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시하기를 “미국 물품들이 어느 정도 희한하던가”


우리나라도 1882년 미국과의 수교 이후 1893년 콜럼버스 미국 발견 400주년을 기념하여 5월 1일부터 10월 30일까지 개최된 시카고 만국박람회World Columbian Exposition에 처음 참여했고,
1900년 파리에서 개최된 대규모 박람회에도 참여했지만 일본과 중국에 비해 규모가 월등히 작아 별로 서양인들의 주목을 받지 못했다.
그러나 주최국의 신문과 잡지에 언급되었고 46개국이 참여하고 2천 7백만 명의 관람자가 모여든 박람회에서 우리나라 미술품이 소개되었다는 것은 한국을 알리는 중요한 방법이었다.
고종은 참의 내무부사 정경원(1841~?)을 출품 사무대원에 임명했고, 정경원은 1893년 2월에 10명을 동반하고 시카고로 향했다.
『고종 순종 실록』(1893년 11월 9일, 음력)에는 정경원의 보고가 적혀 있다.


지시하기를 “미국 물품들이 어느 정도 희한하던가” 하니 정경원이 말하기를 “매우 번창하였습니다”라고 하였다.

지시하기를 “모두 몇 개 나라가 모였던가” 하니 정경원이 말하기를 “모인 것은 47개 나라였습니다.
일본에서는 관리가 와 있었으나 중국에서는 관리가 없이 그저 상인이 가게방을 받았습니다” 라고 하였다.

지시하기를 “우리나라에서도 한 채의 집을 지었는가”라고 하니 정경원이 말하기를 “박물총원(제조와 교양관Manufactures and Liberal Arts Building)을 말함) 가운데에 우리 시으로 집을 짓고 구운 기와를 덮었습니다”라고 하였다.

지시하기를 “몇 미터나 되겠던가” 하니 정경원이 말하기를 “그것이 몇 미터인지 자세히 알 수 없으나 우리나라 간살이로 논하면 6~7간이나 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지시하기를 “우리나라 물품을 보고 어떻다고 하던가” 하니 정경원이 말하기를 “각국 사람들이 우리나라 물품을 처음 보기 때문에 구경하는 사람이 번잡하게 모여들어서 관리하는 사람이 미처 응대할 겨를이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종이에 물품 이름과 용도를 적어서 물품 위에 붙여서 응대를 대신하였습니다”라고 하였다.

지시하기를 “어떤 물건을 가장 좋아하던가”라고 하니 정경원이 말하기를 “천문발, 소라껍질을 박은 장롱, 수를 놓아 만든 병풍 등의 물건은 각국 사람들이 애착하며 칭찬한 것들로서 상패까지 있었다고 하나 아직 문건이 채 되지 않았기 때문에 자세히는 알 수 없습니다.
돌아올 때 박물관 총무관을 만나니 악공樂古工데 대한 상패와 물품에 대한 상패를 만들어서 추후로 미국 공사 알렌安連에게 부쳐 보내겠다고 합니다”라고 하였다.

지시하기를 “출품한 물품 값이 미국 돈으로 얼마나 되는가”라고 하니 정경원이 말하기를 “1,140여 원(달러?)”라고 대답하였다.

지시하기를 “남은 물품은 박물관에 넘겨주는가”라고 하니 정경원이 말하기를 “각 처의 박물관과 각 곳의 학교에 나누어 보내고 사람들이 구경할 가치가 없는 것은 의정부에 도로 바치려고 합니다”라고 하였다.


정경원이 ‘물품에 대한 상패’에 관해 언급했는데,
박람회 측 공식 기록에 의하면 외국 물품에 준 메달이 모두 13,740개였고, 우리나라가 받은 것은 6개, 중국이 15개를 받았고 일본은 무려 1,581개를 받았다.
상장diploma은 모두 14,366개가 수여되었는데, 우리나라가 7개, 중국이 17개, 일본은 무려 1,598개를 받았다.
박람회 도록에 의하면 우리나라 전시는 제조와 교양관 남쪽에 위치했다.
우리나라 전시 면적은 899평방 피트, 중국은 6,390평방 피트, 일본은 39,542평방 피트였다.


시카고 만국박람회가 열리기 전부터 일본 국회는 자발적으로 기부금을 내기로 결정했고 63만 엔을 시카고에 전달했다.
이런 적극적인 태도로 일본은 각국의 국가관 위치 선정 경쟁에서 우위를 확보하여 숲이 우거진 호젓한 섬에 일본 국가관을 설립할 수 있었다.
일본은 이곳에 호오덴鳳凰殿을 건립하고 박람회가 끝난 후 시카고에 기증했다.
이 건물은 12세기 교토 근처의 우지에 세워진 뵤도인平等院의 호오덴을 10만 달러 이상을 들여 재현한 것이다.


한편 국내적으로 일본 정부는 1877년에 제1회 내국권업 박람회를 동경 우에노에서 개최했다.
서구 박람회를 모방한 일본에서의 최초 박람회는 1871년에 개최된 교토 박람회였으나 그것은 민간인이 주도한 것이었다.
서구 제국주의의 충실한 모방자였던 일본은 1903년 오사카에서 개최한 제5회 내국권업 박람회에서 학술인류관에 조선인 3명과 함께 아이누족, 대만의 고산인, 자바인, 인도인, 류구인 등을 데려와 전시하여 관람객에게 그들의 일상적인 주거양식을 보여주었다.
오늘날 박람회에 관한 미술사학적 연구는 일본 근대미술사의 중요한 연구 테마가 되고 있다.
창조적·역사적 시점은 이런 산업적 시점에 근거하여 형성되었다.
화론은 창조적 시점에 의해서 회화사는 역사적 관점에서 저술되었다.
이 두 시점은 에도 시대에서도 존재했다.


현대적 의미로서의 최초의 미술사학적 저술은 『본조화사本朝畵史』로서 에도 시대가 시작된 지 7,80년이 지난 1691년에 간행되었다.
『본조화사』는 狩野山雪의 유고를 바탕으로 그의 아들 永衲이 편찬한 책이다.
이 책은 일본 회화에 관한 개론에 이어서 4백 명 이상의 화가들을 열전식으로 열거했으며 일본과 중국 화풍을 총합한 화단의 주류로서의 수야파狩野派의 위상을 성립시켰다.
에도 시대는 미술사학적 연구가 활발했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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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경 미술 학교와 어네스트 페놀로사



현재 동경 예술 대학의 전신인 동경미술학교 교수 미국인 어네스트 페놀로사Ernest Fenollosa(1853~1908)는 1882년에 ‘미술진설美術眞說’이란 주제로 강연했는데
일본 미술계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그는 전통적인 일본 미술의 우위를 이론적으로 해석한 서양인으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고고심원高古深遠의 미술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것을 버리고 분별없이 외국의 풍조를 모방하는 건 스스로를 위태롭게 만든다.
한 나라의 문화는 과거의 역사를 기틀로 해서 건설되어야만 한다."


그의 ‘미술진실’은 통속적 관념론에 지나지 않았지만 일본 화가들의 정신과 실천에 큰 영향을 미쳤고,
전통 일본화와 사실주의 서양화와 비교하여 일본화 혹은 동양화의 우월을 주장한 것은 당시 일본인에게 매우 중요한 의미가 되었다.
페놀로사는 미국 메사추세스 주의 세람 시에서 태어나 하버드 대학에서 철학을 공부했고,
1878년 일본에 와 동경대학에서 정치학·사회학·철학·경제학을 가르쳤다.
페놀로사는 1881년부터 심미학을 강의했는데 일본에서 최초로 미학을 강의했다는 역사적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2년 후 中江兆民과 野村泰亨이 프랑스의 우제뉴 베론의 저서를 번역하여 『유씨미학維氏美學』으로 출판하면서 미학이란 말이 처음 사용되었다.
페놀로사는 미술사는 강의하지 않았다.
페놀로사는 일본 미술에 관심을 갖고 수집과 연구에 주력했는데 『고화비고古畵備考』가 중요한 자료가 되었다.
그는 '미술진설’ 강연에서 “일본화에 비해 유화는 사진처럼 실물을 묘사한다”면서 이는 ‘자연 실물에 대한 모사가 미술의 근본을 이룬다’는 인식은
곧 ‘진정한 미술’로부터의 ‘퇴보’를 의미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일본화는 ‘묘상妙想idea’을 잘 담아내고 있음에 비해 “유화는 거의 대부분 이 묘상을 결여한다”고 했다.
그의 강연은 열세에 몰려 있던 일본 전통 화가들에게 소생할 절호의 기회를 마련해주었고,
서양화가들에게는 자신들의 작업이 역사에 뿌리를 내린 미술과 동일선상에 있다는 것을 증명해야 하는 과제가 안겨졌다.
이 무렵 서양미술사에 대한 연구가 시작되었는데 서양화가들이 자신들의 존립 기반을 마련하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


1880년 4월과 8월 사이에 간행된 『와유석진臥游席珍』은 다카하시 유이치가 아들 다카하시 겐키치를 편집주간으로 하여 출간한 월간 미술잡지였으며
이 잡지를 통해 처음으로 화화和畵(일본 그림), 한화漢畵와 함께 서양화의 기원, 역사, 기법, 화가의 일대기 등이 소개되었다.
매우 간단한 서술이기는 했지만 통사로서 이집트, 앗시리아, 그리스, 로마 미술을 다뤘으며,
중세를 문화적 암흑시대로 보아 13세기의 이탈리아 화가 치마부에Cimabue(1240?~1302)를 언급한 후 다시금 그리스가 주목받게 되는 르네상스가 시작되었음을 언급했다.
또한 플랑드르 유화가 얀 반 에이크Jan Van Eyck에 의해서 완성되었으며,
라파엘로Sanzio Raffaello(1483~1520), 티치아노, 카르라치 등에 의해 이탈리아 회화가 활발히 전개되었고,
프랑스에서는 루이 14세 시대가 되어 훌륭한 화가들이 배출되었으며, 영국에서 초상화가 발달했다는 등의 내용을 다뤘다.
화가전으로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Leonardo da Vinci(1452~1519), 미켈란젤로Michelangelo Buonarroti(1475~1564) 등의 경력과 함께 사진을 실었다.
그 외에도 나폴레옹이 회화에 관심이 많았다는 일화와 함께 그의 총애를 받은 신고전주의 화가 자크 루이 다비드Jacques-Louis David(1748~1825)에 관한 내용을 그의 사진과 함께 소개했다.



르네상스

르네상스Renaissance는 14세기 이탈리아에서 시작하여 16세기에 절정에 이른 지적 운동 전체를 말한다.
재생rebirth을 뜻하는 이탈리아어 리나시타rinascita에서 비롯한 르네상스라는 말의 어원은 15세기로 거슬러 올라가 처음 고전 학문의 부흥을 기술하는 데 사용되었다.
또한 여러 예술의 부흥에도 적용되었는데,
이 부흥의 개념을 체계적으로 발전시킨 것이 조르조 바사리Giorgio Vasari(1511~74)의 유명한 저서 『이탈리아의 뛰어난 건축가, 화가, 조각가의 생애 Le Vite de piu eccellenti architectti, pittori, et scultori italiani』(1550)로 약칭 『미술가 열전』이라고 한다.
바사리는 조토에서 미켈란젤로에 이르는 이탈리아의 미술사를 연속적인 발전으로 보고 이를 생물의 유기적 성장에 비유했다.
이런 그의 견해는 근대 이전의 미술사관을 지배했다.
이 용어의 의미가 한 시대 전체로 확대된 것은 18세기로 역사가 쥘 미슐레는 1855년에 프랑스 역사의 한 시기를 ‘라 르네상스 La Renaissance’로 부르면서 일번적으로 통용되었다.
이미 러스킨은 『베네치아의 돌 Stones of Venice』(1851~53)에서 ‘르네상스 시대’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또한 1860년에 스위스 역사가 야코프 부르크하르트는 ‘이탈리아에서의 르네상스 문화’를 하나의 유기적인 존재로 기술했다.
그에게 있어 ‘세계와 인간의 발견’은 고전 문예의 부흥리라기보다 오히려 인간 정신의 새로운 고양에서 비롯된 것이다.



『와유석진』 제3호 ‘서양화 부문’의 연혁 서술 부분에서는 미술을 육성하고 보호하며 존중하는 것은 “문명이 도래한 개화 시기가 아니었으면 불가능했을 것이라”는 주장과 함께 “품위 있고 또한 정신적 쾌감을 가져다주는 것으로서
즉, 미술이 사회상의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이라고 기술되어 있다.
이런 논설은 2년 전에 출간된 니시 아마네의 『미묘학설』에 나타난 견해와 거의 일치한다.
『와유석진』에 실린 서양미술에 관한 내용은 서양화가 단순히 기술에 의한 것이 아니라 보다 수준 높은 미술이라는 점을 알리기 위한 의도로 씌여진 것이다.


서양 미술사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가 시작되었지만 일본 전통회화를 고수하려는 대세에 의해 부진한 상태였다.
1889년 공부 미술 학교에서 수학한 몇 사람을 중심으로 ‘명치 미술회’라는 단체가 결성되면서부터 서양 미술사에 대한 연구가 다시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그러나 서양 미술은 여전히 이단아 취급을 받고 있었다.
같은 해에 관립인 동경 미술 학교(오늘 날 동경 예술 대학 미술학부)가 설립되었지만 서양화를 가르치지 않았다.
그러나 서양 미술사 과목이 개설되었다는 것은 특기할 만하다.
개교한 해인 1889년 9월 11일부터 이듬해 7월 10일까지 ‘미학과 미술사’ 과목을 어네스트 페놀로사가 담당했으며 그의 강의를 오카쿠라 덴신岡倉天心(1862~1913)이 통역했다.
페놀로사는 일본에서 최초로 동경 대학에서 미학을 강의하고 동경 미술 학교에서 미술사를 강의한 인물이 되었다.
그는 그리스와 로마 미술, 라파엘로, 미켈란젤로, 코로, 밀레, 휘슬러, 인상주의 등에 관해 강의했지만 전반적인 내용은 미학이었고,
‘미술이란 무엇인가’라는 철학적 명제 하에 테인Hippolyte Taine, 러스킨John Ruskin 등의 이론을 자신의 비평을 첨가해서 가르쳤으므로 역사적 관점과는 사뭇 다른 방향으로 전개시켰다.
그의 의도는 일본 미술을 활성화시키는 것으로 품위 있는 일본 미술이 서양에 적잖은 영향을 주었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것이었다.



미학

미학이란 쉽게 말해서 미와 예술에 관한 이론적 고찰이다.
그러나 미학이 하나의 학과로 대학에서 다뤄진 것은 18세기 중엽 독일에서였다.
이는 예술에 대한 개념이 르네상스 시기에 사고되기 시작하여 18세기에 이르러서야 겨우 성숙되었고 미학 또한 이 시기에 겨우 성립되었다.
프랑스의 봐뙤C. Batteaux(1713~80)의 『예술론』(1746)의 서문 ‘같은 원리로 환원된 여러 예술’에 나타난 대로,
예술가의 활동이 점차 직인의 손작업과 구별되는 데
이어서 시와 음악, 회화, 조각 등의 여러 예술이 결국 자연모방을 원리로 하여 실용성보다는 즐거움을 목표로 하는 미적 예술beaux-arts(schone Kanste)로서 통일적으로 파악할 수 있게 되고
예술이 고유의 논리에 기초한 자율적 세계라는 것이 이론적으로 명백해진 것은 18세기 중엽에서 말엽 사이였다.

학문으로서의 미학은 합리주의 입장에 서서 라이프니츠-볼프 학파의 철학자 바움가르텐A. G. Baumgarten(1714~62)의 『미학 Aesthetica』(1권은 1750년, 2권은 1758년에 출간)에서 시작되었다.
그는 시가 명료·판명의 개념으로 환원되는 것이 아니므로 논리학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고 확신하고 감각적·미적 인식을 이성과 유사한 여러 능력에 의한 것으로 보고
그러한 하급 인식능력에 의한 ‘감성적 인식학’으로서 미학이라는 철학의 새로운 부분을 열게 되었다.
그러므로 미학이 성립되던 당시 그 명칭이 의미하는 대로 미학Aesthetica의 어원은 그리스어로 감각, 지각이란 뜻이며,
이성적 인식의 여러 법칙을 다루는 논리학에 대해 감성적 인식의 논리학, 즉 감성학 또는 감성론이었다.

이성적 인식이 명료·판명이라 하더라도 결국은 추상에 기초한 것임에 반해,
감성적 인식의 장소는 대상을 그 자체가 나타내는 대로 생생하게 포착하는 데 있다.
바움가르텐은 그처럼 감성적 인식의 확실함을 보증함으로써 완전성을 높여,
“미학의 목표는 감성적 인식 그 자체의 완전성, 즉 미에 있다”고 했다.

칸트는 『판단력 비판』(1790)의 전반 ‘미적 판단력 비판’에서 취미와 천재를 중심으로 미와 예술의 문제를 다뤘는데,
우리가 어떤 것을 아름답다고 말하는 미적 판단을 그는 취미 판단이라고 불렀다.
그가 말하는 취미Geschmack는 어떤 것을 아름답다고 판정하는 능력을 말한다.
그는 취미 판단을 분석함으로써 미적 판단을 내리는 인식 능력을 비판, 음미하는 방법으로서의 미가 무엇인지 탐구했다.
그는 대상을 인식하는 것과 아름답다고 말하는 것을 구별했다.
칸트에 의하면 아름답다고 말하는 우리의 취미는 대상의 표상과 우리의 주관 및 주관의 쾌·불쾌 감정과의 관계에 기초한다.
그가 말하는 취미 판단은 미적 판단으로 인식 판단은 아니더라도 오성, 이성과 함께 상급 인식능력의 하나인 판단력에 기초한다.
취미 판단은 대상의 개념에 의존하지 않고 구상력과 오성과의 자유로운 조화적 활동인 아 프리오리한 근거에 기초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도 정당하게 동의를 구할 수 있다는 것이 칸트의 입장이다.
그가 미의 비판을 학문으로 부른 것은 그것이 인식능력들의 자유로운 조화적 활동이라는 취미의 주관적 원리를 반성적 판단력의 아 프리오리한 원리인 주관적 합목적성,
즉 목적없는 합목적성으로 발전시켜 그것의 합법성을 증명하기 때문이다.
그는 예술을 천재Genie에 의한 미적 이념의 표현으로 규정했다.

칸트 미학을 비판적으로 계승한 실러J. Schiller 이후 19세기 전반의 독일 미학은 실질적으로 헤겔G. W. F. Hegel(1770~1831) 등의 독일 관념론 미학에서 예술철학이 되었다.
즉 예술철학으로서의 미학이다.
여기서는 자연미보다는 인간의 창조적 정신에 의한 예술이야말로 진실한 미로 보고 예술에 관해 많은 발전된 철학적 성찰이 생겨났다.
헤겔은 예술의 본질을 미와 결부시켜 생각하고 예술이 절대정신의 감각적 표현이라는 형이상학적 입장을 취했다.

이에 반해 미와 예술을 분리시켜 비형이상학적 입장에서 예술의 독자적인 형성작용을 기초짓는 동시에 근대 예술사 기술의 가능성을 연 사람은
근대 예술학의 아버지로 불리우는 피들러Konrad Fiedler(1841~95)였다.
피들러는 『조형 예술작품의 평가에 관하여』(1876)에
“예술작품을 미적 감각이나 취미의 대상으로 보는 것은 작품을 작품으로서 올바르게 이해하는 일이 아니다”고 적었다.
칸트는 미의 학문을 부정했지만 피들러는 미와 예술을 분리시켜 예술의 독자적 원리를 구함으로써 예술 학문의 가능성을 열었다.



원래 페놀로사의 미학은 헤겔 미학에 근거했으며 미술사는 다윈니즘을 사회 발전에 적용한 스펜서의 사회진화론에 근거한 것이다.
그러나 그의 미술사는 일본에 있어서 미술의 수집 연구와 수야파화가들과의 교류를 통해 형성된 것으로 엄밀한 의미에서 방법론은 서양미술사가 아니었다.
양식과 화풍을 특정하기 위해 기초가 된 감정은 수야파에 의한 것이었고 정보의 근거가 된 것은 일본과 중국의 회화사와 화론이었다.
그의 독창성을 말한다면 그가 수집한 작품들을 근거로 한 것인데
현재 보스턴 뮤지엄Boston Museum of Fine Arts에 소장되어 있는 그의 컬렉션 7백여 점을 보면 명품 위주의 것들이 아니라 유파 별로 다양한 화가들의 작품들이다.
페놀로사의 전문 분야는 철학과 정치학이었고 일본 미술 연구는 취미에서 시작되었으며 아마추어 수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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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경 미술 학교 서양화과 교과 과정


야마나시 에미코山梨繪美子의 논문 ‘구로다 세이키와 동경미술학교의 양화교육’에 의하면

1학년, 실습 외에 역사 및 고고학, 미학, 미술사 및 체조

2학년, 실습 외에 역사 및 고고학, 미술해부, 원근법 및 체조

3학년, 실습 외에 역사 및 고고학, 미술해부, 원근법

4학년, 실습 및 졸업 제작, 용기화법, 교육학

1~3학년 3년 동안 실습 외에 역사 및 고고학 등 인문학을 중점적으로 가르친 것이 특기할 만하다.


이는 유럽 전통 아카데미에서 강조한 점으로
이런 교과과정이 채택된 데는 구로다와 오카쿠라 덴신의 교육 철학이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덴신은 동·서양의 전반적 역사와 미술사의 이해를 바탕으로 일본 미술사의 특징을 파악하여 일본 근대미술을 창조해야 한다는 신념을 갖고 있었다.


미술사학의 형성과 관련하여 주목해야 할 것은 고미술조사이다.
정부에 의한 공식적인 고미술조사가 언제 시작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메이지 17년인 1884년 문부성에서 도화조사회圖畵調査會가 설립되었고,
페놀로사와 오카쿠라 덴신이 위원으로 참여했다.
이듬해 도화조사회는 도화취조괘圖畵取調掛로 개칭되었으며 덴신이 주간이 되었다.
이것은 원래 미술학교를 설립하기 위한 조사기관이었지만 고미술보호에도 관련이 있었다.
문부성 외에도 내무성과 궁내청도 고미술보호에 관여했으며 1888년 궁내성 안에 임시전국보물취조국이 생겼고,
1897년에는 내무성 안에 고사사보존법古社寺保存法이 생겼다.
특기할 점은 고미술보호가 미술사학의 성립과 불가분의 관계가 있었다는 것 외에도 일본의 자기의식 확립을 전제로 시작되었다는 사실이다.


페놀로사는 강의를 마친 후 1890년 7월 일본을 떠났다.
그가 떠난 해 간사였던 오카쿠라 덴신이 동경 미술 학교 교장에 취임했고 페놀로사의 뒤를 이어 ‘미학과 미술사’ 과목을 맡았다.
이 시기에 특기할 만한 점은 소위 ‘신일본화’라 불리우는 새로운 양식들의 출현이다.
덴신은 전통적인 산묘법에 서양의 사실주의 기법을 가미하면서 그들의 인문학이 뒷받침하는 역사화와 풍경화를 창작하는 데 목표를 두었다.
그는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일본은 아시아의 사상·문화·예술의 총합유적이며 아시아 문명의 박물관이며 또한 살아서 활동을 계속하는 생명체로서의 박물관이다.
이 고대 아시아의 잠자고 있는 생명을 감득하고 부활시켜 그 위에 새롭고 크게 움직이게 하는 것이 명치 일본의 사명이고 의무이다.”

일본 근대 미술사에서 위대한 사건으로 꼽히는 덴신의 업적은 독일 낭만주의에 지대한 공헌을 한 빈켈만에 비유된다.
괴테와 더불어 독일 낭만주의의 선구자 빈켈만은 고대 그리스 미술품을 모방하라면서 그리스 조각이 미술사에 있어 가장 규범이 된다고 역설했다.
그에 의해서 고전을 존중 계승하는 신고전주의가 사조가 생겼다.
덴신도 동양의 고전을 끌어내는 데 앞장을 섰다.



빈켈만Johann J. Winckelmann(1717~68)

예술의 역사적 연구는 빈켈만의 『그리스 미술 모방론』(1755), 『고대 미술사』(1764)로 시작되었다.
그는 고대 그리스 미술을 최고의 예술로 평가하고 예술을 미와 동일시했다.
그의 고전주의 예술관은 19세기 전반의 헤겔에서도 거의 공통으로 나타났다.
헤겔은 미를 이념의 감각적 현상으로 규정하고 예술을 이념과 형태와의 관계에서 고찰하여 이러한 관계에서
상징적·고전적·낭만적이라는 예술의 세 가지 기본 형식을 구별한 후
이를 이념의 변증법적인 자기 전개로 해서 예술의 역사적 전개에 적용했다.

빈켈만은 양식Stil의 개념을 처음 미술사의 영역에 삽입하여 근대 미술사학의 정초자가 되었다.
양식sytle(독일어 stil)은 라틴어 스틸루스stilus에서 유래했다.
스틸루스는 원래 납끌판에 쓰는 철필을 말하지만 필적, 서법, 문체를 의미하게 되었다.
16~17세기에 걸쳐 이 말의 용법은 점점 확대되어 조형예술에서도 사용하게 되었다.
처음 이 말은 예술가의 개성적 작풍을 의미하는 마니에라maniera와 동일시되었지만,
16세기가 되면서 예를 들어 괴테에 의해 양식은 모방Nachahmung과 자기풍Manier에서 구별되어 미술이 이미 달성했고 장래 달성하려고 하는 최고의 예술작품의 격으로서 적용하려는 개념으로 정해졌다.
즉 양식이란 예술의 ‘보편적인 관점 및 표현의 방식’으로서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이 개념은 19세기 중엽부터 미술사학을 방법론적으로 기초짓는 중심개념으로 받아들여졌으며
부르크하르트J. Bruckhardt(1818~97)의 『치체로네』(1855)와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문화』(1860)는 양식사의 연구의 가장 큰 성과물이다.
부르크하르트에 의해 이루어진 양식사를 더욱 진전시킨 사람이 그의 제자 하인리히 뵐플린Heinrich Wolfflin(1864~1945)과 빈 학파의 아버지로 불리우는 알로이스 리글Alois Riegl(1858~1905)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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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경 미술 학교


당시 교수로 내정되었던 카노狩野 호가이狩野芳崖(1828~88)가 동경 미술 학교 창립 한 해 전에 타계했지만,
일본화 교수진으로 하시모토 가호橋本雅邦, 카노 도모노부狩野友信 등의 카노파狩野波가 맡게 됨으로써 남화를 배격하고 일본화풍의 새 시대가 열리게 되었다.
카노파란 카노 마사노부狩野正信를 시조로 한 화가 계통으로 무로마치 시대 후기부터 에도 시대까지 장군 가문의 어용 화가가 되어 번영한 화풍을 말한다.
카노파 회화는 중국 송·원대의 그림과 무로마치室町 시대의 중국화를 주요 원천으로 하여 거기에 일본의 헤이안 시대에 중국 회화 양식을 일본화한 일본적 정취가 물씬 풍기는 야마토에大和繪 전통을 합친 것으로 고전 지향이 농후했다.
보수성을 강화하고자 했던 당시 무사들에게 카노파 회화는 바람직한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카노 호가이는 메이지 시기에 이상주의적 신일본화의 제창자로서 남송대의 마원, 하규 즉 마하파馬夏波와도 연결되는 공간 구성과 묵필법을 구사했으며 하시모토 가호와 더불어 카노파에 입문하여 그림을 익힌 동문이었다.

한편 동경 미술 학교의 개교와 함께 일본에서는 경도청년회 공진회가 열렸으며,
일본 남화협회가 도미오카 뎃사이富岡鐵齋에 의해 결성되는 등 지속적으로 근대 화단의 신기류가 형성되어 갔고,
10년 후인 1898년에 이르러서는 오카쿠라 덴신이 하시모토 가호 이하 일본화 교수들과 더불어 동경 미술 학교 교장직을 사직하고 요코야마 다이칸橫山大觀을 비롯하여 26명의 정회원으로 일본미술원을 창립했다.
1901년 덴신의 뒤를 이어 동경 미술 학교 고장에 마사키 나오히코正木直彦가 취임했다.
마사키는 매우 유능한 교장으로 그 후 1932년까지 30년 이상을 재임했다.

마사키 교장 시대의 동경 미술 학교는 전통 미술과 서양 미술 그리고 회화, 조각, 공예, 건축 모두 동등하게 존중되는 소위 중용의 방침을 취했다.
당시의 대세는 여러 국면에서 서구화가 진행되어 회화에서는 전통파인 일본화과보다는 서양화과가, 조각에서는 전통파인 목조부보다 소조부,
즉 서양 조각이 활기를 디게 되지만,
오카쿠라 덴신이 교장이었던 시대에 일단 제도화된 전통 유지를 위한 조직, 설비, 교육 체계도 폐교될 때까지 존속되었다.
동아시아에서 온 유학생들이 입학하기 시작한 때는 마사키 교장 시대였다.
덴신 교장 시대에는 서양인이 3명 입학했을 뿐 동양인은 한 명도 없었다.
마사키 교장 시대의 동경 미술 학교는 서서히 규모가 확대되어 1900년부터 1910년까지의 시기에만도
일본화과, 서양화과, 조각과, 도안과, 건축과, 금공과, 주조과, 칠공과, 제판과, 임ㅧㅣ사진과, 도화사범과 등의 많은 과가 있었다.
동아시아에서 온 유학생의 대다수는 서양화과에 입학했으며 그 다음으로는 조각과와 소조부에 입학했다.

1901년에 홍아회紅兒會가 창립되고,
1907년에 문부성 미술 전람회와 국화옥성회國畵玉成會가 창립되고,
1909년에 교토에서는 공예학교에 이어서 시립회전市立繪專이 창립되었다.
그리고 1914년 일본 미술원전이 다시 재흥전을 개최했으며, 1916년에 금령사金鈴社, 1918년에 국화 창작협회, 1919년에 제국 미술원 전람회, 1921년에는 일본 남화원이 결성됨으로써 도미오카 뎃사이 이후의 수묵 계열에 자체적인 응집력을 보여주었고,
신흥대화회新興大和繪도 결성되었다.

1923년에는 혁신 일본 화회가 아리키 주빙荒木十敏에 의해 결성되었으므로 1920년대는 신일본화가 성숙단계로 접어든 때라고 할 수 있다.
1929년에 후쿠다 호시로福田豊四郞와 요시다 겐이치吉岡堅二에 의해 신일본화연구회가 결성되었고,
이듬해에는 유키 소메이結成素明와 아오키 오노리靑木大乘에 의해 대일미술원이 결성되었으며,
이어서 명랑 미술 연맹(1934), 신흥 미술원(1937), 일본화원(1938), 신미술인 협회(1938) 등이 결성되었다.
1949년에 동경 예술 대학이 창립되었으며 이듬해에는 교토시립미대가 문을 열면서 미국을 중심으로 한 각종 서양 사조에 대한 폭넓은 수용을 거듭하게 된다.
1950년대의 두드러진 점은 신제작협회의 일본화부와 1956년 고다마 산레이兒玉三鈴의 일본화부의 결성과 1958년의 신일본미술전람회 등이다.
1960년대 이후로는 신일본화의 양식이 일면 전통에 대한 지속적인 계승의 노력을 보이면서도 동시에 서양화의 유화적 마티에르 감각을 동반하면서 입체적 질료를 구사한다든가 원근법의 전면적 사용에 의한 화면 구성의 다양한 서양적 시각을 복합적으로 사용하는 등 표현이 다양하게 전개되어진다.
한편 덴신은 동경미술학교에서 일본미술사와 서양미술사를 강의했는데 전임자 페놀로사와는 달리 미학보다는 미술사에 초점을 맞추었다. 페놀로사와 덴신의 강의는 제자들의 노트를 토대로 복원된 『강창천심전집岡倉天心全集』을 통해 알려졌다.
두 사람에 의해서 미술사학이 제도적으로 탄생했다.
같은 해 동경대학에서도 ‘심미학’이 ‘심미학미술사’로 개칭되어 강의되었으며 이듬해에는 ‘미학미술사’로 명칭이 다시 변경되었다.
국립대학인 동경미술학교에서 서양미술사를 가르쳤다는 것은 일본 정부가 서양미술의 가치를 인정했음을 의미한다.
분량으로는 일본 미술사의 절반에 지나지 않았더라도 『와유석진』에 실린 서양미술에 관한 내용에 비하면 양적으로 질적으로 우수했으며, 무엇보다도 일본 최초의 체계적인 서양미술사 강의였다는 의의를 지닌다.
『강창천심전집』을 보면 덴신이 서양미술사를 고대, 중세, 근대로 나눈 후 고대에서 이집트, 앗시리아, 페르시아, 페니키아, 그리스, 로마 등을 다뤘고, 중세에서는 비잔틴, 로마네스크, 아라비아, 고딕을 다뤘으며, 근대에서는 르네상스로부터 19세기에 걸친 시기를 다뤘고,
각 시기를 종교, 정치, 미술적 측면에서 각각 다뤘다.
그가 참고한 기본 문헌은 빌헬름 뤼브케Wilhelm Lubke의 『미술사 History of Art』(1874) 영어 번역본이었다.
각 시기에 대한 강의 분량은 불균형을 이루었는데 고대를 거의 절반, 중세는 10%, 근세를 40%로 구성한 것이다.
고대에서 그리스 미술에 큰 비중을 두었고, 근대에서는 15, 16세기 르네상스에 치중했으며, 17, 18세기는 매우 간략하게 다뤘다.
이는 서양미술사에 대한 덴신의 평가를 반영한 것으로 그리스와 르네상스를 높이 평가하는 오늘 날의 서양 미술교육과 일치한다.
그리스와 르네상스 미술에 크게 비중을 둠으로써 그가 새로운 시대의 서양미술을 거론할 수 없게 만들었고
나아가 근대 일본의 서양화까지도 배척하려고 했다는 후대 일본 미술사학자들의 비판이 있다.
그리고 그가 서양미술사 강의를 통해 일본 미술의 가치를 정립하려고 했음은 분명해 보인다.

덴신은 7세기 후반부터 8세기 초까지를 ‘천황天智 시대’로 명명하면서 당대의 미술 원류를 그리스 미술로 소급되는 인도 미술에서 찾으려고 했다.
그는 서술했다.

"그리스와 인도 사이에는 늘 교통이 끊이지 않았다.
또한 예술가의 왕래도 있어서 그리스풍 건축이 인도에 생겨났고,
심지어 그리스어를 사용하는 곳도 있었으며 많은 그리스인들이 이주하여 살기도 했는데 …
그리스풍이 인도에 들어간 것은 때마침 불교가 융성했던 무렵이었다.
그러므로 불상 제작에 있어서 그리스풍을 받아들이게 된 것이었으며
지금 인도에 유존하는 대리석 석상 중에는 그리스풍의 영향을 받은 것이 많이 있다."



덴신은 인도·그리스 미술이 중국을 거쳐 일본에 들어왔음을 역설했다.
그는 일본 미술의 우수함을 역사적으로 고증하기 위해 그리스 미술이 서양미술사에서 최상위에 위치한다는 점을 강조해야 했다.
일본 미술에는 이상·감정·자각 세 가지 특성이 있다면서 이상을 잘 구현한 것이 7, 8세기의 작품들로서 일본 불교 조각이 그리스 조각과 근접하며,
감정적 특성은 9세기 말엽부터 13세기까지의 작품들에 나타나 있는데 르네상스 작품들에 내재된 감정적 요소들과 일치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15세기 일본 미술품에 나타난 자각성에 대해서는 “이와 비교될 만한 대상이 없다”는 말로 그 우수성을 강조했고
강의 마무리 부분에서 다음과 같이 단언했다.

“동일한 민족의 미술로서 이 세 가지를 골고루 갖춘 것은 세계에서도 그 예를 찾을 수 없으니 이로써 일본 민족의 탁월함이 증명되는 것이다.”

이런 발언에 주목한다면 덴신이 서양 미술사 강의에서 시도한 그리스와 르네상스 미술에 대한 양적 배분이 단지 서양의 일반적 평가 기준을 따른 것만이 아님이 확실해진다.
그는 일본 미술의 세 가지 특성 가운데 두 가지를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서양 미술을 거론한 것이다.
결국 그의 강의는 서양미술과 일본 미술을 대조시킴으로써 결과적으로 일본 미술이 우수함을 부각시키고 한층 더 세계적 위상으로 정립시키겠다는 의도를 드러낸 것이다.
때마침 유럽에서 일본 회화에 대한 인기가 대단했으므로 그의 일본 미술 가치의 정립은 별 무리없이 받아들여졌을 것이다.



그리스 조각

고대 그리스 미술의 특징은 정확하고 규격화된 이상주의에 있다.
그리스 미술은 세계 최초의 가장 위대한 자연주의적인 미술이었으며,
따라서 기원전 5세기까지 그리스 조각의 전개는 해부학적인 정확함의 진보라는 말로써 설명될 수 있다.
그러나 그리스 조각의 목적은 20세기 조각 대부분의 경우처럼 소재를 흥미로운 삼차원적 구조체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보기에 이상적인 아름다운 인체를 표현하는 것이었다.
정교한 균형의 원리가 실제의 인체에서 보여지는 불완전함이나 불규칙함을 바로 잡는 역할을 했다.

그리스 조각에서 주된 재질은 청동과 흰 대리석이고 그 다음은 석회석과 테라코타가 차지한다.
신전에는 이따금 황금상아상을 안치했는데, 나무로 된 골조 위에 피부에 해당하는 부분은 상아로, 그 외의 부분은 금으로 처리한 것이다.
청동상은 처음에는 순수한 소상小像이 제작되었고, 이후 기원전 6세기 말에는 청동 공동空洞 주조법이 일반화되어 기원전 5세기에는 단독 조각상을 위한 소재로 선호되었다.
사용된 주조법은 납형법이었다.
그리스인은 조각에 표면 장식을 더했다.
채색은 처음에는 상투적이었지만 점차 자연스런 색으로 석조상과 테라코타상의 머리카락, 눈, 입술, 젖꼭지, 옷주름을 강조했다.
살부분에도 종종 채색을 했다.
허리띠 종류나 무기 같은 부속품은 금속으로 만드는 경우가 많았으며, 청동상의 눈에는 천연 유색석을 박아 넣었고, 눈썹은 금속선을 끼웠으며, 입술과 젖꼭지에는 귀금속을 상감했다.
청동의 표면은 광택이 나도록 처리했으며 때로는 채색되기도 했다.
현존하는 그리스 조각이 무색인 것은 이러한 채색의 대부분이 벗겨져 버렸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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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최초의 미술사


일본 최초의 미술사 『고본일본제국미술약사稿本日本帝國美術略史』는 1900년 파리의 샹 드 마르스 공원에서 성대하게 개최된 만국박람회에 출품된 일본 고미술 전시에 대한 해설을 겸하여 제국박물관(궁내성)이 편찬했는데,
프랑스어로 먼저 출판되고 1901년에서야 일본어로 간행되었다.
이 책은 일본 미술사에 의한 자기 확인이 외국을 의식하여 만들어진 것이다.
“아시아는 하나이다”라고 쓰여진 『동양의 이상』을 비롯하여 덴신의 주요 저서들이 모두 영문으로 저술되었다는 사실과도 연결된다.

주목할 점은 『동양의 이상』이라고 일본어로 번역했지만 영어판 제목에서는 『특별히 일본 미술과 관련한 동양의 이상 The Ideas of The East with Special Reference to The Art of Japan』이라고 한 의도이다.
『고본일본제국미술약사』에도 7, 8세기의 일본 건축물이 그리스 건축물과 유사하다는 것과 불교 벽화와 불상들이 인도 서역 내지는 그리스 양식을 따른 것이라는 주장이 담겨 있다.
1906년 12월 『국화國華』(199호)에 소개된 하마다 고사쿠嚬田耕作의 ‘추고推古 시대의 조각’ 서설에는 “실로 일본의 기름진 토양은 에게 해에 돌출해 있는 그리스보다 훨씬 더 자연의 혜택을 입고 있으며 일본 민족의 낙천적이고 쾌활한 정서는 그리스인과 매우 흡사하다”고 적혀 있으며,
6세기 말부터 7세기 초까지의 추고 조각에 관해서는
“이는 그리스 초기의 조각과 동일한 궤도선상에 위치하는 것으로서 그 직립적인 자태는 아테네에서 발견된 아폴로와 같으며 옷주름 선은 에기나Aegina의 사원에 있는 파풍破風(Pediment) 조각 등과도 동일하다”고 적었다.

1930년경 거의 모든 미술사학자들은 무의식 중에 일본 미술을 그리스 미술과 관련지어 고찰하는 방법을 따랐는데,
덴신에 의해 본격적으로 시작된 서양미술사 연구가 일본 미술사 전분야에 걸쳐 지대한 영향을 끼쳤음을 알게 해준다.


만국박람회Exposition Universelle

프랑스의 20세기는 1900년 파리 만국박람회L’Exposition de Paris de 1900의 개막과 함께 그 문을 열었다.
샹 드 마르스 공원에서 열린 이 축제에 8만 3천에 달하는 전시자가 참여했고 200여 일에 걸쳐 약 5천만 명이 관람했다.
니콜라이 2세로 명명된 큰 길 양편에는 막 완공된 그랑 팔래와 프티 팔래가 호화로운 예술의 전당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프티 팔래에는 ‘기원에서 1800년까지’를 보여주는 약 5천여 점의 작품이 전시되었으며 그랑 팔래에는 프랑스 미술 ‘100년전’이 열렸다.
이 ‘100년전’의 마지막 전시 벽면은 인상주의 화가들의 작품으로 장식되었다.
이 인상주의 전람회에는 마네, 모네, 피사로, 르누아르, 쇠라, 시슬레, 바질, 부댕, 드가, 기요맹, 모리소 등 고갱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인상주의 주요 화가들이 참여했다.
고갱은 그 때 타히티 섬에서 외롭게 생활하고 있었다.
동양학파의 일원이며 프랑스 한림원의 회원이기도 한 레옹 제롬은 인상주의 전시장 입구를 두 팔을 올려 막으면서
“대통령 각하, 멈추십시오. 이것은 프랑스의 치욕입니다” 하고 말한 에피소드는 유명하다.
이 에피소드에서 그 때만 해도 인상주의가 프랑스인에게 폭넓게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특기할 점은 훗날 근대 조각의 아버지로 불리운 오귀스트 로댕Auguste Rodin(1840~1917)이 60세의 나이로 만국박람회에 참여한 것이다.
그는 이미 명성이 높은 조각가로 알마 광장에 사비를 들여 별도로 건립한 개인전시장에서 조각품 150여 점을 소개했다.
그의 개인전은 성공했는데, 코펜하겐, 함부르크, 드레스덴, 부다페스트 등 유럽의 뮤지엄뿐 아니라 미국 필라델피아 뮤지엄도 그의 작품을 다투어 사들였다.
그는 이 전람회를 위해 오랫동안 미완성으로 남겨둔 <지옥문>을 석고로 완성시켜 전시했다.
<지옥문>은 로댕이 타계한 후에 청동으로 뜰 수 있었다.
사람들이 석고로 된 <지옥문>을 보고 미완성이라고 말하면 로댕은 “그럼 프랑스의 대성당들은 완성작이란 말이오?” 하고 대꾸했다.

국호가 대한제국으로 바뀐 지 3년 후에 개최된 이 박람회에 우리나라도 참여했다.
고종은 학무대신 민병석을 총재격인 박물대원에, 민영찬을 실무 담당 박물부원에, 그리고 프랑스인 안예백Alple을 사무부원에 임명 파견했다.
프랑스 건축가 에밀 페레Emile Ferret가 지은 왕궁 접견실 형태의 대한제국관은 샹 드 마르스에서 떨어진 슈프렌 가에 위치했다.
『파리 박람회 L’Exposition de Paris』에 조선관이 소개되었다.

“조선관은 화려한 색채로 칠해진 목조건물로 극동 건축의 특징적인 위로 치솟은 처마와 큰 지붕으로 덮여 행인들의 관심을 끈다.
독특한 구조의 건축은 왕궁의 알현실에서 영감을 받았다.
벽은 7세기에 만들어진 비단으로 장식되었으며 들어갈 때 서로 마주보는 두 개의 패널에는 탈과 연극적인 물건들이 걸려 있다.
진열장에는 황제가 직접 보낸 값비싼 물건들과 대한제국에 가 있던 몇몇 프랑스인이 소장한 것들, 그리고 국가에서 제작한 물건들의 견본이 … 이 모든 것은 조선의 산업 자산에 대한 강한 인상을 준다.”

1900년 12월 16일자 『르 프티 주르날 Le Petit Journal』에 전시관이 삽화로 소개되었다.


1894년에 발발한 청일전쟁은 일본에서 일청전쟁으로 불리었고 일본인에게는 조선을 침략했다는 실체는 망각하고 중국에 승리한 전쟁으로만 기억되고 있다.
이 전쟁은 일본인에게 대국 중국의 패망이라는 인식을 심어주었다.
이는 곧 일본이 오랜 기간에 걸쳐서 받아온 중국의 문화적 영향이 종식되었음을 의미했다.
이 전쟁으로 인해 일본인의 중국관이 크게 뒤바뀌었다.
전쟁이 발발하기 전까지만 해도 일본인은 중국과 중국인에 대해 전혀 증오심을 갖고 있지 않았지만 전쟁이 승리하자 용맹심에 편승하여 중국인을 경멸하게 되었다.
중국이 너무 쉽게 패망하자 일본인은 한편 중국을 깔보게 되었으며 보수적 풍조가 만연하면서 배외적 감정이 증대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서양을 경외하는 관념이 싹텄다.

청일전쟁이 발발하기 9년 전 계몽가인 후쿠자와 유키치는 ‘탈아론脫亞論’을 발표하여 일본을 서양적인 문명국으로 정립시켰으며, 아울러 중국과 한국을 미개국으로 얕잡아 보아 그들에 대한 침략을 정당화하는 토대를 다지면서 아시아에 대한 우월의식을 증폭시키려고 했다.
청일전쟁은 일본이 아시아를 멸시하는 길로 들어서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일본인은 일본이 아시아의 유일한 문명국이라고 생각했고 서양 열강과 어깨를 나란히 하여 아시아를 멸시하게 되었다.

이러한 정신이 형성될 무렵 프랑스에서 서양화를 연구하여 살롱전에 입선한 적도 있는 구로다 세이키黑田淸輝가 1893년에 귀국했다.
구로다가 파리에서 유학할 때 프랑스 화단의 두 가지 특징을 언급해 둘 필요가 있다.
하나는 프랑스 화가들의 일본 화화의 영향이고 다른 하나는 마네와 모네로 시작된 인상주의가 마네 타계 후 모네에 의해 큰 성과를 거두어 그를 프랑스 최고의 화가로 만든 것이다.

19세기 중반의 프랑스 회화는 외부로부터 영향을 많이 받았는데, 가장 두드러진 것은 일본화의 영향이었다.
1853년 다시 개항된 코모도르 마퇴유 항구를 통해 일본의 예술작품과 가제도구들이 유럽으로 들어왔으며 일본 미술은 한동안 유럽 전역에 영향을 미쳤다.
외국 문화에 대한 관심이 고조될 때 일본 화가들의 그림을 프린트한 사본들이 1860년에 개업한 포트 오세안에서 매매되었고 1890년에는 일본 예술품들이 국립미술학교에서 소개되었다.
이 시기에 뱅Siegfried Bing이 쓴 『일본 예술가들 Le Japan Artistique』이 출판되었으며 일본 회화에 매료된 마네와 모네도 뱅의 책을 읽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유럽 예술가들은 일본의 회화·조각·판화를 연구하면서 동양의 독특한 요소들을 자신들의 작품에 응용했다.
일본 풍속화 대가들의 판화에 나타난 광택 있는 평면과 힘 있는 색, 과감하게 단순화된 외곽선과 가파르면서 날카롭게 각진 형태, 평면적인 디자인, 대담한 칼자국 등은 유럽 예술가들을 매료시키기에 충분했고,
특히 기타가와 우타마로, 카츠시카 호쿠사이, 우타가와 히로시게 등의 다색목판화는 그들을 감동시켰다.
이들 세 사람의 판화는 모두 재질이 질긴 종이 위에 색깔별로 몇 번이고 물감을 찍은 정교한 다색 판화였다.
‘에도 그림’이라는 명칭으로 일본 전국의 구석구석까지 명상이 자자해던 다색 판화는 색상도 선명하여 중국에서 건너온 고급 비단을 연상시킨다고 해서 니시키에錦繪라는 호칭도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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