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서 가장 인기 있는 그림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모나리자>는 서양미술사에서 가장 유명한 작품으로 파리의 루브르 뮤지엄을 찾는 사람들이 가장 보고 싶어 하는 것이다.
이 작품은 레오나르도가 1503~6년에 그린 것으로 1512년 시뇨리의 일원이 된 프란체스코 델 조콘도의 아내 초상이다.
조콘도는 실크 교역으로 부자가 된 사람이었다.
그는 1495년 몬나 리자라는 과부 리자 디 게라르디니를 아내로 맞았다.
그녀는 아이를 하나 낳았지만 1499년에 죽었는데 이것이 그녀의 미소 이면에 담겨진 의미가 된 것 같다.
레오나르도는 1503~6년 동안 여러 차례 몬나 리자로 하여금 자신의 작업장으로 와서 포즈를 취하게 했는데,
자신의 예술의 비밀과 뉘앙스를 여인의 초상화를 통해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레오나르도는 몬나 리자를 부드러운 명암으로 조명하면서 배경에 나무, 물, 산, 바다를 그려넣었다.
그녀는 새틴을 단 벨벳 의상을 입었고, 레오나르도는 특유의 기교로 의상의 우미한 주름을 세밀하게 묘사했다.
그녀의 눈빛은 성숙해보이지 않고 입술 가장자리는 잔잔한 바람처럼 스치는 미소로 인해 약간 위로 올라갔는데,
무엇 때문에 미소를 짓고 있는지 관람자들을 궁금하게 만든다.


뵐플린은 <르네상스 미술>(1898)에서 모나리자의 미소를 이렇게 묘사했다.

“그것은 아주 살포시 지은 미소이다.
물 위를 스치는 바람결처럼 얼굴의 부드러운 표면 위를 스쳐가는 움직임이다.
빛과 그림자가 벌이는 유희와 귀를 기울여도 잘 들리지 않는 속삭이는 대화이다.”


뵐플린은 이런 개념과 표현이 16세기에 생겨난 것에 회의를 표하면서 미소가 16세기에는 유행하지 않았음을 지적했다.
모나리자의 갈색 눈은 광채를 드러내는 15세기 식의 눈길이 아니라 흐려진 눈길이다.
눈 아랫부분은 대단한 감수성과 피부 밑에 섬세한 신경이 숨어 있음을 말해준다.
눈썹이 없는 것이 눈에 띈다.
뵐플린은 눈두덩이의 부풀어오른 부분이 바로 높은 앞이마로 이어졌음을 지적하면서,
몬나 리자에게 눈썹이 없는 것은 당시에는 넓은 이마를 아름답다고 여겼기 때문에 <모나리자>의 눈썹과 이마 윗부분의 머리가 밀려 있는 것이라고 했다.
따라서 뵐플린은 몬나 리자의 취향이 철저히 15세기적임을 강조하지만, 바로 직후 유행이 달라졌음을 지적했다.
마드리드에 있는 <모나리자> 복제판에 그려진 눈썹을 예로 들며 이마는 도로 내려왔고, 얼굴을 강력하게 분할해주는 눈썹이 있는 것이 훨씬 아름답게 여겨지게 되었다고 설명했다.


눈과 동일한 색의 밤색 머리카락이 머리 위에 덮어쓴 물결치는 베일과 더불어 살짝 곱슬거리며 양쪽 볼로 내려온다.
그녀는 팔걸이가 있는 안락의자에 앉아 있다.
그토록 부드러운 상태에서 목을 꼿꼿이 하고 있는 것이 놀랍다.
분명 그녀는 당시 유행하던 자세를 취하고 있는 것이다.
지체 높음을 보여주려는 꼿꼿한 자세인 것이다.
기를란다요의 프레스코화에서 귀부인들이 이런 자세를 취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녀들은 누군가를 방문할 때 목을 꼿꼿하게 한다.
뒷날 이런 자세의 유행도 달라졌다.
그리고 달라진 자세 또한 초상화의 자세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끼쳤다.


레오나르도는 과거 화가들과는 달리 흉상이 아닌 반신상으로 그렸다.
약간 옆으로 앉은 모델의 상반신을 반쯤 틀어 얼굴이 거의 정면을 바라보게 묘사했다.
왼팔은 안락의자 팔걸이에 올려져 있고 오른팔은 안쪽에서 바깥쪽으로 뻗어나오면서 오른손이 왼손 위에 살며시 포개졌다.
편안한 동작이 모델의 성격이 차분함을 말해준다.
그는 입체감을 회화의 혼이라고 했으며 이 작품에서 그런 점을 볼 수 있다.
가까이서 보지 않으면 알 수 없을 정도로 표면이 아주 섬세하게 튀어나오고 들어갔기 때문이다.


조콘도는 방문자들에게 아내의 웃는 모습을 벽에 걸어놓고 보여줄 수 없어 구입하지 않았기 때문에 <모나리자>는 레오나르도가 소장하고 있었다.
레오나르도는 이 초상화에 제목을 붙이지 않았으나 <라 조콘다>로 알려졌다.
여러 해가 지난 후 프랑스 왕 프랑수아 1세가 4천 크라운을 주고 구입하여 자신의 퐁텐불루 궁전에 걸었다.
이후 이 초상화는 프랑스어로 <라 조콘드>로 불리웠고 영어로는 <모나리자>로 알려졌다.


<모나리자>에 관한 이야기는 바사리가 <미술가 열전>에 남긴 기록을 통해 전해진다.
하지만 그가 <미술가 열전>을 쓸 때 이 작품은 프랑스에 있었기 때문에 그는 생전에 이 작품을 본 적이 없다.
그래서 많은 학자들이 이에 관한 바사리의 기록에 신빙성을 두지 않는다.
작품의 주인공에 관해서는 여러 설이 있으며 그중 피렌체의 통치자 로렌초의 막내아들 줄리아노 데 메디치가 좋아한 여인라는 설이 유력하다.
레오나르도가 타계하기 몇 달 전 아라공의 추기경이 그림의 여인을 피렌체에서 보았다면서 줄리아노의 여인이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이 여인의 이름은 파시피카 브란다노가 된다.
그 밖에도 이 여인에 관한 설이 분분해서 이제는 누가 과연 실제 인물인지 밝히기란 불가능한 일이 되었다.
심지어 그림의 주인공은 남자이며 레오나르도의 자화상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지만, 이 작품은 여전히 <모나리자>로 불리고 있다.


바사리는 이 작품을 주문한 사람이 구입하지 않은 이유를 4년 동안 그렸지만 미완성이었기 때문이라고 적었다.
하지만 오늘날 루브르에 있는 이 작품을 보고 미완성이라고 판단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바사리의 말대로 당시 이것이 미완성이었다면 레오나르도는 이것을 프랑스로 갖고 가서 완성했을 것이다.
일부 학자들은 줄리아노가 레오나르도에게 <누드 모나리자>를 주문했다고 말한다.


레오나르도의 작품들이 대부분 수난을 겪었듯이 <모나리자>도 수세기 동안 수난을 겪었다.
패널 양쪽 7cm 가량이 잘려나갔으며 그 위에 덧칠되었고 얼굴 부분에는 연한 황록색 유약이 칠해졌다.
하지만 <모나리자>는 서양사람들의 가장 사랑받는 작품이 되었고 많은 예술가들이 이를 모티프로 갖가지 작품을 제작함으로써 레오나르도에게 존경을 표했다.


마르셀 뒤샹은 1919년에 레오나르도의 <모나리자>를 엽서로 프린트한 것을 사서 연필로 염소수염을 그려넣었다.
레디메이드ready made 혹은 기성품에 약간의 손질을 가한 것인데,
르네상스의 대표적인 양식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는 전통에 대한 반발을 상징한 행위였다.


앤디 워홀은 1963년에 모나리자의 크고 작은 여러 이미지를 회화적 목적으로 배열하고 채색하여 실크스크린으로 떴는데,
뒤샹과는 달리 레오나르도의 <모나리자>를 부정하는 의도는 아니었다.
하나의 이미지보다는 많은 이미지가 더 낫다는 ‘다다익선’의 논리와 더불어서 채색하기에 따라서 배열하기에 따라서 이미지에 변화가 생긴다는 관점을 표현한 것이다.
그는 반복되는 이미지를 통해 ‘변용’을 시도하면서 여러 개의 이미지를 통해 절대적인 이미지를 대중적인 이미지로 격하시켰지만, 여전히 르네상스 대가에게 존경심을 표했다.
팝아티스답게 워홀은 한 사람을 위한 초상이 아니라 대중을 위한 초상으로 변형시켰다.
반복과 변용은 그의 주요 미학이다.


재스퍼 존스는 1969년에 모나리자의 이미지를 숫자와 함께 사용한 작품을 제작했다.
이런 무관한 이미지의 병렬은 모더니즘에 대한 반발일 뿐이다.
새로운 시각예술의 자유와 폭을 확장하기 위해 모두가 익히 아는 모나리자가 사용되었을 뿐이다.


팝아티스트 로버트 아르네손은 1976년에 <콜로마 목욕을 하는 조지와 모나>를 조각품으로 제작했다.
실재했던 모나리자도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목욕을 즐겼을 것이다.
아르네손은 그녀를 우상화하는 데 반대하기 위해 모나리자를 대중적인 인물로 격하시켰는데 이는 팝아트의 본질이다.


로버트 라우센버그는 모나리자의 이미지를 사용하여 <무제>와 <리자 몽롱상태 #1>을 그렸다.
그는 <무제>에서 <모나리자>를 의자 등받침대로 사용함으로써 전통미를 부정했으며, <리자 몽롱상태 #1>에서는 르네상스의 대표적인 이미지를 지우며 거꾸로 오버랩되게 하여 새로운 회화의 언어로 변형시켰다.
이렇듯 후세 예술가들은 모나리자를 서양미술의 규범적 상징물로 보았으며 <모나리자>를 분쇄하고 파괴하며 부정해야만 새로운 회화가 가능하다고 믿었다.
그만큼 <모나리자>는 분쇄되지 않고 파괴되지 않으며 부정되지 않는 고유한 이미지로 자리매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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