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사전문 공학가, 도시설계가, 건축가, 물리학자, 의학자, 화가로서의 레오나르도


레오나르도 역시 미켈란젤로와 마찬가지로 당대에 명성이 높았지만 두 사람 모두 사후에 더욱 더 위대한 예술가로 인식되었으며, 단지 르네상스의 대가로만 유명한 것이 아니라 서양미술사 전반에 걸쳐 가장 뛰어난 인물들로 평가되고 있다.
두 사람은 근대 미술의 초석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미술의 개념을 확고히 했으며 서양미술의 패러다임이 되었다.
예술가가 부와 권력의 수족이 아니라 독자적이고 고유한 창작의 세계를 갖고 있다는 점을 일생을 통해 보여줌으로써 근대 예술가들의 규범이 되었다.
화가들은 레오나르도의 작품을 그대로 모방함으로써 독특한 그의 양식을 따르려고 했다.
레오나르도를 존경한 라파엘로는 <아테네 학파 The School of Athens>를 그리면서 플라톤의 모습을 레오나르도로 대신했다.

바사리는 <미술가 열전>(1550) 초판에 "하늘은 이따금 인문학뿐 아니라 신성까지도 대변하는 인물을 보내서 사람들로 하여금 그를 모델로 삼아 모방하게 하며 우리의 정신과 지성이 가장 우수한 하늘나라의 영역에 다가갈 수 있게 만든다"고 적었는데, 레오나르도를 염두에 두고 쓴 것이다.
바사리는 1569년의 재판에서는 이 구절을 삭제했다.
미켈란젤로를 최고의 예술가로 꼽았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레오나르도와 미켈란젤로 두 사람을 놓고 누가 더 우수한 예술가이냐고 묻는다면 미켈란젤로가 훨씬 더 많은 작품을 남겼으므로 그의 영향이 월등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두 사람 가운데 누가 더 문명에 기여했느냐고 묻는다면 단연히 레오나르도의 업적을 꼽아야 할 것이다.
레오나르도는 미술뿐 아니라 과학 전반에 걸쳐서 단연 선구자였기 때문이다.

레오나르도에게 화가란 세계를 탐구의 대상으로 보고 눈에 보이는 모든 사물을 지배하는 명료한 눈길이었다.
바사리는 그가 시장에서 새를 산 뒤 날려보내는 것을 사람들이 목격했다고 적어 그의 행위가 사람들에게 이상하게 보였음을 기록했다.
레오나르도는 세계를 샅샅이 조사하려고 했다.
그에게는 사물에 대한 새로운 감동이 많아 새로운 표현방법으로 예술을 행위해야 했다.
그는 만족을 모르는 실험가였다.
그가 세상을 떠난 지 한 달 후 제자 프란체스코 멜치는 스승의 의붓남동생들에게 타계 소식을 알리면서 "그 분은 제게 있어 어버이들 중 최고와도 같았습니다"고 적었다.
멜치는 스승이 타계하자 슬픔을 도저히 억누를 수 없었다며 "자연은 그 분과 같은 인물을 창조해내는 데 있어 무력할 뿐 quale non e podesta della natura"이라고 탄식하며 레오나르도에게 최대의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물론 스승에 대한 제자의 글이라서 객관성이 없다고 말할런지 모르지만 예술가의 재능을 진정으로 아는 데는 제자가 오히려 더 적합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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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나르도는 1519년 5월 2일 프랑스에서 타계했다.
시신은 앙부아즈의 성 플로렌탱 교회에 안장되었다.
매장증명서에는 같은 해 8월 12일에 다시금 매장식이 거행된 것으로 적혀 있다.

1802년 황제 나폴레옹은 원로원의 의원 한 명을 선임하여 앙부아즈의 기념물들에 대한 복구를 명령했는데 당대의 약탈과 프랑스 혁명시기의 만행으로 항폐해졌기 때문이다.
원로원 의원은 성 플로렌탱 교회는 보존할 가치가 없어 보인다고 보고했는데, 그의 말에 의하면 놀라울 정도로 파괴되어 있었다.
묘비들이 나동그라져 있고 무덤은 파헤쳐진 상태였다.
폐허가 된 교회터에서 아이들이 무덤 밖으로 파헤쳐져 나온 뼈를 놀이에 사용할 정도였다.
정원지기가 뼈들을 추스러 모아 정원 모퉁이에 묻었다.
모든 무덤이 파헤쳐졌던 것은 아니었지만 어느 누구도 레오나르도의 무덤이 어느 것인줄 알지 못했다.
아이들이 갖고 놀았던 뼈가 레오나르도의 것이었을 수도 있다.

1863년 시인 아르세느 우사에는 성 플로렌탱 교회가 세워졌던 곳을 발굴해 하나의 완전한 골격을 발견했다.
흥미롭게도 팔이 굽었고 한 손 위에 해골이 얹혀진 상태였다.
시신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묘석 파편들이 있었는데, 불완전한 글이지만 '레오나르도스 빈치우스 EO DUS VINS(Leonardus Vincius)'라고 짐작할 수 있게 적혀 있었다고 한다.
시인은 해골이 보통 것들보다 컸다고 적으면서 지성인의 것으로 레오나르도의 것이란 심증을 가졌다.
이 뼈는 성 내 성 위베르 예배당에 안치되었고 사람들은 이 뼈가 레오나르도의 것이라고 믿기 시작했다.
그러나 불완전한 글이 적힌 묘석의 파편은 현존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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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회화에 관한 논문> 

 

레오나르도는 무려 5천 페이지에 달하는 많은 글을 썼다.
이것들은 그의 생전에 한 권의 책으로 묶여지지 못했지만 글의 양으로 보면 그는 예술가라기보다는 저술가라고 해야 타당할 것이다.
그는 생전에 120종에 달하는 글을 쓰고 있다고 했지만 현존하는 것은 50종에 불과하다.
이것들은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쓰여진 것들로 절반은 흘린 글씨로 왼손잡이가 동양식으로 쓴 것처럼 보인다.

레오나르도가 쓴 글은 양적으로 보면 과학과 미술에 관한 내용이 반반이며 미술에 관한 내용은 1651년에 <회화에 관한 논문>으로 처음 출간되었다.
당시 출판사가 편집을 했지만 그이 중복되고 짜임새가 없으며 문법적으로도 문제가 있어 레오나르도의 글이 내용에서는 우수했지만 문장력에 있어서는 매우 취약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는 회화를 회화로서만 익힐 수 있다는 당시의 사고를 부정하고 화가가 되려는 사람은 다른 화가의 작품을 모사하기보다는 자연을 연구하고 알아야 한다면서 들에 나가 다양한 오브제들을 바라보고 각 오브제들의 상이함을 알도록 하라고 주문했다.
그는 화가가 해부학, 원근법, 명암을 배워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지각과 경험을 중시한 것으로 그의 사고의 근거는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전래된 "우리의 모든 지식은 지각 안에 그 원천을 두고 있다"란 문구에 요약되어 있었다.
그는 말했다.

"많은 사람들은 경험적 판단이 없기 때문에 내가 해놓은 증명들이, 경험 없이 얻어낸 판단으로 존경을 한 몸에 모으고 있는 어떤 이들의 권위에 맞서는 것이라고 단언하면서 나를 비난하는 것이 정당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이는 내 작업이 하나밖에 없는 진정한 스승인 순수하고 단순한 경험의 소산임을 알지 못하는 태도이다."

레오나르도에게 있어 회화의 확실성은 다양한 요소들에 의해 결정되었는데, 첫째, 가장 정확하게 사물을 파악할 수 있는 눈에 의존하고, 둘째, 눈으로 파악할 수 없는 것들은 실제 척도를 따라 판단을 검증하며, 셋째, 기하의 원리를 이용하는 데 있었다.
시를 옹호하는 사람과 논쟁을 벌일 때 그는 "회화가 자연의 상을 시보다 더 진실되게 나타내기 때문에 더 낫다"고 주장했으며, 회화와 시의 관계를 실재와 그림자의 관계에 비유했다.
그는 또 회화가 조각보다 우수함을 역설하면서 조각이 색채나 대기의 원근을 나타낼 수 없으며 발광체나 투명체를 비롯하여 구름과 폭풍우, 그 외의 많은 것들을 묘사할 수 없음을 지적했다.
회화를 일종의 과학으로 보았으면서도 그는 예술적 모방은 과하적 행위이지만 단순히 기계적인 행위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님을 강조하면서 이론에 근거하는 실천을 역설했다.
그는 말했다.

"학문적 바탕 없이 실제 작업에만 힘을 쏟는 사람들은 키나 나침판을 갖지 않고 바다로 나가 자신들이 어디로 가는지 확실히 알지 못하는 선원들과 같다. 실천은 늘 확고한 이론에 근거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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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크니는 책을 쓰기보다는 그림을 그려야 한다


오랜만이에요, 이 선생.
결혼해서 식구가 딸리니 더욱 더 일하는라 바쁜가보지요?
하느님이 아담에게 준 벌입니다.


호크니의 저서에 관해 TV에서 자세히 소개했으므로 책을 사보지 않아도 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호크니가 예증을 한 광학에 의한 인물화 그리고 주변의 오브제들을 정밀하게 묘사하는 수단으로서의 거울의 사용은 타당할 뿐 아니라 그가 예로 든 몇몇 화가들의 작품에서는 매우 설득력이 있습니다.
문제는 호크니가 너무 쉽게 과거 대가들의 업적을 광학과 거울이라는 수단을 통해 쉽게 이루어진 것처럼 시사한 데 있지요.
미국의 유명한 평론가 수잔 손탁은 호크니의 주장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그의 말대로라면 대가들이 자위행위를 했단 말이냐?"고 반문하면서 일고의 가치도 없다고 일축했습니다.
나의 생각은 일고의 가치가 없다고는 말할 수 없다는 것과 호크니가 예증한 방법을 화가들이 사용했다고 하더라도 그런 방법으로 그렸기 때문에 걸작이 나온 예는 없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과학적 관찰의 수단으로는 매우 유용했지만 창작에는 거의 도움이 되지 못했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난 호크니가 많은 시간을 책을 쓰는 데 할애하기보다는 저술은 학자들에게 맡기고 그림을 더욱 더 열심히 그렸으면 낫겠다 싶습니다.
팝아트 이후 그가 그린 풍경화는 매우 좋습니다.
요즘은 어떻게 그리고 있는지 모르지만 그의 재능이 또 다른 창작으로 우리에게 보여졌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미술에 있어서의 르네상스의 특징은 과학적 관찰에 의한 창작에 있습니다.
당시 보티첼리의 고딕적 회화를 레오나르도나 미켈란젤로가 하찮게 여겼고 한동안 보티첼리는 평범한 화가로 알려졌습니다.
19세기 말에 와서야 그에 대한 관심이 갑자기 많아졌지요.
당대에 그의 작품을 하찮게 여긴 것은 과학적 관망이 나타나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사실에 대한 관심은 예술가들에게 높았습니다.
레오나르도는 사실적인 방법으로 원근법을 익히기 위해 도구를 만들어 사용했고 뒤러가 도구를 만들어 원근을 연구한 건 잘 알고 있겠지요?
이런 도구의 사용은 빛을 이용한 것입니다.
호크니도 예증했듯이 유리 위에 종이를 대고 유리에 비치는 오브제를 그대로 그리는 것입니다.
자화상은 거울을 보고 그린 것이지요.
호크니가 지적한 대로 얀 반 아이크의 작품에 오목거울이 등장하고 유리, 거울, 렌즈가 사용된 건 분명합니다.
레오나르도의 초상 드로잉을 보면 얼굴과 머리를 점으로 미리 찍어놓고 그린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도구를 사용해서 점으로 외양을 미리 정해놓고 그렸음을 알게 해줍니다.

그러나 매우 중요한 사실은 도구가 관망에 직접적인 도움이 되었더라도 창작에는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는 것이지요.
요즘 많은 화가들이 사진이나 인쇄물을 모사하여 작품을 제작하는데, 그런 작품들치고 훌륭한 작품이 없듯이 과거 대가들의 작품에서도 그런 것들에 의존한 증거가 없다는 것입니다.
손탁이 호크니의 주장을 일축한 건 그런 이유에서 입니다.

예를 들면 과학에 누구보다도 지식이 많은 레오나르도이지만 <모나리자>를 포함해서 그가 그린 초상화는 수년이나 걸린 것이고 미완성도 많습니다.
도구를 사용하는데 왜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리거나 완성을 시키지 못했겠어요.
도구에 나타난 이미지는 회화의 이미지가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진의 이미지인 것입니다.
사진과 회화의 다른 점이지요.

17세기에 와서 렘브란트의 초상을 보더라도, 18, 19세기 대가들의 작품을 보더라도 부분적으로는 광학과 사진의 도움을 받았겟지만 역시 화가는 제 손으로 그렸단 말입니다.
대가들의 작품이지만 원근이 맞지 않거나 인물화의 경우 손이 팔이 유난히 크거나 긴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도구를 사용하면 그런 단점을 정정할 수 있었겠지만 창작하는 데는 오히려 걸림돌이 되었기 때문이지요.

호크니가 예로 든 몇몇 작품의 경우는 호크니의 주장대로 도구의 도움을 크게 입은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러나 그런 몇몇 사례를 모든 대가들에게 적용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매우 미미해서 그의 주장이 중요하게 다뤄지지 않는 것입니다.
역시 화가는 그림 그리는 일에만 정진해야 한다고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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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치에서 태어난 천재 사생아 레오나르도 다 빈치


레오나르도 다 빈치Leonardo da Vinci는 1452년 4월 15일 토요일 오후 10시 30분 토스카니의 마을 빈치의 불우한 환경에서 태어났다.
빈치Vinci는 빈치Vinchi에서 유래했는데 빈치는 토스카니 시골 사람들이 엮는 골풀로 빈치오Vinchio로 불리우는 개울가에서 자랐다.
레오나르도는 자신의 성을 골풀과 동일시하여 <흰담비를 안은 여인>과 <모나리자>에서 골풀을 사용했다.
빈치는 피렌체에서 약 32km 떨어진 마을이다.
빈치는 우리나라 읍에 해당한다.
에트루리아에 속했다가 훗날 로마 영토가 된 이 마을은 몬탈바노와 아르노 강 계곡 사이에 위치하며 구이디 공작의 중세 성과 산타 크로체 교회, 양로원과 몇 채의 집이 있었다.
빈치의 옛 법령 부록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빈치는 성이다. 이 성의 역사는 거인들의 역사로 거슬러 올라간다. 거인들은 열광적으로 거만하게 하늘에 대항했고 결국 하늘의 벌을 받아 큰 치욕을 당했다."

빈치가 피렌체의 영토가 된 것은 13세기 중엽이다.
기능적이고 상징적인 요새 형상을 한 빈치는 아몬드처럼 생겨 군사적, 종교적 힘의 타워를 돛대로 삼은 한 척의 배 안에 건설된 성처럼 보였다.


레오나르도의 할아버지 안토니오Antonio di Ser Piero da Vinci(1372년경~1465)는 고조할아버지의 공증기록부 마지막 페이지 아래에 "1452년 손자가 태어났는데, 나의 아들 세르 피에로Ser Piero의 아이이다"라고 적었다.
아이가 사생아일 경우 아이 어머니의 이름을 기록하지 않는 것은 상례였다.
세르 피에로는 레오나르도가 태어나던 해 결혼했으며 피렌체의 부르주아 딸 열여섯 살의 알비에라 디 조반니 아마도리Albiera di Giovanni Amadori를 아내로 맞아 피렌체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그때 피에로의 나이 스물다섯이었고 직업이 공증인으로 사업차 피사, 피스토이아, 피렌체 등지에 출장을 가곤 했다.

레오나르도의 어머니는 카테리나Caterina로 알려졌으며 아이를 출산할 때 그녀의 나이는 스물두 살로 농부의 딸이었다.
카테리나의 아버지는 소작농이었거나 여인숙의 머슴이었던 것 같다.
카테리나의 성은 밝혀지지 않았다.
그녀는 레오나르도를 낳고 얼마 후 별명이 아카타브리가Accattabriga로 알려진 걸핏하면 싸움질하는 안토니오 디 피에로 디 안드레아 디 조반니 부티Antonio di Piero di Andrea di Giovanni Buti란 사람과 결혼하여 빈치에서 불과 2km밖에 떨어지지 않은 캄포 제피Campo Zeppi에 살림을 차렸다.
카테리나는 곧 딸 피에라를 낳았고 딸을 셋 더 낳은 후 아들을 낳았다.
이들 다섯은 레오나르도의 의붓여동생 남동생이 되는 셈이다.
카테리나가 레오나르를 낳고서도 서둘러 결혼을 한 걸 보면 피에로로부터 버림을 받았기 때문인 것으로 추측된다.
아카타브리가는 빈치에 익히 알려진 인물로 1449년과 1453년 사이에 마을 근처에서 도기 굽는 일을 했으며 성 베드로 수도원의 도기 가마공노릇을 했다.
그의 가족은 콤포 제피에 농지를 갖고 있었는데 안토니오 디 리오나르도의 땅과의 경계선에 위치했고 리오나르도는 레오나르도의 할아버지들과 관련이 있던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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