렘브란트는 21살 때 고유한 회화방법을 발견했다.
그는 암스테르담을 떠나 고향 리덴으로 돌아와 라스트만의 제자 얀 리벤스Jan Lievens와 함께 작업하기도 했는데 두 사람이 함께 작업한 것은 1626년부터 1631년까지였다.
렘브란트보다 10살 손위인 컨스탄틴 후이겐스Constantijn Huygens(1596~1687)가 쓴 자서전을 보면 그가 1626년에 렘브란트를 방문했으며, 후이겐스는 그때 주지사 프레데릭 헨드릭Frederik Hendrik의 비서였는데 그는 렘브란트와 리벤스에게 이탈리아로 유학 갈 것을 권한 것으로 적혀 있다.
그는 다음과 같이 적었다.

"두 사람이 라파엘로와 미켈란젤로처럼 유명해지려면 최고의 그림을 그려야 한다."

그의 자서전을 보면 렘브란트와 리벤스는 그에게 "우리는 이탈리아로 여행을 갈 시간이 없지만 훌륭한 이탈리아 화가들의 작품을 네덜란드에서 볼 수 있다"고 했다.
후이겐스는 두 사람에 관한 자신의 견해를 자서전에 기술했다.

"렘브란트는 생동감이 있는 느낌에서는 리벤스를 능가하지만 웅대한 상상력과 주제의 솔직함은 리벤스가 렘브란트를 능가한다."

그는 저서에서 렘브란트가 1629년에 그린 <은 삼십 량을 돌려주는 유다 Judas Returning the 30 Pieces of Silver>를 지적하면서 다음과 같이 적었다.

"나는 렘브란트가 적당한 자세와 운동 그리고 표정을 묘사하는 데 인상 깊었으며, 특히 화면 중앙에 있는 유다가 자신이 저지른 죄를 애통해 하면서 자신이 용서받을 수 없음을 알면서도 용서를 간청하는 모습에서 인상이 깊었다."

그러면서 그는 렘브란트의 작품은 이탈리아와 고대의 어떠한 작품과도 견줄 만하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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렘브란트는 자화상을 그리면서 갖가지 회화방법을 실험했으며 판화, 드로잉, 유화로 자신의 표정과 자세를 표현하면서 아울러 명암의 사용을 극대화했다.
그가 1627~29년에 그린 그림들을 보면 그림의 분위기와 감정을 표현하는 기교가 매우 진전되고 있음을 알 수 있는데 이렇게 익힌 기교가 훗날 그린 역사화에서 나타났다.
그의 자화상은 익살맞거나 근엄하거나 미소를 짓고 있는데 감정의 표현을 다양한 방법으로 실험했음을 알 수 있다.
그가 입은 의상 또한 세심한 의도에 따른 것으로 그의 세밀한 묘사의 기교를 한층 돋보이게 한다.
그의 세밀한 묘사는 <세금 The Tribute Money>, <성전에서의 그리스도 출현 Presentation of Christ in the Temple>, <사스키아 Saskia> 등에서 발견된다.

렘브란트는 1631년 다시 암스테르담으로 갔다.
당시 암스테르담은 유럽의 중요한 상업도시들 가운데 하나였고 주식시장이 있어 폴랜드, 러시아, 헝가리, 그리스, 터키의 상인들이 왔다.
그는 지성의 신장과 경제적인 이유 때문에 암스테르담으로 간 것으로 기록에 의하면 그곳 사람들이 그의 그림을 잘 사주었다.
이 시기에 그는 돈을 꽤 벌었다.
기록에 의하면 그는 1631년 6월 20일에 암스테르담에 있는 딜러 반 율렌버그Van Uylenburgh에게 1천 길더guilder를 꿔주었는데 이는 여느 예술가와 딜러들과 마찬가지로 그도 반 율렌버그의 성공적인 사업의 이익금을 나눠갖는, 즉 주식 투자에 참여했음을 의미한다.

반 율렌버그는 부잣집 자식들이 돈을 내고 회화를 배우는 미술학교를 갖고 있었고, 학생들은 그의 상점에 있는 대가들의 작품을 모사하여 사람들에게 팔았다.
렘브란트는 한때 그의 집에 묵기도 했는데 얼마 동안 묵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장사꾼의 속셈으로 두 사람은 만난 것 같았으며 렘브란트는 그의 미술학교에서 한동안 교사생활을 하기도 했다.

렘브란트는 암스테르담에서 경제적으로 성공했다.
그는 주문을 받아 그렸는데 부자 사업가 <니톨라스 럿스의 초상 Portrait of Nicolaes Ruts>도 이때 그렸다.
아마 반 율렌버그의 소개로 그의 초상화를 그린 것 같다.
렘브란트는 반 율렌버그의 친척들을 포함해서 장사꾼들, 성직자들, 예술가들, 그리고 유대인 학자들의 초상을 그렸다.
명암을 사용해 인물의 개성을 극명하게 표현하는 그의 그림을 사람들은 매우 좋아했으며 1630년대 초 암스테르담에서 그는 인기 있는 화가였다.

이대 많은 돈을 받고 그린 그림들 중에는 <니콜라스 털프 의사의 해부학 강의 The Anatomy Lesson of Dr. Nicolaes Tulp>도 있다.
이 작품은 외과의사협회가 그에게 주문한 것으로 당시 의과대학 강의장면을 상기시켜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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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라바조Michellangelo Merisida Caravaggio(1571~1610)

17세기 이탈리아를 대표할 만한 화가는 카라바조입니다.
여러분은 그가 그림을 무대의 한 장면처럼 극적으로 그린 화가로 기억할 것입니다.
모델을 연출하여 극적인 그림을 그의 회화방법을 유명한 네덜란드 화가 렘브란트가 영향을 받았습니다.
카라바조는 그림을 극적으로 그렸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인생도 극적으로 살았는데 촌스럽지도 않은 미술 이야기가 될런지 ...

카라바조의 이름은 베르가모Bergamo 근처 고향 마을의 이름을 딴 것입니다.
이탈리아 사람들은 직업 외에도 고향 마을의 명칭을 자신의 성last name으로 삼았는데 레오나르도의 성이 빈치Vinci인 것을 알지요?
그러니까 Leonardo da Vinci는 빈치의 레오나르도란 뜻입니다.
조상이 누구인지 알 수 없는 집안의 사생아로 태어났지요.
르네상스의 메디치Medichi 가문을 다 알줄 아는데 메디치는 영어 메디신의 원어로 의사란 뜻입니다.
즉, 조상이 의사라는 자부심으로 의사를 성으로 삼은 것이지요.
직업과 고향 마을은 이렇듯 성이 되었습니다.
이야기가 곁가지로 흘렀고 본론으로 가서,

카라바조는 밀라노에서 회화를 수학한 후 1592년 로마로 가서 주로 활약했습니다.
1592년이라고 하면 레오나르도가 50살, 미켈란젤로가 불과 17살 때로 르네상스가 성기로 접어들 때였습니다.
카라바조가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것은 1599년부터였습니다.
그는 색을 심도있게 사용하면서 그늘을 강렬한 색채로 강조했습니다.
그는 추기경 프란체스코 델 몬테의 후원을 받아 기독교 주제의 그림을 많이 그렸습니다.

촌스럽지도 않은 미술 이야기는 다음의 내용입니다.

카라바조는 불같은 성격으로 많은 사건을 일으켰는데 1606년 어느날 내기 테니스를 치다가 심한 말다툼 끝에 상대를 살해하고 로마로 도망친 후 나폴리(1606~7), 말타(1607~8), 시실리(1609)를 전전하다가 다시 나폴리로 돌아와 외롭게 지내다 1610년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카라바조의 유명한 작품, <매장 The Entombment>, 1602~4, 유화, 300-203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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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에 교수신문 기자가 신문을 갖고 내 집을 방문했습니다.
우리나라 교수 30%가량이 구독하는 신문으로 5천부 이상 발행하는 신문입니다.
'정체된 허무주의 예술'이란 제목으로 이우환 씨의 작품을 비평한 글을 청탁받아 기고했는데 신문에 실렸다고 가져온 것입니다.
보통 미술에 할애하는 지면보다 훨씬 크게 실었습니다.
컬러로 이우환의 작품과 그분이 붓을 들고 포즈를 취한 장면 그리고 '상응'의 조각도 두 점이나 실었습니다.

개념미술은 가장 난해한 미술인 데에도 우리나라에서 갑자기 이우환에 대한 관심이 큰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현재 우리나라에는 개념미술에 관한 책이 소개되고 있지 못한데 너무 어렵기 때문입니다.
개념미술은 곧 예술철학이라서 번역도 쉽지 않습니다.
헌데 이우환에 대한 관심이 크게 나타난 것입니다.
여하튼 좋은 일입니다.
어떤 이유에서이든 미술에 대한 관심이 커지는 것은 미술에 종사하는 사람으로 매우 바람직합니다.
좀더 바란다면 제대로 알면서 관심을 기울였으면 하는 점입니다.

이우환의 작품에 칭찬한 사람들은 아주 많습니다.
일본 내에서도 호평이 있고 그는 국제적으로 활약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나의 글은 비평입니다.
아까 이우환 씨를 잘 아는 분이 방문하셔서 모레 그분을 만나기로 했다길래 신문을 주며 그분에게 전해달라고 했습니다.
난 교수신문 독자를 위해 썼지만 정작 그분을 향해 썼습니다.

어제 그분에 관한 심포지엄이 있었지만 참석하지 못했습니다.
같은 날 같은 시각에 코리아나 호텔에서 월전 장우성 화백의 신인발굴 축하 및 자서전 출판기념회가 열려 그곳에 가야 했기 때문입니다.
약 200여 명이 참석한 성대한 잔치였습니다.
김은호 화백의 제자로 현재 92살 되시는 그분은 <화단 풍상 70년>이란 저서를 내셨습니다.
지난 우리나라 화단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볼 수 있는 책입니다.
거의 모든 일간지가 크게 보도했으므로 독자들이 알고 잇을 것입니다.

나의 글은 모레 이우환 씨에게 전달될 것입니다.
난 그분이 나의 글을 통해 자신에 대한 비평을 알기 바라고 무엇보다도 앞으로의 창작에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
나는 비평할 때 상대방에게 직접 한다는 태도로 합니다.
그리고 가능하면 나의 비평이 본인에게 전달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야 비평할 맛이 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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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남 씨의 전시회가 열리던 날 화가 두 분과 여기자 한 분과 함께 갔다.
전시장을 거의 않가는 편인데 세 분이 내 집을 방문해 동행하게 되었다.
소개로 윤석남 씨와 처음 인사를 나누고 전시장을 둘러보았다.
앞으론 이따금 전시장을 찾아 가고 소감을 적는 버릇을 길러야겠다고 생각했다.

청진동의 어느 술집에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전시 소감을 묻길래 디자인이라고 대답했다.
본인은 페미니스트로 불리기를 원한다고 전시장에 크게 적어놓았는데 페미니즘으로는 매우 약하다고 말했다.
미학 혹은 작품의 깊은 성찰은 없어보이고 조형적 색채가 강해서 한 마디로 디자인이라고 했다.
노골적인 페미니즘의 성격이 농후한 작품조차 페미니스트의 메세지는 전달이 되지 않고 조형성이 강하며 디자인으로 보였다.

조형성이 강하고 디자인이란 말을 내가 사용하는 데 대해 설명을 해야 할 것 같다.
조형성이란 시각적인 데 주안점을 두었단 뜻이다.
미술의 기본으로 균형을 말하는데 길고 짧은 것, 고저장단을 맞추는 걸 말한다.
디자인 역시 시각적인 것을 의미하지만 여기에는 창작이 있다.
조형은 이미 완성되었다고 본다.
해서 조형성에 치중하면 장식 그 이상의 의미가 없어진다.
디자인은 동시대의 느낌이며 변형이라고 생각된다.
동시대의 느낌이기 때문에 창작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전시회를 갖다온 후 어느 디자이너에게 그분의 전시를 보라고 권했다.
디자인하는 사람들은 가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퍽 세련된 감각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세련'이란 말을 썼는데 그렇다.
그녀의 작품은 매우 세련되었다.
매끈하고 잘 빠졌다.
보기에 좋았다.

하지만 사색을 유도하고 정신적 자유를 느끼게 하는 점은 거의 없다.
역시 이런 작품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다.

예술가들이 모두 사변적인 작품을 제작하는 것이 아니고 또 그럴 필요는 없다.
관람자들의 취향도 다르기 때문에 각각 자신의 장점을 발전시키면 된다.
윤석남 씨는 디자인에 치중하면서 그 분야에서 자신의 자리를 잡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했다.

윤석남의 작품은 한 마디로 디자인 디자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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