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굴벽화를 그린 새 원시인 박수근


박수근은 프랑수아 밀레의 <만종>을 보고 감동을 받았으며 이는 화가가 된 동기가 되었다. 1932년 18살 때 제11회 조선미술전람회에 <봄이 오다>가 입선되자 고무되었지만 이후 세 차례의 낙선의 고배를 마셨고 1936년 다시 입선했다. 이후 1943년 제22회까지 빠짐없이 입선했다. 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상급학교로 진학하지 못했으며 미술교육을 받아보지 못한 그에게 조선전의 입선은 화가로서 자신의 재능을 인정받는 중요한 사건이었다. 당시 일본에 가서 회화를 수학한 사람이 적지 않았고 이들에 의해 서양 화가들의 양식이 소개되고 있었는데, 박수근은 그런 양식을 배우며 익히지 않은 상황에서 스스로 회화의 세계를 펼쳐나갔다. 평양의 도청 서기직으로 신혼가정을 꾸려나가며 곤궁한 생활을 했지만 화가의 꿈은 버리지 않았다. 6.25동란이 발발하자 서울로 피난한 그는 한때 미군 PX에서 미군의 초상화를 그리는 일을 하면서도 꾸준히 국전에 출품했다. 1956년경부터 반도호텔 내 생긴 화랑에서 미군들을 상대로 작품을 팔았는데, 미국인 여인 마가렛 밀러가 그의 작품에 관심을 갖고 자신만 콜렉트한 것이 아니라 친구들에게도 팔았다. 미 대사관 문정관 부인 마이아 핸더슨도 그의 작품에 관심을 갖고 자신도 구입하고 주변 사람들에게 소개하기도 했다. 그의 작품이 대량 미국에 있는 건 이런 이유에서 비롯했다.

우리나라 작가들 중 박수근의 작품이 가장 고가이다. 미국의 경매장에서 고가에 팔린다. 고가에 매매되는 것과 작품의 우수성은 별개의 문제이다. 경매장의 가격은 경매장 시스템에 의해 가장 고가로 끌어올린 가격일 뿐이다. 따라서 작품의 가격은 작품에 대한 비평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박수근의 독특한 회화는 1950년대 중반부터 나타나기 시작하는데, 카메라로 클로즈업한 구성이 보통이고 모티프는 인물, 풍경, 정물이다. 구성으로 말하면 당시 화가들 중 가장 뒤떨어진다. 수줍음이 많은 사진가가 상대방에게 들키지 않고 사진을 찍으려고 대충 잡은 구성이라고 할 수 있다. 인물들이 등진 모습 혹은 옆모습으로 등장하기 보통인데 모델을 드로잉하는 훈련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눈치채지 못할 적당한 거리에서 드로잉하고 집에 와 채색한 것 같다. 고의적인 구성이 아닌 보여지는 대로의 구성이라서 오히려 독자성을 인정받는다. 특별히 인상을 주지 않을 뿐 아니라 너무 평범해서 무료해보이는 장면들이다. 풍경과 정물도 마찬가지로 교육을 받은 화가라면 일고의 가치도 없는 진부하기 짝이 없는 구성이다.

밀레가 농부들을 주제로 그린 것에 감동한 박수근은 농가의 일하는 여인의 모습을 많이 그렸다. 밀레는 노동의 신성함을 찬양했는데 박수근의 모티프도 여인들의 일상 모습으로 <절구질하는 여인>, <맷돌질하는 여인>, <나물 캐는 여인들(봄)>, <시장의 여인들>, <아기 업은 여인> 등이다. 그는 개별적인 모델의 특성 있는 행위를 묘사한 것이 아니라 일상적 행위를 화석처럼 평편하게 압축한 듯이 그렸다. 원근과 입체는 없고 매우 간명한 선에 의한 도안적 구성이 보통이다. 현대판 동굴벽화라고 하면 적당할 것이다. 원시인들이 몇 가지 색으로 그렸듯이 20세기 원시인 박수근도 몇 가지 색으로 모노톤이 되게 그렸다. 헨더슨과 밀러가 아마 이런 원시성에 흥미를 느꼈던 것 같다. 그는 당시 흔한 장면들을 모티프로 삼았지만 역사적 기록의 가치가 없는 이유는 도안적으로 단순화하여 의상과 환경 등 시대적 상황을 설명해주는 요소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이런 점은 풍경화에서도 마찬가지인데, <고목>(1961)과 <노목과 어린 나무>(1962)의 경우 나무의 본질은 묘사되지 못했고 다만 평편한 형상만 화면에서 구성을 이루고 있을 뿐이다. 그가 의도적으로 실재 상황을 그대로 나타내려고 하지 않았음을 동일한 제목 <나무와 여인>으로 1956년, 1950년대, 1962년에 그린 세 점을 보면 알 수 있다. 동일한 구성의 작품에서 중앙의 나무가 대충 줄기만 같을 뿐 가지들은 다르게 나타난다. 나무의 본질은 사라지고 박수근의 나무가 화면에서 자라고 있는 것이다.

그의 화면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한결같이 무표정으로 그냥 그 자리에 서 있거나 앉아 있을 뿐이다. 행위를 일시 중단하고 박수근의 OK 사인이 떨어질 때까지 호흡도 멈추고 부동한 자세를 취한다. 그의 작품 앞에서 회화적 상황을 보고 감흥이 생기지 않는 건 이런 이유에서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작품 앞에 오래 서 있게 되는 이유는 불명료함 때문이다. 동굴의 벽화처럼 형상이 형상 주변의 여백과 색채에 있어 동일하기 때문에 눈으로 형상과 여백을 분리하느라 시간이 걸린다. 그는 형상을 검정색 윤곽선으로 겨우 구분했다. 그의 작품이 사람들에게 호감을 주는 점은 바로 이 불명료함이다. 레오나르도의 <모나리자>가 불명료한 미소로 호감의 대상이 된 이래 불명료함 자체가 회화적 장점이 되었다. 박수근은 진부하기 짝이 없는 구성의 화면을 간명한 선으로 대상을 형상화한 후 모노톤 채색으로 불명료하게 묘사해 동굴벽화가 되게 했다. 오래되어 형상이 흐려지고 색이 바랜 것과 같은 효과를 극대화한 것이다. 이런 채색기교가 작품에 대한 호감으로 관람자에게 부각된 것이다. 박수근은 채색기교로 유명해졌으며 이는 전례가 없는 일이다. 그는 모노크롬의 선구자이다. 그의 화면은 고르지 못한 동굴의 벽처럼 두터운 층으로 이루어졌다. X레이를 투시하면 얼마나 많은 층으로 이루어졌는지 알 수 있다. 안료를 바르고 또 바르는 방법으로 두터운 층을 만든 후 최종적으로 자연색을 입힌다. 밝고 어두운 색을 번갈아가며 칠해 질감이 부조처럼 입체적 층을 만들면 그 위에 검정색으로 형상을 그리고 자연색이 겨우 드러날 정도로 해서 마무리했다.

박수근은 말했다. "나는 그림 제작에 있어서 붓과 나이프를 함께 사용한다. 캔버스 위의 첫 번째 층을 충분히 기름에 섞은 흰색과 담황갈색으로 바르고 이것을 말린다. 그 다음에 틈 사이사이의 각층을 말리면서 층 위에 층을 만드는 것이다. 맨 위의 표면은 물감을 섞은 매우 적은 양의 기름을 사용한다. 이런 식으로 해서 그것은 갈라지거나 깨지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나서 나는 검은 윤곽선을 이용한 대담한 필법으로 주제를 스케치한다."

바탕색은 눈으로 볼 수 없으므로 요철이 심한 두터운 한지를 사용하면 박수근의 채색기교를 대신할 수 있다. 박수근의 화면이 여덟 층으로 이루어졌다면 한지를 사용할 경우 세 층만 입혀도 같은 효과를 낼 수 있을 것이다. 박수근은 채색기교와 모노크롬으로 유명해졌고 그것은 그의 몫이 되었다. 그는 1965년 51세로 사망하기 전 10년 동안 창작활동을 왕성히 했는데, 이 시기에 간과 신장의 약화와 백내장으로 건강이 나빠지기 시작했으며 후기 작품은 거의 한쪽 눈에 의존해 그린 것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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