줄리양, 난 이렇게 생각합니다.


줄리양이
"'포스트모던’이라는 기기묘묘한 신조어를 턱하니 들이대고는, 고작 1,2년만 흘러도 구식(Old-fashion)으로 치부해버리면서 새로운 것이면 무엇이건 만병통치 약방문마냥 덮어씌우는 요즈음입니다"라고 했는데,
사실 이런 경향이 농후합니다.

난 이렇게 생각합니다.
포스트모던이란 말은 스타일이 아니라 시기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더러 사람들은 포스트모던 미술품이니 영화니, 연극이니 하지만,
그들에게는 명확한 개념이 없습니다.
포스트모던은 혼란스러운 오늘날의 시기를 가리키는 용어에 불과합니다.


크리스 발딕은 1990년에 발간된 <간추린 옥스퍼드 문학용어사전>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을 다음과 같이 정의했는데 혼란스러운 오늘을 잘 표현했습니다.


1960년대 이후부터 선진 자본주의 사회에 널리 퍼져 있는 문화적 상황을 가리키며, 특히 TV, 광고, 상업디자인, 팝 비디오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이는 연결되지 않는 이미지와 양식들의 과잉을 특징으로 하고 이런 의미에서 ...
포스트-모더니티는 파편적 감각, 절충적 향수, 마음대로 소비할 수 있는 시뮬라크르simulacra(모조품), 뒤죽박죽인 피상성의 문화라 할 수 있다.
따라서 거기에는 전통적으로 가치를 지녔던 깊이, 일관성, 의미, 독창성, 진보성과 같은 특성들이 공허한 신호들의 무작위적인 혼돈 가운데 사라지거나 용해된다. ...
모더니스트 미술가와 작가가 신화, 상징, 혹은 복잡한 형식을 통해 세상으로부터 어떤 의미를 얻고자 애썼다면 포스트모더니스트는 경박한 냉담성을 지닌 현대적 실존의 부조리하고 의미 없는 혼돈을 환영하며 의식적으로 ‘깊이 없는’ 작업을 선호한다.
이 용어를 가장 많이 사용하는 사람들은 ‘포스트모던’을 ‘고급’과 ‘저급’ 문화들 간의 위계질서로부터의 해방으로 여기며 환영하는 경향이 있다.
반면 경멸조로 포스트모던의 지지자들을 ‘포스티posties’라고 부르는 회의론자들은 이 용어를 상업자본주의의 화려함과 도덕적 결핍에 대한 학문의 무책임한 도취증상으로 여긴다.


나는 크리스 발딕이 언급한 대로 포스트모던의 지지자들을 '포스티'로 부르는 회의론자에 속합니다.
"경박한 냉담성을 지닌 현대적 실존의 부조리하고 의미 없는 혼돈을 환영하며 의식적으로 ‘깊이 없는’ 작업을 선호하는" 예술가들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런 태도로 제작한 그들의 작품은 볼거리뿐이라는 것입니다.

내가 화랑에 가기를 꺼려하는 것은 이런 볼거리는 주변에 얼마든지 있기 때문입니다.
'깊이 없는' 볼거리는 전철에서도 발견되고, 홍대 앞에서도 얼마든지 발견하며, 신촌 현대백화점에서도 아주 많이 발견합니다.
구태여 화랑에 가는 수고를 할 필요가 없습니다.

내가 화랑에 가는 이유는 서점에 가서 신간을 뒤적이듯 새로운 읽을거리가 있을까 해서입니다.
단순히 눈요기를 하는 것이라면 거리를 걸으면 됩니다.

가령 거리를 걷다가 시선을 끄는 몇 사람을 내가 화랑에 마네킹처럼 세운다고 합시다.
이는 분명 볼거리가 될 것입니다.
가령 재래시장에서 콩나물을 파는 아주머니에게 일당을 주고 화랑 안에서 콩나물을 팔게 한다고 합시다.
이는 분명 볼거리가 될 것입니다.
볼거리를 만드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읽을거리란 내가 왜 그렇게 하는지를 설명할 수 있는 것을 말합니다.

이를 달리 말하면 작품에 자기 지시성self-referentiality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미술품으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반드시 어떤 읽을거리가 있어야 하고 그 읽을거리가 작품에서 물질적으로 구성되어야 합니다.
이는 오브제가 해석을 통해 작품으로 변용되어져야 한다는 것을 말하며 오브제에 읽을거리가 있어야 함을 뜻합니다.
요컨대 이는 미술비평의 소관으로 미술품으로 존재하려면 관람자가 이해할 수 있는 비평이 따라야 합니다.

작품에 자기 지시성이 있어 평론가의 식견이 이를 미술품으로 규정하는 중요한 판단의 요소로 삼게 됩니다.
동시대 비평은 작품에 대한 판단만 하는 것이 아니라 작품의 성립에도 작용합니다.
과거에는 작품을 성립하는 판단기준이 작품이 제작되기 전에 미리 존재했지만 동시대에는 작품을 규정하는 기준을 작가 스스로 제시해야 합니다.
이는 매우 분명한 읽을거리를 제공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아서 단토는 미술이 철학과 상보적 관계를 이룰 수밖에 없는 이유로 작품의 구성은 눈으로 파악되지만 그 의미는 눈으로 읽어낼 수 없기 때문으로 꼽았습니다.
의미를 캐는 데 철학적 추리능력이 요구되는 것입다.


줄리양,
줄리양의 사고 경향이 마음에 들어요.
지성인이라면 이성적, 논리적, 비판적 사고의 패턴을 기본으로 갖추어야 합니다.
모쪼록 미술사 공부에 진전이 있기를 바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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