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대혁명의 밑거름이 된 루소의 사상

18세기 중반까지 유럽 사람들이 군주의 압정에 시달리면서도 군주제 자체를 반대하지 못한 이유는 군주를 신격화한 아주 오래된 관습때문이었다.
가장 지성적으로 발달한 철학자, 예술가 계층조차도 정치적으로 온건한 태도를 취하면서 군주제를 지지했다.

관습보다는 이성을 중시한 장 자크 루소는 일찍이 전제군주에 반대하고 철학자들이 부패했다면서 그들과 거리를 두었다.
그는 <학문과 예술을 위한 논문>으로 1750년 디종 아카데미로부터 최우수상을 받았는데 학문과 예술을 회복하는 것으로 도덕을 정화시킬 수 있는가 하는 문제를 다룬 것이다.
그는 논문에서 특히 예술과 문학을 공격하면서 이 분야의 사람들이 부자와 권력자들의 사슬에 묶인 노예가 되었고 정치적으로 이용당하는 도구가 되었다고 비난했다.
루소는 자신의 주장을 유럽의 모든 군주제에 적용했다.
그의 논문은 발표 후 특히 3년 동안 과격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그는 자신의 생각을 좀더 진전시키면서 돈을 목적으로 하는 군대체제를 비판했으며 국민의용군의 조직을 옹호했다.

이 시기에 루소는 음악에도 관심이 많아 디드로와 달랑베르가 편집한 <백과사전>에 음악에 관한 이론을 실었다.
1752년에 오페라 <동네 점쟁이>를 작곡했고 이 작품은 처음으로 퐁텐블로 궁에서 소개되었으며 매우 성공적이었다.
이튿날 루소는 루이 15세에게 장려금을 받기로 되어 있었지만 거부했다.
그의 작품은 이탈리아에서도 소개되는 등 매우 대중적이었지만, 프랑스 음악과 전제주의를 비판했다는 이유로 1753년 경찰의 감시대상이 되었다.

그해 루소는 디종 아카데미가 제시한 문제, 인간 불평등의 기원과 이것이 자연법에 따른 것인지에 관한 논문을 통해 자신의 정치적 견해를 피력하였다.
그는 <인간 불평등의 기원에 관한 논문>(1755)에서 인간의 자연적 상태를 가정하면서 인간의 타고난 능력이 동일하지 않더라도 평등했다고 주장했다.
그는 동물과 마찬가지로 인간도 서로가 서로를 피했으며 각각 떨어져 살았기 때문에 인간이 인간에게 종속되는 일은 없었다는 논리를 폈다.
루소에 의하면 지리적 지각 변동으로 인해 인간이 함께 모여 살았는데 이것이 여러 신화에 인간의 '황금기 golden age'로 설명되어 있으며, 인간은 원시사회를 이루면서 사랑, 우정, 노래, 춤의 즐거움과 질투, 증오, 전쟁의 고통 등의 감정을 겪으면서 선과 악을 배우게 되었다는 것이다.
철과 밀의 발견이 인간 진화의 세 번째 단계가 되었으며 인간은 자신의 재산의 필요성을 알게 되었다고 했다.
루소는 다음과 같이 적었다.

"철과 밀이 인간을 문명화시켰고 또한 인간의 종족을 파멸시켰다. ...
땅을 경작하면서부터 필수적으로 계층이 생겨났고 ...
재산을 상속하는 경우가 허다해지고 이윽고 세상 전체에까지 만연되어 서로가 서로의 땅에 경계를 만들고 상대방의 땅을 빼앗게 되고 ...
미성숙된 사회는 가공할 만한 전쟁을 야기시켰다."

루소는 전쟁의 시기에 지주들이 자신들의 재산을 보호하는 법을 제정한 것으로 보았다.
루소는 원시사회에서의 자연적인 인간 평등을 회복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지만 디드로의 요청으로 <백과사전>에 기고하였고, 1755년에 따로 발표한 <시민론: 경제 정치를 위한 논문>에서 사회적 불평등으로 빚어진 불의를 최소화하는 방법을 모색했다. 그는 세 가지를 제안했다.

1. 정치적 권리와 의무의 평등, 즉 부유층이 어떤 사람의 자유나 삶을 침해할 수 없는 '일반 의지 general will'를 존중할 것.

2. 국가를 위한 계발의 의미에서, 그리고 고대 스파르타에서와 같은 준엄한 도덕을 위해 모든 아이에게 공공교육을 시킬 것.

3. 상속재산과 사치품에 부과하는 세금과 공공재산의 자원을 혼용해 경제적, 금융적 체계를 만들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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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크 루이 다비드가 로마로 향한 것은 1775년 10월이었다.
약 180cm 키에 강렬한 눈을 가진 그의 피부는 검었고 머리카락은 약간 곱슬이며 반듯한 용모가 사람들에게 차분한 인상을 주었다.
그는 비엥을 선두로 한 그룹에 끼어서 로마로 향했는데 비엥은 로마의 코르소에 있는 프랑스 아카데미의 원장에 부임하기 위해 제자들을 인솔하고 갔다.
일행이 로마에 도착한 것은 파리를 떠난 지 한 달 남짓 후였는데 볼로냐와 피렌체에 잠시 체류하면서 주요 대가들의 작품을 습작했기 때문이다.

18세기 중반부터 로마는 다시금 유럽 예술의 중심지가 되고 있었다.
1738년 고고학자들이 헤르쿨라네움을 발굴했고 10년 후에는 폼페이를 발굴했으므로 고대 우적과 유물을 보기 위해 유럽 각지에서 사람들이 이탈리아로 대여행길에 올랐다.
그들은 고대 번영의 수도 로마에 오래 머물면서 이탈리아 각지를 두루 여행했다.
헤르쿨라네움(현재 이탈리아 명칭으로 에르콜라노)은 나폴리 동쪽 베수바우스 산 서쪽 기슭에 위치한 오래된 도시로서 기원전 79년 8월 24일 베수바우스 산 분화 때 폼페이와 함께 매몰되었지만 폼페이와 달리 용암이 응회암으로 변했으므로 근대에 이르기까지 매몰 당시의 모습으로 남아 있었다.

독일의 고고학자이자 미술사학자 요한 요아힘 빙켈만의 고대 그리스 미술에 대한 찬양으로 로마에 대한 유럽인의 관심은 더욱 커졌다.
1755년 5월에 출간한 <회화와 조각에서 그리스 작품의 모방에 관한 고찰>에서 빙켈만은 "이상적 예술에 도달하는 지름길은 고대의 모방"이라고 주장했다.
이 책은 여러 나라 말로 번역되었으며 유럽인의 애독서가 되었다.
신고전주의 이론의 독보적인 존재가 된 빙켈만은 이 책을 출간한 후 이탈리아로 가서 1759~64년에 걸쳐 <헤르쿨라네움 발굴에 관한 비안코니 서한>(사후 간행), <헤르쿨라네움 발굴에 관한 브륄 서한>(1762년 간행), <최근의 헤르쿨라네옴 발굴에 관한 퓌슬리 보고>(1764년 간행) 세 편의 보고서를 집필했다.

빙켈만은 아테네의 황금기였던 기원전 5세기 고대 그리스인의 조각을 찬양하는 가운데 제스처와 표정의 특징으로 "고귀한 단순과 고요한 위대"를 꼽았다.
이 말은 날개가 달린 말이 되어 유럽 전역으로 퍼졌으며 고대 그리스인의 미를 규정짓는 말이 되었다.

<라오콘>을 고대의 걸작으로 꼽은 빙켈만은 이 작품을 찬양하면서 다음과 같이 적었다.

"그리스 걸작들의 일반적이며 탁월한 특징은 결국 제스처와 표현에서의 고귀한 단순과 고요한 위대이다.
바다의 수면이 사납게 날뛰어도 그 심해는 늘 평온한 것처럼 그리스 조상들은 휘몰아치는 격정 속에서도 침착함을 잃지 않는 위대한 영혼을 나타냈다.
이 영혼은 격렬한 고통 속에 있는 <라오콘 군상>의 얼굴에 잘 묘사되어 있다.
그 고통은 얼굴뿐 아니라 육체의 모든 근육과 힘줄에도 나타나 있어서, 우리는 얼굴이나 육체의 다른 부분을 보지 않고 고통으로 움츠러든 하복부를 보는 것만으로도 이런 고통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얼굴이나 전체 자세에서는 전혀 고통에 찬 격정이 드러나 있지 않다.
그의 고통은 우리의 영혼에까지 스며들어 온다.
그러나 우리는 이 위대한 이처럼 그 고통을 견딜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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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비드는 1766년 9월 왕립미술아카데미Royal Academy of Painting and Sculpture에 입학하여 조제프-마리 비엥으로부터 수학했다.
1648년에 설립된 왕립미술아카데미는 에콜 데 보자르Ecole des Beaux-Arts의 전신이다.
루브르궁 아래층을 사용한 아카데미에 12명의 교사가 재직했는데 비엥과 부셰가 이곳에서 가르쳤으며 8명의 보조교사가 있었고 이들은 한 달씩 근무했다.
12명의 교사 대부분은 아카데미 회원들로 개성이 강했으며 각각 모순되는 이론을 바탕으로 가르쳤다.
이 점을 훗날 다비드가 비난하게 된다.

아카데미는 회화와 조각 지망생 모두에게 드로잉만 가르쳤다.
회화반의 경우 처음에는 대가들의 드로잉과 판화를 모방하게 하고 그 다음 유명한 고대 조각가의 석고상을 드로잉하게 하며 어느 정도 기술이 습득되면 실재 남자 누드를 보면서 드로잉하게 했다.
아카데미를 졸업하기 전 2년 동안 드로잉 훈련에 정진해야 했다.
아카데미는 남자 누드만 제공했는데 여자 누드를 제공할 경우 젊은이들이 방탕해질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아카데미는 역사화를 중점적으로 가르치면서 역사화를 잘 그릴 수 있도록 성서, 고대사, 신화 등을 읽게 했고 모델을 영웅적인 포즈로 드로잉하게 함으로써 역사화를 그리는 데 직접적인 도움이 되도록 했다.
다비드는 아카데미에서의 훈련을 통해 훗날 역사화가가 된다.

아카데미에 재학하는 학생들 모두의 유일한 희망은 로마대상을 수상하는 것이었다.
1749년 코이펠Coypel이 제정한 이 상은 아카데미 재학생들에게는 가장 영예로운 상이었다.
매년 역사화로 수상자를 선발하는 이 컨테스트에 합격하면 우선 작은 아틀리에를 제공받게 되고 그곳에서 10주 동안 작업하다 로마에 있는 프랑스 아카데미에서 3~5년 동안 유학하게 된다.
정부에서 비용을 대고 유능한 화가를 만들어내는 프로그램이다.
유학을 마치고 재능을 인정받으면 아카데미 회원이 될 수 있으며, 그렇게 되면 작품을 비싼 값에 팔 수 있어 경제적으로도 성공을 거두게 되고, 궁정화가로 선임될 경우 궁정과 교회를 장식하는 기념비적인 작업을 맡게 된다.

아카데미에 재학할 때 다비드는 천재적 재능을 발휘하지 못했다.
해부학에서는 비교적 우수했지만 우너근법에는 미숙함을 나타냈다.
그는 다섯 차례의 도전 끝에 로마대상을 수상했다.
네 차례에 걸쳐서 실패를 거듭하자 아카데미에 대한 불만이 고조되었고 이대의 불만이 훗날 아카데미를 증오하게 된 원인이 된다.
다비드는 아카데미가 자신의 작품을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에 자신은 4년 동안 더 프랑스 학파의 오염에 물들게 되었으며 따라서 로마에 머무는 동안 그 오염을 벗어내는 데 무척 힘이 들었다고 훗날 말했다.

그의 첫 좌절은 1770년에 있었으며 이듬해 제출한 작품은 호메로스의 <일리아드>의 한 장면이었다.
트로이 전쟁 때 그리스군을 후원한 지혜의 여신 미네르바가 트로이군을 후원한 전쟁의 신 마르스를 격퇴시키는 장면을 다비드가 회화적 구성으로 해석한 <마르스와 미네르바의 결투>가 그것이다.
마르스가 쓰러지자 애인 비너스가 구출하는 장면이다.
이 해에 조제프 베노이 수베의 동일한 제목의 작품이 수상하자 다비드는 아카데미뿐만 아니라 수베까지 미워했다.
그는 심사위원들을 불신했으며 심지어 스승 비엥이 자신을 수상자로 선정하지 않는 데 가담했을 거라고 의심했다.
자신에 대한 음모가 도사리고 있었다는 식의 일방적인 의심은 그의 인생에 늘 변수로 작용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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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소는 자신의 교육론 <에밀 Emiile>(1762)을 발표하고, 여기서 결론으로 요약한 정치원리를 <사회 계약론>에서 더욱 진전시켰다.
그는 불평등을 돌일킬 수 없는 사실로 인정한 후 무엇이 한 사람으로 하여금 다른 사람에게 복종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는지, 그리고 무슨 권리로 한 사람이 다른 사람 위에 군림할 수 있는지에 관한 의문들에 답하는 형식으로 논리를 전개해나가면서 "자유의지를 보유하는 가운데 모든 사람이 자신들을 자신 외의 모든 사람에게 구속시키는" 의미로서의 계약이 암묵적으로 그리고 자율적으로 이루어졌다는 결론을 유추해냈다. 루소는 다음과 같이 적었다.

"다른 사람의 충동에 따르는 것은 노예가 되는 것이지만 자신이 규정한 법에 복종하는 것은 자유이다."

루소는, 백성은 주권자이며 자신들의 주권을 언제라도 무효가 될 수 있는 정부를 통해 행사한다고 결론지었다.
그는 정부 형태를 역사적, 지리적 조건에 적응시킬 필요성을 강조했다.


<에밀>과 <사회 계약론>은 정부와 종교에 반한다는 이유로 1762년 6월에 파리의 국회로부터 불온서적으로 규정받았다.
루소는 스위스로 달아났는데 그의 저서들은 스위스에서 판매가 금지되었다.
그는 1763년 <크리스토프 드 뷔몽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에밀>을 비난한 파리의 대주교를 공격했다.
이듬해에는 <산에서 쓴 편지>란 제목으로 제네바 공화국의 검찰총장 트론친을 공격했는데, 트론친은 <에밀>과 <사회 계약론>을 불태울 것을 명령한 제네바 원로원의 결정을 옹호했던 사람이다.

코르시카의 독립운동 선두자 파올리는 1764년 9월 루소에게 코르시카를 위해 헌법을 만들어줄 것을 요청했고 루소는 완성하지 못했지만 초안을 작성했다.

1764년 12월 31일 루소는 익명의 발신자로부터 <시민의 느낌>이라는 팜플렛을 받았다.
거기에는 자신을 위선자, 애정이 없는 어버이, 기분 나쁜 친구에 비유하면서 사정 없이 비판한 내용이 들어 있었다.
이것은 볼테르가 쓴 것으로 루소가 받은 충격은 매우 컸다.
루소는 충격에서 벗어나자 자서전 <고백록>을 쓰기로 결심했다.
<산에서 쓴 편지>는 물의를 일으켰는데 개신교 목사들이 더욱 더 그를 공격했으며 폭도들이 그의 집을 부수었다.

루소는 1766년 1월 영국으로 갔다.
영국의 경험론자 데이비드 흄은 루소를 반갑게 맞아주며 자신의 보호 하에 있게 했다.
그러나 고난을 겪는 동안 이성적 판단력에도 이상이 생긴 루소는, 흄이 자신의 명성에 먹칠을 함으로써 파리 철학자들로부터 인기를 누렸다고 의심하기 시작했다.
결국 두 사람은 공개적으로 말다툼을 하게 되었고, 이는 루소에게 불리했지만 유럽인들은 두 사람의 말다툼을 즐기며 즐거워했다.

루소의 사상은 프랑스 혁명의 밑거름이 되었다.
루소가 <사회 계약론>애서 인간은 선천적으로 선하지만 부패한 정부와 부정한 법 아래서는 사악해진다고 한 말과 인간은 자유인으로 태어나서 부자연스러운 문명 하에서 노예가 된다고 한 말은 루이 16세 치하의 프랑스 시민들에게 힘이 되고 희망이 되는 경구였다.
이런 가르침을 로베스피에르와 마라, 그리고 쟈코뱅파 당원들이 기꺼이 받아들였다.
쟈코뱅파들은 권력을 장악하게 되자 시민이 정부의 보호를 받게 되면 암암리에 법에 복종할 것을 서약하게 된다는 루소의 사상을 적용했다.

마라는 1788년 공공장소에서 사람들에게 루소의 <사회 계약론>에 관해 해설했다.
루소가 말한 시민의 주권은 혁명의 시기에 정부의 주권이 되었고, 공안위원회의 주권이 되었으며, 그리고 한 사람의 주권이 되었다.
한 사람이란 농부와 노동자를 말한다.
혁명정부에서 농부와 노동자의 주권은 한층 강화되었다.
1789년을 기준으로 프랑스의 경작농지의 3분의 1이 농부의 재산이었고, 31ㅜㄴ의 1은 귀족, 교회, 부르주아가 소유했으며, 나머지 3분의 1은 소작인들이 경작했다.
그러나 소작인들은 여전히 불만이 많았다.
프랑스 대혁명이 시작된 1789년 7월 프랑스 지방을 여행한 아더 영이 전한 소작농 여인과의 대화내용이 이를 말해준다.
그녀는 세금과 소작료를 바치고나면 살 수 없을 지경이며 무슨 수가 나든지 세상이 달라져야 자기처럼 가난한 사람들도 살 수 잇을 거라고 하면서, 루이 16세가 좋은 사람이라고 들었는데 그분이 가난한 사람들을 보호해주기 바란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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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안 로렌초 베르니니Gian Lorenzo Bernini(1598~1680)는 17세기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조각가이다.
15세기에 이탈리아에는 도나텔로가 있었고 16세기에는 미켈란젤로가 있었으며 17세기에는 베르니니가 이탈리아를 대표했다.
바로크의 대가 베르니니는 1598년 나폴리에서 태어났으며 아버지는 조각가로서 그의 스승이기도 했다.

베르니니가 27살 때 완성한 조각 <아폴로와 다프네 Apollo and Daphne>를 보면 아폴로에게 쫒겨 월계수로 변해버린 요정에 고나한 이야기를 대리석으로 8피드 높이로 제작한 것인데 요정의 얼굴 표정에서 배르니니의 감성적 표현의 놀라움을 발견하며, 극도의 사실주의가 관람자로 하여금 신화를 사실처럼 믿게 만든다.
3년 전 이미 <프로세르피나의 유괴 Anduction of Proserpina>(1621~22, 높이 7.425피드)에서 극적인 장면을 열연하는 배우들처럼 실재감을 느끼게 하는 작품을 제작한 그는 대리석을 잘 다루는 귀재였으며, 그는 평생 재료로 대리석을 선호했다.

그는 인간의 벌거벗은 육체를 아름답게 가꿀 줄 알았는데 그의 조각에서 미켈란젤로의 정신적 요소를 발견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
그는 단지 육체적 아름다움을 찬양하면서 극도한 자신의 감성을 표현하려고 했다.
그가 1645~52년에 제작한 유명한 작품 <환희에 찬 성녀 테레사 St. Theresa in Ecstasy>(대리석, 높이 11피드 6인치)를 보면 성녀는 종교적 체험으로 의식을 잃고 무의식세계를 헤매는 것처럼 보인다.
테레사는 성적으로 황홀감을 느끼는 젊은 여인의 모습처럼 보인다.
주름진 테레사의 의상과 성적으로 공격하는 듯 보이는 천사의 모습 그리고 가슴을 드라낸 의상이 매혹적이다.

베르니니의 미학은 여러 면에서 루벤스의 것과 같고 인물에 대한 그의 묘사는 루벤스의 그림에 등장하는 모델 같으며 바람에 흩날리는 여자 모델의 머리카락과 남자 모델의 수염은 아주 정교하고 이런 요소들은 자신의 감성을 표현하려는 의지였다.
그의 조각을 보노라면 그것들이 대리석으로 제작했는지 청동으로 제작했는지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이다.

미술사학자들은 베르니니가 말년에 제작한 것들을 그의 대표작으로 꼽는데 그것들 가운데 <성 제롬 St. Jerome>과 <가시왕관을 든 천사 Angel with the Crown of Thorns>가 있다.
<환희에 찬 성녀 테레사>와 <성녀 마리아 막달렌 St. Mary Magdalen>에서 보여주었듯이 그는 말년의 두 작품에서도 구겨진 옷자락을 정교하게 사실주의 방법으로 묘사했으며 성자와 천사를 가장 인간적인 모습으로 묘사하여 그들의 품위를 떨어뜨렸다.

1630년대부터 그의 흉상 조각들은 달라지기 시작했으며 초기의 주제들이 신화였고 극적이었던 데 반해 그는 점차 종교적인 주제를 사용하면서 실재에 근사한 모습들을 제작했다.
그가 1635년에 제작한 <코스탄자 부오나렐리의 초상 Portait of Costanza Buonarelli>는 그의 조수의 젊은 아내의 초상으로 그녀는 무엇인가에 심취해 있다.
베르니니는 이때부터 이런 형상의 흉상들을 제작하기 시작했다.
흉상, 무덤, 교회의 제단, 그리고 서 있는 사람의 모습들은 전통적인 조각의 주제들이었으며 베르니니는 이러한 주제들에 고상한 아이디어를 투영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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