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의 종말 이후 - 컨템퍼러리 미술과 역사의 울타리 동시대 미학 1
아서 단토 지음, 이성훈 외 옮김 / 미술문화 / 200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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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리양,


우선 좋은 글을 계속해서 기고해주어 고마워요.
줄리양의 글은 읽는 재미가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논조가 명료하고 수학처럼 논리적이라서 마음에 들어요.
지성인이라면 의당 그렇게 사고를 해야 하지만 요즘 워낙 엉뚱하게 글을 쓰는 사람들이 많아서 ...

워홀의 생년월일에 관한 질문에 대한 답은 내가 쓴 <워홀과 친구들>에 적어놓은 것을 여기에 언급하는 것으로 대신하지요.

"워홀은 자신의 출생연도에 대해서도 1929년 혹은 1930년이라고 엇갈린 주장을 하면서 출생 증명서가 잘못 기록된 것이라고 우겼지만 사람들은 그가 태어난 해를 1928년으로 알고 있다."

참고로 워홀의 큰형 Paul은 1922년에, 작은형 John은 1925년에 탸어났습니다.


단토의 <예술의 종말 이후>를 읽었다니 기쁨니다.
꼭 일어야 할 책입니다.
내가 처음 그 책을 읽었을 때 시야가 아주 넓어지는 걸 경험했습니다.
그리고 그 책을 번역하느라 다시 꼼꼼이 읽을 때는 좀더 진전되어야 부분에서는 단토도 우물쭈물하기도 했구나 하고 느꼈습니다.
그러나 워낙 철학으로 무장된 분이라서 감히 반박할 엄두는 나지 못했고,
그보다는 그분이 준 가르침이 너무 크고 흡족해서 약간 회의를 가졌던 것 뿐이었습니다.

줄리양의 글 대부분은 단토의 입장이며 정확하게 내용을 파악한 걸로 보입니다.
단토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key word는 변용입니다.
성경에서 온 말이지요.
예수가 가까운 제자 몇 사람과 함께 산으로 올라갔을 때 제자들의 눈에 스승 예수가 모세와 엘리야와 같은 예언자로 보였다는 기록에서 연유된 말입니다.
같이 밥먹고, 근래 예수에 관한 영화를 보면 함께 축구를 하다가 넘어져 뒹굴기도 한 그 스승과 함께 산에 올랐습니다.
평소와 다름없는 스승인데 그날은 그들에게 예언자의 모습으로 보였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실체는 그대로인데 보는 사람의 심적 변화에 따라서 그 실체의 본질이 다르게 보인 것입니다.
이것이 변용입니다.
그리고 단토가 워홀의 브릴로 상자와 관련에 언급한 그 변용의 의미이기도 합니다.
슈퍼마켓의 비누상자 브릴로와 워홀이 화랑에서 전시한 브릴로는 똑같은 형태이지만 보는 이에 따라서 변용된다는 것입니다.
예수가 예루살렘의 거리를 거닐 때 그와 옷깃을 스친 사람도 있었을 것이고 그에게 다가가 길을 물어본 사람도 있었을 것입니다.
나사렛 목수의 아들인 그를 잘 아는 나사렛 사람들은 그를 이웃에 사는 사람과 똑같이 대하면서 그를 평범한 사람으로 알았을 것입니다.
워홀이 화랑에 브릴로 상자를 전시했더라도 많은 사람은 그것을 슈퍼마켓에 있는 브릴로 상자과 동일한 평범한 것으로 여겼을 것입니다.

변용은 사물 자체가 일으킨 것이 아니라 소수의 사람의 눈을 통해 그렇게 나타난 현상입니다.
특히 단토의 두 눈에 변용이 보였던 것이지요.
그린버그나 곰브리치 같은 사람들만 해도 그것에서 변용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러고보면 단토에게 일어난 퍽 개인적인 사건이었지요.
예수를 예언자로 본 것이 몇몇 제자들의 경험이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말입니다.
그러니까 단토의 변용의 체험은 거의 종교적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헤겔이 예언한 대로 한 사람이 자유를 맛보고 소수가 자유를 맛보고 그런 다음 모든 사람이 자유로워지는 것처럼 단토 한 사람이 브릴로 상자를 보면서 억압된 예술철학에서 자유로워졌던 것입니다.

그러나 단토가 그런 경험을 했다고 주장하지만 그는 그것을 논문으로 발표하는데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워홀이 그 작품을 소개한 것은 1964년이었지요?
그 후 20년 동안 그는 사유했고 그런 후 <예술의 종말>을 발표했고 그 후 10년이 지나고 <예술의 종말 이후>를 내놓았습니다.
그렇다면 20년 전의 일을 회상하면서 쓴 글에는 다소 과장된 감격도 있었을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1964년 단토가 스테이블 화랑에서 워홀의 작품을 직접 목격했을 대는 감동이 그리 크지 않았을 것으로 추리됩니다.
나중에 글을 쓰면서 감동을 키운 것으로도 추정이 가능해보입니다.
여하튼 이런 지적은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단토를 바르게 이해하는 데 약간의 단서를 제공해줄 수는 있습니다.

난 <워홀과 친구들>, <뒤샹과 친구들>을 쓰느라 두 사람에 대해 각별히 자료를 모으고 두 사람에 관한 많은 책을 읽어야 했습니다.
내가 아는 뒤샹은 매우 이지적인 사람이지만 워홀은 감성적인 사람이었습니다.
뒤샹이 자신의 레디메이드에 <샘>, <부러진 팔> 등의 제목을 붙인 건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봅니다.
물론 개념적인 작품이지만
르네 마그리트가 <이것인 산이 아니다>,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라고 붙인 그런 제목과는 다르지요.
마그리트에게 있어서는 산을 그려놓고 <이것이 산이 아니다>, 파이프를 그려놓고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라고 할 때 실은 제목 자체가 작품인 것입니다.
당연히 캔버스에 그린 산은 산이 아니고 파이프는 파이프가 아니지요.
산과 파이프를 모방한 이미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산, 파이프가 아니다라고 적은 것이지요.
이미지에 속지 말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얼마전 어느 분이 대학에서 뒤샹을 강의하고 있다면서 <큰유리>에 나타난 세세한 부분의 의미를 전화로 물어와 일일이 답한 후
"작품의 세부에 대해 너무 신경쓰지 마세요. 뒤샹이 우리를 갖고 논 것입니다"라고 말해주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뒤샹은 익살꾼으로 장난을 쳤던 것입니다.
남자 소변기에 제목을 <샘>이라고 했든 <무제>로 했던들 달라질 것은 없습니다.
줄리양이 말한 대로 그것을 거꾸로 놓으면 분수처럼 혹은 샘처럼(영어로 Fountain이었지요?) 보이기 때문에 뒤샹이 그렇게 제목을 붙인 것이 아니란 말이지요.
그에게 제목은 또 다른 화두였고 익살이었으며 함정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단토가 주장한 대로 변용의 입장에서 얼마든지 바라볼 수 있다는 것이 내 생각입니다.
브릴로 상자만큼 어쩜 그보다 더 소변기가 대중적 사물이라고 말할 수 입습니다.
눈삽은 거의 모든 가정이 구비하는 실용품으로 브릴로 비누를 사용하지 않는 가정은 있어도 눈삽을 사용하지 않는 가정은 없을 것입니다.
대중적으로 말하면 뒤샹의 레디메이드나 워홀의 브릴로 상자가 별반 다르지 않다는 점을 지적하려는 것입니다.

내가 지적하려는 또 다른 점은 뒤샹과 워홀의 미학적 차이입니다.
<내가 워홀을 쏘았다>라는 영화가 있었지요?
영화 <폴록>과 마찬가지로 예술가의 제 모습을 정확하게 묘사한 영화입니다.
내가 <워홀과 친구들>에서 묘사한 것과 마찬가지로 그 영화에서도 워홀을 지성인이 아닌 사람으로, 미학적 문제로 고심하는 사람이 아닌 것으로, 단지 순발력과 디자인의 감각이 뒤어난 사람일 뿐인 것으로 묘사되었습니다.
놀기 좋아하고 쾌락주의자로 묘사되었으며 그것은 워홀의 참 모습이기도 합니다.
단토가 말하는 예술의 종말을 논할 만한 그런 머리를 가지고 있지 못한 사람입니다.
예술가의 의도는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가 의도적으로 예술의 종말을 고한 것은 분명 아니었다는 것이 나의 생각입니다.
본인에게는 전혀 그런 의도가 없었지만 단토는 그를 예술의 종말을 고한 상징적인 인물로 꼽았습니다.

한편 뒤샹에게는 예술의 종말에 관한 신념이 있었습니다.
그는 한때 그림을 더 이상 그리지 않겠다고 선언하고 직업장기 선수로 데뷰했습니다.
더 이상 미술품을 만들지 않겠다는 선언은 예술의 종말을 감지했기 때문인 것으로 추리됩니다.
물론 그는 약속을 깨고 작품을 좀더 제작했지만,
이는 이해가 되는 부분으로 목숨이 붙어있는데 어떻게 작품을 제작하지 않고 여생을 무료하게 보낼 수 있겠습니까!
뒤샹은 예술의 종말과 관련해서 새롭게 해석되어야 할 예술가라고 생각합니다.

뒤샹 이후의 모더니즘, 특히 그린버그의 모더니즘을 언급했는데,
내 생각은 우선 이렇습니다.
그린버그의 이론은 다분히 미국적 입장의 일방적 이론이라는 것입니다.
그의 <American Painting>이 말해주듯 그는 미국 회화의 우위를 주장하기 위해 혈안이 되었던 사람입니다.
회화의 평면성 혹은 2차원성에 대한 인정에서 모더니즘의 출발을 삼아 에두아르 마네의 회화를 모더니즘의 출발로 보았습니다.
단토는 이에 이의를 제기했습니다.
그린버그에게는 마네가 최초의 모더니스트이지만 단토에게는 고갱과 반 고흐가 최초의 모더니스트였습니다.
그리버그의 이론에는 다분히 미국 제국주의적 광포한 우월성이 내재해 있습니다.
이는 유럽에 대한 미국인의 컴플랙스의 반영이라고 봅니다.

예술의 종말에 관해 전혀 아이디어가 없었던 워홀보다는 그런 사고를 가졌던 뒤샹을 재조명해야 하지 않는가 하는 것이 나의 생각입니다.
뒤샹은 모더니즘에 속한 사람이 아니라 모더니즘에 반발하고 부정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아름답지도 추하지도 않은 레디메이드를 선정하느라 나름대로 고심해야 했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샘>이 뉴욕의 앙데팡당에서 거절당할 것을 미리 알고 그 사건을 야기시켜 논쟁의 장을 마련했던 것입니다.
한 마디로 미술품이 무엇이냐 하는 질의를 일으킨 것이지요.

이에 대해 단토는 말합니다.
미술품이란 물질로 이루어져야 하고,
언어로 설명될 수 있는 의미가 있어야 한다.
후자는 달리 말하면 미술품에는 자기지시성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왜 미술품인가 하는 것에 대한 답을 스스로 지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단토가 선정한 예로 든 많은 작품을 보면 그에게는 엘리트주의가 다분히 있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이런 점은 내게 또 다른 의문을 일으키게 합니다.
그리고 이는 단토의 문제만이 아니라 오늘날 우리 모두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원래 팝아트는 엘리트주의로부터 민중미술로의 이양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민중미술이란 우리나라 80년대 발생한 그런 민중을 이용하고 선동한 정치적 민중미술이란 뜻이 아니라 민중 모두가 함께 이해하고 즐길 수 있는 미술을 말합니다.
팝아트가 예술의 종말을 고하게 했다면,
종말 이후, 혹은 미술사 이후의 시대인 컨템퍼래리에서 엘리트주의는 마땅히 배척되어야 한다고 생각되어지는데 그렇지 않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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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은 밤 자책하지 않아도 되는데 자책하다.


어제는 몇 사람이 방문했다.
학회를 마치고 왔는데 문학평론가, 미술평론가, 예술철학 전공 등 자기 분야에 책을 낸 사람들이다.
맥주로 시작해서 위스키를 마셨는데, 한 사람 한 사람 일어서고 문학평론하는 사람만 남아 술을 계속 마셨다.
내가 위스키를 다섯 잔 마실 수 있다는 걸 어제 알았다.
문학평론가는 아마 열 다섯 잔을 마셨을 것이다.
마지막 잔을 기울이고 자기도 집에 가야겠다고 일어섰다.
"선생님, 죄송합니다"를 연거퍼 말해 취했구나 했다.
현관을 나서서도 또 같은 말을 되풀이하는 걸 보고 많이 취했구나 했다.
아내의 일 년 후배이기도 해서 함께 가서 택시에 태우고 오라고 했다.


늘어진 그릇들을 설겆이 하고
에어컨을 끄고 창문을 모두 열었다.
몸이 끈끈해서 샤워를 하고 누우니 바람이 조금 있어 쾌적한 잠을 자겠구나 싶었다.
자다가 온몸에 땀이 나서 리빙룸으로 나오니 발 아래가 뜨겁다.
온집안이 온기로 가득 찬 것이다.
샤워를 한 후 스위치를 내리지 않았더니 온방이 된 것이다.
우리집은 목욕물로 켜놓고 그냥 두면 나중에 자동으로 온방이 된다.
가끔 목욕하고 끄는 걸 잊었다가 바닥이 미지근할 걸 알고 가서 끌 때가 종종 있다.
온방이 어찌나 잘되는지 겨울에도 잘 때는 꺼야 한다.
그 정도로 방구석구석까지 온기가 꽉 찬다.
거의 사우나 수준이니 잠을 잘 수 없었던 건 당연하다.

기왕 깬김에 책이나 본다고 책상에 두어 시간 앉았지만 집안은 여전히 덥고 바닥의 온기도 쉬 식지 않는다.
스위치를 끄는 걸 깜빡한 것은 자책할 일도 아닌 줄 알면서도 깜빡한 것에 대해 그렇게 자책해본 것은 오늘 새벽 처음이다.
새벽까지 온기에 시달리다가 겨우 잠이 들었는데 두어 시간 후에 깼다.
쾌적한 잠을 자지 못한 것이 여간 아싑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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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가장 인기 있는 그림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모나리자>는 서양미술사에서 가장 유명한 작품으로 파리의 루브르 뮤지엄을 찾는 사람들이 가장 보고 싶어 하는 것이다.
이 작품은 레오나르도가 1503~6년에 그린 것으로 1512년 시뇨리의 일원이 된 프란체스코 델 조콘도의 아내 초상이다.
조콘도는 실크 교역으로 부자가 된 사람이었다.
그는 1495년 몬나 리자라는 과부 리자 디 게라르디니를 아내로 맞았다.
그녀는 아이를 하나 낳았지만 1499년에 죽었는데 이것이 그녀의 미소 이면에 담겨진 의미가 된 것 같다.
레오나르도는 1503~6년 동안 여러 차례 몬나 리자로 하여금 자신의 작업장으로 와서 포즈를 취하게 했는데,
자신의 예술의 비밀과 뉘앙스를 여인의 초상화를 통해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레오나르도는 몬나 리자를 부드러운 명암으로 조명하면서 배경에 나무, 물, 산, 바다를 그려넣었다.
그녀는 새틴을 단 벨벳 의상을 입었고, 레오나르도는 특유의 기교로 의상의 우미한 주름을 세밀하게 묘사했다.
그녀의 눈빛은 성숙해보이지 않고 입술 가장자리는 잔잔한 바람처럼 스치는 미소로 인해 약간 위로 올라갔는데,
무엇 때문에 미소를 짓고 있는지 관람자들을 궁금하게 만든다.


뵐플린은 <르네상스 미술>(1898)에서 모나리자의 미소를 이렇게 묘사했다.

“그것은 아주 살포시 지은 미소이다.
물 위를 스치는 바람결처럼 얼굴의 부드러운 표면 위를 스쳐가는 움직임이다.
빛과 그림자가 벌이는 유희와 귀를 기울여도 잘 들리지 않는 속삭이는 대화이다.”


뵐플린은 이런 개념과 표현이 16세기에 생겨난 것에 회의를 표하면서 미소가 16세기에는 유행하지 않았음을 지적했다.
모나리자의 갈색 눈은 광채를 드러내는 15세기 식의 눈길이 아니라 흐려진 눈길이다.
눈 아랫부분은 대단한 감수성과 피부 밑에 섬세한 신경이 숨어 있음을 말해준다.
눈썹이 없는 것이 눈에 띈다.
뵐플린은 눈두덩이의 부풀어오른 부분이 바로 높은 앞이마로 이어졌음을 지적하면서,
몬나 리자에게 눈썹이 없는 것은 당시에는 넓은 이마를 아름답다고 여겼기 때문에 <모나리자>의 눈썹과 이마 윗부분의 머리가 밀려 있는 것이라고 했다.
따라서 뵐플린은 몬나 리자의 취향이 철저히 15세기적임을 강조하지만, 바로 직후 유행이 달라졌음을 지적했다.
마드리드에 있는 <모나리자> 복제판에 그려진 눈썹을 예로 들며 이마는 도로 내려왔고, 얼굴을 강력하게 분할해주는 눈썹이 있는 것이 훨씬 아름답게 여겨지게 되었다고 설명했다.


눈과 동일한 색의 밤색 머리카락이 머리 위에 덮어쓴 물결치는 베일과 더불어 살짝 곱슬거리며 양쪽 볼로 내려온다.
그녀는 팔걸이가 있는 안락의자에 앉아 있다.
그토록 부드러운 상태에서 목을 꼿꼿이 하고 있는 것이 놀랍다.
분명 그녀는 당시 유행하던 자세를 취하고 있는 것이다.
지체 높음을 보여주려는 꼿꼿한 자세인 것이다.
기를란다요의 프레스코화에서 귀부인들이 이런 자세를 취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녀들은 누군가를 방문할 때 목을 꼿꼿하게 한다.
뒷날 이런 자세의 유행도 달라졌다.
그리고 달라진 자세 또한 초상화의 자세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끼쳤다.


레오나르도는 과거 화가들과는 달리 흉상이 아닌 반신상으로 그렸다.
약간 옆으로 앉은 모델의 상반신을 반쯤 틀어 얼굴이 거의 정면을 바라보게 묘사했다.
왼팔은 안락의자 팔걸이에 올려져 있고 오른팔은 안쪽에서 바깥쪽으로 뻗어나오면서 오른손이 왼손 위에 살며시 포개졌다.
편안한 동작이 모델의 성격이 차분함을 말해준다.
그는 입체감을 회화의 혼이라고 했으며 이 작품에서 그런 점을 볼 수 있다.
가까이서 보지 않으면 알 수 없을 정도로 표면이 아주 섬세하게 튀어나오고 들어갔기 때문이다.


조콘도는 방문자들에게 아내의 웃는 모습을 벽에 걸어놓고 보여줄 수 없어 구입하지 않았기 때문에 <모나리자>는 레오나르도가 소장하고 있었다.
레오나르도는 이 초상화에 제목을 붙이지 않았으나 <라 조콘다>로 알려졌다.
여러 해가 지난 후 프랑스 왕 프랑수아 1세가 4천 크라운을 주고 구입하여 자신의 퐁텐불루 궁전에 걸었다.
이후 이 초상화는 프랑스어로 <라 조콘드>로 불리웠고 영어로는 <모나리자>로 알려졌다.


<모나리자>에 관한 이야기는 바사리가 <미술가 열전>에 남긴 기록을 통해 전해진다.
하지만 그가 <미술가 열전>을 쓸 때 이 작품은 프랑스에 있었기 때문에 그는 생전에 이 작품을 본 적이 없다.
그래서 많은 학자들이 이에 관한 바사리의 기록에 신빙성을 두지 않는다.
작품의 주인공에 관해서는 여러 설이 있으며 그중 피렌체의 통치자 로렌초의 막내아들 줄리아노 데 메디치가 좋아한 여인라는 설이 유력하다.
레오나르도가 타계하기 몇 달 전 아라공의 추기경이 그림의 여인을 피렌체에서 보았다면서 줄리아노의 여인이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이 여인의 이름은 파시피카 브란다노가 된다.
그 밖에도 이 여인에 관한 설이 분분해서 이제는 누가 과연 실제 인물인지 밝히기란 불가능한 일이 되었다.
심지어 그림의 주인공은 남자이며 레오나르도의 자화상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지만, 이 작품은 여전히 <모나리자>로 불리고 있다.


바사리는 이 작품을 주문한 사람이 구입하지 않은 이유를 4년 동안 그렸지만 미완성이었기 때문이라고 적었다.
하지만 오늘날 루브르에 있는 이 작품을 보고 미완성이라고 판단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바사리의 말대로 당시 이것이 미완성이었다면 레오나르도는 이것을 프랑스로 갖고 가서 완성했을 것이다.
일부 학자들은 줄리아노가 레오나르도에게 <누드 모나리자>를 주문했다고 말한다.


레오나르도의 작품들이 대부분 수난을 겪었듯이 <모나리자>도 수세기 동안 수난을 겪었다.
패널 양쪽 7cm 가량이 잘려나갔으며 그 위에 덧칠되었고 얼굴 부분에는 연한 황록색 유약이 칠해졌다.
하지만 <모나리자>는 서양사람들의 가장 사랑받는 작품이 되었고 많은 예술가들이 이를 모티프로 갖가지 작품을 제작함으로써 레오나르도에게 존경을 표했다.


마르셀 뒤샹은 1919년에 레오나르도의 <모나리자>를 엽서로 프린트한 것을 사서 연필로 염소수염을 그려넣었다.
레디메이드ready made 혹은 기성품에 약간의 손질을 가한 것인데,
르네상스의 대표적인 양식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는 전통에 대한 반발을 상징한 행위였다.


앤디 워홀은 1963년에 모나리자의 크고 작은 여러 이미지를 회화적 목적으로 배열하고 채색하여 실크스크린으로 떴는데,
뒤샹과는 달리 레오나르도의 <모나리자>를 부정하는 의도는 아니었다.
하나의 이미지보다는 많은 이미지가 더 낫다는 ‘다다익선’의 논리와 더불어서 채색하기에 따라서 배열하기에 따라서 이미지에 변화가 생긴다는 관점을 표현한 것이다.
그는 반복되는 이미지를 통해 ‘변용’을 시도하면서 여러 개의 이미지를 통해 절대적인 이미지를 대중적인 이미지로 격하시켰지만, 여전히 르네상스 대가에게 존경심을 표했다.
팝아티스답게 워홀은 한 사람을 위한 초상이 아니라 대중을 위한 초상으로 변형시켰다.
반복과 변용은 그의 주요 미학이다.


재스퍼 존스는 1969년에 모나리자의 이미지를 숫자와 함께 사용한 작품을 제작했다.
이런 무관한 이미지의 병렬은 모더니즘에 대한 반발일 뿐이다.
새로운 시각예술의 자유와 폭을 확장하기 위해 모두가 익히 아는 모나리자가 사용되었을 뿐이다.


팝아티스트 로버트 아르네손은 1976년에 <콜로마 목욕을 하는 조지와 모나>를 조각품으로 제작했다.
실재했던 모나리자도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목욕을 즐겼을 것이다.
아르네손은 그녀를 우상화하는 데 반대하기 위해 모나리자를 대중적인 인물로 격하시켰는데 이는 팝아트의 본질이다.


로버트 라우센버그는 모나리자의 이미지를 사용하여 <무제>와 <리자 몽롱상태 #1>을 그렸다.
그는 <무제>에서 <모나리자>를 의자 등받침대로 사용함으로써 전통미를 부정했으며, <리자 몽롱상태 #1>에서는 르네상스의 대표적인 이미지를 지우며 거꾸로 오버랩되게 하여 새로운 회화의 언어로 변형시켰다.
이렇듯 후세 예술가들은 모나리자를 서양미술의 규범적 상징물로 보았으며 <모나리자>를 분쇄하고 파괴하며 부정해야만 새로운 회화가 가능하다고 믿었다.
그만큼 <모나리자>는 분쇄되지 않고 파괴되지 않으며 부정되지 않는 고유한 이미지로 자리매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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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루의 미라와 모티프


고대 북유럽 정신을 현대적으로 해석한 주요 인물로 꼽히는 노르웨이 화가 에드바르트 뭉크(1863~1944)는 독일 표현주의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화가 중 하나이다.
1885년 파리를 처음 방문한 후 그의 작품에는 인상주의의 영향이 나타났고, 1908년 이후에는 1888년 상징주의 운동 내부에서 주로 폴 고갱의 영향을 받은 젊은 예술가들이 결성한 나비 그룹과 후기 인상주의, 특히 반 고흐와 고갱, 툴루즈-로트레크의 영향이 두드러졌다.
그러나 뭉크가 다룬 주제에는 억제되지 않고 거의 발작에 가까운 감정이 담겨 있어 이후 등장한 표현주의 운동을 예견했다.


뭉크는 1893년에 <폭풍의 밤>을 그리면서 양손으로 귀를 틀어막은 여인의 모습을 그렸는데 이런 모습은 그해 그린 <절규>에서 더욱 극명하게 나타났다.
1974년 뉴욕 모마에 소장된 <폭풍의 밤>(뭉크 252)은 뭉크가 커다란 집의 창문을 밝은 색으로 칠하고 노란색으로 불빛을 강조한 후 왼편에 각기 다른 색의 드레스를 입은 여인들을 색을 쓱쓱 문질러 묘사하고 앞서 걸어오는 흰색 드레스를 입은 여인을 두드러지게 한 작품이다.
다른 여인들과 마찬가지로 앞서 걸어오는 여인도 양손을 귀에 대고 윙윙거리는 폭풍의 거센 소리를 듣지 않으려고 한다.


오슬로 내셔널 갤러리에 소장된 <절규>(뭉크 5, 255)에 대한 변형이 무려 50종이나 되어 뭉크가 이 모티프에 얼마나 집착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미국의 미술사학자 로버트 로젠블럼은 파리의 홈메 뮤지엄에 소장되어 있는 페루인의 미라(뭉크 254)가 뭉크에게 죽음에 사로잡힌 얼굴을 그리는 데 영감을 주었다고 주장했다.
페루인의 미라가 <절규>에 등장한 남자의 얼굴과 매우 흡사해서 그의 주장이 타당해 보이며,
죽음에 사로잡힌 사람의 모습이 죽음 그 자체로 나타나는 것도 당연해 보인다.


<절규>는 뭉크의 작품 중 가장 표현적이다.
그는 역동적인 색으로 자연의 꿈틀거리는 속성을 표현했으며 그것이 곧 자신의 내면세계임을 강조했다.
1891년 류머티즘에 의한 열병으로 니스에서 투병할 때의 일기는 <절규>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어느 날 저녁 두 친구와 함께 걷고 있었다.
해는 막 서산에 지고 있었으며 약간 우울한 기분이었다.
돌연히 하늘이 핏빛으로 물들었다.
난 걸음을 멈췄으며 탈진된 듯 느껴져 난간에 몸을 의지했다.
검정색에 가까운 진한 파란색 협만과 도시 위에 피의 불길이 넘실거렸고, 친구들은 계속 걷고 있었지만 나는 그냥 서서 불안에 떨고 있었다.
끊임없는 절규가 자연을 관통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뭉크는 1895년작 채색석판화(뭉크 253)에 “나는 끊임없는 절규가 자연을 관통하는 것을 느꼈다”라고 적었는데 그날의 체험을 잊지 못했다.
핏빛으로 넘실대는 황혼의 하늘과 진동하는 대지의 거친 호흡을 매우 표현적으로 묘사했으며, 표현 그 자체가 회화임을 입증하려는 듯이 보인다.
<절규>의 화면 중앙에 몸을 비틀면서 양손을 얼굴에 대고 눈과 입을 크게 뜬 것은 뭉크 자신의 모습이다.
원경을 다이내믹한 곡선으로 리드미컬하게 했는데 직선과 대조를 이룬다.
이 모티프는 유화보다는 석판화에서 더욱 효과가 크다.
현대인이 겪는 불안을 뭉크는 자신의 체험을 통해 공감할 수 있도록 표현했으며 <절규>는 오늘날에도 인형으로 제작되어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열린미술관 210)


문학에 관심이 많은 뭉크는 도스토예프스키와 키에르케고르의 저서를 탐독했다.
키에르케고르의 불안의 개념은 뭉크의 심상을 나타내기에 충분해 보인다.
키에르케고르는 파스칼에 의해 사유된 불안이 인간을 사로잡는 까닭에 관해 <불안의 개념>, <죽음에 이르는 병> 등을 통해 깊이 분석했다.
어떤 대상에 대한 공포와는 달리 불안은 무에서 비롯되는 인간 본성을 위협하는 근원적인 의식 또는 정서이다.
따라서 불안은 파악하기 어렵고 이에 집착하면 할수록 인간은 무기력해진다.
뭉크 뮤지엄 도서실에 소장되어 있는 그의 장서 가운데 ‘니체 전집’과 열네 권의 ‘키에르케고르의 전집’이 있어 두 철학자에 대한 관심이 컸음을 알 수 있다.
특히 키에르케고르 전집 제4권 <불안의 개념>은 여러 번 읽은 흔적이 있어, 그가 불안이라는 인간의 근원적, 감성적 의식에 집착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뭉크의 불안은 키에르케고르의 불안이라고 할 수 있다.
<절규> 외에도 <칼 요한 거리의 봄날 저녁>과 <절망>도 키에르케고르의 불안과 관련 있어 보인다.


고갱도 페루인의 미라를 여러 차례 드로잉했는데 그의 작품에서 이런 불안을 쉽게 발견한다.
그는 미라를 양손을 얼굴에 괴고 고뇌하는 여인의 모습으로 변형시켜 <브르통 이브>(고흐 460, 461)를 그렸다.
이 작품은 그가 아를에서 반 고흐와 함께 포도원을 배경으로 상이한 주제의 그림을 그린 <아를의 포도수확 (인간의 고뇌)>(고흐 26, 26-1)과 유사하다.
이 작품은 1888년 11월 4~11일에 유채로 그린 이것의 원래 제목은 <포도수확 혹은 가난한 여인들>이었는데 나중에 <아를의 포도수확 (인간의 고뇌)>로 바꿨다.
결이 고운 캔버스는 비쌌기 때문에 고갱은 아를에서 표면이 거칠게 짜여진 싸구려 마포 캔버스를 필로 사서 잘라 사용했다.
거친 표면을 물감으로 부드럽게 했지만 부분적으로는 거친 질감을 그대로 드러나게 해서 그 효과를 구성의 요소로 삼기도 했다.
이 작품에는 아를의 여인들이 아니라 브르통 여인들이 등장하고 있다.
삼각형의 붉은 빛이 감도는 보라색 포도밭에 두 여인이 허리를 굽히고 수확에 여념 없고 왼편에 서 있는 여인은 브르통 나막신을 신고 브르통 의상을 하고 있다.
양손으로 턱을 괸 여인의 모습은 그가 퐁타방에서 그린 그림에서 이미 사용한 것으로 샤를 라발에게 준 <과일이 있는 정물>(고흐 27)에서도 나타난 적이 있다.
결과적으로 고갱은 자신이 본 아를의 풍경을 묘사한 것이 아니라 브르통에서 그린 그림들을 염두에 두고 상상의 합성 이미지를 고안해낸 것이다.
<설교 후의 영상>에서 색을 평편하게 넓게 칠한 데 비해 여기서는 색을 얼룩처럼 사용했는데 색에 대한 새로운 시도이다.
그는 붓질만 한 게 아니라 문지르고 긁어 거친 색조를 만들었으며 표면이 거친 캔버스를 팔레트 나이프로 색을 바르기도 했다.
슈페네케에게 말했듯이 그의 목적은 특정한 메시지를 서술적으로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그려진 소설”을 만드는 것이었다.
그는 형상, 색, 상징을 통해 암시의 새로운 양식을 창안해내는 데 역점을 두었다.
“불쌍하고 의기소침한” 여인이라고 표현한 붉은 오렌지색 머리를 한 여인이 오른팔을 무릎에 대고 왼팔은 무릎에서 떨어진 불안정한 자세로 앉아 미래의 일에 관해 골똘히 생각하게 하고 옆에 검정색 겉옷을 입은 여인을 서 있게 해서 애도를 상징했다.


고갱은 아를에서 그린 여인의 모습을 변형시켜 <인간의 고뇌>(고흐464)를 수채화로 그렸고 이를 다시 이브의 모습으로 변형시켰으며 다시금 <삶과 죽음>(고흐 463)에서 삶을 상징하는 누드와 병렬해서 사용했다.


<브르통 이브>는 나무 뒤에 있는 뱀의 위협을 받고 있다.
그는 이브의 몸 외곽을 검정색으로 칠했다. 이것은 <인간의 고뇌>와 함께 1889년의 파리 만국박람회의 독자적 전시장에서 소개되었다.
전시장은 볼피니에 의해 아트 카페에 마련되었고 고갱 외에도 베르나르, 라발, 슈페네케, 그리고 그 밖의 예술가들도 출품했다.
전시회 카탈로그 앞면에 고갱의 <검은 바위에서>(고흐 462)가 장식되었다.


<브르통 이브>의 모습은 고갱이 1889년에 참피나무에 부조와 채색으로 제작한 <사랑하라, 그러면 행복해질 것이다>(고흐 475)에서 더욱 극적으로 나타났다.
이 작품을 그는 1898년에 화선지를 이중으로 붙인 후 채색목판화(고흐 849)로 떴는데 여기에서도 불안한 여인의 모습이 있다.
그는 화선지에 검정색과 황토색으로 프린트한 채색목판화를 1902년에 <모던 정신과 가톨릭주의>의 안쪽 표지(고흐 884)로 사용하기도 했다.
고갱은 동일한 이미지를 1889년에 아연 판화와 목판화로 제작한 <인간의 고뇌>(고흐 850, 851)에서도 거듭 사용했다.


뭉크와 마찬가지로 고갱도 불안의 개념에 집착했는데 <브르통 이브>의 모습은 그해 그가 그린 <니르바나, 메이어 드 한의 초상>(고흐 440)에서도 나타난다.
그는 이 작품에서 드 한의 모습을 수도승처럼 은유적으로 묘사하고 배경에 브르통 이브를 삽입했다.
이브의 유혹에도 아랑곳하지 않는 드 한의 모습은 단호하며 이미 이 세상 사람의 모습이 아닌 것으로 보인다.
그는 말년에 야심을 갖고 그린 대작 <우리는 어디서 왔으며, 누구이고, 어디로 가는가?>(고흐 821, 820, 821-5)에서도 이 이미지를 사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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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라크루아와 폴 고갱


1888년 11월 16일경 고갱이 아를에서 반 고흐의 노란집에 묵고 있을 때 모호한 구성의 그림을 그렸는데 <건초 안에서, 하루의 열기 속에서>이다.
반 고흐는 동생 테오에게 보낸 편지에 “건초와 돼지가 있는 가운데 누드 여인”이라고 언급했다.
해석하고 읽어내기 어려운 작품이다.
상단 끝에 돌로 된 벽이 조금 보이고 여인은 허리까지 알몸을 드러낸 채 등을 돌렸는데, 등과 어깨는 하얀 피부지만 팔꿈치 아래 왼손은 벌겋게 탔다.
화면 아래 왼편에 핑크빛 오렌지색의 돼지 몸통이 보이고 여인 오른편에도 돼지 뒷부분과 꼬리가 보인다.
여인의 허리 아래 갈퀴가 보여 여인이 작업 도중에 낮잠을 자고 있는 것으로 짐작된다.
하지만 여인의 모습이 모호해서 앉아 있는 것인지 서 있는 것인지 가늠하기 어렵다.
아를로 오기 전 고갱이 브르타뉴에서 드로잉한 여인의 기억을 되새겨 이 작품에 삽입한 것으로 추정된다.
여인의 모습은 프랑스의 낭만주의 화가 외젠 들라크루아의 <사르다나팔루스의 죽음>에서의 누드를 상기시킨다.


<사르다나팔루스의 죽음>은 들라크루아가 영국을 여행한 후 연극에 대한 이해가 한층 많아진 후 그린 것으로 바이런의 희곡 <사르다나팔루스>(1821)에서 영감을 받아 그린 것이다.
들라크루아는 1828년 살롱전의 소개 책자에 이 작품에 관해 적었다.


“사르다나팔루스는 거대한 화장대 위에 놓인 화려한 침대에 누워 화관들과 궁정의 근위병들에게 그의 처첩들과 시종들 그리고 그가 총애하던 말들과 개들까지 모조리 목을 자르라고 명한다.
그의 쾌락에 봉사했던 그 어떤 것도 그가 죽은 후 살아남아서는 안 되었던 것이다.”


바이런의 희곡은 수도 니네베가 적군의 수중에 떨어지자 감연히 분신자결을 택한 아시리아의 전설적인 군주 사르다나팔루스를 그리고 있다.
이 작품은 아시리아 중심으로 왕 옆에서 죽음을 기다리는 미르하는 두 팔을 활짝 펴고 침대에 엎드린 채 자신의 목을 자르려 다가오는 근위병들에게 등을 내보이고 있는 구성이다.
요란한 살육의 장면들이 적색, 오렌지색, 황색, 갈색 등으로 현란하게 묘사된 이 작품은 고전주의에 대한 형식 파괴를 보여주는 낭만주의의 상징적 작품이 되었다.
당시 화가들은 발루아 지방의 역사 혹은 16, 17세기의 영국의 역사에서 비극적인 사실들을 찾아내어 이런 것들을 극적인 장면들로 묘사했다.
살롱전에 출품된 작품들은 살인이나 전투, 학살장면 일색이었다.
그래서 일부 관람자들은 화가들이 대중을 타락시켜서 방탕함에 짓눌리게 한다고 비난했다.


고갱은 1888년 크리스마스에 아를을 떠나 파리로 간 후 그곳에서 두 달 머물다가 퐁타방으로 갔다.
브뤼셀과 볼피니에서의 전시가 경제적으로 실패하자 빚이 늘었고 우울해졌다.
퐁타방은 돈이 적게 들어 그에게는 제2의 고향과도 같은 시골이었다.
그러나 관광지가 되어버린 퐁타방에 계속 머무는 것도 창작에 도움이 되지 않아 1889년 10월 근처의 르 풀뒤로 갔다.
바닷가의 이 작은 마을은 화가들에게 제2의 브르타뉴로 부상되고 있었다.


그는 그곳에 안주하기 전 그곳을 자주 찾았고 1889년 봄에 <파도 속에서>를 그렸는데 <사르다나팔루스의 죽음>과 <건초 안에서, 하루의 열기 속에서>와 유사한 형식의 작품이다.
여인이 수영하는 장면을 그리면서 파도와 정면으로 마주치게 해서 삶의 즐거움을 맞이하는 의미를 담았다.
고갱은 이원론적 사상을 갖고 있었는데 삶과 죽음, 정신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인 것이다.
그가 르 풀뒤에서 작업한 작품들은 이런 이원론에 근거한다.
등을 관람자에게 돌린 여인의 모습은 <신비롭게 보이는>과 <큄퍼 주전자가 있는 정물>에서도 삽입되었다.


고갱은 르 풀뒤에서의 생활에도 만족하지 못하고 타히티로 가기로 결심했다.
그가 타히티행을 결정한 것은 1890년 여름이 다할 무렵으로 반 고흐가 자살한 그해 7월 27일이 조금 지난 후였다.
그는 르 풀뒤에서 르동에게 편지를 썼다.


“마다가스카르가 좀더 유럽 가까이 있지만은 타히티로 가려고 하며 그곳에서 여생을 마치려고 합니다.
선생이 좋아하는 저의 예술이 먼 곳에 심어지고 저 자신의 즐거움을 위해 원시적이고 야만적인 상태에서 성장되도록 하겠습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저는 고요와 평화의 상태에서 지내야 만합니다.
사람들이 ‘고갱은 끝났어. 그가 보여줄 것이란 더 이상 없어’라고 말하면서 저의 명예를 훼손하더라도 상관하지 않겠습니다.”(1890.9)


고갱이 타히티로 간 이유 가운데 그의 경제적 어려움이 가장 컸다.
그는 타히티에서는 거의 무일푼으로 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는 1891년 2월 23일 월요일 드루오 호텔에서 작품 서른 점을 경매에 붙여 자금을 마련하기로 하고 한 달반 전부터 언론과 잡지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친구들을 동원하여 이 일을 대대적으로 알렸다.
고갱의 친구 모리스가 시인 스테판 말라르메로 하여금 미술평론가 옥타브 미르보에게 고갱의 작품에 호감을 주는 글을 청탁했다.
미르보의 글이 전시회가 열리기 한 주 전 1891년 2월 16일 <에코 드 파리>에 발표되었고, 사흘 후 일간지 <르 피가로>에 장문의 글이 기고되었으며, 경매 카탈로그에도 기재되었다.
미르보는 고갱을 “화가, 시인, 사도, 악마”라고 적으면서 회화의 그리스도라고 추켜세웠다.
미르보는 잉카의 후예인 고갱의 작품에서 야만적 아름다움과 모호한 상징주의의 요소가 발견되며 절대적인 고립을 위해 마르티니크로 간 적이 있는 고갱은 이제 자신의 꿈의 세계에 좀더 근접한 남태평양의 타히티로 가는 것이라고 하면서 어디를 가든지 그의 여정에 관심을 갖는다고 했다.
고갱은 미르보의 글에 대단히 만족해하며 그에게 직접 감사를 표했다.


시인이며 미술평론가 알베르 오리에도 고갱에 관한 글을 발표했다.
오리에도 고갱을 회화에 있어서 새로운 상징주의를 개척한 “축복받고 영감을 가진 예언자”라고 극찬하면서 회화에서의 상징주의 선구자라고 소개했다.
이렇게 자신의 명성을 쌓은 고갱은 정부 공무원과 사회적으로 지명도가 있는 인사들에게 편지를 보내 자신을 도와달라고 청했는데,
그가 편지를 보낸 인사들 중에는 공화당 대변인이자 예술부 장관 안토냉 프루스트와 철학자이며 역사가 에르네스트 르낭도 포함되었다.
고갱은 프루스트에게 ‘타히티에 대한 정부 후원 미션’을 신청했으며 정치인으로 훗날 국무총리가 된 조르주 클레망소는 “타히티의 풍경과 풍물을 그리고 연구”하는 데 필요한 자금을 받게 해주었다.
고갱은 예술원으로부터 마르세유에서 타히티행 배표를 얻을 수 있었고, 식민지 책임자에게 보내는 소개장도 갖게 되었다.


고갱은 1891년 4월 1일 마르세유에서 배를 타고 타히티로 향했다.
그가 탄 배가 누메아에서 일주일 정박하고 타히티에 도착한 것은 6월 9일이었다. 타히티는 남태평양 중부, 프랑스령 폴리네시아의 소시에테 제도 가운데 동쪽 윈드워드 제도에서 가장 큰 섬으로 1767년에 발견되어 프랑스 식민지가 된 후 프랑스 관리와 군인이 통치하던 곳이다.
고갱의 표현으로 하면 “신비스러운 것들이 요염한 조화를 이루는 환희와 적막”을 맛볼 수 있는 타히티에서의 생활에 그는 만족해했다.
그는 그곳에서 <바다 근처>를 그렸는데 등을 돌린 동일한 여인이 삽입되어 있어 그가 실재에 상상의 인물을 삽입했음을 보고 또한 이 이미지에 집착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1893~94년에 제작한 판화에서도 이 이미지를 삽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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