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학원 그리고 조선 미술 전람회
당시 일본 서양화단을 보면,
1907년에 개설된 문전에서 백마회 계열의 소위 일본 외광파가 아카데미즘으로 자리를 잡기 시작한 1910년, 타카무라 코타로는 『녹색의 테양』에서 개성과 주관을 강조했고,
같은 해 창간된 잡지 『백화 白樺』는 세잔을 비롯하여 르누아르, 반 고흐, 고갱 등 후기인상주의를 소개하고 있었다.
이후 1914년 이시이 하쿠데이石井柏亨를 중심으로 이과회에 결집한 젊은 예술가들은 재야단체의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속속 새로운 사조를 도입, 이식하게 되었으며,
1910년대의 야수주의, 입체주의, 미래주의를 거쳐 1920년대에는 프로레타리아 미술, 초현실주의의 도입에 이르게 되었다.
제국 미술 학교가 개교할 시기에는 이러한 개성과 자유, 주관의 시대가 시작된 지 오래된 때였으며, 이와 관련하여 서양에서 갓 들어온 새로운 사조에 많은 예술가들과 일반인들이 주목한 때였다.
귀국 후 유학생들의 전시활동은 선전 참가와 재야단체의 조직 및 참여로 나타났는데, 130명 중 선전에 참가한 사람은 서양화, 동양화, 조각, 공예 네 부문에서 31명뿐이었다.
그들은 오히려 재도쿄 미술 협회전에 적극 참여했다.
이 전람회는 제국 미술 학교 출신들이 주축이 되어 동경에 유학한 화가들이 모여 1938년에 창립전을 가진 후 여섯 차례에 걸쳐 전람회를 개최했다.
제국 미술 학교 출신 작가들은 해방 후 대학과 중고등학교 등의 교원으로 활동했으며 20여 명은 월북했다.
문화 학원
문화 학원은 1921년 건축가 니시무라 이사쿠西村伊作가 화가 이시이 하쿠테이石井柏亨과 함께 동경의 간다神田에 설립한 학교였다.
이사쿠는 자산가로서 유화를 그리며 도자기를 만드는 취미가 있었다.
창립시 2교실과 무용실 겸 강당만으로는 협소하여 1923년 목조 4층의 건물을 증축했지만 낙성 직후의 관동대지진으로 화를 입어 창립시의 영국 민가풍 건물과 일본 정원이 소실되었다.
관동 대지진은 약 340만 명의 사상자를 낸 가공할 만한 천연재해였다.
대학부에 본과(현재의 문학부)와 미술과가 설치된 것은 1925년이었다.
교장 이사쿠의 필화를 시작으로 정부의 탄압이 날로 강해졌고 1943년 마침내 “일본의 국시에 맞지 않다”는 이유로 폐쇄명령을 받았으며 건물은 군에 징용되었고 교장은 전쟁반대와 불경죄로 구치되었다.
1946년 전쟁이 끝남과 동시에 군에 징용되었던 건물이 풀리고 교장의 불경죄와 학교의 폐쇄령도 자연 해소되었다.
문과와 미술과가 이듬해 재개되었다.
이사쿠는 1963년 78세로 타계했고, 1931년부터 학감으로 아버지를 도왔던 장녀 니시무라 아야가 교장에 취임했으며 장남 西村久二가 이사장에 취임했다.
西村久二의 설계에 따라 1966년에 지상 5층, 지하 1층의 신교사가 낙성했다.
1985년 고등학교 과정에 상당하는 예술과가 설립되어 도자과와 함께 문화 학원 예술 전문 학교로 인가 받았다.
1988년에는 전문 과정 미술과가 추가되고 2002년에 고등 과정 예술과와 전문 과정 미술과는 각기 오차노미즈에 있는 문화 학원의 고등 과정 미술과와 전문 과정 미술과로 통합되었다.
1930년대 우리나라 유학생이 입학할 때만 해도 입시시험은 형식적이었고 동경 미술 학교만 제외하고 지망하면 모두 입학할 수 있었다.
동경 미술 학교는 징병이 면제되었기 때문에 입학 경쟁이 매우 높았다. 문화 학원은 교복이 없었으며 자유로운 분위기의 학교였다.
조선 미술 전람회
일본 근대 미술과 미술 학교는 조선 근대 미술이 뿌리를 내리는 온상이었고, 조선 화단을 이끈 대부분의 주역들이 일본 유학파들이었다.
비록 일본으로 유학을 오지 못했더라도 조선의 작가들은 조선에 체류하던 일본인 작가와 일본으로부터 유입된 미술 관련 서적을 통해 서양의 근대 미술을 알고 이해하게 되었다.
일제 시기에 이들 대부분의 활동무대는 일본 총독부가 1921년 12월 27일에 설립한 조선 미술 전람회(선전)였다.
선전에 출품할 수 있는 자격은 조선에 6개월 이상 거주해야 하는 것으로 조선 거주 일본인 화가들이 자신들의 활동무대로 삼았다.
서예를 제외한 모든 분야의 심사위원들이 일본에서 초빙되어 왔으며 처음에는 주로 동경 미술 학교 교수들이 초빙되었다.
따라서 일본 화풍이 두드러질 수밖에 없었다.
1922년에 발간된 『제1회 조선미술전람회 도록』에는 선전 개최의 의의를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 오랫동안 폐정에 시달려 온정이 모자라는 처참한 생활을 해 온 조선도, 제국의 시정 이후 정치가 잘 되어 문명의 혜택이 해를 거듭할수록 넓게 각종 방면에 많은 변화를 보여주고 있는데,
예로부터 중요한 미술의 관계에는 그다지 적극적인 시설을 연구하지 않은 것은 매우 유감스러운 감이 있다.
미술장려를 위한 전람회의 개최는 우리들이 다년간 부르짖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