줄리님,


우선 내가 상상했던 그 사람의 줄리가 아니군요.
난 내가 아는 사람의 익명으로 생각했더랬습니다.


제 글을 처음부터 읽고 계시다니 감사합니다.
그때 그때의 소감을 적은 글이라서 미비한 점이 많습니다.
헌데 줄리님의 객관적 분석을 글을 읽고 매우 기쁨니다.
그렇게 폭넓게 포용할 수 있는 아량이 마음에 쏙 듭니다.

줄리님이 언급한 대로 양면성을 인정합니다.
자연 정복 운운하지만 이면에는 허무주의자로서의 감성을 갖추고 있습니다.
이성과 감성의 양면성입니다.

"자연이 예술을 따라야 한다"는 말은 오스카 와일드가 한 것입니다.
이는 역설이기도 합니다.
예술이라는 문화가 우리의 생활과 밀접해 있고 이런 문화 속에서 나고 자라게 되면 자연을 예술의 눈으로 바라보게 됩니다.
예를 들면 변관식이 바라보고 그린 금강산도가 아주 마음에 들어 금강산에 가게 되면 변관식의 구도로 바라본다든가 하는 행위 말입니다.
안개낀 런던 브리지를 바바리 깃을 올리고 걸어가는 영화 속의 남자 주인공이 인상적이어서 안개낀 런던 브리지를 걷게 되면 주인공처럼 바바리 깃을 올린다든가 말입니다.

화가들의 풍경화는 정리된 자연입니다.
회화적으로 구도를 잡은 그렇게 바라보고픈 풍경을 그린 것입니다.
실재 자연에 나가면 풍경화와는 전혀 다른 산발적인 자연이 있다는 걸 알게 됩니다.
산발적인 자연과 화가가 구성한 풍경화의 자연 모두 자연입니다.
구태여 말하자면 있는 그대로의 자연과 우리가 원하는 자연이라고 하겠습니다.


줄리님이 영화를 언급하니까 새삼 그 영화 속의 여주인공이 눈에 선합니다.
다가오는 죽음을 당당히 맞으려는 여교수의 태도를 내가 자연에 대한 정복으로 적은 것 같습니다.
줄리님의 말대로 실은 여교수는 죽음에 불안을 나타냅니다.
내가 그 입장이라도 죽음에 대한 불안을 떨치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 모두에게 죽음을 가히 위협적입니다.
자연의 순리는 정복되지 않습니다.
정복이란 말 자체가 자연에서는 어울리지 얺는다는 것 잘 압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음을 이겼다고 말하는 건 죽음에 대한 불안이 모두 가셨다는 낭만적인 의미는 아닙니다.
인간의 존엄성에 관한 의미입니다.
불안을 떨구려는 노력에서 인간의 존엄성을 찾으려는 것이지요.
죽음의 절박한 상황에서 끝내 인간의 존엄성을 지킨 사례를 우리는 역사에서 얼마든지 찾을 수 있습니다.
영화 속의 여교수도 불안을 이겨내기 위해 노력합니다.
순순히 죽음을 맞이하지 않고 저승사자를 당당하게 맞겠다는 최후의 저항입니다.
난 이를 죽음의 미학이라고 생각합니다.

인간도 자연의 일부분입니다.
진화론적으로 보면 열성을 도태되고 우성이 생존하여 우성적으로 진화됩니다.
인간의 노력이 자연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노력이 우성이 되어 진화되기를 바랍니다.

문화는 인간의 자긍심 혹은 존엄성을 확대시키는 우리의 노력이라고 생각합니다.
자연도 여러 가지인데 불현듯 닥치는 자연의 힘 도는 강압
영화 속의 여교수처럼 갑자기 암으로 죽음의 터널을 걸어가야 할 때
이런 자연의 강압에 순순히 생명을 내주어야 하지만 여교수는 각종 실험을 통해 생명을 연장하는 것 반대하고 마치 스스로 선택한 죽음인양 어두운 터널을 걸어가겠다고 합니다.
그러나 얼마나 불안하고 외로움을 느끼겠습니까!

전 이런 양면성을 인정합니다.

자연을 정복해야 한다는 나의 말은 인간 위주의 삶 또는 인간 중심의 자연을 말한 것입니다.
암을 정복해서 다시는 여교수처럼 암으로 순순히 죽지 말아야 한다는 거지요.
난 자연에 의지가 있다고 믿지 않습니다.
대부분의 종교인은 자연에 의지가 있다고 믿지만 난 자연에 의지가 없다고 믿습니다.
연약한 식물이 성장하지 못하고 죽어가는 것은 자연입니다.
연약하게 태어난 신생아가 성장하지 못하고 죽어가는 것도 자연입니다.
그러나 의학의 발달로 이런 신생아가 살아 남아야 한다고 생각하며 미래의 의학이 이를 이루어낼 것입니다.
줄리님도 그런 의학의 발달을 바랄 것입니다.

난 암에 걸려 죽기 싫은데 죽어야 하기보다는 내 스스로 그만 살고 싶을 때 죽고 싶습니다.
그게 가능할지는 모르지만,
고승들 중에는 그렇게 죽음을 맞이한 분들이 있습니다.
그런 분들을 가리켜 죽음을 정복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암튼 이런 의미로 그때 안석환 선생님과 의견을 나눈 것입니다.
안선생님의 의견도 이런 범주 안에서 피력한 것으로 이해됩니다.
동전의 양면성처럼 말입니다.

줄리님이 언급한 대로 의견에 약간의 차이는 있더라도 대등소이할 겁니다.
자연 정복 운운해도 자연의 엄청난 힘에 허무를 느낄 수밖에 없고
자연에 순응 운운해도 무조건 자연에 나를 맡길 수는 없을 테니 말입니다.

종종 글을 올려주세요.
아주 잘 읽었습니다.
5월 1일 지리산에서 만날 수는 없을가요?
고속도로가 지리산으로 향하는 길을 깔아놓은 것 같은테 ...
7인의문화읽기 회원들과 인사하는 기회가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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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비니 여인들의 중재  

(교수신문에 기고한 글입니다.)

플루타르크는 고대 로마에서 일어난 사비니 여인들에 관한 역사적 사건을 전래했다. 이 사건은 회화의 주제로는 드물게 나타났는데 니콜라 푸생(1593/4~1665), 자크-루이 다비드(1748~1825), 파블로 피카소(1881~1973) 세 사람이 각자의 독특한 양식으로 묘사했다. 고대의 사건을 모티프로 한 데서 세 사람은 고전을 규범으로 삼는 고전주의라는 이념으로 한데 묶을 수 있다. 푸생과 피카소는 로마인이 사비니 여인들을 약탈하는 장면을 묘사한 데 비해 다비드는 약탈이 발생한 지 3년 후 여인들을 구출하기 위한 사비니 부족의 반격을 묘사했다. 푸생과 피카소가 약탈의 비극적 장면을 모티프로 삼은 데 반해 다비드는 여인들이 전쟁이 일어나지 않도록 두 부족 사이에 중재의 역할을 하는 장면을 묘사했는데 다분히 의도적이었다. 그의 의도는 당시 프랑스의 혁명적 상황에서의 좌파와 우파의 첨예한 대립을 염두에 두고 자신의 평화의 제스처를 작품을 통해 간접적으로 나타내려고 한 것이다. 그러므로 푸생과 피카소의 작품은 순수 고전주의에 속하는 데 반해 다비드의 작품에는 고전주의 양식은 취했으나 정치에 이용하려는 불순한 동기가 내재해 있다.

프랑스 고전주의 화화의 창시자인 푸생은 당시 유행하던 매너리즘 양식을 취했지만, 고대 로마의 조각상, 부조 등 고전적 작품에 관심이 많았고 1624년부터 로마에서 본격적으로 고대 로마의 조각을 연구한 뒤 매너리즘 양식에서 벗어나 고전적인 양식을 추구하게 되었으며 표현을 절제하게 되었다. 이후 10년 동안 독자적인 창조성으로 평가받게 된 양식을 진전시키면서 종교적 주제에서 벗어나 고대의 신화적 세계를 목가적, 시적인 분위기로 묘사했다. 이때 그린 것이 <사비니 여인들의 약탈>(푸생 84)이다. 그는 인물의 몸짓, 자세, 얼굴 표정 등을 통해 감정을 표현하는 데 열중했고, 회화에서의 문학적, 심리적 묘사에 신중을 기했다. 이런 감정 표현은 나중에 미술아카데미의 교칙으로 명문화되기에 이른다. 17세기 후반 푸생의 이름은 색채의 중요성을 주장한 루벤스에 대해서, 회화에서 소묘의 우월성을 믿었던 푸생주의자들을 지지하기 위해 아카데미에서 거론되었다. 처음에는 루벤스파가 우세했지만, 푸생은 19세기 초까지 고전적 정신을 가진 예술가들에게 끊임없는 영감의 원천이 되었다. 존 러스킨이 푸생을 가리켜서 감수성이 결여되었으며 지적으로 부패한 “진실에서 벗어난 화가”라고 비난했지만, 세잔을 비롯한 근대 프랑스 예술가들은 푸생이 창시한 고전주의 전통으로부터 영향을 받았다.

다비드가 1799년 <사비니 여인들의 중재>를 그릴 때 그는 프랑스 최고의 화가로 인정받고 있었다. 1790년 9월에 쟈코뱅 당원이 된 이래 다비드는 정치에 깊이 관여하여 루이 16세의 처형에 찬동하고 로베스피에르를 존경하며 추종했다. 1793년 9월 17일부터 이듬해 7월 28일까지 10개월 이상 지속된 ‘공포정치’의 시기에 3, 4만 명이 목숨을 잃었는데, 공화당 내 우파와 좌파의 충돌로 로베스피에르와 그의 추종자들도 실각과 더불어 단두대에서 처형되었다. 다비드는 로베스피에르와 가까운 사이였기 때문에 테르미도르 9일, 즉 7월 27일의 반동으로 처형의 위기에 처했다. 하지만 운이 좋게도 로베스피에르가 체포되던 날 그는 국민공회 전당대회에 출석하지 않았다. 그날 병중이었다고 변명했지만 매우 건강한 상태였다. 그는 비겁하게도 로베스피에르의 강렬한 개성과 혁명적 열정에 자신이 속았던 것이라고 변명한 후 처형을 면하고 약 5개월 동안 투옥되었다. 자유로운 몸이 된 다비드는 평화를 위한 제스처로 <사비니 여인들의 중재>를 그렸다.

플루타르크가 전한 이야기는 이렇다. 고대 로마에 남자의 인구는 많지만 여자의 수가 부족하자 이런 불균형을 해결하여 인구를 증가시키기 위해 로물루스는 이웃나라 부족들을 페스티발에 초대한 후 자신의 신호를 따라 젊은이들이 결혼하지 않은 여인들을 유괴하고 약탈하게 했다. 다비드가 묘사한 장면은 여인들이 강탈되어간 지 3년 후, 사비니 남자들이 타티우스의 주도 하에 반격에 나서 대치하는 순간이다.(다비드 163/134) 당시에는 두 리더가 결투를 벌이는 것이 전투의 관례였으므로 화면 중앙에 로물루스와 타티우스가 대결을 벌이고 있다. 헤르실리아가 오른쪽의 남편 로물루스와 왼쪽의 아버지 타티우스 사이에 뛰어들어 아버지에게 전쟁을 중단할 것을 간청한다.

헤르실리아는 사비니인으로 로마의 로물루스와 결혼하여 두 아이를 낳았다. 이제는 로마인도 되고 사비니인도 되는 여인들은 적으로 맞서 싸우는 아버지, 오빠, 남편의 이름을 부르며 전투를 중단하라고 호소한다. 헤르실리아는 자신의 오른쪽에 있는 아버지 타티우스에게 말한다.

“아버님이 부모에게 데려다 주기 위해 구해낼 딸들이 더이상 없으며 아버님이 벌을 가해야 할 강탈자 역시 없습니다. … 아버님은 이제 남편에게서 아내를, 아이들에게서 어미를 갈라놓고 있는 것입니다.”

이 말을 들은 로물루스는 타티우스에게 덤벼들려다 창을 뒤로 제끼며 물러났고 타티우스 또한 방패를 위로 올리고 칼을 아래로 내리며 머뭇거린다. 뒤에 군인들은 자신들의 헬멧을 벗어 위로 던졌는데 평화를 원하는 제스처이다. 로마인과 사비니인들은 서로 껴안고 그 후 한 민족이 되었다.

다비드는 <사비니 여인들의 중재>를 고대 그리스 미술을 닮게 하려고 했다. 로물루스와 타티우스의 몸을 매끈하게 묘사했는데 그리스 조각을 보고 그렇게 한 것이다. 그는 의도적으로 드라마의 한 장면처럼 그리려고 했다. 배경에 타르펠리 바위를 그려넣었는데 로마의 캐피톨린 언덕(옛 로마의 일곱 언덕 중 하나) 남서쪽에 있는 바위와 닮았다. 역사적 사건이 발발할 때 이 언덕은 사비니에 속했다. 사비니가 이 언덕을 차지할 수 있었던 것은 한 로마 여인의 어리석은 반역 때문이었는데, 캐피톨의 사령관 딸 타르페이아가 사비니인이 차는 금팔찌를 자기에게 주면 성채에 들어갈 수 있도록 해주겠다고 제안해서 그녀의 반역으로 사비니인이 성채를 점령할 수 있었다. 사비니인은 성채에 들어서자마자 그녀를 죽였다. 바위는 반역을 상징해 그녀의 이름을 따 부르게 되었고 훗날 살인자와 배신자들을 바위 위에서 아래로 던져 죽이는 처형지로 사용되었다. 다비드는 사비니 여인들의 중재를 반역자 여인을 상징하는 바위를 배경으로 비교가 되게 구성했다.

그림에 등장하는 전사들은 다비드의 제자와 친구들이고 중앙의 검은 머리를 하고 젖가슴을 드러낸 채 무릎을 꿇고 아이들을 보호하는 사비니 여인의 모델은 다비드의 아이들을 돌보던 아델레이다. 그녀는 그림에 모델로 참여한 것을 자랑스럽게 여겨 사람들이 자신을 알아보도록 그림에서의 헤어스타일을 하고 다녔다고 한다.

다비드는 로마의 주제를 그리스 양식으로 표현했는데 로마 미술보다는 그리스 미술이 도덕적으로 그리고 미학적으로 우월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림에서 전사들이 누드로 묘사된 것에 대해 많은 사람이 의아해 했다. 로물루스와 타티우스의 완전한 도덕성을 나타내기 위해 육체적으로 온전한 누드로 상징한 것이라고 했는데 많은 사람이 그의 설명을 납득하지 못했다. 실제에 있어 누드로 전투를 벌이는 일이란 없었기 때문에 도덕적·미학적 설명이 납득되지 않았던 것이다.

미적으로 새로운 것을 추구하기 위해 이 그림을 그린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이 작품은 그에게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지금까지 그린 것들과는 달리 그는 여인을 중앙에 구성하면서 남자들을 누드로 에로틱하게 묘사했다. 그는 영웅적 누드로 고대의 신·영웅·보편적 남성을 나타내려고 했다.

또한 영국 판화에서 아이디어를 얻기도 했는데 존 플랙스맨이 『일이아드』에서 모티프를 얻어 그린 <파트로클로스의 죽음을 위한 전투>(다비드 168)와 <아레스를 향해 창을 던지는 디오메데스>, 그리고 제임스 길레이의 <죄, 죽음과 마귀>(다비드 169)를 참조했다. 왕립미술아카데미에서 윌리엄 블레이크를 만나 평생 우정을 나눈 존 플랙스맨은 영국 조각가, 제도가, 디자이너로 신고전주의 운동의 중요한 인물이고, 제임스 길레이는 당대 영국의 가장 유명한 캐리커처였다.

다비드는 <사비니 여인들의 중재>를 주문을 받아 그린 것이 아니었으므로 작품을 통해 이익을 창출하기 위해 루브르에 위치한 과거 건축아카데미로 사용된 강당을 빌려 전시한 후 입장료를 받았다. 파리에서는 돈을 받고 작품을 관람하게 한 적이 없었고 아카데미가 그런 행위를 금해온 터라서 이는 새로운 사건이 되었다. 따라서 입장료를 받는 전시에 대해 비난이 거세었다. 입장료 1프랑 80센팀은 적은 돈이 아니었으므로 전시회는 결국 상류층 인사와 외국 방문객들을 위한 것이 되었다. 당시 숙련공 일당이 1프랑 미만이었으므로 입장료는 적은 돈이 아니었다. <사비니 여인들의 중재>를 보기 위한 입장료는 당시 고급 음식물인 버터 450g의 값이었고, 아스파라거스 한 다발 혹은 햄을 700g 살 수 있는 돈이었다.
이 작품은 1799년 12월 21일부터 5년 동안 전시되었고 약 5만 명이 입장료를 내고 관람했다. 다비드는 제자들에게 입장료가 2만 4천 프랑에 이를 때마다 그들에게 저녁식사를 제공하겠다고 했으며 모두 세 차례에 걸쳐 식사를 제공했다. 다비드는 입장료가 자신이 원하는 작품값에 이르게 되면 작품을 정부에 기증하겠다고 제의했지만 막상 입장료가 원하는 액수에 이르렀을 때는 악속을 지키지 않았다. 전시회가 계속되던 1801년 10월 그는 파리로부터 남동쪽으로 48km 떨어진 퐁텐블로 근처 오조우에 르 불지에 별장을 구입했다. 이 전시회는 개인전의 효시가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피카소는 여전히 활기차고 다채로운 그림을 그리면서 새로운 문제에 부딪힐 때마다 끊임없이 새로운 해법을 찾았다. 1950년대 중반부터 그는 대가들의 작품을 변형하는 작품을 연작으로 제작하기 시작했다. 그는 들라크루아와 벨라스케스의 걸작을 변형시켜 무려 58점을 제작했다. 이런 경향은 1960년대에도 계속되어 마네의 <풀밭 위의 점심식사>를 변형시켜 <식사> 연작을 제작했고, 들라크루아를 연상시키는 <약탈> 연작, 푸생의 <유아 대학살>과 다비드의 <사비니 여인들의 중재>를 모델로 한 연작을 제작했다.(다비드 167/202) 뛰어난 기초 소묘능력, 시각적 독창성, 그리고 구상능력에서 인정받은 피카소는 고전적 주제도 새로운 양식으로 소화해냈다. 그가 20세기 회화에 끼친 영향은 감정을 전달하는 매체로서의 미술의 개념을 강화한 것이며 형식적, 추상적 완성도보다는 역동적인 힘과 활기를 강조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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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거리와 읽을거리


화요일에는 춘천에 있는 강원대학에서 특강을 했습니다.
볼거리와 읽을거리에 관해서 주로 강의를 했는데,
학생들 모두 서양화, 동양화, 조각, 공예 전공자들이라서 창작에 관한 내용을 일환이었습니다.

볼거리란 양식을 의미하고 읽을거리란 작품의 내용, 동기, 목적 등을 의미합니다.
요즘 아주 많은 전시회가 있어 볼거리가 많지만 정작 읽을거리가 있는 작품이 드물다는 나의 비평이었습니다.
이는 작품을 제작하는 사람이 특별한 동기, 목적, 혹은 내용을 미리 생각하고 작품을 제작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한때는 양식 자체가 작품의 내용이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양식은 작품의 가치를 논할 때 별로 중요한 요소가 되지 못합니다.
작가가 어떤 재료를 사용했든, 어떤 방법으로 제작을 했든 그런 것들은 수단에 불과하기 때문에 자랑할 만하지 않습니다.

두 주 전 모대학원에서 특강할 때 후반부에 작가가 자신의 작품을 소개하는 시간이 있었는데, 언제 그렸고, 어떤 재료를 사용했으며, 특별히 어떤 기교를 사용했다는 등 양식에 관해서만 장황하게 늘어놓았습니다.
양식에 대한 설명만 한 것입니다.
정작 중요한 왜 그 작품을 제작해야 했는지에 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머리로 작품을 제작한 것이 아니라 순전히 손으로 제작한 것입니다.

어제 그런 말을 했습니다.
어떤 바보라도 캔버스에 색을 칠할 수 있다.
그리는 것은 어린이도 할 수 있고,
원숭이도 할 수 있다.
그리고 결과물은 놀랍게도 훌륭하게 나타날 수 있다.
그렇지만 우리가 어린이의 작품과 원숭이의 작품을 화랑이나 미술관에 걸지 않는 이유는 사변적인 사고를 앞세워서 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 것들을 보기에 그럴싸해도 작품으로 간주하지 않는다.

건축가가 건물을 짓기 전에 청사진을 그리는듯 작가는 사전에 자신이 완성할 작품에 관해 충분히 생각을 해두어야 한다.
더러 작업과정에 고치거나 우연에 의해 변경할 수는 있더라도 반드시 왜 작업을 하는지 신념을 가져야 만한다고 했습니다.

요즘 화랑에 가면 실험적으로 혹은 별로 깊은 생각 없이 손으로 제작한 작품을 많이 봅니다.
내게는 작품으로 보이지 않는 것들이 아주 많습니다.
나의 말로 하면 읽을거리가 없다는 말입니다.
볼거리만 있고 읽을거리가 없다는 것은 완전한 작품이 아니라 절반은 결여된 불구의 작품입니다.


학생들 모두 초롱초롱한 눈으로 열심히 들었습니다.
얼마나 나의 강의를 이해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생각의 전환이 되는 계기가 얼마만큼은 성취된 것으로 봅니다.

목수와 미쟁이의 작업을 폄하하려는 의도로 하는 말이 아니라
머리로 작업하지 않고 손으로만 혹은 기술로만 볼거리를 만드는 것은
목수와 미쟁이의 작업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목수와 미쟁이의 작업도 오래 연마한 기술이 있어야 가능합니다.
미대에서 오래 연마한 기술로만 작업한다면 그럴 작품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읽을거리가 있는 작품을 전시장에서 보았으면 합니다.
제발 볼거리만 있는 전시회는 사라졌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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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리양, 난 이렇게 생각합니다.


줄리양이
"'포스트모던’이라는 기기묘묘한 신조어를 턱하니 들이대고는, 고작 1,2년만 흘러도 구식(Old-fashion)으로 치부해버리면서 새로운 것이면 무엇이건 만병통치 약방문마냥 덮어씌우는 요즈음입니다"라고 했는데,
사실 이런 경향이 농후합니다.

난 이렇게 생각합니다.
포스트모던이란 말은 스타일이 아니라 시기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더러 사람들은 포스트모던 미술품이니 영화니, 연극이니 하지만,
그들에게는 명확한 개념이 없습니다.
포스트모던은 혼란스러운 오늘날의 시기를 가리키는 용어에 불과합니다.


크리스 발딕은 1990년에 발간된 <간추린 옥스퍼드 문학용어사전>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을 다음과 같이 정의했는데 혼란스러운 오늘을 잘 표현했습니다.


1960년대 이후부터 선진 자본주의 사회에 널리 퍼져 있는 문화적 상황을 가리키며, 특히 TV, 광고, 상업디자인, 팝 비디오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이는 연결되지 않는 이미지와 양식들의 과잉을 특징으로 하고 이런 의미에서 ...
포스트-모더니티는 파편적 감각, 절충적 향수, 마음대로 소비할 수 있는 시뮬라크르simulacra(모조품), 뒤죽박죽인 피상성의 문화라 할 수 있다.
따라서 거기에는 전통적으로 가치를 지녔던 깊이, 일관성, 의미, 독창성, 진보성과 같은 특성들이 공허한 신호들의 무작위적인 혼돈 가운데 사라지거나 용해된다. ...
모더니스트 미술가와 작가가 신화, 상징, 혹은 복잡한 형식을 통해 세상으로부터 어떤 의미를 얻고자 애썼다면 포스트모더니스트는 경박한 냉담성을 지닌 현대적 실존의 부조리하고 의미 없는 혼돈을 환영하며 의식적으로 ‘깊이 없는’ 작업을 선호한다.
이 용어를 가장 많이 사용하는 사람들은 ‘포스트모던’을 ‘고급’과 ‘저급’ 문화들 간의 위계질서로부터의 해방으로 여기며 환영하는 경향이 있다.
반면 경멸조로 포스트모던의 지지자들을 ‘포스티posties’라고 부르는 회의론자들은 이 용어를 상업자본주의의 화려함과 도덕적 결핍에 대한 학문의 무책임한 도취증상으로 여긴다.


나는 크리스 발딕이 언급한 대로 포스트모던의 지지자들을 '포스티'로 부르는 회의론자에 속합니다.
"경박한 냉담성을 지닌 현대적 실존의 부조리하고 의미 없는 혼돈을 환영하며 의식적으로 ‘깊이 없는’ 작업을 선호하는" 예술가들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런 태도로 제작한 그들의 작품은 볼거리뿐이라는 것입니다.

내가 화랑에 가기를 꺼려하는 것은 이런 볼거리는 주변에 얼마든지 있기 때문입니다.
'깊이 없는' 볼거리는 전철에서도 발견되고, 홍대 앞에서도 얼마든지 발견하며, 신촌 현대백화점에서도 아주 많이 발견합니다.
구태여 화랑에 가는 수고를 할 필요가 없습니다.

내가 화랑에 가는 이유는 서점에 가서 신간을 뒤적이듯 새로운 읽을거리가 있을까 해서입니다.
단순히 눈요기를 하는 것이라면 거리를 걸으면 됩니다.

가령 거리를 걷다가 시선을 끄는 몇 사람을 내가 화랑에 마네킹처럼 세운다고 합시다.
이는 분명 볼거리가 될 것입니다.
가령 재래시장에서 콩나물을 파는 아주머니에게 일당을 주고 화랑 안에서 콩나물을 팔게 한다고 합시다.
이는 분명 볼거리가 될 것입니다.
볼거리를 만드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읽을거리란 내가 왜 그렇게 하는지를 설명할 수 있는 것을 말합니다.

이를 달리 말하면 작품에 자기 지시성self-referentiality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미술품으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반드시 어떤 읽을거리가 있어야 하고 그 읽을거리가 작품에서 물질적으로 구성되어야 합니다.
이는 오브제가 해석을 통해 작품으로 변용되어져야 한다는 것을 말하며 오브제에 읽을거리가 있어야 함을 뜻합니다.
요컨대 이는 미술비평의 소관으로 미술품으로 존재하려면 관람자가 이해할 수 있는 비평이 따라야 합니다.

작품에 자기 지시성이 있어 평론가의 식견이 이를 미술품으로 규정하는 중요한 판단의 요소로 삼게 됩니다.
동시대 비평은 작품에 대한 판단만 하는 것이 아니라 작품의 성립에도 작용합니다.
과거에는 작품을 성립하는 판단기준이 작품이 제작되기 전에 미리 존재했지만 동시대에는 작품을 규정하는 기준을 작가 스스로 제시해야 합니다.
이는 매우 분명한 읽을거리를 제공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아서 단토는 미술이 철학과 상보적 관계를 이룰 수밖에 없는 이유로 작품의 구성은 눈으로 파악되지만 그 의미는 눈으로 읽어낼 수 없기 때문으로 꼽았습니다.
의미를 캐는 데 철학적 추리능력이 요구되는 것입다.


줄리양,
줄리양의 사고 경향이 마음에 들어요.
지성인이라면 이성적, 논리적, 비판적 사고의 패턴을 기본으로 갖추어야 합니다.
모쪼록 미술사 공부에 진전이 있기를 바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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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도와 신윤복의 풍속화  

 

(신세계 백화점 정기간행물에 기고한 글입니다.) 


조선후기에 성행한 풍속화는 양반 신분으로 즐겨 그린 윤두서와 조영석에서 시작되어 김홍도와 신윤복에 이르러서 다양하게 진전되었다. 단원 김홍도는 조선 사생의 독보적인 존재로 남종화풍을 토대로 진경산수화를 그린 표암 강세황의 제자이다. 강세황이 노년에 “그대(김홍도)와 나는 나이와 지위를 무시하는 친구”라고 했듯이 두 사람은 일생 스승과 제자이자 동료, 그리고 서로 존중하고 인정해준 화단의 지기였다. 김홍도가 본격적으로 활동한 18세기 후반은 중인 세력이 안정되어가던 시기로 정조는 등극하면서 규장각을 세워 문풍을 크게 진작시켰다. 문헌상으로 중인의 칭호가 나타난 것은 인조(1623~49) 때였으나 신분변동은 18세기에 이루어졌으며, 이런 상황에서 중인 출신 김홍도는 어려서 강세황으로부터 그림을 배웠다.

김홍도는 산수, 인물, 도석, 영모, 화조, 어해, 사군자, 누각 등 모든 화두에 능했으며, 특히 당시 생활상을 그려내는 풍속인물화에 뛰어났고, 신선과 고승을 그리는 도석화는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복숭아를 두 손으로 떠받들고 들키지 않게 조심조심 걸어가는 <낭원에서 복숭아를 훔쳐 나오는 동방삭>(김홍도 141, 142)은 중국 전설에서 영감을 얻어 그린 것이다. 곤륜산에는 여자 신선 서왕모가 살고 있었고, 그녀의 과수원에서 생산되는 복숭아는 3천 년 만에 한 번 꽃이 피고, 다시 3천 년이 지나야 먹음직스럽게 익었다. 이 복숭아 한 개를 먹으면 1천 갑자를 산다는 소문이 나서 많은 사람이 복숭아를 훔치려고 호심탐탐 노렸지만, 서왕모의 경계가 워낙 삼엄해서 그 뜻을 이룬 사람이 없었다. 그러나 서왕모의 이웃에 살면서 장난을 좋아한 동방삭만은 세 차례나 복숭아를 훔쳐 먹고 3천 갑자를 살았다. 1갑자가 60년이니 18만 년을 장수한 것이다. 옛날 할머니들은 손자가 장생하기를 바랄 때 “이 아이가 삼천갑자 동방삭이처럼 오래 살게 하소서” 하고 두 손 모아 빌었다.

김홍도가 마흔 살이 되기 전에 그린 <소나무 아래 생황 부는 어린 신선>(김홍도 67)은 그의 대표작 중 하나로 용처럼 치솟은 소나무 아래서 한가롭게 대나무로 만든 악기 생황을 불고 있는 어린 신선을 그린 것이다. 소나무 껍질은 마치 용의 비늘을 보는 듯하며 젊은 그의 기운을 느끼게 한다. 새 깃털을 허리에 걸친 어린 신선의 등에 호리병 주둥이가 빼꼼 나와 있다. 솔잎 아래 적은 글은 당나라 시인 나업의 <생황시> 중 일부로 “들쭉날쭉한 대나무통 봉황이 날개 펼친 듯 달빛 어린 마루에 용 부르짖음보다 더 처절하구나”라는 뜻이다. 이 작품은 세상과 자신의 관계를 나타낸 김홍도의 마음의 표상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김홍도의 생애는 미궁 속에 묻혀 있다. 그는 1721년 혹은 1745년에 태어나서 언제 어디에서 죽었는지도 분명하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화원 출신에 왕의 신임을 받았으며 정조의 문집에 그의 이름이 들어 있다. 그가 일본에서 삽화가로 활동했다는 설도 있다. 정조와 김홍도의 밀접한 관계를 고려하면 그가 정조의 밀명을 띠고 일본으로 갔을 가능성도 있다.

작가미상으로 알려져 있는 <맹견도>(박용숙 24)가 김홍도의 작품이라는 주장이 있다. 이 작품의 화법은 서양화풍으로 화면에 서명이 없는 것은 이 작품을 그린 동기가 떳떳하지 않음을 시사한다. 만약 이 작품을 김홍도가 그린 것이라면 서명을 하지 않은 이유가 추정되는데, 일본에서 본 서양화가 바로 이런 것이라고 정조에게 보고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이는 그가 왕의 밀명을 띠고 당시 상공업의 중심지 나가사키에 가서 그곳 상황을 그림에 담아오는 임무를 띠었을 것으로 가정할 때 가능한 추리이다. <맹견도>는 화가가 직접 보고 그렸다는 사실을 유추하게 한다. 이것은 18세기 김두량이 그린 <흑구도>(박용숙 25)와 비교된다. <맹견도>는 한 순간의 실재 공간에 있던 개를 그린 것인 데 비해 <흑구도>는 이런 실제성과는 무관하게 관념적으로 존재하는 개인 것이다. <맹견도>에서 당시 실학사상을 느끼게 한다.

혜원 신윤복(1758~?)의 풍속화는 기녀와 여속, 에로티시즘으로 유명하다. 그는 주로 어른의 놀이문화와 성의 문제를 다뤘는데, 이는 조선사회가 간과한 문제였다. 성과 유희는 그의 작품에 주조를 이룬다. 중인의 가계를 모은 <성원록>에 의하면 신윤복은 신숙주의 동생 신말주의 11대손이다. 신윤복의 아버지 신한평(1726~?)은 영조, 정조, 순조 초년까지 궁중의 자비대령화원으로 활동했으며 초상화와 풍속화에 빼어났다. 신윤복이 아버지로부터 영향받았음을 짐작하게 한다.

신윤복의 <손목: 소년전홍>(신윤복 51, 52)에서 소년전홍은 ‘소년이 붉은 꽃을 자른다’는 뜻으로 붉은 꽃이란 젊은 여인을 의미한다. 화면 오른편 상단에 적힌 화제는 “잎사귀 빽빽해져 푸른 빛 쌓여가자, 가지마다 붉은 꽃잎 조각조각 떨구네”이다. 젊은 여인의 손목을 쥐고 있는 젊은 남자는 상투를 틀어올리고 사방관을 쓰고 있다. 사방관은 양반만 쓸 수 있는 관으로 젊어 장가간 양반임을 알 수 있다. 오른편 돌로 쌓은 담이 보이고 큰 괴석이 마당을 장식하고 있어 부호가의 후원으로 보이며 젊은 서방님이 앳된 계집종을 건드리고 있다. 여인의 복색을 보면 저고리 고름만 겨우 자주색이다. 시집간 여인이라면 소매 끝을 남색 천으로 꾸몄을 텐데 처녀의 얼굴이 앳되고 부끄러워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서방님이 후원에서 젊은 종년의 손목을 잡아당기며 희롱하고 있으며 여종은 부끄러워 엉덩이를 뒤로 빼고 있는데 저고리가 풍만한 가슴을 다 가리지 못한 채 맨살을 드러낸다. 주변 기물이 봄의 춘정을 은근히 나타내는데 단단하고 거친 거대한 괴석이 사내의 성기를 상징하고 여종의 춘정은 붉은 꽃이 막 피어오른 나무로 상징된다. 조선시대의 필기류 산문과 소화집에는 양반이 젊은 여종을 탐하다가 망신당한 이야기가 심심찮게 적혀 있다.

이 작품에는 양반의 강제성이 나타나 있지만, <봄날: 춘의만원>(신윤복 57)에서는 여인이 이미 양반의 희롱을 겪은 눈치이다. 여기서도 나무에 새잎이 나는 봄의 춘정이 나타나 있다. 화제는 “봄빛 뜨락에 가득 차니 꽃은 흐드러지게 붉게 피었구나”이다. 나무를 보면 연녹색의 푸른 잎새가 올라오고 있을 뿐 붉은 꽃은 피지 않았는데 화제에는 피었다고 한다. 낮술을 마신 사내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그의 얼굴을 꽃이 핀 것으로 적은 것이다. 사내는 오른손에 부채를 들고 있고 철릭을 입은 모습이다. 철릭을 악공이나 별감, 무당도 입었으므로 이것만으로 사내의 신분을 알 수는 없다. 그러나 사내가 갓을 쓰고 합죽선을 쥐고 있어 양반임을 알 수 있는데 합죽선은 양반만 휴대할 수 있었다. 여인은 어염집 여자다. 머리를 틀어올리고 앞치마를 두르고 봄날 홀로 나물을 캐러 간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사내는 여인의 나물바구니에 손을 대고 있고 여인은 전혀 싫어하는 내색을 하지 않고 있다. 여인의 바구니에 사내의 손이 들어가 있는 것은 프로이트식으로 설명하면 이미 통정을 하고 있는 것을 의미하며 여인의 얼굴에 색기가 흘러 더욱 그렇게 보인다. 오른편 초가지붕 위에 불쑥 솟아오른 것은 사내의 성기가 발기했음을 상징한다.

<밀회: 월하정인>(신윤복 62, 65)에서 오른편 사내는 넓은 갓에 중치막을 입고 있는 양반이다. 여인은 쓰개치마를 쓰고 자주색 깃과 끝동이 달린 저고리를 입고 있다. 여인의 신발이 비싼 갖신인 것으로 보아 꽤나 부유한 층이다. 하늘에는 초승달이 떠 있고 사내가 어둠을 밝히는 사각등을 들고 있다. 화제에는 시각이 삼경임을 말한다. “달빛 침침한 삼경 두 사람의 마음은 두 사람만 알겠지.” 삼경이라면 밤 11시에서 새벽 1시까지를 말한다. 조선시대 서울에는 통금이 있었다. 초경(밤 8시)에 인경종을 33번 치면 관원과 이속 외에는 거리를 다니지 못하고, 5경(새벽 4시)이 되어 파루종이 33번 울리면 통금이 해제된다. 따라서 이 두 남녀는 야금임에도 불구하고 은밀히 만나고 있는 것이다. 조선시대 양반가의 여인은 외출이 자유롭지 못했으며 꼭 외출해야 한다면 종과 함께 나서는 것이 통례인데 부유층에 속한 여인이 혼자 외출한 것은 사내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조선시대에는 남녀가 자유롭게 연애할 공간이 없었다. 깊은 밤 은밀한 곳이 사랑을 나누기에 안성맞춤의 공간이 되는 것이다.



박용숙 24, 작가미상, <맹견도>, 19세기, 종이에 채색, 44.2-98.5cm. 국립중앙박물관
김홍도 67, <소나무 아래 생황 부는 어린 신선>, 종이에 옅은 채색, 109-55cm. 고려대학교
신윤복 51, <손목: 소년전홍>, 간송미술관
신윤복 57, <봄날: 춘의만원>, 간송미술관
신윤복 62, <밀회: 월하정인>, 간송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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