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네상스를 인문주의Humanism와 동의어로 사용하는 이유


중세 사람들은 신에게 기도하기 위해서 그리고 신의 전령자 교황의 말씀을 듣기 위해 라틴어를 배워야 했고 라틴어를 익히게 되자 로마법과 로마 사회 시스템의 우수성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이탈리아에는 고대 그리스 문화에 비견할 만한 유산이 없었으므로 지식인들은 자연히 고대 그리스 문화에 심취하게 되었다.
단순히 그리스 문화를 소개한 데서 새로운 시대가 열린 건 아니었고 르네상스를 가능하게 한 데는 인문주의자들의 노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대표적인 인물을 꼽으라면 페트라르카이다.
오래 지속된 중세 기간 중에 많은 고전이 산실되었지만 그런 와중에도 남게 된 사본들이 주로 베네딕트파 수도원에 보존되어 있었다.
페트라르카는 이 문헌들을 친구 보카치오와 더불어 온 힘을 다 해 발굴해내 필사하고 번역하는 일에 전력을 투구했다.
두 사람은 책벌레로 알려진 인문주의자들에게 협력을 청했다.
르네상스를 인문주의Humanism와 동의어로 사용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으며 인문주의가 르네상스를 가능하게 했다.
고전 문헌이 이탈리아에 가장 많았으므로 인문주의가 이탈리아에서 먼저 일어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르네상스가 가능했던 여건으로 도시 문화의 부흥을 꼽지 않을 수 없다.
게르만족은 인종격리 정책을 취하며 스스로 고립되었으며 도시생활을 모르는 채 시골 성채에서 미개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문명이란 말은 도시라는 말에서 파생되었으며 고대 그리스와 로마는 도시국가로 형성되었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문명이 있었지만 마케도니아에는 도시가 없었고, 그들은 농경, 목축생활도 할 줄 몰랐으며, 군대만 번성시켰기 때문에 문명의 여지가 없었다.
서양에서 중세의 오랜 농촌생활로부터 처음 도시가 사회의 구심점으로 부활한 곳이 이탈리아였다.
이탈리아에는 로마문명이 어느 지역보다 깊게 뿌리박고 있었으며 로마제국이 수도를 콘스탄티노플로 옮겼지만 로마는 엄연히 건재한 카톨릭 세계의 수도였으므로 로마에는 고대문명의 자취가 확연히 남아 있었다.

이탈리아는 지리적 조건으로 많은 도시들이 서양문명의 전위로 각광을 받게 되었다.
지중해는 물심양면으로 세계 교역의 중심지였으며 여러 종족이 상접해 있어 이따금 충돌이 발생했지만 대게는 평화적 교류가 이뤄졌다.
특기할 만한 점은 산업과 지식이 동방에서 서방으로 불어온 것으로 중국의 견직물과 도자기, 인도의 융단과 향료, 그리고 방직염색 화학기술도 동방에서 유입되었다.
기하, 대수,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 철학 등도 동방으로부터 전해 왔다.
이 모든 것들이 이탈리아의 여러 항구로부터 각지로 집산되었다.
교역은 부를 가져 왔고 부는 문화의 필요조건이다.
중세의 모든 부가 이탈리아로 모인 셈이다.
중세 이탈리아에서의 유일한 대사업은 카톨릭 교회였다.
서양 카톨릭 세계의 모든 헌금은 로마로 보내졌으며 그곳에서 반도 전역으로 뿌려졌다.

농촌화된 유럽 나라들에서는 교역이 물물교환으로 이뤄졌지만 이탈리아에서는 자본주의가 발달되고 화폐의 유통이 강화되었다.
경제의 수원은 교회뿐 아니라 해운업에도 있었다.
베네치아와 제노바 두 도시에는 우수한 선단과 선원들이 있어 폭풍우와 해적들을 물리치고 거액을 벌여들였다.
이탈리아 사람들은 원료와 제품을 생산해 상공업을 진흥시켰다.
이런 식으로 자본을 축적한 덕택에 부자들은 예술가들을 고용해 많은 미술품을 만들게 하고 삶의 질을 높였다.
르네상스를 성행시킬 수 있는 가장 실질적인 여건이 마련된 것이다.

상공업과 은행업이 발달함에 따라 이탈리아에서는 금전만능 풍조가 현저했으며, 입신출세의 길도 열렸고, 시민들의 생활이 윤택해졌다.
중세는 피라미드식의 폐쇄된 신분사회로 귀족계급이 정상을 점하고 있었지만, 신흥 부호들이 이 계급을 따라잡기 위해 예술을 보호 육성하면서 자신들의 삶의 질을 귀족들과 동등하게 만들었다.
십자군에서 공을 이루지 못한 그들은 교회를 건립하고 아름답게 장식함으로써 자신들의 공을 널리 알리려고 했다.
르네상스는 이러한 신흥 부르주아들의 속물근성으로 인해 교회를 세속화시켰다.
종래에는 예술가의 보수를 지불하는 곳이 교회뿐이었으므로 카톨릭 미술만이 발전되었지만, 부르주아들이 예술가들에게 작품을 주문하면서부터 카톨릭 미술 외의 테마가 등장했으며 검열을 받지 않기 때문에 예술가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작품을 제작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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