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경 미술 학교


당시 교수로 내정되었던 카노狩野 호가이狩野芳崖(1828~88)가 동경 미술 학교 창립 한 해 전에 타계했지만,
일본화 교수진으로 하시모토 가호橋本雅邦, 카노 도모노부狩野友信 등의 카노파狩野波가 맡게 됨으로써 남화를 배격하고 일본화풍의 새 시대가 열리게 되었다.
카노파란 카노 마사노부狩野正信를 시조로 한 화가 계통으로 무로마치 시대 후기부터 에도 시대까지 장군 가문의 어용 화가가 되어 번영한 화풍을 말한다.
카노파 회화는 중국 송·원대의 그림과 무로마치室町 시대의 중국화를 주요 원천으로 하여 거기에 일본의 헤이안 시대에 중국 회화 양식을 일본화한 일본적 정취가 물씬 풍기는 야마토에大和繪 전통을 합친 것으로 고전 지향이 농후했다.
보수성을 강화하고자 했던 당시 무사들에게 카노파 회화는 바람직한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카노 호가이는 메이지 시기에 이상주의적 신일본화의 제창자로서 남송대의 마원, 하규 즉 마하파馬夏波와도 연결되는 공간 구성과 묵필법을 구사했으며 하시모토 가호와 더불어 카노파에 입문하여 그림을 익힌 동문이었다.

한편 동경 미술 학교의 개교와 함께 일본에서는 경도청년회 공진회가 열렸으며,
일본 남화협회가 도미오카 뎃사이富岡鐵齋에 의해 결성되는 등 지속적으로 근대 화단의 신기류가 형성되어 갔고,
10년 후인 1898년에 이르러서는 오카쿠라 덴신이 하시모토 가호 이하 일본화 교수들과 더불어 동경 미술 학교 교장직을 사직하고 요코야마 다이칸橫山大觀을 비롯하여 26명의 정회원으로 일본미술원을 창립했다.
1901년 덴신의 뒤를 이어 동경 미술 학교 고장에 마사키 나오히코正木直彦가 취임했다.
마사키는 매우 유능한 교장으로 그 후 1932년까지 30년 이상을 재임했다.

마사키 교장 시대의 동경 미술 학교는 전통 미술과 서양 미술 그리고 회화, 조각, 공예, 건축 모두 동등하게 존중되는 소위 중용의 방침을 취했다.
당시의 대세는 여러 국면에서 서구화가 진행되어 회화에서는 전통파인 일본화과보다는 서양화과가, 조각에서는 전통파인 목조부보다 소조부,
즉 서양 조각이 활기를 디게 되지만,
오카쿠라 덴신이 교장이었던 시대에 일단 제도화된 전통 유지를 위한 조직, 설비, 교육 체계도 폐교될 때까지 존속되었다.
동아시아에서 온 유학생들이 입학하기 시작한 때는 마사키 교장 시대였다.
덴신 교장 시대에는 서양인이 3명 입학했을 뿐 동양인은 한 명도 없었다.
마사키 교장 시대의 동경 미술 학교는 서서히 규모가 확대되어 1900년부터 1910년까지의 시기에만도
일본화과, 서양화과, 조각과, 도안과, 건축과, 금공과, 주조과, 칠공과, 제판과, 임ㅧㅣ사진과, 도화사범과 등의 많은 과가 있었다.
동아시아에서 온 유학생의 대다수는 서양화과에 입학했으며 그 다음으로는 조각과와 소조부에 입학했다.

1901년에 홍아회紅兒會가 창립되고,
1907년에 문부성 미술 전람회와 국화옥성회國畵玉成會가 창립되고,
1909년에 교토에서는 공예학교에 이어서 시립회전市立繪專이 창립되었다.
그리고 1914년 일본 미술원전이 다시 재흥전을 개최했으며, 1916년에 금령사金鈴社, 1918년에 국화 창작협회, 1919년에 제국 미술원 전람회, 1921년에는 일본 남화원이 결성됨으로써 도미오카 뎃사이 이후의 수묵 계열에 자체적인 응집력을 보여주었고,
신흥대화회新興大和繪도 결성되었다.

1923년에는 혁신 일본 화회가 아리키 주빙荒木十敏에 의해 결성되었으므로 1920년대는 신일본화가 성숙단계로 접어든 때라고 할 수 있다.
1929년에 후쿠다 호시로福田豊四郞와 요시다 겐이치吉岡堅二에 의해 신일본화연구회가 결성되었고,
이듬해에는 유키 소메이結成素明와 아오키 오노리靑木大乘에 의해 대일미술원이 결성되었으며,
이어서 명랑 미술 연맹(1934), 신흥 미술원(1937), 일본화원(1938), 신미술인 협회(1938) 등이 결성되었다.
1949년에 동경 예술 대학이 창립되었으며 이듬해에는 교토시립미대가 문을 열면서 미국을 중심으로 한 각종 서양 사조에 대한 폭넓은 수용을 거듭하게 된다.
1950년대의 두드러진 점은 신제작협회의 일본화부와 1956년 고다마 산레이兒玉三鈴의 일본화부의 결성과 1958년의 신일본미술전람회 등이다.
1960년대 이후로는 신일본화의 양식이 일면 전통에 대한 지속적인 계승의 노력을 보이면서도 동시에 서양화의 유화적 마티에르 감각을 동반하면서 입체적 질료를 구사한다든가 원근법의 전면적 사용에 의한 화면 구성의 다양한 서양적 시각을 복합적으로 사용하는 등 표현이 다양하게 전개되어진다.
한편 덴신은 동경미술학교에서 일본미술사와 서양미술사를 강의했는데 전임자 페놀로사와는 달리 미학보다는 미술사에 초점을 맞추었다. 페놀로사와 덴신의 강의는 제자들의 노트를 토대로 복원된 『강창천심전집岡倉天心全集』을 통해 알려졌다.
두 사람에 의해서 미술사학이 제도적으로 탄생했다.
같은 해 동경대학에서도 ‘심미학’이 ‘심미학미술사’로 개칭되어 강의되었으며 이듬해에는 ‘미학미술사’로 명칭이 다시 변경되었다.
국립대학인 동경미술학교에서 서양미술사를 가르쳤다는 것은 일본 정부가 서양미술의 가치를 인정했음을 의미한다.
분량으로는 일본 미술사의 절반에 지나지 않았더라도 『와유석진』에 실린 서양미술에 관한 내용에 비하면 양적으로 질적으로 우수했으며, 무엇보다도 일본 최초의 체계적인 서양미술사 강의였다는 의의를 지닌다.
『강창천심전집』을 보면 덴신이 서양미술사를 고대, 중세, 근대로 나눈 후 고대에서 이집트, 앗시리아, 페르시아, 페니키아, 그리스, 로마 등을 다뤘고, 중세에서는 비잔틴, 로마네스크, 아라비아, 고딕을 다뤘으며, 근대에서는 르네상스로부터 19세기에 걸친 시기를 다뤘고,
각 시기를 종교, 정치, 미술적 측면에서 각각 다뤘다.
그가 참고한 기본 문헌은 빌헬름 뤼브케Wilhelm Lubke의 『미술사 History of Art』(1874) 영어 번역본이었다.
각 시기에 대한 강의 분량은 불균형을 이루었는데 고대를 거의 절반, 중세는 10%, 근세를 40%로 구성한 것이다.
고대에서 그리스 미술에 큰 비중을 두었고, 근대에서는 15, 16세기 르네상스에 치중했으며, 17, 18세기는 매우 간략하게 다뤘다.
이는 서양미술사에 대한 덴신의 평가를 반영한 것으로 그리스와 르네상스를 높이 평가하는 오늘 날의 서양 미술교육과 일치한다.
그리스와 르네상스 미술에 크게 비중을 둠으로써 그가 새로운 시대의 서양미술을 거론할 수 없게 만들었고
나아가 근대 일본의 서양화까지도 배척하려고 했다는 후대 일본 미술사학자들의 비판이 있다.
그리고 그가 서양미술사 강의를 통해 일본 미술의 가치를 정립하려고 했음은 분명해 보인다.

덴신은 7세기 후반부터 8세기 초까지를 ‘천황天智 시대’로 명명하면서 당대의 미술 원류를 그리스 미술로 소급되는 인도 미술에서 찾으려고 했다.
그는 서술했다.

"그리스와 인도 사이에는 늘 교통이 끊이지 않았다.
또한 예술가의 왕래도 있어서 그리스풍 건축이 인도에 생겨났고,
심지어 그리스어를 사용하는 곳도 있었으며 많은 그리스인들이 이주하여 살기도 했는데 …
그리스풍이 인도에 들어간 것은 때마침 불교가 융성했던 무렵이었다.
그러므로 불상 제작에 있어서 그리스풍을 받아들이게 된 것이었으며
지금 인도에 유존하는 대리석 석상 중에는 그리스풍의 영향을 받은 것이 많이 있다."



덴신은 인도·그리스 미술이 중국을 거쳐 일본에 들어왔음을 역설했다.
그는 일본 미술의 우수함을 역사적으로 고증하기 위해 그리스 미술이 서양미술사에서 최상위에 위치한다는 점을 강조해야 했다.
일본 미술에는 이상·감정·자각 세 가지 특성이 있다면서 이상을 잘 구현한 것이 7, 8세기의 작품들로서 일본 불교 조각이 그리스 조각과 근접하며,
감정적 특성은 9세기 말엽부터 13세기까지의 작품들에 나타나 있는데 르네상스 작품들에 내재된 감정적 요소들과 일치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15세기 일본 미술품에 나타난 자각성에 대해서는 “이와 비교될 만한 대상이 없다”는 말로 그 우수성을 강조했고
강의 마무리 부분에서 다음과 같이 단언했다.

“동일한 민족의 미술로서 이 세 가지를 골고루 갖춘 것은 세계에서도 그 예를 찾을 수 없으니 이로써 일본 민족의 탁월함이 증명되는 것이다.”

이런 발언에 주목한다면 덴신이 서양 미술사 강의에서 시도한 그리스와 르네상스 미술에 대한 양적 배분이 단지 서양의 일반적 평가 기준을 따른 것만이 아님이 확실해진다.
그는 일본 미술의 세 가지 특성 가운데 두 가지를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서양 미술을 거론한 것이다.
결국 그의 강의는 서양미술과 일본 미술을 대조시킴으로써 결과적으로 일본 미술이 우수함을 부각시키고 한층 더 세계적 위상으로 정립시키겠다는 의도를 드러낸 것이다.
때마침 유럽에서 일본 회화에 대한 인기가 대단했으므로 그의 일본 미술 가치의 정립은 별 무리없이 받아들여졌을 것이다.



그리스 조각

고대 그리스 미술의 특징은 정확하고 규격화된 이상주의에 있다.
그리스 미술은 세계 최초의 가장 위대한 자연주의적인 미술이었으며,
따라서 기원전 5세기까지 그리스 조각의 전개는 해부학적인 정확함의 진보라는 말로써 설명될 수 있다.
그러나 그리스 조각의 목적은 20세기 조각 대부분의 경우처럼 소재를 흥미로운 삼차원적 구조체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보기에 이상적인 아름다운 인체를 표현하는 것이었다.
정교한 균형의 원리가 실제의 인체에서 보여지는 불완전함이나 불규칙함을 바로 잡는 역할을 했다.

그리스 조각에서 주된 재질은 청동과 흰 대리석이고 그 다음은 석회석과 테라코타가 차지한다.
신전에는 이따금 황금상아상을 안치했는데, 나무로 된 골조 위에 피부에 해당하는 부분은 상아로, 그 외의 부분은 금으로 처리한 것이다.
청동상은 처음에는 순수한 소상小像이 제작되었고, 이후 기원전 6세기 말에는 청동 공동空洞 주조법이 일반화되어 기원전 5세기에는 단독 조각상을 위한 소재로 선호되었다.
사용된 주조법은 납형법이었다.
그리스인은 조각에 표면 장식을 더했다.
채색은 처음에는 상투적이었지만 점차 자연스런 색으로 석조상과 테라코타상의 머리카락, 눈, 입술, 젖꼭지, 옷주름을 강조했다.
살부분에도 종종 채색을 했다.
허리띠 종류나 무기 같은 부속품은 금속으로 만드는 경우가 많았으며, 청동상의 눈에는 천연 유색석을 박아 넣었고, 눈썹은 금속선을 끼웠으며, 입술과 젖꼭지에는 귀금속을 상감했다.
청동의 표면은 광택이 나도록 처리했으며 때로는 채색되기도 했다.
현존하는 그리스 조각이 무색인 것은 이러한 채색의 대부분이 벗겨져 버렸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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