 『문화조선』에 기고한 윤희순의 미술시평 ‘선전 앞에서’에 이런 지적이 있다.
… 조선의 일반적 미술형태란 것은 하나의 범주를 만들게 하면서 어떤 질곡 속에 맴도는 결과를 가져왔다.
즉, (동경의) 문전, 이과전에의 동경과, 거기에서 위촉되어 온 심사원을 해마다 맞이한다는 것은 하나의 공통적 제작주형을 낳게 한 것이다.
즉, 그 심사원들은 각기 예술태도가 다름에도 불구하고 선전 작가에 대한 요구와 장려는 하나로 집중돼 있다.
“조선의 로컬 컬러를 내라!”고 하는 것이다.
작가들은 어떻게 하면 가장 이색적인 로컬 컬러로써 작품에 영광을 가져올 수 있을까 고심했던 것이다.
… 실로 예술적 차이는 제재題材 그 자체보다는 제재를 어떻게 다루었느냐에서 빚어지는 것이겠으나, 그보다도 먼저 마음가짐에 따라 제재 선택이 정해지는 것이 아니겠는가.
향토에 대한 참다운 이해와 사랑을 수반하지 않은 작가, 혹은 지성이 저열한 작가는 향토색을 풍속 그림엽서으로밖에는 표현하지 못할 것이다.
학생도 포함된 신인 작품 공모경연전으로서의 선전은 초기의 서예와 사군자를 제외하고 모든 부문 동양화, 서양화, 조각, 공예의 심사위원들이 주최측인 일제 총독부가 위촉한 일본 작가들이었다는 사실은 심사위원의 의식에 따른 일본색 만연과 추종을 낳게 한 직접적인 요인들 중 하나였다.
특히 동경 미술 학교 출신들은 해방 후 창설된 대한민국 미술 전람회(국전)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여 동경 미술 학교에서 배운 아카데믹한 보수 성향을 드러냈고 이런 성향은 한동안 국전의 성격으로 나타났다.
그리고 동경 미술 학교 출신 상당수가 대학 미술 교육에 전념하여 해방 후 한국 미술 교육에 있어 일익을 담당했다.
1930년대 후반 이후 일본의 여러 미술 학교들 중 가장 많은 조선 유학생들이 다닌 학교는 제국 미술 학교였다.
이 학교 출신들은 해방 이전에 재동경 미술 협회전을 비롯하여 선전과 일본의 주요 전람회에서 활발하게 활동했으며, 해방 후에는 국전에 적극적으로 가담하기보다는 중고등학교 미술교사, 대학 미술과 교수 등으로 후학 양성에 노력했다.
특기할 점은 중국의 꿔화國畵와 일본의 니홍가日本畵 호칭처럼 조선의 전통 회화를 주체성 있게 한화韓畵 혹은 조선화로 지칭하지 못하게 서양화의 대어對語로서 동앵화란 용어가 일제에 의해 고착되어 진 것은 1922년에 시작된 선전의 운영규정에서부터였다.
제1부를 동양화부로 정함으로써 그 용어가 그 후 전통 조선화 혹은 한국화를 의미하게 된 것이다.
식민지 시대에 강제로 사용된 이 용어는 해방 후에도 반성 없이 사용되었다.
한국화의 전통은 고구려의 고분 풍속화(예술철학 234)를 기원으로 고려 이래 사군자화, 18세기의 진경산수화, 풍속화 등이었지만 이런 데서 한국화의 정체성을 찾으려는 노력은 없었다.
이광수는 1916년 10월 31일과 11월 2일에 『매일신보』에 기고한 ‘동경유신, 문부성 전람회기’에서 옛 조선 회화는 주제가 다양하지 못했기 때문에 이제는 신선하고 당대의 생활과 관련된 장면들을 그려야 함을 역설했다.
문학 평론가 변영로도 안중식과 조석진 화풍의 동양화는 보수적이고 생명력이 없으며 다시 태어날 필요가 있다고 평했다.
그는 화가들은 자신들이 살고 있는 시대의 시대정신을 관찰하고 이해할 필요가 있으며 미술은 당대 사회와 문화를 반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서양 사실주의 사조에 근거를 둔 두 사람의 요구와 주장은 당시 문학의 주류가 사실주의였으므로 그런 맥락에서 이해된다.
제1회 선전은 1922년 6월 1일 서울 현재의 저동 영낙정에 있던 상품진열관에서 개최되었다.
조선인 출품작가는 김용진, 현채, 이한복, 오세창, 최린, 안종원, 고희동, 심인섭, 지운영, 노수현, 변관식, 이상범, 허백련, 김은호, 이용우, 나혜석 등이었고
심사위원은 동경에서 건너온 세 사람과 조선인으로 이완용, 박영효, 박기양, 이도영, 서병오, 김돈희, 정대유, 김규진 등이었다.
수상으로는 2등상에 허백련의 <추경산수>,
3등상에 심인섭의 <묵죽>,
4등상에 김은호의 <미인승무도>, 이용우의 <고성춘심>이었다.
오세창의 전서는 서예부에서 2등상을 받았고 최린의 <난>은 동양화부에서 입선했다.
조선인으로 무심사 참고품을 낸 서화가는 이도영, 김규진, 김돈희, 정대유였다.
선전 초기에 1~4등으로 수상하던 시상제도가 1926년 제5회전 때부터는 특선제로 바뀌었다.
동양화부에서 연 4회 특선으로 추천작가가 된 사람은 김기창, 장우성, 정말조뿐이다.
김기창과 장우성은 낙청헌에서 김은호의 지도를 받던 친구 사이이고 정말조는 일본 경도 회화 전문 학교를 나온 화학도로 일본에 거주했으므로 조선말보다는 일본말을 더 잘 했다.
어쩌다 서울에 와도 조선인과는 별로 어울리지 않았다.
선전에 참여할 때에도 일본에서 제작한 것을 출품하고 서울에서는 일본인으로 선전에 심사참여한 마쓰다 마사오松田正雄의 집에 묵었다.
조선에 거주하는 일본인 화가들도 상당수 있었으며, 동양화부에서 두각을 나타낸 화가들로는 가와무라 겐뽀川村憲邦, 에구치 게이시로江口敬四郞, 타나까 후미꼬田中文子, 이마다게이 이치로今田慶一郞 등이었다.
가와무라는 광주에서 직장생활을 하면서 시장풍경이나 엿목판을 메고 가위 치는 모습 등 토속적인 풍속화를 주로 그렸다.
이마다게이는 나이가 지긋한 사람으로 관리였으며 타나까는 인물, 꽃 등을 주로 그렸다. 이들은 선전의 추천 작가가 되었다.
추천 작가는 되지 못했지만 선전에서 몇 차례 특선한 동양화가는 정종여, 배렴, 이유태, 조중현, 이응로, 허건 등이었다.
서양화가로 추천작가가 된 사람은 이인성, 심형구, 김인승, 박영선 등이었다.
김중현은 동양화와 서양화를 넘나들며 특선을 수상했다.
선전에서 일본인 화가들을 제치고 특선을 한 사람은 이마동, 김종태, 박득순, 김흥수 등이었다.
조각에서는 윤효중, 김경승, 조구봉, 윤승욱 등이 특선을 수상했다.
늦게 생긴 공예부에서는 김재석, 강창원, 이세영 등이 두드러지게 활약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