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비드는 1766년 9월 왕립미술아카데미Royal Academy of Painting and Sculpture에 입학하여 조제프-마리 비엥으로부터 수학했다.
1648년에 설립된 왕립미술아카데미는 에콜 데 보자르Ecole des Beaux-Arts의 전신이다.
루브르궁 아래층을 사용한 아카데미에 12명의 교사가 재직했는데 비엥과 부셰가 이곳에서 가르쳤으며 8명의 보조교사가 있었고 이들은 한 달씩 근무했다.
12명의 교사 대부분은 아카데미 회원들로 개성이 강했으며 각각 모순되는 이론을 바탕으로 가르쳤다.
이 점을 훗날 다비드가 비난하게 된다.

아카데미는 회화와 조각 지망생 모두에게 드로잉만 가르쳤다.
회화반의 경우 처음에는 대가들의 드로잉과 판화를 모방하게 하고 그 다음 유명한 고대 조각가의 석고상을 드로잉하게 하며 어느 정도 기술이 습득되면 실재 남자 누드를 보면서 드로잉하게 했다.
아카데미를 졸업하기 전 2년 동안 드로잉 훈련에 정진해야 했다.
아카데미는 남자 누드만 제공했는데 여자 누드를 제공할 경우 젊은이들이 방탕해질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아카데미는 역사화를 중점적으로 가르치면서 역사화를 잘 그릴 수 있도록 성서, 고대사, 신화 등을 읽게 했고 모델을 영웅적인 포즈로 드로잉하게 함으로써 역사화를 그리는 데 직접적인 도움이 되도록 했다.
다비드는 아카데미에서의 훈련을 통해 훗날 역사화가가 된다.

아카데미에 재학하는 학생들 모두의 유일한 희망은 로마대상을 수상하는 것이었다.
1749년 코이펠Coypel이 제정한 이 상은 아카데미 재학생들에게는 가장 영예로운 상이었다.
매년 역사화로 수상자를 선발하는 이 컨테스트에 합격하면 우선 작은 아틀리에를 제공받게 되고 그곳에서 10주 동안 작업하다 로마에 있는 프랑스 아카데미에서 3~5년 동안 유학하게 된다.
정부에서 비용을 대고 유능한 화가를 만들어내는 프로그램이다.
유학을 마치고 재능을 인정받으면 아카데미 회원이 될 수 있으며, 그렇게 되면 작품을 비싼 값에 팔 수 있어 경제적으로도 성공을 거두게 되고, 궁정화가로 선임될 경우 궁정과 교회를 장식하는 기념비적인 작업을 맡게 된다.

아카데미에 재학할 때 다비드는 천재적 재능을 발휘하지 못했다.
해부학에서는 비교적 우수했지만 우너근법에는 미숙함을 나타냈다.
그는 다섯 차례의 도전 끝에 로마대상을 수상했다.
네 차례에 걸쳐서 실패를 거듭하자 아카데미에 대한 불만이 고조되었고 이대의 불만이 훗날 아카데미를 증오하게 된 원인이 된다.
다비드는 아카데미가 자신의 작품을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에 자신은 4년 동안 더 프랑스 학파의 오염에 물들게 되었으며 따라서 로마에 머무는 동안 그 오염을 벗어내는 데 무척 힘이 들었다고 훗날 말했다.

그의 첫 좌절은 1770년에 있었으며 이듬해 제출한 작품은 호메로스의 <일리아드>의 한 장면이었다.
트로이 전쟁 때 그리스군을 후원한 지혜의 여신 미네르바가 트로이군을 후원한 전쟁의 신 마르스를 격퇴시키는 장면을 다비드가 회화적 구성으로 해석한 <마르스와 미네르바의 결투>가 그것이다.
마르스가 쓰러지자 애인 비너스가 구출하는 장면이다.
이 해에 조제프 베노이 수베의 동일한 제목의 작품이 수상하자 다비드는 아카데미뿐만 아니라 수베까지 미워했다.
그는 심사위원들을 불신했으며 심지어 스승 비엥이 자신을 수상자로 선정하지 않는 데 가담했을 거라고 의심했다.
자신에 대한 음모가 도사리고 있었다는 식의 일방적인 의심은 그의 인생에 늘 변수로 작용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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