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최초의 미술사


일본 최초의 미술사 『고본일본제국미술약사稿本日本帝國美術略史』는 1900년 파리의 샹 드 마르스 공원에서 성대하게 개최된 만국박람회에 출품된 일본 고미술 전시에 대한 해설을 겸하여 제국박물관(궁내성)이 편찬했는데,
프랑스어로 먼저 출판되고 1901년에서야 일본어로 간행되었다.
이 책은 일본 미술사에 의한 자기 확인이 외국을 의식하여 만들어진 것이다.
“아시아는 하나이다”라고 쓰여진 『동양의 이상』을 비롯하여 덴신의 주요 저서들이 모두 영문으로 저술되었다는 사실과도 연결된다.

주목할 점은 『동양의 이상』이라고 일본어로 번역했지만 영어판 제목에서는 『특별히 일본 미술과 관련한 동양의 이상 The Ideas of The East with Special Reference to The Art of Japan』이라고 한 의도이다.
『고본일본제국미술약사』에도 7, 8세기의 일본 건축물이 그리스 건축물과 유사하다는 것과 불교 벽화와 불상들이 인도 서역 내지는 그리스 양식을 따른 것이라는 주장이 담겨 있다.
1906년 12월 『국화國華』(199호)에 소개된 하마다 고사쿠嚬田耕作의 ‘추고推古 시대의 조각’ 서설에는 “실로 일본의 기름진 토양은 에게 해에 돌출해 있는 그리스보다 훨씬 더 자연의 혜택을 입고 있으며 일본 민족의 낙천적이고 쾌활한 정서는 그리스인과 매우 흡사하다”고 적혀 있으며,
6세기 말부터 7세기 초까지의 추고 조각에 관해서는
“이는 그리스 초기의 조각과 동일한 궤도선상에 위치하는 것으로서 그 직립적인 자태는 아테네에서 발견된 아폴로와 같으며 옷주름 선은 에기나Aegina의 사원에 있는 파풍破風(Pediment) 조각 등과도 동일하다”고 적었다.

1930년경 거의 모든 미술사학자들은 무의식 중에 일본 미술을 그리스 미술과 관련지어 고찰하는 방법을 따랐는데,
덴신에 의해 본격적으로 시작된 서양미술사 연구가 일본 미술사 전분야에 걸쳐 지대한 영향을 끼쳤음을 알게 해준다.


만국박람회Exposition Universelle

프랑스의 20세기는 1900년 파리 만국박람회L’Exposition de Paris de 1900의 개막과 함께 그 문을 열었다.
샹 드 마르스 공원에서 열린 이 축제에 8만 3천에 달하는 전시자가 참여했고 200여 일에 걸쳐 약 5천만 명이 관람했다.
니콜라이 2세로 명명된 큰 길 양편에는 막 완공된 그랑 팔래와 프티 팔래가 호화로운 예술의 전당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프티 팔래에는 ‘기원에서 1800년까지’를 보여주는 약 5천여 점의 작품이 전시되었으며 그랑 팔래에는 프랑스 미술 ‘100년전’이 열렸다.
이 ‘100년전’의 마지막 전시 벽면은 인상주의 화가들의 작품으로 장식되었다.
이 인상주의 전람회에는 마네, 모네, 피사로, 르누아르, 쇠라, 시슬레, 바질, 부댕, 드가, 기요맹, 모리소 등 고갱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인상주의 주요 화가들이 참여했다.
고갱은 그 때 타히티 섬에서 외롭게 생활하고 있었다.
동양학파의 일원이며 프랑스 한림원의 회원이기도 한 레옹 제롬은 인상주의 전시장 입구를 두 팔을 올려 막으면서
“대통령 각하, 멈추십시오. 이것은 프랑스의 치욕입니다” 하고 말한 에피소드는 유명하다.
이 에피소드에서 그 때만 해도 인상주의가 프랑스인에게 폭넓게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특기할 점은 훗날 근대 조각의 아버지로 불리운 오귀스트 로댕Auguste Rodin(1840~1917)이 60세의 나이로 만국박람회에 참여한 것이다.
그는 이미 명성이 높은 조각가로 알마 광장에 사비를 들여 별도로 건립한 개인전시장에서 조각품 150여 점을 소개했다.
그의 개인전은 성공했는데, 코펜하겐, 함부르크, 드레스덴, 부다페스트 등 유럽의 뮤지엄뿐 아니라 미국 필라델피아 뮤지엄도 그의 작품을 다투어 사들였다.
그는 이 전람회를 위해 오랫동안 미완성으로 남겨둔 <지옥문>을 석고로 완성시켜 전시했다.
<지옥문>은 로댕이 타계한 후에 청동으로 뜰 수 있었다.
사람들이 석고로 된 <지옥문>을 보고 미완성이라고 말하면 로댕은 “그럼 프랑스의 대성당들은 완성작이란 말이오?” 하고 대꾸했다.

국호가 대한제국으로 바뀐 지 3년 후에 개최된 이 박람회에 우리나라도 참여했다.
고종은 학무대신 민병석을 총재격인 박물대원에, 민영찬을 실무 담당 박물부원에, 그리고 프랑스인 안예백Alple을 사무부원에 임명 파견했다.
프랑스 건축가 에밀 페레Emile Ferret가 지은 왕궁 접견실 형태의 대한제국관은 샹 드 마르스에서 떨어진 슈프렌 가에 위치했다.
『파리 박람회 L’Exposition de Paris』에 조선관이 소개되었다.

“조선관은 화려한 색채로 칠해진 목조건물로 극동 건축의 특징적인 위로 치솟은 처마와 큰 지붕으로 덮여 행인들의 관심을 끈다.
독특한 구조의 건축은 왕궁의 알현실에서 영감을 받았다.
벽은 7세기에 만들어진 비단으로 장식되었으며 들어갈 때 서로 마주보는 두 개의 패널에는 탈과 연극적인 물건들이 걸려 있다.
진열장에는 황제가 직접 보낸 값비싼 물건들과 대한제국에 가 있던 몇몇 프랑스인이 소장한 것들, 그리고 국가에서 제작한 물건들의 견본이 … 이 모든 것은 조선의 산업 자산에 대한 강한 인상을 준다.”

1900년 12월 16일자 『르 프티 주르날 Le Petit Journal』에 전시관이 삽화로 소개되었다.


1894년에 발발한 청일전쟁은 일본에서 일청전쟁으로 불리었고 일본인에게는 조선을 침략했다는 실체는 망각하고 중국에 승리한 전쟁으로만 기억되고 있다.
이 전쟁은 일본인에게 대국 중국의 패망이라는 인식을 심어주었다.
이는 곧 일본이 오랜 기간에 걸쳐서 받아온 중국의 문화적 영향이 종식되었음을 의미했다.
이 전쟁으로 인해 일본인의 중국관이 크게 뒤바뀌었다.
전쟁이 발발하기 전까지만 해도 일본인은 중국과 중국인에 대해 전혀 증오심을 갖고 있지 않았지만 전쟁이 승리하자 용맹심에 편승하여 중국인을 경멸하게 되었다.
중국이 너무 쉽게 패망하자 일본인은 한편 중국을 깔보게 되었으며 보수적 풍조가 만연하면서 배외적 감정이 증대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서양을 경외하는 관념이 싹텄다.

청일전쟁이 발발하기 9년 전 계몽가인 후쿠자와 유키치는 ‘탈아론脫亞論’을 발표하여 일본을 서양적인 문명국으로 정립시켰으며, 아울러 중국과 한국을 미개국으로 얕잡아 보아 그들에 대한 침략을 정당화하는 토대를 다지면서 아시아에 대한 우월의식을 증폭시키려고 했다.
청일전쟁은 일본이 아시아를 멸시하는 길로 들어서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일본인은 일본이 아시아의 유일한 문명국이라고 생각했고 서양 열강과 어깨를 나란히 하여 아시아를 멸시하게 되었다.

이러한 정신이 형성될 무렵 프랑스에서 서양화를 연구하여 살롱전에 입선한 적도 있는 구로다 세이키黑田淸輝가 1893년에 귀국했다.
구로다가 파리에서 유학할 때 프랑스 화단의 두 가지 특징을 언급해 둘 필요가 있다.
하나는 프랑스 화가들의 일본 화화의 영향이고 다른 하나는 마네와 모네로 시작된 인상주의가 마네 타계 후 모네에 의해 큰 성과를 거두어 그를 프랑스 최고의 화가로 만든 것이다.

19세기 중반의 프랑스 회화는 외부로부터 영향을 많이 받았는데, 가장 두드러진 것은 일본화의 영향이었다.
1853년 다시 개항된 코모도르 마퇴유 항구를 통해 일본의 예술작품과 가제도구들이 유럽으로 들어왔으며 일본 미술은 한동안 유럽 전역에 영향을 미쳤다.
외국 문화에 대한 관심이 고조될 때 일본 화가들의 그림을 프린트한 사본들이 1860년에 개업한 포트 오세안에서 매매되었고 1890년에는 일본 예술품들이 국립미술학교에서 소개되었다.
이 시기에 뱅Siegfried Bing이 쓴 『일본 예술가들 Le Japan Artistique』이 출판되었으며 일본 회화에 매료된 마네와 모네도 뱅의 책을 읽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유럽 예술가들은 일본의 회화·조각·판화를 연구하면서 동양의 독특한 요소들을 자신들의 작품에 응용했다.
일본 풍속화 대가들의 판화에 나타난 광택 있는 평면과 힘 있는 색, 과감하게 단순화된 외곽선과 가파르면서 날카롭게 각진 형태, 평면적인 디자인, 대담한 칼자국 등은 유럽 예술가들을 매료시키기에 충분했고,
특히 기타가와 우타마로, 카츠시카 호쿠사이, 우타가와 히로시게 등의 다색목판화는 그들을 감동시켰다.
이들 세 사람의 판화는 모두 재질이 질긴 종이 위에 색깔별로 몇 번이고 물감을 찍은 정교한 다색 판화였다.
‘에도 그림’이라는 명칭으로 일본 전국의 구석구석까지 명상이 자자해던 다색 판화는 색상도 선명하여 중국에서 건너온 고급 비단을 연상시킨다고 해서 니시키에錦繪라는 호칭도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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