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시하기를 “미국 물품들이 어느 정도 희한하던가”


우리나라도 1882년 미국과의 수교 이후 1893년 콜럼버스 미국 발견 400주년을 기념하여 5월 1일부터 10월 30일까지 개최된 시카고 만국박람회World Columbian Exposition에 처음 참여했고,
1900년 파리에서 개최된 대규모 박람회에도 참여했지만 일본과 중국에 비해 규모가 월등히 작아 별로 서양인들의 주목을 받지 못했다.
그러나 주최국의 신문과 잡지에 언급되었고 46개국이 참여하고 2천 7백만 명의 관람자가 모여든 박람회에서 우리나라 미술품이 소개되었다는 것은 한국을 알리는 중요한 방법이었다.
고종은 참의 내무부사 정경원(1841~?)을 출품 사무대원에 임명했고, 정경원은 1893년 2월에 10명을 동반하고 시카고로 향했다.
『고종 순종 실록』(1893년 11월 9일, 음력)에는 정경원의 보고가 적혀 있다.


지시하기를 “미국 물품들이 어느 정도 희한하던가” 하니 정경원이 말하기를 “매우 번창하였습니다”라고 하였다.

지시하기를 “모두 몇 개 나라가 모였던가” 하니 정경원이 말하기를 “모인 것은 47개 나라였습니다.
일본에서는 관리가 와 있었으나 중국에서는 관리가 없이 그저 상인이 가게방을 받았습니다” 라고 하였다.

지시하기를 “우리나라에서도 한 채의 집을 지었는가”라고 하니 정경원이 말하기를 “박물총원(제조와 교양관Manufactures and Liberal Arts Building)을 말함) 가운데에 우리 시으로 집을 짓고 구운 기와를 덮었습니다”라고 하였다.

지시하기를 “몇 미터나 되겠던가” 하니 정경원이 말하기를 “그것이 몇 미터인지 자세히 알 수 없으나 우리나라 간살이로 논하면 6~7간이나 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지시하기를 “우리나라 물품을 보고 어떻다고 하던가” 하니 정경원이 말하기를 “각국 사람들이 우리나라 물품을 처음 보기 때문에 구경하는 사람이 번잡하게 모여들어서 관리하는 사람이 미처 응대할 겨를이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종이에 물품 이름과 용도를 적어서 물품 위에 붙여서 응대를 대신하였습니다”라고 하였다.

지시하기를 “어떤 물건을 가장 좋아하던가”라고 하니 정경원이 말하기를 “천문발, 소라껍질을 박은 장롱, 수를 놓아 만든 병풍 등의 물건은 각국 사람들이 애착하며 칭찬한 것들로서 상패까지 있었다고 하나 아직 문건이 채 되지 않았기 때문에 자세히는 알 수 없습니다.
돌아올 때 박물관 총무관을 만나니 악공樂古工데 대한 상패와 물품에 대한 상패를 만들어서 추후로 미국 공사 알렌安連에게 부쳐 보내겠다고 합니다”라고 하였다.

지시하기를 “출품한 물품 값이 미국 돈으로 얼마나 되는가”라고 하니 정경원이 말하기를 “1,140여 원(달러?)”라고 대답하였다.

지시하기를 “남은 물품은 박물관에 넘겨주는가”라고 하니 정경원이 말하기를 “각 처의 박물관과 각 곳의 학교에 나누어 보내고 사람들이 구경할 가치가 없는 것은 의정부에 도로 바치려고 합니다”라고 하였다.


정경원이 ‘물품에 대한 상패’에 관해 언급했는데,
박람회 측 공식 기록에 의하면 외국 물품에 준 메달이 모두 13,740개였고, 우리나라가 받은 것은 6개, 중국이 15개를 받았고 일본은 무려 1,581개를 받았다.
상장diploma은 모두 14,366개가 수여되었는데, 우리나라가 7개, 중국이 17개, 일본은 무려 1,598개를 받았다.
박람회 도록에 의하면 우리나라 전시는 제조와 교양관 남쪽에 위치했다.
우리나라 전시 면적은 899평방 피트, 중국은 6,390평방 피트, 일본은 39,542평방 피트였다.


시카고 만국박람회가 열리기 전부터 일본 국회는 자발적으로 기부금을 내기로 결정했고 63만 엔을 시카고에 전달했다.
이런 적극적인 태도로 일본은 각국의 국가관 위치 선정 경쟁에서 우위를 확보하여 숲이 우거진 호젓한 섬에 일본 국가관을 설립할 수 있었다.
일본은 이곳에 호오덴鳳凰殿을 건립하고 박람회가 끝난 후 시카고에 기증했다.
이 건물은 12세기 교토 근처의 우지에 세워진 뵤도인平等院의 호오덴을 10만 달러 이상을 들여 재현한 것이다.


한편 국내적으로 일본 정부는 1877년에 제1회 내국권업 박람회를 동경 우에노에서 개최했다.
서구 박람회를 모방한 일본에서의 최초 박람회는 1871년에 개최된 교토 박람회였으나 그것은 민간인이 주도한 것이었다.
서구 제국주의의 충실한 모방자였던 일본은 1903년 오사카에서 개최한 제5회 내국권업 박람회에서 학술인류관에 조선인 3명과 함께 아이누족, 대만의 고산인, 자바인, 인도인, 류구인 등을 데려와 전시하여 관람객에게 그들의 일상적인 주거양식을 보여주었다.
오늘날 박람회에 관한 미술사학적 연구는 일본 근대미술사의 중요한 연구 테마가 되고 있다.
창조적·역사적 시점은 이런 산업적 시점에 근거하여 형성되었다.
화론은 창조적 시점에 의해서 회화사는 역사적 관점에서 저술되었다.
이 두 시점은 에도 시대에서도 존재했다.


현대적 의미로서의 최초의 미술사학적 저술은 『본조화사本朝畵史』로서 에도 시대가 시작된 지 7,80년이 지난 1691년에 간행되었다.
『본조화사』는 狩野山雪의 유고를 바탕으로 그의 아들 永衲이 편찬한 책이다.
이 책은 일본 회화에 관한 개론에 이어서 4백 명 이상의 화가들을 열전식으로 열거했으며 일본과 중국 화풍을 총합한 화단의 주류로서의 수야파狩野派의 위상을 성립시켰다.
에도 시대는 미술사학적 연구가 활발했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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