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루의 미라와 모티프


고대 북유럽 정신을 현대적으로 해석한 주요 인물로 꼽히는 노르웨이 화가 에드바르트 뭉크(1863~1944)는 독일 표현주의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화가 중 하나이다.
1885년 파리를 처음 방문한 후 그의 작품에는 인상주의의 영향이 나타났고, 1908년 이후에는 1888년 상징주의 운동 내부에서 주로 폴 고갱의 영향을 받은 젊은 예술가들이 결성한 나비 그룹과 후기 인상주의, 특히 반 고흐와 고갱, 툴루즈-로트레크의 영향이 두드러졌다.
그러나 뭉크가 다룬 주제에는 억제되지 않고 거의 발작에 가까운 감정이 담겨 있어 이후 등장한 표현주의 운동을 예견했다.


뭉크는 1893년에 <폭풍의 밤>을 그리면서 양손으로 귀를 틀어막은 여인의 모습을 그렸는데 이런 모습은 그해 그린 <절규>에서 더욱 극명하게 나타났다.
1974년 뉴욕 모마에 소장된 <폭풍의 밤>(뭉크 252)은 뭉크가 커다란 집의 창문을 밝은 색으로 칠하고 노란색으로 불빛을 강조한 후 왼편에 각기 다른 색의 드레스를 입은 여인들을 색을 쓱쓱 문질러 묘사하고 앞서 걸어오는 흰색 드레스를 입은 여인을 두드러지게 한 작품이다.
다른 여인들과 마찬가지로 앞서 걸어오는 여인도 양손을 귀에 대고 윙윙거리는 폭풍의 거센 소리를 듣지 않으려고 한다.


오슬로 내셔널 갤러리에 소장된 <절규>(뭉크 5, 255)에 대한 변형이 무려 50종이나 되어 뭉크가 이 모티프에 얼마나 집착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미국의 미술사학자 로버트 로젠블럼은 파리의 홈메 뮤지엄에 소장되어 있는 페루인의 미라(뭉크 254)가 뭉크에게 죽음에 사로잡힌 얼굴을 그리는 데 영감을 주었다고 주장했다.
페루인의 미라가 <절규>에 등장한 남자의 얼굴과 매우 흡사해서 그의 주장이 타당해 보이며,
죽음에 사로잡힌 사람의 모습이 죽음 그 자체로 나타나는 것도 당연해 보인다.


<절규>는 뭉크의 작품 중 가장 표현적이다.
그는 역동적인 색으로 자연의 꿈틀거리는 속성을 표현했으며 그것이 곧 자신의 내면세계임을 강조했다.
1891년 류머티즘에 의한 열병으로 니스에서 투병할 때의 일기는 <절규>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어느 날 저녁 두 친구와 함께 걷고 있었다.
해는 막 서산에 지고 있었으며 약간 우울한 기분이었다.
돌연히 하늘이 핏빛으로 물들었다.
난 걸음을 멈췄으며 탈진된 듯 느껴져 난간에 몸을 의지했다.
검정색에 가까운 진한 파란색 협만과 도시 위에 피의 불길이 넘실거렸고, 친구들은 계속 걷고 있었지만 나는 그냥 서서 불안에 떨고 있었다.
끊임없는 절규가 자연을 관통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뭉크는 1895년작 채색석판화(뭉크 253)에 “나는 끊임없는 절규가 자연을 관통하는 것을 느꼈다”라고 적었는데 그날의 체험을 잊지 못했다.
핏빛으로 넘실대는 황혼의 하늘과 진동하는 대지의 거친 호흡을 매우 표현적으로 묘사했으며, 표현 그 자체가 회화임을 입증하려는 듯이 보인다.
<절규>의 화면 중앙에 몸을 비틀면서 양손을 얼굴에 대고 눈과 입을 크게 뜬 것은 뭉크 자신의 모습이다.
원경을 다이내믹한 곡선으로 리드미컬하게 했는데 직선과 대조를 이룬다.
이 모티프는 유화보다는 석판화에서 더욱 효과가 크다.
현대인이 겪는 불안을 뭉크는 자신의 체험을 통해 공감할 수 있도록 표현했으며 <절규>는 오늘날에도 인형으로 제작되어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열린미술관 210)


문학에 관심이 많은 뭉크는 도스토예프스키와 키에르케고르의 저서를 탐독했다.
키에르케고르의 불안의 개념은 뭉크의 심상을 나타내기에 충분해 보인다.
키에르케고르는 파스칼에 의해 사유된 불안이 인간을 사로잡는 까닭에 관해 <불안의 개념>, <죽음에 이르는 병> 등을 통해 깊이 분석했다.
어떤 대상에 대한 공포와는 달리 불안은 무에서 비롯되는 인간 본성을 위협하는 근원적인 의식 또는 정서이다.
따라서 불안은 파악하기 어렵고 이에 집착하면 할수록 인간은 무기력해진다.
뭉크 뮤지엄 도서실에 소장되어 있는 그의 장서 가운데 ‘니체 전집’과 열네 권의 ‘키에르케고르의 전집’이 있어 두 철학자에 대한 관심이 컸음을 알 수 있다.
특히 키에르케고르 전집 제4권 <불안의 개념>은 여러 번 읽은 흔적이 있어, 그가 불안이라는 인간의 근원적, 감성적 의식에 집착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뭉크의 불안은 키에르케고르의 불안이라고 할 수 있다.
<절규> 외에도 <칼 요한 거리의 봄날 저녁>과 <절망>도 키에르케고르의 불안과 관련 있어 보인다.


고갱도 페루인의 미라를 여러 차례 드로잉했는데 그의 작품에서 이런 불안을 쉽게 발견한다.
그는 미라를 양손을 얼굴에 괴고 고뇌하는 여인의 모습으로 변형시켜 <브르통 이브>(고흐 460, 461)를 그렸다.
이 작품은 그가 아를에서 반 고흐와 함께 포도원을 배경으로 상이한 주제의 그림을 그린 <아를의 포도수확 (인간의 고뇌)>(고흐 26, 26-1)과 유사하다.
이 작품은 1888년 11월 4~11일에 유채로 그린 이것의 원래 제목은 <포도수확 혹은 가난한 여인들>이었는데 나중에 <아를의 포도수확 (인간의 고뇌)>로 바꿨다.
결이 고운 캔버스는 비쌌기 때문에 고갱은 아를에서 표면이 거칠게 짜여진 싸구려 마포 캔버스를 필로 사서 잘라 사용했다.
거친 표면을 물감으로 부드럽게 했지만 부분적으로는 거친 질감을 그대로 드러나게 해서 그 효과를 구성의 요소로 삼기도 했다.
이 작품에는 아를의 여인들이 아니라 브르통 여인들이 등장하고 있다.
삼각형의 붉은 빛이 감도는 보라색 포도밭에 두 여인이 허리를 굽히고 수확에 여념 없고 왼편에 서 있는 여인은 브르통 나막신을 신고 브르통 의상을 하고 있다.
양손으로 턱을 괸 여인의 모습은 그가 퐁타방에서 그린 그림에서 이미 사용한 것으로 샤를 라발에게 준 <과일이 있는 정물>(고흐 27)에서도 나타난 적이 있다.
결과적으로 고갱은 자신이 본 아를의 풍경을 묘사한 것이 아니라 브르통에서 그린 그림들을 염두에 두고 상상의 합성 이미지를 고안해낸 것이다.
<설교 후의 영상>에서 색을 평편하게 넓게 칠한 데 비해 여기서는 색을 얼룩처럼 사용했는데 색에 대한 새로운 시도이다.
그는 붓질만 한 게 아니라 문지르고 긁어 거친 색조를 만들었으며 표면이 거친 캔버스를 팔레트 나이프로 색을 바르기도 했다.
슈페네케에게 말했듯이 그의 목적은 특정한 메시지를 서술적으로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그려진 소설”을 만드는 것이었다.
그는 형상, 색, 상징을 통해 암시의 새로운 양식을 창안해내는 데 역점을 두었다.
“불쌍하고 의기소침한” 여인이라고 표현한 붉은 오렌지색 머리를 한 여인이 오른팔을 무릎에 대고 왼팔은 무릎에서 떨어진 불안정한 자세로 앉아 미래의 일에 관해 골똘히 생각하게 하고 옆에 검정색 겉옷을 입은 여인을 서 있게 해서 애도를 상징했다.


고갱은 아를에서 그린 여인의 모습을 변형시켜 <인간의 고뇌>(고흐464)를 수채화로 그렸고 이를 다시 이브의 모습으로 변형시켰으며 다시금 <삶과 죽음>(고흐 463)에서 삶을 상징하는 누드와 병렬해서 사용했다.


<브르통 이브>는 나무 뒤에 있는 뱀의 위협을 받고 있다.
그는 이브의 몸 외곽을 검정색으로 칠했다. 이것은 <인간의 고뇌>와 함께 1889년의 파리 만국박람회의 독자적 전시장에서 소개되었다.
전시장은 볼피니에 의해 아트 카페에 마련되었고 고갱 외에도 베르나르, 라발, 슈페네케, 그리고 그 밖의 예술가들도 출품했다.
전시회 카탈로그 앞면에 고갱의 <검은 바위에서>(고흐 462)가 장식되었다.


<브르통 이브>의 모습은 고갱이 1889년에 참피나무에 부조와 채색으로 제작한 <사랑하라, 그러면 행복해질 것이다>(고흐 475)에서 더욱 극적으로 나타났다.
이 작품을 그는 1898년에 화선지를 이중으로 붙인 후 채색목판화(고흐 849)로 떴는데 여기에서도 불안한 여인의 모습이 있다.
그는 화선지에 검정색과 황토색으로 프린트한 채색목판화를 1902년에 <모던 정신과 가톨릭주의>의 안쪽 표지(고흐 884)로 사용하기도 했다.
고갱은 동일한 이미지를 1889년에 아연 판화와 목판화로 제작한 <인간의 고뇌>(고흐 850, 851)에서도 거듭 사용했다.


뭉크와 마찬가지로 고갱도 불안의 개념에 집착했는데 <브르통 이브>의 모습은 그해 그가 그린 <니르바나, 메이어 드 한의 초상>(고흐 440)에서도 나타난다.
그는 이 작품에서 드 한의 모습을 수도승처럼 은유적으로 묘사하고 배경에 브르통 이브를 삽입했다.
이브의 유혹에도 아랑곳하지 않는 드 한의 모습은 단호하며 이미 이 세상 사람의 모습이 아닌 것으로 보인다.
그는 말년에 야심을 갖고 그린 대작 <우리는 어디서 왔으며, 누구이고, 어디로 가는가?>(고흐 821, 820, 821-5)에서도 이 이미지를 사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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