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신세계 백화전 정기간행물에 기고한 것입니다.
정선과 정수영의 산수화
조선 후기 최고의 산수화가 정선(1676~1759)의 호는 겸재謙齋, 난곡蘭谷이며 서울 청운동에서 태어났다.
13세에 아버지를 여의고 늙은 어머니를 모셨다.
서울 근교의 양천 현감, 대구 근처의 하양 현감 등을 지냈는데 현감은 종6품의 지방장관직이다.
그는 금강산을 여러 번 답사했고, 전국 방방곡곡에 그의 발걸음이 미치지 않은 곳이 없다고 말할 정도로 여행을 많이 했으며 절경을 화폭에 담았다.
1756년 화가로서는 파격적인 가선대부지중추부사라는 종2품에 제수되었다.
세거한 사대부 집안에서 태어났고 몇 대에 걸쳐 과거를 통해 출세하지 못한 가난하고 문벌이 변변치 못한 양반이었으나 뛰어난 그림재주로 인해 관료로 추천받았으며 마침내 화단에 명성을 얻게 되었다.
정선의 화제는 당시 기행문의 소재였던 금강산, 관동지방의 명승, 그리고 서울에서 남한강을 오르내리며 접할 수 있는 명소들과 그가 실제 지방 수령으로 근무하던 여가에 묘사한 것들이다.
그 밖에도 자기 집과 가까운 서울 장안의 사철 경치, 특히 인왕산 동북 일대의 계곡과 산등성이들이 화제가 되었다.
회화 기법상으로는 전통 수묵화법이지만 채색화의 맥을 이어받기도 했으며, 나름대로 필묵법을 개발했는데 이는 자연미의 특성을 깊이 관찰한 결과이다.
그의 회화 기법은 다른 화가들에 비해 다양하며 정밀묘사법에서부터 간결하고 활달한 사의화까지 있어 자연에서 얻은 인상을 나름대로 재구성하는 과감성과 회화의 원리를 발전시키는 등 여러 단계의 작품을 보여주었다.
정선과 정수영의 산수화를 보통 문인화라고 하는데 문인화의 개념은 중국에서 성립된 것으로 소동파(1036~1101) 등의 북송 문인들에게서 시작되어 동기창의 남종화 주창에서 구체화되었다.
문인은 곧 사대부라는 등식이 성립되던 시기였다.
문인화란 회화를 직업으로 삼지 않는 사대부들이 여가 혹은 여흥으로 자신들의 의중을 표현하기 위해 그린 회화를 말한다.
문인화는 형사形似보다는 사의寫意를 강조하는 것이 보통이지만 선비 회화는 좀더 포괄적 의미를 지닌다.
선비는 시류에 구애받지 않는 자유스러운 성향을 지니고 있으므로 양식의 범주에서 문인과는 구별이 된다.
문인화에서는 정신성과 주제의 상징이 중요한 요소로 부각되며 일정한 표현 양식, 즉 북송의 미법米法, 원대의 황공망, 예찬으로 대표되는 필법 등이 따라야 할 준칙처럼 되어 있다.
하지만 이런 제한에서 벗어난 선비 회화에는 표현에 수반되는 다양한 준법이 활용될 뿐 아니라 유머, 파격 등 가능한 표현 대상을 선택한다.
그러므로 선비 회화라는 틀 속에서의 우리나라 문인화는 중국식 유형 밖의 것으로 선비의 개성적 특성이 자연스럽게 드러난다.
사물을 정밀묘사 혹은 사실적으로 표현하는 회화양식은 고려 중기에서 조선 말까지 두드러진 화풍이었다.
사물을 세밀하게 묘사하는 것을 자연의 본체, 생명의 본질인 신神으로 보고 전이傳移하는 전신傳神을 실현시키는 것으로 인식했다.
천연 그대로 모사된 회화에서 천지의 조화를 볼 수 있기 때문에 이런 양식을 입신入神과 득신得神, 신필神筆과 신품神品 등의 평어로 최고의 경지와 가치로 간주했다.
명말의 동기창(1555~1636)은 『화지畵旨』에 전신을 기운생동하는 문인 산수화를 구현하는 화결畵訣로 중시한다는 내용의 글을 기술했다.
우리나라에서도 전신론은 고려시대의 대각국사 의천(1055~1101)에 의해 초상화의 정예精藝로 인식되었다.
정선은 남종화풍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자신의 독특한 양식을 만들어낸 후 진경산수화를 창출했다.
정선이 진경산수에서 초기부터 미법을 바탕으로 하고 있음은 부인할 수 없으나 정선은 양식의 해석력이 뛰어날 뿐 아니라 독자적인 필법이 매우 강해 미법이 거기에 묻히다시피 되었다.
정선은 17세기의 정신계를 지배한 성리학의 배경 속에서 조선이 곧 세계 문화의 중심이라고 생각하던 조선중화주의에 입각하여 국토의 아름다움과 민족 문화의 우수성에 대한 자긍을 고차원적인 회화미로 표출해낸 진경산수를 완성시킴으로써 회화를 통해 사상성을 고조시켰을 뿐만 아니라,
기법에 있어서도 문인산수화의 고전적 준법인 미점과 피마준 등을 이용하는 한편,
북종화의 부벽준의 변형이라고 할 빗발준을 개발하여 적극적으로 구사하는 과감성을 보였다.
17세기에 이르러서 강백년(1603~81)이 “범회사귀전신凡繪事貴傳神”이라고 했듯이 전신傳神은 회화가 중시하는 창작론으로 확대되었고 문인 화가이자 평론가 표암豹菴 강세황(1713~91)은 진경을 표현하는 개념으로 사용했다.
이렇듯 전신론은 조선 후기에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졌다.
이하곤(1677~1724)은 시를 짓는 것과 초상화를 그리는 것은 같다면서 적었다.
“눈썹 하나 머리털 하나라도 닮아야 비로소 어떤 사람을 묘사했다고 일컬을 수 있다. 눈썹 하나 머리털 하나라도 닮지 않으면, 아무리 정교하게 그렸다 하더라도 신정과는 상관없게 되니 어찌 그 사람을 묘사했다고 할 수 있겠는가.”
이런 관점에서 이하곤은 겸재 정선의 <해악전신첩海嶽傳神帖>을 평했다.
“무릇 그림에서 전신은 어려워 70~80%만 형을 닮게 나타내도 고수라 할 수 있다. 정선의 금강산도들은 신의 전이도 이루어지고 형사도 모두 얻었다.”
그러나 18세기 화가들 중 남종화 발전에 가장 기여한 강세황은 진경산수화가 실재 경관을 닮아야 한다고 강조했음에도 불구하고 정선의 진경화풍이 획일화, 상투화되었다고 비판했다.
당대에 최고의 명성을 얻은 정선의 진경산수에 비판을 가한 것이 특기할 만하다.
강세황은 정선의 화풍을 잘 알고 있었고 “정겸재가 우리나라 실경을 제일 잘 그린다”고 파악하고 있었다.
그러나 자신의 염격한 기준을 적용하여 평가할 가치도 없다며 다음과 같이 혹평했다.
“정선은 평소에 익숙한 필법을 가지고 마음대로 휘둘렀기 때문에 돌 모양이나 봉우리 형태들을 포함하여 일률적으로 열마준법으로 함부러 그렸기 때문에 그가 진경을 그렸다고 말할 수조차 없다.”
강세황이 이렇게 혹평한 것은 확신에 찬 자신의 진경관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인데, 진경은 습관적인 필치를 벗어나 장면마다 적합한 화법으로 그려야 한다는 것이다.
영·정조英·正祖 시대에 활동한 강세황은 시詩 서書 화畵의 삼절三絶로 ‘예원의 총수’로 불리었다.
그는 문인화가 신위申緯(1769~1845)와 대표적 화원 김홍도의 스승이다.
신위는 조선시대 사대부들 중에 “산수의 명가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더러 있으나 사생寫生(화조·화훼)하는 사람은 전연 이름 있는 사람이 없다. … 400년간 강표암 상서 한 분만이 뛰어나게 그렸다”고 하여 강세황을 조선 사생의 독보적인 존재로 평가했다.
강세황은 수많은 서화평을 남김으로써 명실공히 당대 최고의 평론가로서 독보적인 존재였다.
당시만 해도 조선에는 감식·감상에 높은 안목과 적극적인 관심을 기울인 사람이 없었으므로 강세황은 감식 분야에서도 선구자였다.
18세기에 형성된 조선 남종화는 19세기를 전후하여 점차 토착화되었는데 이런 특징을 지우재 정수영(1734~1831)의 산수화에서 발견할 수 있다.
정수영은 하동인으로 초명이 수대遂大, 자가 군방君芳, 호가 지우재之又齋이며 시서화와 기행을 즐긴 선비 화가이다.
정인지의 후손으로, 백리척百里尺을 사용하여 근대식 지도를 제작한 것으로 유명한 실학자이자 지리학자 정상기(1678~1752)의 증손자이다.
정수영은 과거나 관직에 나아가지 않고 지리학의 명문인 집안의 전통을 좇아 기행과 탐승으로 시 서 화에 몰두하여 일생을 보냈다.
진경산수화에 심취한 정수영의 회화 세계는 자유분방한 필치와 유탄 사용, 거친 독필로서 강한 개성의 독자적인 화경을 지녔다.
그는 남종화와 진경산수를 함께 특이한 화풍으로 그렸으며, 남종화 중에서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여기에 소개하는 <방황공망산수도倣黃公望山水圖>이다.
화면 우편 여백에 ‘방자구필의 지우재倣子久筆意 之又齋’라고 적혀 있어 정수영이 원말 4대가의 한 사람인 황공망의 필의를 방倣해서 그린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 작품이 황공망의 작품과 거리가 있어 여기서 말하는 방은 모방이 아니라 필의만을 참조한 것임을 또한 알 수 있다.
수기법과 피마준법의 사용에서 황공망의 영향이 감지되지만 구도, 공간처리, 각진 윤곽선, 약간 푸른기가 도는 가라앉은 색조와 먹의 효과는 정수영 특유의 개성적인 화풍이다.
그의 작품은 정선의 진경산수화풍을 비롯하여 강세황 등 선배들의 화법을 바탕으로 했음을 보여준다.
도판
정선1 정선, <금강산도>, 견본담채. 고려대 박물관 소장
17세기 후반부터 18세기 초반까지 우리나라 회화에는 한국적 특징을 가장 잘 드러내는 진경산수화와 풍속화가 성행했다.
성리학의 독자성을 주창한 문인들의 국수적인 입장에서 관념산수화를 떠나 구체적인 우리나라의 산천을 모티프로 삼는 진경산수화의 태동은 화단의 큰 변혁으로 보아야 한다.
이 새로운 양식을 개발한 화가가 정선이다.
왼편에 가까이 산을 그리고 오른편 멀리에 봉우리들을 그린 구성은 원근을 나타내기 위한 것으로 이런 식의 풍경화는 일찍이 벨기에 화가 브뢰헬에게서도 나타나 동서양 모두 전형적인 풍경화의 구성임을 알 수 있다.
김창흡(1653~1722)이 화면 우측에 “멀리 보는 것이 가까이 보는 것보다 낫다”라고 적은 대로 정선은 가까이서 본 금강산의 절경들을 한눈에 볼 수 있도록 한데 모아 화폭에 담았다.
정선은 일만이천 봉우리 주위의 숲이 우거진 산들을 짙은 먹의 미점으로 장식하고 녹색으로 덧칠했으며 그렇게 해서 화강암의 금강산과 대조를 이루게 했다.
이것은 다시점에서 바라본 장면을 새의 눈으로 중앙을 중심으로 한데 모아지게 한 것으로 그가 다양한 장소에서 스케치한 것을 참조하여 인위적으로 구성한 것이다.
이런 구성 방법은 과거에 없던 일로 매우 탁월한데, 이 점을 강세황이 인정하지 않은 것은 아쉽다.
화면 좌우에는 조구명(1693~1737)과 김창흡이 제발을 각각 4행씩 나누어 썼고, 상부 중앙에 겸재의 관서가 있으며, 바로 그 아래 겸재의 음각방인이 있다.
상단 오른편의 제발은 다음과 같다.
산은 속과 겉으로 나누어서 보게 되는데,
한쪽은 정신이 수려한 것을 보고,
다른 한쪽은 규모가 얼마나 크냐를 본다.
그리고 이 둘이 합쳐졌을 때
만옥의 못자리가 되는 것이다.
대체로 산은 멀리서 보는 것이 가까이서
보는 것보다 낫고, 두 번 와서 보면
처음 볼 때보다 더 낫게 보인다.
그래서 이 늙은이는 이리 둘러보고
저리 둘러보고 예닐곱 차례나 행장을 꾸려 왕복했던 것이다.
상단 왼편의 제발은 다음과 같다.
초나라 남쪽에는 사람은 적고 돌이 많다.
하늘과 땅이 영기를 모은 곳으로 돌과
사람이 누가 수가 더 많은가를 항상
다투는 곳이기도 하다.
내 이 일만이천 금강산 봉우리를 쳐부수어
일만이천 금강한을 모조리
갖고 싶은 것이다.
정선2 정선, <청풍계도>, 견본담채. 고려대 박물관 소장
청풍계는 현재 청운동 일대이다.
정선은 이곳을 여러 점 그렸는데, 간송미술관 소장의 <청풍계도>는 64세 때에 그린 것이다.
여기에 소개하는 고려대 박물관 소장품은 간송 소장품과 비슷한 시기에 그린 것으로 추정된다.
필치가 원숙한 경지에 이른 작품이다.
빗발준으로 처리한 화강암질의 검은 너럭바위와 지그재그식의 속필로 마무리한 수지법에서 그의 개성을 느낄 수 있다.
햇빛을 받아 훤히 드러나는 바위와 검은 바위의 명암 대조가 공간감을 느끼게 한다.
이 작품에는 제작연대가 적혀 있지 않고 견재의 관서와 겸재의 음각방인, 원백의 양각방인이 화면 위 오른편에 있다.
정선3 정선, <청풍계도>의 부분
정선4 정수영, <방황공망산수도倣黃公望山水圖>, 지본담채. 고려대 박물관 소장
정수영의 산수화에는 중국 명, 청대 화보의 영향이 크다.
그러나 그는 화보를 그대로 그리기보다는 중국 화가들의 화법을 근거로 하여 자신의 독특한 화의를 표현하려고 했다.
이 작품에는 ‘방자구필의仿子久筆意’, 즉 원대의 화가 자구 황공망의 운필 방식을 따랐다고 적혀 있지만 정수영이 보았을 것으로 짐작되는 <고씨화보顧氏畵譜>에 실린 황공망의 산수화와 비교하면 왼편의 높은 산 이외에는 유사한 점이 없다.
이렇듯 독창적인 작품이지만 당시에는 옛 대가의 작품을 방작한다고 적는 것이 관행이었다.
정수영이 남종화의 원류를 따른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지우재’라는 관서와 ‘군방’, ‘지우재인’이라고 쓰인 두 개의 백문방인이 있다.
정선5 정수영, <산수도>, 지본담채. 고려대 박물관 소장
정수영은 산수화, 특히 기행, 사생의 진경산수화를 많이 제작했는데, 이런 면모는 지리학 연구의 가풍과도 관련이 있다.
당시 진경산수의 일반적인 경향인 겸재 정선 화풍의 양식화를 배제하고 독특한 구도, 갈필의 암준법과 담청색의 사용 등으로 자신의 독자적인 문인화풍을 이루었다.
이 작품에는 크기가 비슷한 두 개의 산봉우리를 짙은 연무대烟霧帶로 분리하여 상하로 배치한 독특한 구도가 있다.
여러 번 끊어지며 이어지는 갈필로 모든 경물을 묘사하고 약간의 농담 변화가 있는 담청색을 군데군데 가하여 더없이 깔끔하고 담백한 효과를 냈다.
인적이 없는 산골에서 물가의 정자에 홀로 앉아 물을 바라보며 명상에 잠긴 선비의 모습이 맑은 산수 묘사와 더불어 탈속의 분위기를 한층 더해준다.
관서는 없으나 ‘군방’이라는 정수영의 자를 새긴 백문방인이 있다.
왼편 상단에 다음과 같은 화제가 적혀 있다.
나무숲에 녹음 우거지고
철새들 소리가 달라지면
그게 또 너무나 좋아서
그 사람 자칭 태고적
사람이라고 한다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