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환기의 조형주의
김환기는 중동 중학교를 중퇴하고 도항해 일본 동경의 니시기시로 중학을 나온 후 귀국했으며, 다시 밀항하여 1933년 스무 살 때 일본대학 예술학원 미술부에 입학했다. 이 시기 동경에는 한국 미술학도들이 적지 않았다. 1935년 그의 처녀작 <종달새 노래할 때>(1935)를 보면 해안을 배경으로 바구니를 이고 가는 한복차림의 시골 처녀 앞모습으로 입체주의 양식으로 각이 지게 그려졌지만, 유럽 입체파 화가들이 추구한 다각도의 시각을 펼친 것이 아니라서 그가 입체주의를 구성의 간결함을 위한 양식으로 응용했음을 알 수 있다. 1937년 귀국한 후 자유전에 소개한 작품들을 보면 오브제를 유추할 만한 추상적 형상과 기하적 구성이 두드러지며 이런 점은 지속된다.
그는 1947년 친구 화가들과 더불어 신사실파를 출범시키고 이듬해 12월 서울 화신화랑에서 창립전을 개최했다. 이 시기의 작품 <나무와 달>(1948)과 <수림(숲)>(1949)을 보면 달과 나무를 파란색으로 표현했는데 톤은 달라도 파란색은 이후 그가 즐겨 사용하는 색이 된다. 색을 평편하게 넓게 칠하며 입체감을 없애고 조형에 치우친 점 역시 그가 지속적으로 추구한 요소이다. 그에게 회화는 실재의 기록이 아니라 조형적 착상이며 시각의 문제가 아니라 정리된 감성의 요약적 표현이었다. 이 점을 염두에 두고 그의 작품을 보아야 한다.
6.25동란이 발발하자 아내 김향안과 부산으로 피난간 그는 다락방에 살면서도 그림을 계속 그렸다. 그에게 낭만적 기질이 있음을 작품을 통해 알 수 있는데, <피난열차>(1951), <판자집>(1951), <뱃놀이>(1951년경) 등은 피난 군중, 가난한 삶, 그런 가운데서의 여가를 모티프로 한 것들로 단순한 조형 외에도 밝고 명랑한 혹은 시적 느낌을 주는 색이 사용되었다. 익살스러울 정도로 그는 실재 세계를 만화의 세계로 변형시켰다. 굳이 말하면 조형주의는 화가로 데뷔하면서부터 줄곳 그가 추구한 미학이다. 실재에 대한 조형의지가 얼마나 강했는지 <뱃놀이>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후 그는 더이상 창작의 동기를 실재 환경에서 찾지 않고 화실에서 상상을 통해 발견하기 시작했으며 본격적인 김환기의 조형이 시작되었다.
그의 정물화에는 조선조 백자가 주로 등장한다. 피난가기 전 성북동 집에는 이조시대 탁자와 항아리들이 가득 했다. 전통미에 대한 관심이 컸음을 말해준다. 1950년대 그의 주요 모티프는 백자로서 예를 들면 <항아리와 시>(1954), <항아리와 여인>(1956), <백자>(1956), <항아리와 매화>(1957), <항아리와 새>(1957), <항아리>(1958) 등이다. 그는 '청백자 항아리'란 제목의 글에 적었다. "내 뜰에는 한아름되는 백자 항아리가 놓여 있다. 보는 각도에 따라 꽃나무를 배경하는 수도 있고 하늘을 배경하는 때도 있다. 몸이 둥근 데다 굽이 아가리보다 좁기 때문에 놓여 있는 것 같지가 않고 공중에 둥실 떠 있는 것 같다. 희고 맑은 살에 구름이 떠 가도 그늘이 지고 시시각각 태양의 농도에 따라 청백자항아리는 미묘한 변화를 창조한다. 칠야삼경에도 뜰에 나서면 허연 항아리가 엄연하여 마음이 든든하고 더욱이 달밤일 때면 항아리가 흡수하는 월광으로 인해 온통 내 뜰에 달이 꽉 차 있는 것 같기도 하다" 항아리에 대한 지속적 관찰과 찬양은 그의 특유 조형으로 여러 점 제작되었다. 고전미술에 자신의 회화를 접붙이려고 한 그는 항아리 외에 산, 새, 매화, 달, 구름, 나무, 사슴 등을 모티프로 삼았다.
피난시절 1952년 홍대 교수에 부임했으며 5.16쿠데타 이후 1962년 대학정비령에 따라 미술학부만 남게 되자 홍익미술대학 학장이 되었다. 그가 파리로 간 건 1956년 5월이었다. 그는 말했다. "여기 와서 느낀 것은 시정신이오. 예술에는 노래가 담아져야 할 것 같소. 거장들의 작품에는 모두가 강력한 노래가 있구려. 지금까지 내가 부르던 노래가 무엇이었다는 것을 나는 여기 와서 구체적으로 알아진 것 같소. 밝은 태양을 파리에 와서 알아진 셈." <영원한 것들>(1956~57)은 아홉 개의 모티프를 가로 세로 세 개씩 병렬한 작품으로 그가 말한 화면을 채우는 그의 노래로서 3년 동안 파리에 체류하면서도 그의 주제는 이상적인 달, 구름, 학, 사슴, 산, 섬, 매화, 나무, 백자, 물고기 등이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영원의 상징으로 삼았던 것들이 그의 영원의 노래가 되었다. 전통 모티프를 현대적 회화의 세계로 운반하는 데서 그는 전통미를 계승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귀국 후 그는 홍대 학장으로 활동했지만 재단과의 갈등으로 대학을 떠나게 되었다. 그는 상파울로 비엔날레 커미셔너의 자격으로 출국한 후 돌아오지 않고 1963년 10월 뉴욕으로 가서 11년 동안 지냈다. 특기할 점은 뉴욕에서 회화에 큰 변화가 일어난 것이다. 과거 작품이 김환기식 전통미의 재해석 혹은 전통적, 보편적 모티프를 새로운 조형으로 조명한 것이라면, 뉴욕에서 그는 미니멀리즘과 색을 평편하게 넓게 칠하는 컬러필드color-field의 영향으로 더욱 더 간소한 조형을 추구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파란색을 선호하여 파란색을 자신의 색으로 확립했다. 그는 오브제의 형상을 더이상 사용하지 않고 완전추상으로 나아갔다. 색을 상징적, 기호적 그리고 감성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했으므로 대부분 무제였고 제목을 붙일 경우 <봄의 소리>(1965),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1970) 등 개인적 감상의 표현이었다. <봄의 소리>,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10-08-70>(1970), <27-08-70>(1970) 등은 걸출한 작품이었다. 그의 조형이 최종에 이른 결실이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종착지를 인식하지 못했다. 더이상 나아갈 수 없는 조형의 극단에 이르렀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세계를 허물기 시작했다. 1970년 이후 작품들은 언급할 가치가 없다. 굳이 말하면 유치한 방법으로 격을 한층 떨어뜨린 것들이다. 그는 1974년 7월 7일 뉴욕 포트체스터의 유나이티드 병원에 입원해 수술받았고 14일 침대에서 떨어져 뇌일혈로 12일 동안 인공호흡을 계속하다가 25일 아침 9시 40분에 타계했다. 시신은 뉴욕시에서 한 시간 가량 떨어진 바할라의 켄시코 묘지에 안장되었고 뉴욕에 거주하는 조각가 한용진이 묘비를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