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경 미술 학교 서양화과 교과 과정


야마나시 에미코山梨繪美子의 논문 ‘구로다 세이키와 동경미술학교의 양화교육’에 의하면

1학년, 실습 외에 역사 및 고고학, 미학, 미술사 및 체조

2학년, 실습 외에 역사 및 고고학, 미술해부, 원근법 및 체조

3학년, 실습 외에 역사 및 고고학, 미술해부, 원근법

4학년, 실습 및 졸업 제작, 용기화법, 교육학

1~3학년 3년 동안 실습 외에 역사 및 고고학 등 인문학을 중점적으로 가르친 것이 특기할 만하다.


이는 유럽 전통 아카데미에서 강조한 점으로
이런 교과과정이 채택된 데는 구로다와 오카쿠라 덴신의 교육 철학이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덴신은 동·서양의 전반적 역사와 미술사의 이해를 바탕으로 일본 미술사의 특징을 파악하여 일본 근대미술을 창조해야 한다는 신념을 갖고 있었다.


미술사학의 형성과 관련하여 주목해야 할 것은 고미술조사이다.
정부에 의한 공식적인 고미술조사가 언제 시작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메이지 17년인 1884년 문부성에서 도화조사회圖畵調査會가 설립되었고,
페놀로사와 오카쿠라 덴신이 위원으로 참여했다.
이듬해 도화조사회는 도화취조괘圖畵取調掛로 개칭되었으며 덴신이 주간이 되었다.
이것은 원래 미술학교를 설립하기 위한 조사기관이었지만 고미술보호에도 관련이 있었다.
문부성 외에도 내무성과 궁내청도 고미술보호에 관여했으며 1888년 궁내성 안에 임시전국보물취조국이 생겼고,
1897년에는 내무성 안에 고사사보존법古社寺保存法이 생겼다.
특기할 점은 고미술보호가 미술사학의 성립과 불가분의 관계가 있었다는 것 외에도 일본의 자기의식 확립을 전제로 시작되었다는 사실이다.


페놀로사는 강의를 마친 후 1890년 7월 일본을 떠났다.
그가 떠난 해 간사였던 오카쿠라 덴신이 동경 미술 학교 교장에 취임했고 페놀로사의 뒤를 이어 ‘미학과 미술사’ 과목을 맡았다.
이 시기에 특기할 만한 점은 소위 ‘신일본화’라 불리우는 새로운 양식들의 출현이다.
덴신은 전통적인 산묘법에 서양의 사실주의 기법을 가미하면서 그들의 인문학이 뒷받침하는 역사화와 풍경화를 창작하는 데 목표를 두었다.
그는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일본은 아시아의 사상·문화·예술의 총합유적이며 아시아 문명의 박물관이며 또한 살아서 활동을 계속하는 생명체로서의 박물관이다.
이 고대 아시아의 잠자고 있는 생명을 감득하고 부활시켜 그 위에 새롭고 크게 움직이게 하는 것이 명치 일본의 사명이고 의무이다.”

일본 근대 미술사에서 위대한 사건으로 꼽히는 덴신의 업적은 독일 낭만주의에 지대한 공헌을 한 빈켈만에 비유된다.
괴테와 더불어 독일 낭만주의의 선구자 빈켈만은 고대 그리스 미술품을 모방하라면서 그리스 조각이 미술사에 있어 가장 규범이 된다고 역설했다.
그에 의해서 고전을 존중 계승하는 신고전주의가 사조가 생겼다.
덴신도 동양의 고전을 끌어내는 데 앞장을 섰다.



빈켈만Johann J. Winckelmann(1717~68)

예술의 역사적 연구는 빈켈만의 『그리스 미술 모방론』(1755), 『고대 미술사』(1764)로 시작되었다.
그는 고대 그리스 미술을 최고의 예술로 평가하고 예술을 미와 동일시했다.
그의 고전주의 예술관은 19세기 전반의 헤겔에서도 거의 공통으로 나타났다.
헤겔은 미를 이념의 감각적 현상으로 규정하고 예술을 이념과 형태와의 관계에서 고찰하여 이러한 관계에서
상징적·고전적·낭만적이라는 예술의 세 가지 기본 형식을 구별한 후
이를 이념의 변증법적인 자기 전개로 해서 예술의 역사적 전개에 적용했다.

빈켈만은 양식Stil의 개념을 처음 미술사의 영역에 삽입하여 근대 미술사학의 정초자가 되었다.
양식sytle(독일어 stil)은 라틴어 스틸루스stilus에서 유래했다.
스틸루스는 원래 납끌판에 쓰는 철필을 말하지만 필적, 서법, 문체를 의미하게 되었다.
16~17세기에 걸쳐 이 말의 용법은 점점 확대되어 조형예술에서도 사용하게 되었다.
처음 이 말은 예술가의 개성적 작풍을 의미하는 마니에라maniera와 동일시되었지만,
16세기가 되면서 예를 들어 괴테에 의해 양식은 모방Nachahmung과 자기풍Manier에서 구별되어 미술이 이미 달성했고 장래 달성하려고 하는 최고의 예술작품의 격으로서 적용하려는 개념으로 정해졌다.
즉 양식이란 예술의 ‘보편적인 관점 및 표현의 방식’으로서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이 개념은 19세기 중엽부터 미술사학을 방법론적으로 기초짓는 중심개념으로 받아들여졌으며
부르크하르트J. Bruckhardt(1818~97)의 『치체로네』(1855)와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문화』(1860)는 양식사의 연구의 가장 큰 성과물이다.
부르크하르트에 의해 이루어진 양식사를 더욱 진전시킨 사람이 그의 제자 하인리히 뵐플린Heinrich Wolfflin(1864~1945)과 빈 학파의 아버지로 불리우는 알로이스 리글Alois Riegl(1858~1905)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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