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로키오의 시대
바사리는 세르 피에로가 어느날 베로키오에게로 가서 레오나르도의 드로잉을 보여주었다면서 베로키오를 가리켜 피에로의 가까운 친구라고 적었다.
피에로는 돈만 아는 협량한 공증인이 아니었다.
1465년경 피에로는 상인 회사를 위해 일하면서 그 회사로부터 집을 세 얻었는데 그때 베로키오에게 오르 상 미셀레 외관의 벽감을 장식할 변호사들의 수호 성자 <성 토마스의 회의심 Incredulity of Saint Thomas>을 청동으로 제작해줄 것을 의뢰했다.
베로키오는 훌륭한 작업장을 갖고 있었고 매사에 매우 신중한 사람이었다.
그와 피에로가 어떤 우정을 나눴는지는 알 수 없다.
피렌체에는 많은 대가들이 있었지만 피에로는 레오나르도를 베로키오의 문하에서 공부하게 했다.
베로키오는 레오나르도보다 17살 많아 레오나르도에게는 아저씨도 같았다.
그는 조각가이면서 화가이며 또한 쇠를 잘 다루었고 당시 이탈리아의 중요한 예술가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그는 어렸을 적 금 세공을 배웠고 피올로 우첼로, 브루넬레스키, 기베르티, 기를란다요 모두 금 세공을 배우면서 예술가가 되었다.
그의 별명은 '진정한 눈 true eye'이란 뜻으로 날카로운 시각 때문에 붙여진 것이 아니라 젊었을 때 그 별명의 성직자의 수하에 있었기 때문에 얻게 된 것이다.
그는 자신이 도나텔로부터 수학했다고 했지만 그의 주요 재능은 금 세공에 있으며 섬세한 장인적 기교가 돌출한 그의 특징들 가운데 하나이다.
개인적인 위대함으로 보면 도나텔로와 비교가 되지 않지만 그는 새로운 세대의 새로운 이상을 매우 명료하게 표현한 예술가였다.
베로키오의 쇠 작품은 오직 한 점만 현존하는데, 1477~80년에 제작한 <목이 베어지는 세례 요한 Beheading of John the Baptist>이다.
이 작품은 피렌체 세례당을 위해 제작되었으며 현재 대성당 뮤지엄에 소장되어 있다.
그는 조각가로 더욱 유명했으며 청동을 다루는 데 탁월했지만 대리석과 테라코타의 작품도 제작했다.
그가 1475년경에 제작한 <다윗>은 도나텔로의 것보다 더욱 더 풍치가 있지만 덜 사고적이다.
도나텔로의 것은 평온한 데 비해 베로키오의 것은 이제 막 움직일 수 있는 인물로 보여진다.
베로키오를 화가로 보기에 적당하지 않다고 말하는 사람들의 주장도 일리가 있는데 그가 그렸다고 믿어지는 작품이 얼마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의 작업장에서 제작된 그림은 아주 많으며 당시 피렌체에서 가장 큰 작업장으로 많은 유명한 화가들이 그의 작업장에서 일했다.
그의 작업장은 피렌체에서 가장 다양한 작품을 제작해내는 곳이었고 제자들의 협력이 스승을 더욱 유명하게 만들었다.
회화와 조각을 결합시킨 일은 때마침 조각이 방법론적으로 자연을 철저히 탐색하려는 경향을 보이던 때라서 더욱 촉진되었다.
개인적 양식이 될 위험이 전혀 없었다.
베로키오는 젊었을 때 비극적인 사건에 휘말렸다.
그는 어느날 밤 친구들과 함께 포르타 말라 크로체와 포르타 아 핀티 사이에 있는 도시성곽 밖을 걸었다.
그와 친구들은 장난삼아 돌을 던지며 즐거워했는데, 불행하게도 그가 던진 돌이 14살의 모직제조공 안토니오 디 도메니코의 관자노리를 명중했고 그 소년은 그날 밤 죽었다.
그는 체포되어 투옥되었지만 살의가 없는 살인이었으므로 곧 풀려났지만 그 날의 사건에 대해 항의하는 사람들이 많아 사회적 물의를 일으켰다.
그는 평생 죄책감을 가지고 살아야 했다.
그해 베로키오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으며 세금 징수원이었던 그는 남긴 재산보다 빚이 더 많았다.
베로키오는 어머니 난니나와 다섯 형제 자매를 보살펴야 하는 의무를 떠맡게 되었다.
이런 상황이 그로 하여금 열심히 공부하고 작업하게 만들었다.
레오나르도가 베로키오의 작업장에 들어갔을 때만 해도 그는 형제 자매를 경제적으로 돕고 있었다.
베로키오는 결혼한 두 누이의 자녀들에게까지도 자발적으로 도왔다.
그는 결혼을 하지 않았는데, 작업량이 많아서였는지 결혼에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는 세금보고서에 자신과 동생들이 신발을 살 수 없을 정도로 가난하다고 적어 세금 징수원들의 동정을 사서 세금을 적게 낼 수 있었는데, 아버지가 세금 징수원이었기 때문에 세금을 적게 내는 요령을 아버지로부터 배운 것 같았다.
로렌초 디 크레디Lorenzo di Credi(1458년경~1537)가 1485년에 그린 그의 초상화를 보면 사각형의 얼굴에 볼이 통통하고 강렬한 시선을 느낄 수 있으며 넓은 코 아래 가는 입술에서는 감성을 느낄 수 없다.
그의 얼굴에서 부드러움을 느낄 수 없지만 턱이 작고 여성적이라서 이 부분에서는 부드러움이 엿보인다.
그는 오래 포즈를 취하는 데 힘이 드는지 왼손을 오른손 위에 올려놓고 긴장한 모습인데 빨리 끝내고 자신의 작업에 임하고 싶어하는 것처럼 보인다.
베로키오는 매우 부지런했다. 바시리는 그가 그칠줄 모르게 작업했으며 늘 손에 무엇인가를 쥐고 있어 "녹이 스는 것을 방지했다"고 적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