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거리와 읽을거리
화요일에는 춘천에 있는 강원대학에서 특강을 했습니다.
볼거리와 읽을거리에 관해서 주로 강의를 했는데,
학생들 모두 서양화, 동양화, 조각, 공예 전공자들이라서 창작에 관한 내용을 일환이었습니다.
볼거리란 양식을 의미하고 읽을거리란 작품의 내용, 동기, 목적 등을 의미합니다.
요즘 아주 많은 전시회가 있어 볼거리가 많지만 정작 읽을거리가 있는 작품이 드물다는 나의 비평이었습니다.
이는 작품을 제작하는 사람이 특별한 동기, 목적, 혹은 내용을 미리 생각하고 작품을 제작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한때는 양식 자체가 작품의 내용이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양식은 작품의 가치를 논할 때 별로 중요한 요소가 되지 못합니다.
작가가 어떤 재료를 사용했든, 어떤 방법으로 제작을 했든 그런 것들은 수단에 불과하기 때문에 자랑할 만하지 않습니다.
두 주 전 모대학원에서 특강할 때 후반부에 작가가 자신의 작품을 소개하는 시간이 있었는데, 언제 그렸고, 어떤 재료를 사용했으며, 특별히 어떤 기교를 사용했다는 등 양식에 관해서만 장황하게 늘어놓았습니다.
양식에 대한 설명만 한 것입니다.
정작 중요한 왜 그 작품을 제작해야 했는지에 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머리로 작품을 제작한 것이 아니라 순전히 손으로 제작한 것입니다.
어제 그런 말을 했습니다.
어떤 바보라도 캔버스에 색을 칠할 수 있다.
그리는 것은 어린이도 할 수 있고,
원숭이도 할 수 있다.
그리고 결과물은 놀랍게도 훌륭하게 나타날 수 있다.
그렇지만 우리가 어린이의 작품과 원숭이의 작품을 화랑이나 미술관에 걸지 않는 이유는 사변적인 사고를 앞세워서 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 것들을 보기에 그럴싸해도 작품으로 간주하지 않는다.
건축가가 건물을 짓기 전에 청사진을 그리는듯 작가는 사전에 자신이 완성할 작품에 관해 충분히 생각을 해두어야 한다.
더러 작업과정에 고치거나 우연에 의해 변경할 수는 있더라도 반드시 왜 작업을 하는지 신념을 가져야 만한다고 했습니다.
요즘 화랑에 가면 실험적으로 혹은 별로 깊은 생각 없이 손으로 제작한 작품을 많이 봅니다.
내게는 작품으로 보이지 않는 것들이 아주 많습니다.
나의 말로 하면 읽을거리가 없다는 말입니다.
볼거리만 있고 읽을거리가 없다는 것은 완전한 작품이 아니라 절반은 결여된 불구의 작품입니다.
학생들 모두 초롱초롱한 눈으로 열심히 들었습니다.
얼마나 나의 강의를 이해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생각의 전환이 되는 계기가 얼마만큼은 성취된 것으로 봅니다.
목수와 미쟁이의 작업을 폄하하려는 의도로 하는 말이 아니라
머리로 작업하지 않고 손으로만 혹은 기술로만 볼거리를 만드는 것은
목수와 미쟁이의 작업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목수와 미쟁이의 작업도 오래 연마한 기술이 있어야 가능합니다.
미대에서 오래 연마한 기술로만 작업한다면 그럴 작품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읽을거리가 있는 작품을 전시장에서 보았으면 합니다.
제발 볼거리만 있는 전시회는 사라졌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