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홍도와 신윤복의 풍속화
(신세계 백화점 정기간행물에 기고한 글입니다.)
조선후기에 성행한 풍속화는 양반 신분으로 즐겨 그린 윤두서와 조영석에서 시작되어 김홍도와 신윤복에 이르러서 다양하게 진전되었다. 단원 김홍도는 조선 사생의 독보적인 존재로 남종화풍을 토대로 진경산수화를 그린 표암 강세황의 제자이다. 강세황이 노년에 “그대(김홍도)와 나는 나이와 지위를 무시하는 친구”라고 했듯이 두 사람은 일생 스승과 제자이자 동료, 그리고 서로 존중하고 인정해준 화단의 지기였다. 김홍도가 본격적으로 활동한 18세기 후반은 중인 세력이 안정되어가던 시기로 정조는 등극하면서 규장각을 세워 문풍을 크게 진작시켰다. 문헌상으로 중인의 칭호가 나타난 것은 인조(1623~49) 때였으나 신분변동은 18세기에 이루어졌으며, 이런 상황에서 중인 출신 김홍도는 어려서 강세황으로부터 그림을 배웠다.
김홍도는 산수, 인물, 도석, 영모, 화조, 어해, 사군자, 누각 등 모든 화두에 능했으며, 특히 당시 생활상을 그려내는 풍속인물화에 뛰어났고, 신선과 고승을 그리는 도석화는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복숭아를 두 손으로 떠받들고 들키지 않게 조심조심 걸어가는 <낭원에서 복숭아를 훔쳐 나오는 동방삭>(김홍도 141, 142)은 중국 전설에서 영감을 얻어 그린 것이다. 곤륜산에는 여자 신선 서왕모가 살고 있었고, 그녀의 과수원에서 생산되는 복숭아는 3천 년 만에 한 번 꽃이 피고, 다시 3천 년이 지나야 먹음직스럽게 익었다. 이 복숭아 한 개를 먹으면 1천 갑자를 산다는 소문이 나서 많은 사람이 복숭아를 훔치려고 호심탐탐 노렸지만, 서왕모의 경계가 워낙 삼엄해서 그 뜻을 이룬 사람이 없었다. 그러나 서왕모의 이웃에 살면서 장난을 좋아한 동방삭만은 세 차례나 복숭아를 훔쳐 먹고 3천 갑자를 살았다. 1갑자가 60년이니 18만 년을 장수한 것이다. 옛날 할머니들은 손자가 장생하기를 바랄 때 “이 아이가 삼천갑자 동방삭이처럼 오래 살게 하소서” 하고 두 손 모아 빌었다.
김홍도가 마흔 살이 되기 전에 그린 <소나무 아래 생황 부는 어린 신선>(김홍도 67)은 그의 대표작 중 하나로 용처럼 치솟은 소나무 아래서 한가롭게 대나무로 만든 악기 생황을 불고 있는 어린 신선을 그린 것이다. 소나무 껍질은 마치 용의 비늘을 보는 듯하며 젊은 그의 기운을 느끼게 한다. 새 깃털을 허리에 걸친 어린 신선의 등에 호리병 주둥이가 빼꼼 나와 있다. 솔잎 아래 적은 글은 당나라 시인 나업의 <생황시> 중 일부로 “들쭉날쭉한 대나무통 봉황이 날개 펼친 듯 달빛 어린 마루에 용 부르짖음보다 더 처절하구나”라는 뜻이다. 이 작품은 세상과 자신의 관계를 나타낸 김홍도의 마음의 표상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김홍도의 생애는 미궁 속에 묻혀 있다. 그는 1721년 혹은 1745년에 태어나서 언제 어디에서 죽었는지도 분명하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화원 출신에 왕의 신임을 받았으며 정조의 문집에 그의 이름이 들어 있다. 그가 일본에서 삽화가로 활동했다는 설도 있다. 정조와 김홍도의 밀접한 관계를 고려하면 그가 정조의 밀명을 띠고 일본으로 갔을 가능성도 있다.
작가미상으로 알려져 있는 <맹견도>(박용숙 24)가 김홍도의 작품이라는 주장이 있다. 이 작품의 화법은 서양화풍으로 화면에 서명이 없는 것은 이 작품을 그린 동기가 떳떳하지 않음을 시사한다. 만약 이 작품을 김홍도가 그린 것이라면 서명을 하지 않은 이유가 추정되는데, 일본에서 본 서양화가 바로 이런 것이라고 정조에게 보고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이는 그가 왕의 밀명을 띠고 당시 상공업의 중심지 나가사키에 가서 그곳 상황을 그림에 담아오는 임무를 띠었을 것으로 가정할 때 가능한 추리이다. <맹견도>는 화가가 직접 보고 그렸다는 사실을 유추하게 한다. 이것은 18세기 김두량이 그린 <흑구도>(박용숙 25)와 비교된다. <맹견도>는 한 순간의 실재 공간에 있던 개를 그린 것인 데 비해 <흑구도>는 이런 실제성과는 무관하게 관념적으로 존재하는 개인 것이다. <맹견도>에서 당시 실학사상을 느끼게 한다.
혜원 신윤복(1758~?)의 풍속화는 기녀와 여속, 에로티시즘으로 유명하다. 그는 주로 어른의 놀이문화와 성의 문제를 다뤘는데, 이는 조선사회가 간과한 문제였다. 성과 유희는 그의 작품에 주조를 이룬다. 중인의 가계를 모은 <성원록>에 의하면 신윤복은 신숙주의 동생 신말주의 11대손이다. 신윤복의 아버지 신한평(1726~?)은 영조, 정조, 순조 초년까지 궁중의 자비대령화원으로 활동했으며 초상화와 풍속화에 빼어났다. 신윤복이 아버지로부터 영향받았음을 짐작하게 한다.
신윤복의 <손목: 소년전홍>(신윤복 51, 52)에서 소년전홍은 ‘소년이 붉은 꽃을 자른다’는 뜻으로 붉은 꽃이란 젊은 여인을 의미한다. 화면 오른편 상단에 적힌 화제는 “잎사귀 빽빽해져 푸른 빛 쌓여가자, 가지마다 붉은 꽃잎 조각조각 떨구네”이다. 젊은 여인의 손목을 쥐고 있는 젊은 남자는 상투를 틀어올리고 사방관을 쓰고 있다. 사방관은 양반만 쓸 수 있는 관으로 젊어 장가간 양반임을 알 수 있다. 오른편 돌로 쌓은 담이 보이고 큰 괴석이 마당을 장식하고 있어 부호가의 후원으로 보이며 젊은 서방님이 앳된 계집종을 건드리고 있다. 여인의 복색을 보면 저고리 고름만 겨우 자주색이다. 시집간 여인이라면 소매 끝을 남색 천으로 꾸몄을 텐데 처녀의 얼굴이 앳되고 부끄러워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서방님이 후원에서 젊은 종년의 손목을 잡아당기며 희롱하고 있으며 여종은 부끄러워 엉덩이를 뒤로 빼고 있는데 저고리가 풍만한 가슴을 다 가리지 못한 채 맨살을 드러낸다. 주변 기물이 봄의 춘정을 은근히 나타내는데 단단하고 거친 거대한 괴석이 사내의 성기를 상징하고 여종의 춘정은 붉은 꽃이 막 피어오른 나무로 상징된다. 조선시대의 필기류 산문과 소화집에는 양반이 젊은 여종을 탐하다가 망신당한 이야기가 심심찮게 적혀 있다.
이 작품에는 양반의 강제성이 나타나 있지만, <봄날: 춘의만원>(신윤복 57)에서는 여인이 이미 양반의 희롱을 겪은 눈치이다. 여기서도 나무에 새잎이 나는 봄의 춘정이 나타나 있다. 화제는 “봄빛 뜨락에 가득 차니 꽃은 흐드러지게 붉게 피었구나”이다. 나무를 보면 연녹색의 푸른 잎새가 올라오고 있을 뿐 붉은 꽃은 피지 않았는데 화제에는 피었다고 한다. 낮술을 마신 사내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그의 얼굴을 꽃이 핀 것으로 적은 것이다. 사내는 오른손에 부채를 들고 있고 철릭을 입은 모습이다. 철릭을 악공이나 별감, 무당도 입었으므로 이것만으로 사내의 신분을 알 수는 없다. 그러나 사내가 갓을 쓰고 합죽선을 쥐고 있어 양반임을 알 수 있는데 합죽선은 양반만 휴대할 수 있었다. 여인은 어염집 여자다. 머리를 틀어올리고 앞치마를 두르고 봄날 홀로 나물을 캐러 간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사내는 여인의 나물바구니에 손을 대고 있고 여인은 전혀 싫어하는 내색을 하지 않고 있다. 여인의 바구니에 사내의 손이 들어가 있는 것은 프로이트식으로 설명하면 이미 통정을 하고 있는 것을 의미하며 여인의 얼굴에 색기가 흘러 더욱 그렇게 보인다. 오른편 초가지붕 위에 불쑥 솟아오른 것은 사내의 성기가 발기했음을 상징한다.
<밀회: 월하정인>(신윤복 62, 65)에서 오른편 사내는 넓은 갓에 중치막을 입고 있는 양반이다. 여인은 쓰개치마를 쓰고 자주색 깃과 끝동이 달린 저고리를 입고 있다. 여인의 신발이 비싼 갖신인 것으로 보아 꽤나 부유한 층이다. 하늘에는 초승달이 떠 있고 사내가 어둠을 밝히는 사각등을 들고 있다. 화제에는 시각이 삼경임을 말한다. “달빛 침침한 삼경 두 사람의 마음은 두 사람만 알겠지.” 삼경이라면 밤 11시에서 새벽 1시까지를 말한다. 조선시대 서울에는 통금이 있었다. 초경(밤 8시)에 인경종을 33번 치면 관원과 이속 외에는 거리를 다니지 못하고, 5경(새벽 4시)이 되어 파루종이 33번 울리면 통금이 해제된다. 따라서 이 두 남녀는 야금임에도 불구하고 은밀히 만나고 있는 것이다. 조선시대 양반가의 여인은 외출이 자유롭지 못했으며 꼭 외출해야 한다면 종과 함께 나서는 것이 통례인데 부유층에 속한 여인이 혼자 외출한 것은 사내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조선시대에는 남녀가 자유롭게 연애할 공간이 없었다. 깊은 밤 은밀한 곳이 사랑을 나누기에 안성맞춤의 공간이 되는 것이다.
박용숙 24, 작가미상, <맹견도>, 19세기, 종이에 채색, 44.2-98.5cm. 국립중앙박물관
김홍도 67, <소나무 아래 생황 부는 어린 신선>, 종이에 옅은 채색, 109-55cm. 고려대학교
신윤복 51, <손목: 소년전홍>, 간송미술관
신윤복 57, <봄날: 춘의만원>, 간송미술관
신윤복 62, <밀회: 월하정인>, 간송미술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