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에 와서 활동한 최초의 서양인
러일전쟁 직후 제국주의 단계로 진입한 일본은 조선 경제를 식민지적으로 개편하여 화폐금융체계를 예속시키고 철도·해상운수 부문 등을 정비했다.
회사령을 통해 조선인 자본가의 성장을 저지했으며 토지조사사업으로 막대한 국유지를 창출하고 이를 일본인 농장과 회사에 헐값에 불하했다.
이로써 조선은 일본 제국주의의 상품판매시장, 식량·원료공급지로 전락했다.
자본주의적 관계는 철도·항만 등 교통운수부문, 원료가공업 등과 같이 제국주의 경제에 봉사하는 일부 부문에서만 발전했다.
개항 이후 다양한 전문직에 종사하던 서양인들이 우리나라에 왔고 외교관, 선교사, 기술자, 교사, 상인 등 많은 서양인들이 한국에 체류하면서 서양 문물의 유입과 접촉이 다채로워졌다.
우리나라에 와서 활동한 최초의 서양 화가는 영국인 헨리 사베지 랜더Henry Savage Lander이다.
랜더는 1890년 12월 28일에 제물포에 도착하여 서울에서 3개월 동안 체류하면서 그림을 그렸다.
새로운 재료를 가지고 그림을 그리는 그에 대한 소문이 장안에 퍼지자 고종이 그를 불러 그림을 그리게 한 것으로 전해진다.
그리고 랜더에 이어 외교관의 부인으로 추정되는 스코틀랜드 출신의 여성 콘스탄스 테일러Constance J. D. Tayler가 1894년부터 1901년 사이 서울을 여러 차례 방문하여 그림을 그렸다는 기록이 있다.
테일러는 1901년 한국을 떠나기에 앞서 고종황제를 알현했다.
네덜란드계 미국인 휴버트 보스Hubert Vos(1855~1935)는 1899년 동남아를 여행하던 중 서울에 왔다.
보스는 서울에서 한 달가량 머무는 동안 미국 공사관에 유숙했으며 공사의 주선으로 고종황제와 훗날 순종이 될 황태자의 초상화를 유채로 그린 후 상금으로 1만 원을 받았다.
두 초상화는 덕수궁에 소장되어 있었는데 1904년 화재가 발생했을 때 타버렸다.
보스는 당시 중추원 의관이었던 민상호(1870~1933)의 초상도 그렸다.
보스는 프랑스의 유명한 아카데믹 화풍의 대가로 종교화와 원시인들의 삶을 담은 상상화를 그린 페르낭 코르몽Fernand Cormon(1845~1924)으로부터 수학했고, 런던으로 가서 부유층 인사들의 초상을 그렸으며, 시카고 박람회에 네덜란드 왕실의 커미셔너로 임명되어 미국으로 갔다.
그 후 인종에 관심이 생겨 1895년부터 약 10년 동안 일본, 인도네시아, 자바, 중국, 그리고 우리나라에 오면서 여러 인종을 모델로 초상화를 그렸다.
그는 중국에서 여러 중국 관리를 그렸고 서태후의 초상도 그렸다.
보스가 떠나고 이듬해 1900년 프랑스 대사 콜랭 드 플랑시Collin de Plancu의 추천으로 프랑스 세브르Sevres 출신 도예가 레미옹Remion이 정부의 초청으로 서울에 왔다.
프랑스 대사가 중간 역할로 조선과 프랑스 협력의 공예 미술 학교를 설립하기로 하고 관립 공예 미술 학교의 초빙 교사로 채용하기 위해 레미옹을 초청한 것이다.
그러나 약속된 학교 개설은 여러 사정에 의해서 실현되지 못했다.
공예의 중요성은 개화세력의 한 사람 장지연이 1899년 10월 2일과 이듬해 4월 25일자 『황성신문』에 기고한 글에서 발견되는데, 그는 공예를 부활시켜 나라가 부강해지도록 해야함을 역설했다.
조선은 1893년 처음으로 시카고 만국박람회에 참여했고 1900년 파리에서 개최된 만국박람회에도 참여하면서 도자기, 비단, 놋그릇, 목가구, 보석, 병풍, 악기, 다양한 공예품들을 소개했지만, 파리 만국박람회를 참관한 민영찬의 말대로 조선의 물품은 너무 수준이 낮아 외국인의 호기심을 받자 못해 매매에 있어 실패했다.
공예 미술 학교는 설립되지 못했지만 1908년에 전통 공예의 수준을 높이기 위해 한성 미술품 제작소가 세워졌다.
한성 미술품 제작소는 금속, 목공예, 도자기, 염직 등으로 분야를 나누고 도안과 디자인에 의한 새로운 방법으로 제작했다.
비록 일본인 기술자의 지도를 받았지만 숙련된 장인들을 양성하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한국 공예사에 획기적인 전환점을 마련했다.
레미옹은 약 4년 동안 조선에 머물면서 한성법어학교에 불어교사로 재직했는데, 고희동은 1899년 이 학교에 입학하여 4년 동안 레미옹으로부터 프랑스어를 배웠다.
그는 우연히 레미옹이 에밀 마르텔Emil Martel을 모델로 그리는 것을 보고 서양화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서양화는 서울에 체류한 일본인에 의해서도 알려졌는데 일본인 화가 아마쿠사 신라이天草神來가 일찍이 1902년에 남산 기슭에 화실을 갖고 있었고, 키요미즈 토운淸水東雲은 정동에 강습소를 차렸다.
또한 코지마 젠자부로兒島元三郞가 관립한성사범학교 도화교사로 일본으로부터 왔다. 1910년대에는 많은 화가들이 와서 활동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