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나텔로


도나텔로Donatello(Donato di Niccolo, 1386?~1466)는 15세기 유럽을 대표할 만한 조각가였으며 그와 우정을 나눈 친구 예술가들 알베르티, 브루넬레스키, 마사초 역시 빼어난 예술가들이었다.
그는 1404~07년에 기베르티의 조수로 그를 도왔지만 대가 기베르티의 고딕 우아함과는 다른 자신의 양식을 창조했다.
그는 기베르티가 중요하게 여긴 표면을 매끈하게 하고 우아한 선을 두드러지게 하며 감성적 요소를 드러나게 하는 방법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의 천재성은 기베르티처럼 일찍이 나타나지는 않았지만 서서히 드러났다. 그는 22살 때 기베르티와 상대가 될 만한 자신의 고유한 양식을 보여주었는데, 오르 상 미첼레Or San Michele를 위해 제작한 <성 베드로 St. Peter>였다.
그는 27살 때 <성 마가 St. Mark>를 제작했는데, 매우 강렬한 느낌을 주며 단순했고 나중에 미켈란젤로가 극찬해마지 않았다.

도나텔로는 23때 대성당을 위해 <다윗 David>을 제작했으며 나중에 여러 점의 <다윗>을 제작했다.
그가 제작한 <다윗> 가운데 가장 훌륭한 것은 코시모의 주문을 받아 1430년에 청동으로 뜬 것으로 메디치 궁전 안뜰에 세워졌다.
그는 다윗의 몸을 부드럽게 젊은이의 몸으로 묘사했고 얼굴과 헬멧도 그리스인의 형상을 닮게 하여 르네상스 조각의 특징이 되게 했다.
그는 사실주의 방법으로 제작하지 않고 자신의 상상력을 표현했는데 미켈란젤로의 <다윗>과 마찬가지로 표현적인 작품이 되었다.

도나텔로는 1432년 로마를 잠시 방문하면서 옛 성 베드로 성당을 위해 대리석으로 고전적 닫집 달린 감실을 디자인했다.
로마에서 그는 초상 흉상을 제작하는 방법을 익혀 르네상스의 초기 초상 흉상 제작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 되었다.
제노바 사람 장사꾼이 도나텔로에게 초상 흉상을 주문한 적이 있었다.
그는 도나텔로가 요구하는 돈이 너무 비싸다면 흉상을 제작하는 데 30일이 소요되었으므로 하루에 반플로린($12.50)계산해서 15플로린이면 충분하다고 주장했다.
도나텔로는 흉상을 산산조각이 나게 부수면서 음식물을 겨우 살 만한 돈을 받고 지성을 팔 수는 없다고 말했다.
도나텔로가 피렌체로 돌아간 것은 코시모가 그를 필요로 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 역시 코시모를 좋아했다.
예술에 깊은 관심이 있는 코시모는 그의 지성을 높이 샀으며 풍족한 가운데 작업할 수 있도록 배려해주었다.
코시모는 도나텔로의 자문을 받아 고대 조각, 석관, 아치, 기둥, 대접받침 등을 구입해 메디치 정원을 장식하고 젊은 예술가 지망생들로 하여금 공부하는 데 도움이 되게 했다.
그는 코시모가 아끼는 교회 상 로렌초에 두 개의 설교단을 만들고 청동 릴리프로 장식하면서 여러 장면 가운데 예수의 수난을 함께 장식했다.
그는 또 제단에 성 로렌스St. Lawrence의 흉상을 테라코타로 만들어 장식했으며, 성물 안치소에는 두쌍의 청동 문과 코시모 부모를 위한 단순하지만 아름다운 석관을 제작했다.
코시모가 1464년 세상을 떠나면서 아들 피에로로 하여금 도나텔로를 보살필 것을 당부했으며 피에로는 늙은 도나텔로를 위해 시골에 집을 마련해주었다.
그러나 얼마 후 도나텔로는 피렌체로 돌아와 자신이 사용하던 작업장에서 일했다.
단순한 생활로 일관한 도나텔로는 여든 해의 생을 마감했고 그의 장례식에는 피렌체의 예술가들 모두가 참석했으며 그의 유언대로 그의 유해는 상 로렌초 코시모의 무덤 옆 납골소에 안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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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로키오의 시대


바사리는 세르 피에로가 어느날 베로키오에게로 가서 레오나르도의 드로잉을 보여주었다면서 베로키오를 가리켜 피에로의 가까운 친구라고 적었다.
피에로는 돈만 아는 협량한 공증인이 아니었다.
1465년경 피에로는 상인 회사를 위해 일하면서 그 회사로부터 집을 세 얻었는데 그때 베로키오에게 오르 상 미셀레 외관의 벽감을 장식할 변호사들의 수호 성자 <성 토마스의 회의심 Incredulity of Saint Thomas>을 청동으로 제작해줄 것을 의뢰했다.
베로키오는 훌륭한 작업장을 갖고 있었고 매사에 매우 신중한 사람이었다.
그와 피에로가 어떤 우정을 나눴는지는 알 수 없다.
피렌체에는 많은 대가들이 있었지만 피에로는 레오나르도를 베로키오의 문하에서 공부하게 했다.

베로키오는 레오나르도보다 17살 많아 레오나르도에게는 아저씨도 같았다.
그는 조각가이면서 화가이며 또한 쇠를 잘 다루었고 당시 이탈리아의 중요한 예술가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그는 어렸을 적 금 세공을 배웠고 피올로 우첼로, 브루넬레스키, 기베르티, 기를란다요 모두 금 세공을 배우면서 예술가가 되었다.
그의 별명은 '진정한 눈 true eye'이란 뜻으로 날카로운 시각 때문에 붙여진 것이 아니라 젊었을 때 그 별명의 성직자의 수하에 있었기 때문에 얻게 된 것이다.
그는 자신이 도나텔로부터 수학했다고 했지만 그의 주요 재능은 금 세공에 있으며 섬세한 장인적 기교가 돌출한 그의 특징들 가운데 하나이다.
개인적인 위대함으로 보면 도나텔로와 비교가 되지 않지만 그는 새로운 세대의 새로운 이상을 매우 명료하게 표현한 예술가였다.

베로키오의 쇠 작품은 오직 한 점만 현존하는데, 1477~80년에 제작한 <목이 베어지는 세례 요한 Beheading of John the Baptist>이다.
이 작품은 피렌체 세례당을 위해 제작되었으며 현재 대성당 뮤지엄에 소장되어 있다.
그는 조각가로 더욱 유명했으며 청동을 다루는 데 탁월했지만 대리석과 테라코타의 작품도 제작했다.
그가 1475년경에 제작한 <다윗>은 도나텔로의 것보다 더욱 더 풍치가 있지만 덜 사고적이다.
도나텔로의 것은 평온한 데 비해 베로키오의 것은 이제 막 움직일 수 있는 인물로 보여진다.
베로키오를 화가로 보기에 적당하지 않다고 말하는 사람들의 주장도 일리가 있는데 그가 그렸다고 믿어지는 작품이 얼마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의 작업장에서 제작된 그림은 아주 많으며 당시 피렌체에서 가장 큰 작업장으로 많은 유명한 화가들이 그의 작업장에서 일했다.
그의 작업장은 피렌체에서 가장 다양한 작품을 제작해내는 곳이었고 제자들의 협력이 스승을 더욱 유명하게 만들었다.
회화와 조각을 결합시킨 일은 때마침 조각이 방법론적으로 자연을 철저히 탐색하려는 경향을 보이던 때라서 더욱 촉진되었다.
개인적 양식이 될 위험이 전혀 없었다.

베로키오는 젊었을 때 비극적인 사건에 휘말렸다.
그는 어느날 밤 친구들과 함께 포르타 말라 크로체와 포르타 아 핀티 사이에 있는 도시성곽 밖을 걸었다.
그와 친구들은 장난삼아 돌을 던지며 즐거워했는데, 불행하게도 그가 던진 돌이 14살의 모직제조공 안토니오 디 도메니코의 관자노리를 명중했고 그 소년은 그날 밤 죽었다.
그는 체포되어 투옥되었지만 살의가 없는 살인이었으므로 곧 풀려났지만 그 날의 사건에 대해 항의하는 사람들이 많아 사회적 물의를 일으켰다.
그는 평생 죄책감을 가지고 살아야 했다.
그해 베로키오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으며 세금 징수원이었던 그는 남긴 재산보다 빚이 더 많았다.
베로키오는 어머니 난니나와 다섯 형제 자매를 보살펴야 하는 의무를 떠맡게 되었다.
이런 상황이 그로 하여금 열심히 공부하고 작업하게 만들었다.

레오나르도가 베로키오의 작업장에 들어갔을 때만 해도 그는 형제 자매를 경제적으로 돕고 있었다.
베로키오는 결혼한 두 누이의 자녀들에게까지도 자발적으로 도왔다.
그는 결혼을 하지 않았는데, 작업량이 많아서였는지 결혼에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는 세금보고서에 자신과 동생들이 신발을 살 수 없을 정도로 가난하다고 적어 세금 징수원들의 동정을 사서 세금을 적게 낼 수 있었는데, 아버지가 세금 징수원이었기 때문에 세금을 적게 내는 요령을 아버지로부터 배운 것 같았다.
로렌초 디 크레디Lorenzo di Credi(1458년경~1537)가 1485년에 그린 그의 초상화를 보면 사각형의 얼굴에 볼이 통통하고 강렬한 시선을 느낄 수 있으며 넓은 코 아래 가는 입술에서는 감성을 느낄 수 없다.
그의 얼굴에서 부드러움을 느낄 수 없지만 턱이 작고 여성적이라서 이 부분에서는 부드러움이 엿보인다.
그는 오래 포즈를 취하는 데 힘이 드는지 왼손을 오른손 위에 올려놓고 긴장한 모습인데 빨리 끝내고 자신의 작업에 임하고 싶어하는 것처럼 보인다.
베로키오는 매우 부지런했다. 바시리는 그가 그칠줄 모르게 작업했으며 늘 손에 무엇인가를 쥐고 있어 "녹이 스는 것을 방지했다"고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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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드로 보티첼리


수세기 동안 산드로 보티첼리Sandro Botticelli(Alessandro di Mariano Filipepi, 1444/5~1510)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지만 현재 콰트로첸토의 가장 사랑받는 화가이다.
보티첼리란 이름의 뜻은 '작은 몸통 little barrel'인데 그의 형이 살이 쪄서 붙여진 별명으로 그에게도 사용되었다.
이 별명이 그의 성이 되었다.
보티첼리는 베로키오의 작업장에 들어오기 전에 필리포 리피로부터 수학했으며 그로부터 가장 많은 영향을 받았다.
그의 양식은 15세기 후반 예술가들의 것들과 유사한 데가 있는데 마사초의 과학적 자연주의에 반하는 고딕 양식으로 감성적이고 여성적 우아함과 장식적 요소가 두드러졌다.

보티첼리가 자신의 작업장을 가지고 독립한 것은 1465년경이었다.
그는 독립하고 곧 메디치가로부터 주문을 받아 일했는데, 로렌처의 어머니 루크레지아 토르나부오니를 위해 <유딧 Judith>를 그렸으며 그녀의 남편 피에로 고토소를 위해 <위대한 마돈나 Madonna of the Magnificat>와 <동방박사의 경배 Adoration of the Magi>를 그렸다.
그는 <위대한 마돈나>를 마돈나가 찬송가를 적고 있는 장면으로 묘사하면서 로렌초와 줄리아노 형제를 각각 열여섯 살과 열두 살의 소년들로 마리아가 쓰고 있는 책을 붙들고 있게 했다.
이런 아이디어는 그가 프라 리포로부터 받은 영향이었다.
<동방박사의 경배>에서는 코시모가 마돈나의 발 앞에 무릎을 꿇은 모습으로 그렸으며, 그 아래 피에로가 무릎을 꿇고 있는 모습으로 그렸고, 열일곱 살의 로렌초가 칼을 쥐고 있는 모습으로 그렸는데, 열일곱 살이면 법적으로 사람을 죽일 수 있는 나이이다.
보티첼리는 메디치가의 세 세대를 그림에 삽입한 것이다.
피에로가 사망한 후 로렌초와 줄리아노가 아버지의 뒤를 이어 보티첼리를 후원했으며 보티첼리가 그린 유명한 초상화는 줄리아노와 줄리아노의 애인 시모네타 베스푸치Simonetta Vespucci를 그린 것이다.

보티첼리는 대부분의 생애를 피렌체에서 보냈고, 유일하게 피렌체를 떠난 기간은 1481~2년으로 시스티나 예배당을 장식하기 위해서였으며, 그는 그때 페루지노, 로젤리, 기를란다요와 함께 나란히 작업했다.
그가 시스티나 예배당을 장식한 것만 봐도 당시 그가 유명한 예술가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로렌초 디 피에르프란체스코 데 메디치의 주문을 받고 <프리마베라 Primavera>, <비너스의 탄생 The Birth of Venus>, <팔라스와 켄타우로스 Pallas and the Centaur> 세 점을 그렸으며 현재 모두 우피치 뮤지엄에 소장되어 있다.
보티첼리는 종교적?신화적 그림을 주로 그렸지만 초상화도 그렸고 단테의 『신곡 Divine Comedy』을 위해 펜으로 드로잉도 많이 그렸다.
그는 작업장을 운영했는데 그의 제자들 중 가장 유명한 화가는 필리포 리피Filippino Lippi(1457년경~1504)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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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 필리포 리피


프라 필리포 리피Fra Filippo Lippi(1406년경~69)는 버려진 아이로 카르미네 수도원에서 자랐고 1421년에는 수사가 될 것을 맹세했다.
도미니칸 소속 프라 안젤리코와는 달리 그는 마지못해서 하는 탁발수사였으며 수녀 루크레지아 부티와 사랑에 빠져 스캔달을 일으켰고 부티는 그의 아들 필리피노Filippino(1457년경~1504)와 딸 알레산드라Alessandra를 낳았다.
필리피노는 열두 살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아버지로부터 그림을 배웠고 그후 보티첼리에게서 배운 후 피렌체의 유명한 화가들 가운데 한 사람이 되었다.
리피는 부티와의 결혼을 허락받았지만 여전히 서명을 할 때 수사로서 '형제 필리포스 Frater Philippus'라고 했다.

바사리에 의하면 리피가 화가가 된 것은 마사초가 카르미네 교회에서 그림을 그리는 것을 보고부터였다.
리피가 1437년에 그린 <타르퀴니아 마돈나 Tarquinia Madonna>는 마사초의 영향을 받아 그린 것이다.
그러나 1440년부터 그의 양식에는 변화가 생겼으며 좀더 선을 사용하면서 장식적 모티프를 선호했다.
그는 <동정녀와 아이 Virgin and Child>의 주제에 집착했으며 이를 둥근 원형tondi에 그렸으며 이런 포맷에 그린 최초의 화가들 중 한 명이었다.
프레스코 화가인 그의 유명한 작품은 1452~66년 프라토 대성당에 그린 성 스데반과 세례 요한의 일대기이다.
리피는 메디치의 후원을 받았으며 사기행위로 투옥되어 고문을 받을 때 메디치가의 도움을 받았다.
리피는 당대의 유명한 화가로 많은 화가들이 그의 영향을 받았고 특히 보티첼리가 그의 영향을 많이 받았으며 아마 그로부터 수학한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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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사초


피렌체 화가 마사초Masaccio(Tommaso di Ser Giovanni di Mone, 1401~28)는 비록 스물일곱 살에 요절했지만 위상은 친구들 알베르티와 브루넬레스키 그리고 도나텔로와 어깨를 나란히 한다.
마사초는 그의 별명으로 '칠칠치 못한 탐 Sloppy Tom'이란 뜻이다.
바사리는 그의 별명과 관련해서 마사초는 세상 것에 관심이 없다 보니 옷을 아무렇게나 남루하게 입고 다녀서 그런 별명을 얻게 되었다고 적었다.
마사초가 피렌체의 길드 멤버가 된 것은 1422년으로 그가 누구로부터 어떻게 수학했는지에 관해서는 전혀 알려진 바가 없다.
가장 초기의 작품으로 알려진 것은 현재 우피치에 소장되어 있는 상 조베날레 3부작San Giovenale Triptych으로 1422년에 제작한 것이다.
이 작품은 세련되어 보이지는 않지만 고딕의 우아함을 배척한 개성이 뚜렷해보이고 인물들의 체중과 부피를 묘사해내려고 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당대의 화가들에게 배우기보다는 조토의 그림에서 영감을 받았으며 중력과 장려함을 나타내려고 했다.
조토가 공간에 인물을 배치한 것과는 달리 마사초는 삼차원적으로 묘사하려고 했으며 이는 유럽 회화의 근간이 되었다.
그와 공통점이 있는 예술가를 꼽는다면 도나텔로로서 두 사람 모두 감성적 표현에 집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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