줄리님,


우선 내가 상상했던 그 사람의 줄리가 아니군요.
난 내가 아는 사람의 익명으로 생각했더랬습니다.


제 글을 처음부터 읽고 계시다니 감사합니다.
그때 그때의 소감을 적은 글이라서 미비한 점이 많습니다.
헌데 줄리님의 객관적 분석을 글을 읽고 매우 기쁨니다.
그렇게 폭넓게 포용할 수 있는 아량이 마음에 쏙 듭니다.

줄리님이 언급한 대로 양면성을 인정합니다.
자연 정복 운운하지만 이면에는 허무주의자로서의 감성을 갖추고 있습니다.
이성과 감성의 양면성입니다.

"자연이 예술을 따라야 한다"는 말은 오스카 와일드가 한 것입니다.
이는 역설이기도 합니다.
예술이라는 문화가 우리의 생활과 밀접해 있고 이런 문화 속에서 나고 자라게 되면 자연을 예술의 눈으로 바라보게 됩니다.
예를 들면 변관식이 바라보고 그린 금강산도가 아주 마음에 들어 금강산에 가게 되면 변관식의 구도로 바라본다든가 하는 행위 말입니다.
안개낀 런던 브리지를 바바리 깃을 올리고 걸어가는 영화 속의 남자 주인공이 인상적이어서 안개낀 런던 브리지를 걷게 되면 주인공처럼 바바리 깃을 올린다든가 말입니다.

화가들의 풍경화는 정리된 자연입니다.
회화적으로 구도를 잡은 그렇게 바라보고픈 풍경을 그린 것입니다.
실재 자연에 나가면 풍경화와는 전혀 다른 산발적인 자연이 있다는 걸 알게 됩니다.
산발적인 자연과 화가가 구성한 풍경화의 자연 모두 자연입니다.
구태여 말하자면 있는 그대로의 자연과 우리가 원하는 자연이라고 하겠습니다.


줄리님이 영화를 언급하니까 새삼 그 영화 속의 여주인공이 눈에 선합니다.
다가오는 죽음을 당당히 맞으려는 여교수의 태도를 내가 자연에 대한 정복으로 적은 것 같습니다.
줄리님의 말대로 실은 여교수는 죽음에 불안을 나타냅니다.
내가 그 입장이라도 죽음에 대한 불안을 떨치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 모두에게 죽음을 가히 위협적입니다.
자연의 순리는 정복되지 않습니다.
정복이란 말 자체가 자연에서는 어울리지 얺는다는 것 잘 압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음을 이겼다고 말하는 건 죽음에 대한 불안이 모두 가셨다는 낭만적인 의미는 아닙니다.
인간의 존엄성에 관한 의미입니다.
불안을 떨구려는 노력에서 인간의 존엄성을 찾으려는 것이지요.
죽음의 절박한 상황에서 끝내 인간의 존엄성을 지킨 사례를 우리는 역사에서 얼마든지 찾을 수 있습니다.
영화 속의 여교수도 불안을 이겨내기 위해 노력합니다.
순순히 죽음을 맞이하지 않고 저승사자를 당당하게 맞겠다는 최후의 저항입니다.
난 이를 죽음의 미학이라고 생각합니다.

인간도 자연의 일부분입니다.
진화론적으로 보면 열성을 도태되고 우성이 생존하여 우성적으로 진화됩니다.
인간의 노력이 자연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노력이 우성이 되어 진화되기를 바랍니다.

문화는 인간의 자긍심 혹은 존엄성을 확대시키는 우리의 노력이라고 생각합니다.
자연도 여러 가지인데 불현듯 닥치는 자연의 힘 도는 강압
영화 속의 여교수처럼 갑자기 암으로 죽음의 터널을 걸어가야 할 때
이런 자연의 강압에 순순히 생명을 내주어야 하지만 여교수는 각종 실험을 통해 생명을 연장하는 것 반대하고 마치 스스로 선택한 죽음인양 어두운 터널을 걸어가겠다고 합니다.
그러나 얼마나 불안하고 외로움을 느끼겠습니까!

전 이런 양면성을 인정합니다.

자연을 정복해야 한다는 나의 말은 인간 위주의 삶 또는 인간 중심의 자연을 말한 것입니다.
암을 정복해서 다시는 여교수처럼 암으로 순순히 죽지 말아야 한다는 거지요.
난 자연에 의지가 있다고 믿지 않습니다.
대부분의 종교인은 자연에 의지가 있다고 믿지만 난 자연에 의지가 없다고 믿습니다.
연약한 식물이 성장하지 못하고 죽어가는 것은 자연입니다.
연약하게 태어난 신생아가 성장하지 못하고 죽어가는 것도 자연입니다.
그러나 의학의 발달로 이런 신생아가 살아 남아야 한다고 생각하며 미래의 의학이 이를 이루어낼 것입니다.
줄리님도 그런 의학의 발달을 바랄 것입니다.

난 암에 걸려 죽기 싫은데 죽어야 하기보다는 내 스스로 그만 살고 싶을 때 죽고 싶습니다.
그게 가능할지는 모르지만,
고승들 중에는 그렇게 죽음을 맞이한 분들이 있습니다.
그런 분들을 가리켜 죽음을 정복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암튼 이런 의미로 그때 안석환 선생님과 의견을 나눈 것입니다.
안선생님의 의견도 이런 범주 안에서 피력한 것으로 이해됩니다.
동전의 양면성처럼 말입니다.

줄리님이 언급한 대로 의견에 약간의 차이는 있더라도 대등소이할 겁니다.
자연 정복 운운해도 자연의 엄청난 힘에 허무를 느낄 수밖에 없고
자연에 순응 운운해도 무조건 자연에 나를 맡길 수는 없을 테니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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