렘브란트는 자화상을 그리면서 갖가지 회화방법을 실험했으며 판화, 드로잉, 유화로 자신의 표정과 자세를 표현하면서 아울러 명암의 사용을 극대화했다.
그가 1627~29년에 그린 그림들을 보면 그림의 분위기와 감정을 표현하는 기교가 매우 진전되고 있음을 알 수 있는데 이렇게 익힌 기교가 훗날 그린 역사화에서 나타났다.
그의 자화상은 익살맞거나 근엄하거나 미소를 짓고 있는데 감정의 표현을 다양한 방법으로 실험했음을 알 수 있다.
그가 입은 의상 또한 세심한 의도에 따른 것으로 그의 세밀한 묘사의 기교를 한층 돋보이게 한다.
그의 세밀한 묘사는 <세금 The Tribute Money>, <성전에서의 그리스도 출현 Presentation of Christ in the Temple>, <사스키아 Saskia> 등에서 발견된다.
렘브란트는 1631년 다시 암스테르담으로 갔다.
당시 암스테르담은 유럽의 중요한 상업도시들 가운데 하나였고 주식시장이 있어 폴랜드, 러시아, 헝가리, 그리스, 터키의 상인들이 왔다.
그는 지성의 신장과 경제적인 이유 때문에 암스테르담으로 간 것으로 기록에 의하면 그곳 사람들이 그의 그림을 잘 사주었다.
이 시기에 그는 돈을 꽤 벌었다.
기록에 의하면 그는 1631년 6월 20일에 암스테르담에 있는 딜러 반 율렌버그Van Uylenburgh에게 1천 길더guilder를 꿔주었는데 이는 여느 예술가와 딜러들과 마찬가지로 그도 반 율렌버그의 성공적인 사업의 이익금을 나눠갖는, 즉 주식 투자에 참여했음을 의미한다.
반 율렌버그는 부잣집 자식들이 돈을 내고 회화를 배우는 미술학교를 갖고 있었고, 학생들은 그의 상점에 있는 대가들의 작품을 모사하여 사람들에게 팔았다.
렘브란트는 한때 그의 집에 묵기도 했는데 얼마 동안 묵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장사꾼의 속셈으로 두 사람은 만난 것 같았으며 렘브란트는 그의 미술학교에서 한동안 교사생활을 하기도 했다.
렘브란트는 암스테르담에서 경제적으로 성공했다.
그는 주문을 받아 그렸는데 부자 사업가 <니톨라스 럿스의 초상 Portrait of Nicolaes Ruts>도 이때 그렸다.
아마 반 율렌버그의 소개로 그의 초상화를 그린 것 같다.
렘브란트는 반 율렌버그의 친척들을 포함해서 장사꾼들, 성직자들, 예술가들, 그리고 유대인 학자들의 초상을 그렸다.
명암을 사용해 인물의 개성을 극명하게 표현하는 그의 그림을 사람들은 매우 좋아했으며 1630년대 초 암스테르담에서 그는 인기 있는 화가였다.
이대 많은 돈을 받고 그린 그림들 중에는 <니콜라스 털프 의사의 해부학 강의 The Anatomy Lesson of Dr. Nicolaes Tulp>도 있다.
이 작품은 외과의사협회가 그에게 주문한 것으로 당시 의과대학 강의장면을 상기시켜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