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홍도
강세환은 노년에 “근일에는 그대(김홍도)의 그림을 얻은 사람이 곧 나에게 와서 한두 마디의 평어評語를 써주기를 요구하였고 궁중에 들어간 병풍과 권축에도 내 글씨가 뒤에 붙은 것이 더러 있다.
‘그대와 나는 나이와 지위를 무시하는 친구’라고 하여도 좋을 것이다”라고 하여, 두 사람이 일생 제자이자 동료, 그리고 서로 존중하고 인정해주는 화단의 지기로 지냈다.
김홍도가 본격적으로 활동한 18세기 후반은 중인 세력이 안정되어가던 시기였고, 정조는 등극하면서 규장각을 세워 문풍文風을 크게 진작시켰으며, 박제가(1750~1815)와 같은 서얼 출신의 학자를 검서관檢書官으로 임명하는 등 중인층의 신분상승을 통한 정계진출을 용인했다.
문헌상으로 중인中人의 칭호가 나타난 것은 인조(1623~49) 때였고, 신분변동은 18세기에 이루어졌지만, 화원의 경우 안경이 호군직에 최경이 당상관에 임명되어 예외적으로 사족士族의 관직을 받은 사례가 있다.
이런 상황에서 중인 출신 김홍도는 어려서 표암 강세황으로부터 그림을 배웠다.
강세황은 김홍도와의 관계를 훗날 말했다.
“내가 사능과 사귄 것이 전후 대개 세 번 변하였다.
처음에는 사능이 어린 나이에 우리 집에 드나들어 혹은 그 재능을 칭찬하기도 하고 혹은 그림 그리는 요령을 가르쳐주기도 했고, 중간에는 한 관청에 있으면서 아침 저녁으로 서로 대했으며, 나중에는 함께 예술계에서 노닐어 지기의 느낌이 있었다.”
김홍도는 산수, 인물, 도석道釋, 영모, 화조, 어해, 사군자, 누각 등 모든 화두에 능했으며,
특히 당시 생활상을 그려내는 풍속인물화에 뛰어났고, 신선과 고승을 그리는 도석화는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그의 작품 전반에는 그가 살았던 세상의 태평한 기상이 스며 있으며 자기 문화를 존중하던 시대의 자긍심이 깃들어 있다.
우리나라는 자연 중심의 예술을 추구했으므로 인물화보다는 산수화가 더 큰 비중을 차지하고 인물화의 경우에는 종교화, 초상화, 기록화 등에서와 같이 부처, 도인, 성현, 군자, 충신, 열부 등 이상적인 인물과 역사적·교육적으로 존경의 대상이 되는 권계주의적勸戒主義的 인물들이다.
종종 미인도와 사녀도仕女圖가 그려졌지만 지배층에 국한된 취향의 반영이었다.
김홍도의 풍속화를 통해서 권계주의는 사라지고 서민들이 그림에 주인공으로 등장하기 시작했다.
김홍도의 영모화는 매우 다양했는데 개, 고양이, 호랑이, 소, 말, 사슴, 다람쥐, 양, 박쥐, 까치, 백로, 학, 메추리, 구욕새, 참새, 꿩, 꾀꼬리, 매, 닭, 오리 등 20여 종에 달한다.
그의 그림 밑바탕에는 서법이 깔려 있는데 늘 중봉中鋒의 원리를 지켰으며 어느 경우에도 편봉偏鋒을 쓰지 않았다.
그의 필선은 획에서 나온 것이므로 필선에 처음과 끝이 있다.
따라서 준법에도 선과 관련이 있는 피마준과 하엽준 같은 선묘에 치중하고 있다.
스승 강세황은 『표암고豹菴稿』에 김홍도에 관해 적었다.
찰방 김홍도는 자가 사능士能이다.
어릴 적에 내 집에 드나들었는데 눈매가 맑고 용모가 빼어나서 익힌 음식 먹는 세속사람 같지 않고 (신선 같은) 기운이 있었다.
이제 사능의 사람됨을 보면 얼굴이 준수하고 마음가짐은 깨끗하여 보는 이는 모두 (사능이) 고상하게 속세를 넘어섰으며 시중 거리에 흔한 자잘한 무리가 아님을 알 것이다.
품성이 또 거문고와 젓대의 전아한 음악을 좋아하니 매번 꽃피고 달밝은 저녁이면 때때로 한두 곡조를 연주하여 스스로 즐겼다.
그 기예가 막바로 옛사람을 좇을 수 있는 것은 물론이고 그 풍채와 정신이 우뚝하니 멀리 빼어나서 진·송의 훌륭한 선비 중에나 (그 짝을) 구할 수 있을 것이다.
사능은 음률에 두루 밝았고 거문고, 젓대며 시와 문장도 그 묘를 다하였으며 풍류가 호탕하였다.
매번 무딘 칼날을 치며 슬피 노래하는 마음이 들 때면 북받쳐서 혹은 몇 줄기 눈물을 흘리기도 하였으니 사능의 마음은 스스로 아는 이만 알 것이다.
들으니 그 거처는 책상이 바르고 깨끗이 정돈되어 있으며 계단과 뜨락이 그윽하여 집안에 있으면서도 곧 세속을 벗어난 듯한 생각이 든다고 한다.
세상의 용렬하고 옹졸한 사람들은 겉으로는 사능과 더불어 비록 어깨를 치고 네나거리를 하지마는 또한 사능이 어떠한 인물인지 어찌 알 수 있으랴.
김홍도는 진경산수를 종종 그렸는데 1788년 정조의 명령을 받고 영동의 사군을 여행하고 <영동사군첩 嶺東四郡帖>을 그렸다.
이때의 여행을 통해 금강산의 명소들을 화폭에 담게 되었다.
그가 금강산을 여행한 지 7년 후인 1795년에 그린 것이 <총석정도 叢石亭圖>이다.
김홍도의 진경산수화는 18세기 후반과 19세기 초에 화가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자연환경에 따라 각 나라 그리고 각 지역의 회화가 다르다는 점을 일찍이 히폴리트 텐느가 『예술철학 Philosophie de l’art』(1882)에서 언급한 적이 있다.
건조한 나라에서는 선이 주조가 되고 그것이 사람의 주의를 끈다.
산에는 웅대한 몇 층의 건물이 하늘로 솟아오르는 것처럼 모든 대상이 투명한 공기 속에 선명하게 부조된다.
그러나 플랑드르의 평탄한 눈에는 사물의 윤곽이 뚜렷하지 못하고, 거기에는 언제나 공기 속에 눈에 보이지 않는 수증기가 떠있다.
주가 되는 것은 색조뿐이다.
풀을 뜯고 있는 암소, 목장 속에 있는 지붕, 난간에 기대고 있는 사람의 모습이 다른 모습의 일부로서 보일 따름이다. 대상은 서서히 그 모습을 나타내고, 갑자기 주위에서 뛰쳐나오지 않는다.
사람들은 전체의 가감과 농담에 감동할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