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응로의 사의적·서예적 추상

이응로는 1976년 서울 신세계 미술관에서 열린 개인전 카탈로그에 적었다.

"내가 그림을 시작한 것이 벌써 70년이 되었다. 그 지나온 70년을 되돌아보니 소년기의 자유자재했던시절을 제하고 약 10년을 주기로 하여 여섯 번으로 나뉘어 변화하였음을 발견하게 된다. 20대를 우리나라 전통의 동양화와 서예적 기법을 기초로 한 모방시기라 하면, 30대를 자연물체의 사실주의적 탐구시대, 40대를 반추상적 표현이라 할 수 있는 자연사실에 대한 사의적 표현, 그리고 50대에 유럽에 와서 추상화가 시작된다. 그로부터 오늘까지 다시 나누어 전기 10년을 ‘사의적 추상’이라 하면 후기 10년을 ‘서예적 추상’이라 이름지어 보겠다.”

그때로부터 1989년 86세로 타계할 때까지 한 차례 더 창작에 변화가 생겼으므로 모두 일곱 차례에 걸친 변화이다. 40대의 반추상에서부터 이응로의 감정 표현과 조절이 회화적 장점으로 나타났으며 오브제를 사의적으로 표현하고 자연의 기운을 역동적으로 다룬 점이 주목할 만하다. <분출>(1950)과 <산>(1954)은 자연의 기운에 대한 느낌을 표현하고 조절해 회화적 균형 혹은 구성을 창작한 것들로 장차 그릴 일련의 <문자추상>과 미학적 공통성이 있다.

그는 1958년 크리스마스 다음 날 프랑스로 향했으며 환경의 변화가 그로 하여금 창작의 태도를 바꾸게 만들었다. 유럽 미술의 본고장에서 종이콜라주paper collages와 앵포르멜Informel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종이콜라주는 조르주 브라크가 1912년 처음 발견한 방법으로 우연히 벽지를 파는 상점 앞을 지나다가 나무결처럼 생긴 벽지를 잘라 붙이면 환상의 효과가 생길 것이라고 생각했다. 종이콜라주는 종이를 풀로 붙인다는 뜻이며 브라크는 자신과 더불어 입체주의를 창안한 피카소와 함께 이 기교를 회화에 이용해 환상적 삼차원의 효과를 한층 높였다. 앵포르멜은 미셸 타피에Michel Tapie가 1940년대와 50년대 유럽 주요 화가들의 즉흥적 완전추상화에 붙인 명칭으로 영어로는 ‘형식이 없는 without form’이란 뜻이며 비형식주의Informailsm란 말로 통용되기도 한다. 하지만 앵포르멜은 단순히 형식을 무시한다는 의미보다는 좀더 넓은 의미로 서정적 추상lyrical abstraction을 말하며, 가벼운 붓질로 색을 칠해 불규칙한 얼룩을 남긴다고 해서 붙여진 명칭 타시즘Tachisme(프랑스어 타시tache는 얼룩blotch이란 뜻이다)과 동일한 양식이다. 특정한 주제가 없이 화면 전체를 하나의 구성으로 하는 올-오버 회화all-over painting를 <분출>을 통해 실험한 적이 있고, 또한 감정 표현과 조절을 통해 서정적 반추상을 추구해온 이응로에게 당시 유행한 앵포르멜 양식은 매우 친숙하게 느껴졌을 것이다.

그는 1960년에 여러 점의 <문자추상>을 그렸으며 한동안 이 주제에 집착했다. 캔버스에 종이를 잘라 구긴 다음 풀로 붙이고 그 위에 색을 칠한 것들로 대부분의 작품에 문자를 유추할 만한 형상이 없어 제목에서 문자란 말을 빼고 추상 혹은 구상으로 불러야 타당하다. 종이콜라주가 주는 입체감과 오십 후반에 이르도록 훈련해온 채색기술 그리고 올-오버 구성이 한데 어우러져 유행에 있어 프랑스 주요 화가들의 작품에 뒤지지 않았다. 종이콜라주의 부드러운 질적 장점을 십분 활용해 부조와 같은 입체감을 한껏 드러낸 완전추상 작품으로 1961~81년작 <문자추상>을 꼽을 수 있다. 대표작으로 꼽을 만한 이것은 <도시>(1970)와 <태양>(1972)과 관련 있으며 회화의 평면성에 갑갑함을 느끼고 좀더 자유로운 삼차원의 표현으로 나아가기 시작한 이정표가 된다. 그는 결국 입체적 표현을 위해 조각을 제작하기 시작했는데, <세 얼굴>(1964)과 <토템>(1964)은 이그러진 얼굴 그리고 풍상에 깍여 형상을 알아볼 수 없는 원시적 형태를 주제로 한 것이다. 창작 중심에 사람이 있다는 점이 특기할 만하며 사람은 그의 작품에서 다양한 형상들도 나타나다가 60년대 후반부터는 군상으로 큰 무리를 이룬다. 조각의 재료로 흙과 나무를 주로 사용했는데, 서정성을 나타내기에 매우 효과적인 재료이다. 이런 재료는 인간에게 가장 친근한 물질이라서 부드럽고 포근한 느낌을 주기 때문에 사람의 형상을 표현하기에 안성맞춤이다.

이응로의 감정 표현은 발산적이라서 다분히 서양적이지만 조절 방식은 부드러워 동양적이어서 과격하게 치우치지 않고 절제된다. 감정을 지나치게 과장하거나 절제하여 서정성이 떨어지고 진부한 조형에 머물고 만 작품들도 없지 않지만 일관성을 유지하며 그가 추구하려고 한 점은 젊었을 때부터 창안한 사의적·서예적 추상이며, 이는 이응로 미학의 근간을 이룬다. <문자추상>이란 제목으로 많은 작품을 제작했는데 문자적 커뮤니케이션을 위해서가 아니라 회화에서만 가능한 조형문법이며 이를 감정 표현의 수단으로 삼아 이응로 고유의 추상문법이 되게 했다. 그의 문법이란 다름 아닌 사의적·서예적 추상을 말한다. 흥미로운 점은 문자를 구상적 인간의 형상으로 변형시켜서 궁극적으로 인간 자체를 모티프로 삼은 점이다. 이렇게 하게 된 동기로 그는 1980년 5월의 광주민주화운동을 꼽았다.

1967년 ‘동베를린사건’에 연루되어 2년 반 동안 옥고를 치룬 적이 있는 그에게 민중운동은 감동을 주었고 77살의 노화가에게 마지막 창작 동기를 주었다. 그는 <군상>이란 제목으로 민중의 힘을 여러 점으로 표현했는데, 그의 역사관·정치관과 관련이 있다. 그는 1986년 동경도 미술관에서 초대전을 열었을 때 말했다.

“나의 그림은 추상적 표현이었으나, 1980년 5월의 광주사태가 있은 뒤로 좀 사람들에게 호소되는 구상적인 요소를 그림 속에 가져왔다. 2백 호의 화면에 수천 명 군중의 움직임을 그려넣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그 그림을 보고 이내 광주를 연상하거나 서울의 학생데모라고 했다. 유럽 사람들은 반핵운동으로 보았지만, 양쪽 모두 나의 심정을 잘 파악해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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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굴벽화를 그린 새 원시인 박수근


박수근은 프랑수아 밀레의 <만종>을 보고 감동을 받았으며 이는 화가가 된 동기가 되었다. 1932년 18살 때 제11회 조선미술전람회에 <봄이 오다>가 입선되자 고무되었지만 이후 세 차례의 낙선의 고배를 마셨고 1936년 다시 입선했다. 이후 1943년 제22회까지 빠짐없이 입선했다. 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상급학교로 진학하지 못했으며 미술교육을 받아보지 못한 그에게 조선전의 입선은 화가로서 자신의 재능을 인정받는 중요한 사건이었다. 당시 일본에 가서 회화를 수학한 사람이 적지 않았고 이들에 의해 서양 화가들의 양식이 소개되고 있었는데, 박수근은 그런 양식을 배우며 익히지 않은 상황에서 스스로 회화의 세계를 펼쳐나갔다. 평양의 도청 서기직으로 신혼가정을 꾸려나가며 곤궁한 생활을 했지만 화가의 꿈은 버리지 않았다. 6.25동란이 발발하자 서울로 피난한 그는 한때 미군 PX에서 미군의 초상화를 그리는 일을 하면서도 꾸준히 국전에 출품했다. 1956년경부터 반도호텔 내 생긴 화랑에서 미군들을 상대로 작품을 팔았는데, 미국인 여인 마가렛 밀러가 그의 작품에 관심을 갖고 자신만 콜렉트한 것이 아니라 친구들에게도 팔았다. 미 대사관 문정관 부인 마이아 핸더슨도 그의 작품에 관심을 갖고 자신도 구입하고 주변 사람들에게 소개하기도 했다. 그의 작품이 대량 미국에 있는 건 이런 이유에서 비롯했다.

우리나라 작가들 중 박수근의 작품이 가장 고가이다. 미국의 경매장에서 고가에 팔린다. 고가에 매매되는 것과 작품의 우수성은 별개의 문제이다. 경매장의 가격은 경매장 시스템에 의해 가장 고가로 끌어올린 가격일 뿐이다. 따라서 작품의 가격은 작품에 대한 비평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박수근의 독특한 회화는 1950년대 중반부터 나타나기 시작하는데, 카메라로 클로즈업한 구성이 보통이고 모티프는 인물, 풍경, 정물이다. 구성으로 말하면 당시 화가들 중 가장 뒤떨어진다. 수줍음이 많은 사진가가 상대방에게 들키지 않고 사진을 찍으려고 대충 잡은 구성이라고 할 수 있다. 인물들이 등진 모습 혹은 옆모습으로 등장하기 보통인데 모델을 드로잉하는 훈련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눈치채지 못할 적당한 거리에서 드로잉하고 집에 와 채색한 것 같다. 고의적인 구성이 아닌 보여지는 대로의 구성이라서 오히려 독자성을 인정받는다. 특별히 인상을 주지 않을 뿐 아니라 너무 평범해서 무료해보이는 장면들이다. 풍경과 정물도 마찬가지로 교육을 받은 화가라면 일고의 가치도 없는 진부하기 짝이 없는 구성이다.

밀레가 농부들을 주제로 그린 것에 감동한 박수근은 농가의 일하는 여인의 모습을 많이 그렸다. 밀레는 노동의 신성함을 찬양했는데 박수근의 모티프도 여인들의 일상 모습으로 <절구질하는 여인>, <맷돌질하는 여인>, <나물 캐는 여인들(봄)>, <시장의 여인들>, <아기 업은 여인> 등이다. 그는 개별적인 모델의 특성 있는 행위를 묘사한 것이 아니라 일상적 행위를 화석처럼 평편하게 압축한 듯이 그렸다. 원근과 입체는 없고 매우 간명한 선에 의한 도안적 구성이 보통이다. 현대판 동굴벽화라고 하면 적당할 것이다. 원시인들이 몇 가지 색으로 그렸듯이 20세기 원시인 박수근도 몇 가지 색으로 모노톤이 되게 그렸다. 헨더슨과 밀러가 아마 이런 원시성에 흥미를 느꼈던 것 같다. 그는 당시 흔한 장면들을 모티프로 삼았지만 역사적 기록의 가치가 없는 이유는 도안적으로 단순화하여 의상과 환경 등 시대적 상황을 설명해주는 요소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이런 점은 풍경화에서도 마찬가지인데, <고목>(1961)과 <노목과 어린 나무>(1962)의 경우 나무의 본질은 묘사되지 못했고 다만 평편한 형상만 화면에서 구성을 이루고 있을 뿐이다. 그가 의도적으로 실재 상황을 그대로 나타내려고 하지 않았음을 동일한 제목 <나무와 여인>으로 1956년, 1950년대, 1962년에 그린 세 점을 보면 알 수 있다. 동일한 구성의 작품에서 중앙의 나무가 대충 줄기만 같을 뿐 가지들은 다르게 나타난다. 나무의 본질은 사라지고 박수근의 나무가 화면에서 자라고 있는 것이다.

그의 화면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한결같이 무표정으로 그냥 그 자리에 서 있거나 앉아 있을 뿐이다. 행위를 일시 중단하고 박수근의 OK 사인이 떨어질 때까지 호흡도 멈추고 부동한 자세를 취한다. 그의 작품 앞에서 회화적 상황을 보고 감흥이 생기지 않는 건 이런 이유에서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작품 앞에 오래 서 있게 되는 이유는 불명료함 때문이다. 동굴의 벽화처럼 형상이 형상 주변의 여백과 색채에 있어 동일하기 때문에 눈으로 형상과 여백을 분리하느라 시간이 걸린다. 그는 형상을 검정색 윤곽선으로 겨우 구분했다. 그의 작품이 사람들에게 호감을 주는 점은 바로 이 불명료함이다. 레오나르도의 <모나리자>가 불명료한 미소로 호감의 대상이 된 이래 불명료함 자체가 회화적 장점이 되었다. 박수근은 진부하기 짝이 없는 구성의 화면을 간명한 선으로 대상을 형상화한 후 모노톤 채색으로 불명료하게 묘사해 동굴벽화가 되게 했다. 오래되어 형상이 흐려지고 색이 바랜 것과 같은 효과를 극대화한 것이다. 이런 채색기교가 작품에 대한 호감으로 관람자에게 부각된 것이다. 박수근은 채색기교로 유명해졌으며 이는 전례가 없는 일이다. 그는 모노크롬의 선구자이다. 그의 화면은 고르지 못한 동굴의 벽처럼 두터운 층으로 이루어졌다. X레이를 투시하면 얼마나 많은 층으로 이루어졌는지 알 수 있다. 안료를 바르고 또 바르는 방법으로 두터운 층을 만든 후 최종적으로 자연색을 입힌다. 밝고 어두운 색을 번갈아가며 칠해 질감이 부조처럼 입체적 층을 만들면 그 위에 검정색으로 형상을 그리고 자연색이 겨우 드러날 정도로 해서 마무리했다.

박수근은 말했다. "나는 그림 제작에 있어서 붓과 나이프를 함께 사용한다. 캔버스 위의 첫 번째 층을 충분히 기름에 섞은 흰색과 담황갈색으로 바르고 이것을 말린다. 그 다음에 틈 사이사이의 각층을 말리면서 층 위에 층을 만드는 것이다. 맨 위의 표면은 물감을 섞은 매우 적은 양의 기름을 사용한다. 이런 식으로 해서 그것은 갈라지거나 깨지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나서 나는 검은 윤곽선을 이용한 대담한 필법으로 주제를 스케치한다."

바탕색은 눈으로 볼 수 없으므로 요철이 심한 두터운 한지를 사용하면 박수근의 채색기교를 대신할 수 있다. 박수근의 화면이 여덟 층으로 이루어졌다면 한지를 사용할 경우 세 층만 입혀도 같은 효과를 낼 수 있을 것이다. 박수근은 채색기교와 모노크롬으로 유명해졌고 그것은 그의 몫이 되었다. 그는 1965년 51세로 사망하기 전 10년 동안 창작활동을 왕성히 했는데, 이 시기에 간과 신장의 약화와 백내장으로 건강이 나빠지기 시작했으며 후기 작품은 거의 한쪽 눈에 의존해 그린 것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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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환기의 조형주의


김환기는 중동 중학교를 중퇴하고 도항해 일본 동경의 니시기시로 중학을 나온 후 귀국했으며, 다시 밀항하여 1933년 스무 살 때 일본대학 예술학원 미술부에 입학했다. 이 시기 동경에는 한국 미술학도들이 적지 않았다. 1935년 그의 처녀작 <종달새 노래할 때>(1935)를 보면 해안을 배경으로 바구니를 이고 가는 한복차림의 시골 처녀 앞모습으로 입체주의 양식으로 각이 지게 그려졌지만, 유럽 입체파 화가들이 추구한 다각도의 시각을 펼친 것이 아니라서 그가 입체주의를 구성의 간결함을 위한 양식으로 응용했음을 알 수 있다. 1937년 귀국한 후 자유전에 소개한 작품들을 보면 오브제를 유추할 만한 추상적 형상과 기하적 구성이 두드러지며 이런 점은 지속된다.

그는 1947년 친구 화가들과 더불어 신사실파를 출범시키고 이듬해 12월 서울 화신화랑에서 창립전을 개최했다. 이 시기의 작품 <나무와 달>(1948)과 <수림(숲)>(1949)을 보면 달과 나무를 파란색으로 표현했는데 톤은 달라도 파란색은 이후 그가 즐겨 사용하는 색이 된다. 색을 평편하게 넓게 칠하며 입체감을 없애고 조형에 치우친 점 역시 그가 지속적으로 추구한 요소이다. 그에게 회화는 실재의 기록이 아니라 조형적 착상이며 시각의 문제가 아니라 정리된 감성의 요약적 표현이었다. 이 점을 염두에 두고 그의 작품을 보아야 한다.

6.25동란이 발발하자 아내 김향안과 부산으로 피난간 그는 다락방에 살면서도 그림을 계속 그렸다. 그에게 낭만적 기질이 있음을 작품을 통해 알 수 있는데, <피난열차>(1951), <판자집>(1951), <뱃놀이>(1951년경) 등은 피난 군중, 가난한 삶, 그런 가운데서의 여가를 모티프로 한 것들로 단순한 조형 외에도 밝고 명랑한 혹은 시적 느낌을 주는 색이 사용되었다. 익살스러울 정도로 그는 실재 세계를 만화의 세계로 변형시켰다. 굳이 말하면 조형주의는 화가로 데뷔하면서부터 줄곳 그가 추구한 미학이다. 실재에 대한 조형의지가 얼마나 강했는지 <뱃놀이>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후 그는 더이상 창작의 동기를 실재 환경에서 찾지 않고 화실에서 상상을 통해 발견하기 시작했으며 본격적인 김환기의 조형이 시작되었다.

그의 정물화에는 조선조 백자가 주로 등장한다. 피난가기 전 성북동 집에는 이조시대 탁자와 항아리들이 가득 했다. 전통미에 대한 관심이 컸음을 말해준다. 1950년대 그의 주요 모티프는 백자로서 예를 들면 <항아리와 시>(1954), <항아리와 여인>(1956), <백자>(1956), <항아리와 매화>(1957), <항아리와 새>(1957), <항아리>(1958) 등이다. 그는 '청백자 항아리'란 제목의 글에 적었다. "내 뜰에는 한아름되는 백자 항아리가 놓여 있다. 보는 각도에 따라 꽃나무를 배경하는 수도 있고 하늘을 배경하는 때도 있다. 몸이 둥근 데다 굽이 아가리보다 좁기 때문에 놓여 있는 것 같지가 않고 공중에 둥실 떠 있는 것 같다. 희고 맑은 살에 구름이 떠 가도 그늘이 지고 시시각각 태양의 농도에 따라 청백자항아리는 미묘한 변화를 창조한다. 칠야삼경에도 뜰에 나서면 허연 항아리가 엄연하여 마음이 든든하고 더욱이 달밤일 때면 항아리가 흡수하는 월광으로 인해 온통 내 뜰에 달이 꽉 차 있는 것 같기도 하다" 항아리에 대한 지속적 관찰과 찬양은 그의 특유 조형으로 여러 점 제작되었다. 고전미술에 자신의 회화를 접붙이려고 한 그는 항아리 외에 산, 새, 매화, 달, 구름, 나무, 사슴 등을 모티프로 삼았다.

피난시절 1952년 홍대 교수에 부임했으며 5.16쿠데타 이후 1962년 대학정비령에 따라 미술학부만 남게 되자 홍익미술대학 학장이 되었다. 그가 파리로 간 건 1956년 5월이었다. 그는 말했다. "여기 와서 느낀 것은 시정신이오. 예술에는 노래가 담아져야 할 것 같소. 거장들의 작품에는 모두가 강력한 노래가 있구려. 지금까지 내가 부르던 노래가 무엇이었다는 것을 나는 여기 와서 구체적으로 알아진 것 같소. 밝은 태양을 파리에 와서 알아진 셈." <영원한 것들>(1956~57)은 아홉 개의 모티프를 가로 세로 세 개씩 병렬한 작품으로 그가 말한 화면을 채우는 그의 노래로서 3년 동안 파리에 체류하면서도 그의 주제는 이상적인 달, 구름, 학, 사슴, 산, 섬, 매화, 나무, 백자, 물고기 등이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영원의 상징으로 삼았던 것들이 그의 영원의 노래가 되었다. 전통 모티프를 현대적 회화의 세계로 운반하는 데서 그는 전통미를 계승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귀국 후 그는 홍대 학장으로 활동했지만 재단과의 갈등으로 대학을 떠나게 되었다. 그는 상파울로 비엔날레 커미셔너의 자격으로 출국한 후 돌아오지 않고 1963년 10월 뉴욕으로 가서 11년 동안 지냈다. 특기할 점은 뉴욕에서 회화에 큰 변화가 일어난 것이다. 과거 작품이 김환기식 전통미의 재해석 혹은 전통적, 보편적 모티프를 새로운 조형으로 조명한 것이라면, 뉴욕에서 그는 미니멀리즘과 색을 평편하게 넓게 칠하는 컬러필드color-field의 영향으로 더욱 더 간소한 조형을 추구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파란색을 선호하여 파란색을 자신의 색으로 확립했다. 그는 오브제의 형상을 더이상 사용하지 않고 완전추상으로 나아갔다. 색을 상징적, 기호적 그리고 감성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했으므로 대부분 무제였고 제목을 붙일 경우 <봄의 소리>(1965),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1970) 등 개인적 감상의 표현이었다. <봄의 소리>,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10-08-70>(1970), <27-08-70>(1970) 등은 걸출한 작품이었다. 그의 조형이 최종에 이른 결실이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종착지를 인식하지 못했다. 더이상 나아갈 수 없는 조형의 극단에 이르렀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세계를 허물기 시작했다. 1970년 이후 작품들은 언급할 가치가 없다. 굳이 말하면 유치한 방법으로 격을 한층 떨어뜨린 것들이다. 그는 1974년 7월 7일 뉴욕 포트체스터의 유나이티드 병원에 입원해 수술받았고 14일 침대에서 떨어져 뇌일혈로 12일 동안 인공호흡을 계속하다가 25일 아침 9시 40분에 타계했다. 시신은 뉴욕시에서 한 시간 가량 떨어진 바할라의 켄시코 묘지에 안장되었고 뉴욕에 거주하는 조각가 한용진이 묘비를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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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상스를 인문주의Humanism와 동의어로 사용하는 이유


중세 사람들은 신에게 기도하기 위해서 그리고 신의 전령자 교황의 말씀을 듣기 위해 라틴어를 배워야 했고 라틴어를 익히게 되자 로마법과 로마 사회 시스템의 우수성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이탈리아에는 고대 그리스 문화에 비견할 만한 유산이 없었으므로 지식인들은 자연히 고대 그리스 문화에 심취하게 되었다.
단순히 그리스 문화를 소개한 데서 새로운 시대가 열린 건 아니었고 르네상스를 가능하게 한 데는 인문주의자들의 노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대표적인 인물을 꼽으라면 페트라르카이다.
오래 지속된 중세 기간 중에 많은 고전이 산실되었지만 그런 와중에도 남게 된 사본들이 주로 베네딕트파 수도원에 보존되어 있었다.
페트라르카는 이 문헌들을 친구 보카치오와 더불어 온 힘을 다 해 발굴해내 필사하고 번역하는 일에 전력을 투구했다.
두 사람은 책벌레로 알려진 인문주의자들에게 협력을 청했다.
르네상스를 인문주의Humanism와 동의어로 사용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으며 인문주의가 르네상스를 가능하게 했다.
고전 문헌이 이탈리아에 가장 많았으므로 인문주의가 이탈리아에서 먼저 일어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르네상스가 가능했던 여건으로 도시 문화의 부흥을 꼽지 않을 수 없다.
게르만족은 인종격리 정책을 취하며 스스로 고립되었으며 도시생활을 모르는 채 시골 성채에서 미개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문명이란 말은 도시라는 말에서 파생되었으며 고대 그리스와 로마는 도시국가로 형성되었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문명이 있었지만 마케도니아에는 도시가 없었고, 그들은 농경, 목축생활도 할 줄 몰랐으며, 군대만 번성시켰기 때문에 문명의 여지가 없었다.
서양에서 중세의 오랜 농촌생활로부터 처음 도시가 사회의 구심점으로 부활한 곳이 이탈리아였다.
이탈리아에는 로마문명이 어느 지역보다 깊게 뿌리박고 있었으며 로마제국이 수도를 콘스탄티노플로 옮겼지만 로마는 엄연히 건재한 카톨릭 세계의 수도였으므로 로마에는 고대문명의 자취가 확연히 남아 있었다.

이탈리아는 지리적 조건으로 많은 도시들이 서양문명의 전위로 각광을 받게 되었다.
지중해는 물심양면으로 세계 교역의 중심지였으며 여러 종족이 상접해 있어 이따금 충돌이 발생했지만 대게는 평화적 교류가 이뤄졌다.
특기할 만한 점은 산업과 지식이 동방에서 서방으로 불어온 것으로 중국의 견직물과 도자기, 인도의 융단과 향료, 그리고 방직염색 화학기술도 동방에서 유입되었다.
기하, 대수,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 철학 등도 동방으로부터 전해 왔다.
이 모든 것들이 이탈리아의 여러 항구로부터 각지로 집산되었다.
교역은 부를 가져 왔고 부는 문화의 필요조건이다.
중세의 모든 부가 이탈리아로 모인 셈이다.
중세 이탈리아에서의 유일한 대사업은 카톨릭 교회였다.
서양 카톨릭 세계의 모든 헌금은 로마로 보내졌으며 그곳에서 반도 전역으로 뿌려졌다.

농촌화된 유럽 나라들에서는 교역이 물물교환으로 이뤄졌지만 이탈리아에서는 자본주의가 발달되고 화폐의 유통이 강화되었다.
경제의 수원은 교회뿐 아니라 해운업에도 있었다.
베네치아와 제노바 두 도시에는 우수한 선단과 선원들이 있어 폭풍우와 해적들을 물리치고 거액을 벌여들였다.
이탈리아 사람들은 원료와 제품을 생산해 상공업을 진흥시켰다.
이런 식으로 자본을 축적한 덕택에 부자들은 예술가들을 고용해 많은 미술품을 만들게 하고 삶의 질을 높였다.
르네상스를 성행시킬 수 있는 가장 실질적인 여건이 마련된 것이다.

상공업과 은행업이 발달함에 따라 이탈리아에서는 금전만능 풍조가 현저했으며, 입신출세의 길도 열렸고, 시민들의 생활이 윤택해졌다.
중세는 피라미드식의 폐쇄된 신분사회로 귀족계급이 정상을 점하고 있었지만, 신흥 부호들이 이 계급을 따라잡기 위해 예술을 보호 육성하면서 자신들의 삶의 질을 귀족들과 동등하게 만들었다.
십자군에서 공을 이루지 못한 그들은 교회를 건립하고 아름답게 장식함으로써 자신들의 공을 널리 알리려고 했다.
르네상스는 이러한 신흥 부르주아들의 속물근성으로 인해 교회를 세속화시켰다.
종래에는 예술가의 보수를 지불하는 곳이 교회뿐이었으므로 카톨릭 미술만이 발전되었지만, 부르주아들이 예술가들에게 작품을 주문하면서부터 카톨릭 미술 외의 테마가 등장했으며 검열을 받지 않기 때문에 예술가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작품을 제작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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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상스는 엘리트 문화


양식의 차이로서가 아니라 르네상스 미술을 전반적으로 말하면 엘리트 문화의 일부이다.
르네상스 예술가들은 당시의 인문주의와 신플라톤주의를 추구한 계층으로 대체적으로 동일한 사고방식과 단일성을 지닌 지식인들이었다.
단일성으로 말하면 중세 승려계급에서도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였다.
르네상스 예술가들은 지식인계층을 위해 작품을 제작했다.
오늘날 우리가 아는 르네상스의 대표적 미술품들을 당시 시민계급은 알지 못했으며 그들이 관람했더라도 예술가들의 고상한 미적 의도를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당시 시민과 지식인의 지성적 차이는 매우 컸으며 이런 격차는 유럽 미술사에서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였다.
물론 중세 미술 역시 시민계층을 바탕으로 한 건 아니지만 르네상스의 미술처럼 철저히 시민을 배제시킨 미술은 과거에 없었다.

아놀드 하우저Arnold Hauser는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Sozialgeschichte der Kunst und Literatur>(1953)에서 중세 교회문화가 라틴어를 공용어로 사용한 것은 교회가 로마 후기 문명과 연속적, 유기적 관련을 맺고 있었기 때문이지만, 르네상스 인문주의자들이 라틴어를 사용한 것은 지역에 따라 상이한 언어를 통해 표현된 중세 문화의 민중적 전통을 단절시키고 일종의 새로운 성직자계급으로서 자신의 문화적 독점을 확립하려고 했기 때문이라고 적었다.
하우저는 예술가들이 이런 계층의 비호 하에 있었으며 정신적으로 그들의 후견 아래 있었다고 보았는데, 이는 예술가들이 교회와 길드의 권위로부터 해방되자마자 인문주의자들로 구성된 새로운 권위에 종속된 것을 의미하며 이 엘리트층은 여태까지 교회와 길드가 누린 권한을 예술가들에게 행사했다.
주목할 점은 인문주의자들이 역사화와 종교화의 주제에 대한 해석에서 절대적 권위를 시위했을 뿐만 아니라 작품의 구성과 기교에서도 전문적 지식을 갖고 있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예술가들은 인문주의자의 판단을 받아들이고 따를 수밖에 없었다.
예술가들은 교회와 길드로부터 독립한 댓가로 사회적으로 지위를 얻고 명성을 얻게 되었지만 인문주의자들을 자신들의 작품에 대한 심판자로 인정해야 했다.
이를 긍정적으로 보면 미술품을 감상하는 계층이 비평적이며 창작에도 자신들의 역할을 관철시켰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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