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의 종말 이후 - 컨템퍼러리 미술과 역사의 울타리 동시대 미학 1
아서 단토 지음, 이성훈 외 옮김 / 미술문화 / 200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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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리양,


우선 좋은 글을 계속해서 기고해주어 고마워요.
줄리양의 글은 읽는 재미가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논조가 명료하고 수학처럼 논리적이라서 마음에 들어요.
지성인이라면 의당 그렇게 사고를 해야 하지만 요즘 워낙 엉뚱하게 글을 쓰는 사람들이 많아서 ...

워홀의 생년월일에 관한 질문에 대한 답은 내가 쓴 <워홀과 친구들>에 적어놓은 것을 여기에 언급하는 것으로 대신하지요.

"워홀은 자신의 출생연도에 대해서도 1929년 혹은 1930년이라고 엇갈린 주장을 하면서 출생 증명서가 잘못 기록된 것이라고 우겼지만 사람들은 그가 태어난 해를 1928년으로 알고 있다."

참고로 워홀의 큰형 Paul은 1922년에, 작은형 John은 1925년에 탸어났습니다.


단토의 <예술의 종말 이후>를 읽었다니 기쁨니다.
꼭 일어야 할 책입니다.
내가 처음 그 책을 읽었을 때 시야가 아주 넓어지는 걸 경험했습니다.
그리고 그 책을 번역하느라 다시 꼼꼼이 읽을 때는 좀더 진전되어야 부분에서는 단토도 우물쭈물하기도 했구나 하고 느꼈습니다.
그러나 워낙 철학으로 무장된 분이라서 감히 반박할 엄두는 나지 못했고,
그보다는 그분이 준 가르침이 너무 크고 흡족해서 약간 회의를 가졌던 것 뿐이었습니다.

줄리양의 글 대부분은 단토의 입장이며 정확하게 내용을 파악한 걸로 보입니다.
단토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key word는 변용입니다.
성경에서 온 말이지요.
예수가 가까운 제자 몇 사람과 함께 산으로 올라갔을 때 제자들의 눈에 스승 예수가 모세와 엘리야와 같은 예언자로 보였다는 기록에서 연유된 말입니다.
같이 밥먹고, 근래 예수에 관한 영화를 보면 함께 축구를 하다가 넘어져 뒹굴기도 한 그 스승과 함께 산에 올랐습니다.
평소와 다름없는 스승인데 그날은 그들에게 예언자의 모습으로 보였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실체는 그대로인데 보는 사람의 심적 변화에 따라서 그 실체의 본질이 다르게 보인 것입니다.
이것이 변용입니다.
그리고 단토가 워홀의 브릴로 상자와 관련에 언급한 그 변용의 의미이기도 합니다.
슈퍼마켓의 비누상자 브릴로와 워홀이 화랑에서 전시한 브릴로는 똑같은 형태이지만 보는 이에 따라서 변용된다는 것입니다.
예수가 예루살렘의 거리를 거닐 때 그와 옷깃을 스친 사람도 있었을 것이고 그에게 다가가 길을 물어본 사람도 있었을 것입니다.
나사렛 목수의 아들인 그를 잘 아는 나사렛 사람들은 그를 이웃에 사는 사람과 똑같이 대하면서 그를 평범한 사람으로 알았을 것입니다.
워홀이 화랑에 브릴로 상자를 전시했더라도 많은 사람은 그것을 슈퍼마켓에 있는 브릴로 상자과 동일한 평범한 것으로 여겼을 것입니다.

변용은 사물 자체가 일으킨 것이 아니라 소수의 사람의 눈을 통해 그렇게 나타난 현상입니다.
특히 단토의 두 눈에 변용이 보였던 것이지요.
그린버그나 곰브리치 같은 사람들만 해도 그것에서 변용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러고보면 단토에게 일어난 퍽 개인적인 사건이었지요.
예수를 예언자로 본 것이 몇몇 제자들의 경험이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말입니다.
그러니까 단토의 변용의 체험은 거의 종교적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헤겔이 예언한 대로 한 사람이 자유를 맛보고 소수가 자유를 맛보고 그런 다음 모든 사람이 자유로워지는 것처럼 단토 한 사람이 브릴로 상자를 보면서 억압된 예술철학에서 자유로워졌던 것입니다.

그러나 단토가 그런 경험을 했다고 주장하지만 그는 그것을 논문으로 발표하는데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워홀이 그 작품을 소개한 것은 1964년이었지요?
그 후 20년 동안 그는 사유했고 그런 후 <예술의 종말>을 발표했고 그 후 10년이 지나고 <예술의 종말 이후>를 내놓았습니다.
그렇다면 20년 전의 일을 회상하면서 쓴 글에는 다소 과장된 감격도 있었을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1964년 단토가 스테이블 화랑에서 워홀의 작품을 직접 목격했을 대는 감동이 그리 크지 않았을 것으로 추리됩니다.
나중에 글을 쓰면서 감동을 키운 것으로도 추정이 가능해보입니다.
여하튼 이런 지적은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단토를 바르게 이해하는 데 약간의 단서를 제공해줄 수는 있습니다.

난 <워홀과 친구들>, <뒤샹과 친구들>을 쓰느라 두 사람에 대해 각별히 자료를 모으고 두 사람에 관한 많은 책을 읽어야 했습니다.
내가 아는 뒤샹은 매우 이지적인 사람이지만 워홀은 감성적인 사람이었습니다.
뒤샹이 자신의 레디메이드에 <샘>, <부러진 팔> 등의 제목을 붙인 건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봅니다.
물론 개념적인 작품이지만
르네 마그리트가 <이것인 산이 아니다>,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라고 붙인 그런 제목과는 다르지요.
마그리트에게 있어서는 산을 그려놓고 <이것이 산이 아니다>, 파이프를 그려놓고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라고 할 때 실은 제목 자체가 작품인 것입니다.
당연히 캔버스에 그린 산은 산이 아니고 파이프는 파이프가 아니지요.
산과 파이프를 모방한 이미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산, 파이프가 아니다라고 적은 것이지요.
이미지에 속지 말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얼마전 어느 분이 대학에서 뒤샹을 강의하고 있다면서 <큰유리>에 나타난 세세한 부분의 의미를 전화로 물어와 일일이 답한 후
"작품의 세부에 대해 너무 신경쓰지 마세요. 뒤샹이 우리를 갖고 논 것입니다"라고 말해주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뒤샹은 익살꾼으로 장난을 쳤던 것입니다.
남자 소변기에 제목을 <샘>이라고 했든 <무제>로 했던들 달라질 것은 없습니다.
줄리양이 말한 대로 그것을 거꾸로 놓으면 분수처럼 혹은 샘처럼(영어로 Fountain이었지요?) 보이기 때문에 뒤샹이 그렇게 제목을 붙인 것이 아니란 말이지요.
그에게 제목은 또 다른 화두였고 익살이었으며 함정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단토가 주장한 대로 변용의 입장에서 얼마든지 바라볼 수 있다는 것이 내 생각입니다.
브릴로 상자만큼 어쩜 그보다 더 소변기가 대중적 사물이라고 말할 수 입습니다.
눈삽은 거의 모든 가정이 구비하는 실용품으로 브릴로 비누를 사용하지 않는 가정은 있어도 눈삽을 사용하지 않는 가정은 없을 것입니다.
대중적으로 말하면 뒤샹의 레디메이드나 워홀의 브릴로 상자가 별반 다르지 않다는 점을 지적하려는 것입니다.

내가 지적하려는 또 다른 점은 뒤샹과 워홀의 미학적 차이입니다.
<내가 워홀을 쏘았다>라는 영화가 있었지요?
영화 <폴록>과 마찬가지로 예술가의 제 모습을 정확하게 묘사한 영화입니다.
내가 <워홀과 친구들>에서 묘사한 것과 마찬가지로 그 영화에서도 워홀을 지성인이 아닌 사람으로, 미학적 문제로 고심하는 사람이 아닌 것으로, 단지 순발력과 디자인의 감각이 뒤어난 사람일 뿐인 것으로 묘사되었습니다.
놀기 좋아하고 쾌락주의자로 묘사되었으며 그것은 워홀의 참 모습이기도 합니다.
단토가 말하는 예술의 종말을 논할 만한 그런 머리를 가지고 있지 못한 사람입니다.
예술가의 의도는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가 의도적으로 예술의 종말을 고한 것은 분명 아니었다는 것이 나의 생각입니다.
본인에게는 전혀 그런 의도가 없었지만 단토는 그를 예술의 종말을 고한 상징적인 인물로 꼽았습니다.

한편 뒤샹에게는 예술의 종말에 관한 신념이 있었습니다.
그는 한때 그림을 더 이상 그리지 않겠다고 선언하고 직업장기 선수로 데뷰했습니다.
더 이상 미술품을 만들지 않겠다는 선언은 예술의 종말을 감지했기 때문인 것으로 추리됩니다.
물론 그는 약속을 깨고 작품을 좀더 제작했지만,
이는 이해가 되는 부분으로 목숨이 붙어있는데 어떻게 작품을 제작하지 않고 여생을 무료하게 보낼 수 있겠습니까!
뒤샹은 예술의 종말과 관련해서 새롭게 해석되어야 할 예술가라고 생각합니다.

뒤샹 이후의 모더니즘, 특히 그린버그의 모더니즘을 언급했는데,
내 생각은 우선 이렇습니다.
그린버그의 이론은 다분히 미국적 입장의 일방적 이론이라는 것입니다.
그의 <American Painting>이 말해주듯 그는 미국 회화의 우위를 주장하기 위해 혈안이 되었던 사람입니다.
회화의 평면성 혹은 2차원성에 대한 인정에서 모더니즘의 출발을 삼아 에두아르 마네의 회화를 모더니즘의 출발로 보았습니다.
단토는 이에 이의를 제기했습니다.
그린버그에게는 마네가 최초의 모더니스트이지만 단토에게는 고갱과 반 고흐가 최초의 모더니스트였습니다.
그리버그의 이론에는 다분히 미국 제국주의적 광포한 우월성이 내재해 있습니다.
이는 유럽에 대한 미국인의 컴플랙스의 반영이라고 봅니다.

예술의 종말에 관해 전혀 아이디어가 없었던 워홀보다는 그런 사고를 가졌던 뒤샹을 재조명해야 하지 않는가 하는 것이 나의 생각입니다.
뒤샹은 모더니즘에 속한 사람이 아니라 모더니즘에 반발하고 부정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아름답지도 추하지도 않은 레디메이드를 선정하느라 나름대로 고심해야 했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샘>이 뉴욕의 앙데팡당에서 거절당할 것을 미리 알고 그 사건을 야기시켜 논쟁의 장을 마련했던 것입니다.
한 마디로 미술품이 무엇이냐 하는 질의를 일으킨 것이지요.

이에 대해 단토는 말합니다.
미술품이란 물질로 이루어져야 하고,
언어로 설명될 수 있는 의미가 있어야 한다.
후자는 달리 말하면 미술품에는 자기지시성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왜 미술품인가 하는 것에 대한 답을 스스로 지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단토가 선정한 예로 든 많은 작품을 보면 그에게는 엘리트주의가 다분히 있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이런 점은 내게 또 다른 의문을 일으키게 합니다.
그리고 이는 단토의 문제만이 아니라 오늘날 우리 모두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원래 팝아트는 엘리트주의로부터 민중미술로의 이양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민중미술이란 우리나라 80년대 발생한 그런 민중을 이용하고 선동한 정치적 민중미술이란 뜻이 아니라 민중 모두가 함께 이해하고 즐길 수 있는 미술을 말합니다.
팝아트가 예술의 종말을 고하게 했다면,
종말 이후, 혹은 미술사 이후의 시대인 컨템퍼래리에서 엘리트주의는 마땅히 배척되어야 한다고 생각되어지는데 그렇지 않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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