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크 루이 다비드가 로마로 향한 것은 1775년 10월이었다.
약 180cm 키에 강렬한 눈을 가진 그의 피부는 검었고 머리카락은 약간 곱슬이며 반듯한 용모가 사람들에게 차분한 인상을 주었다.
그는 비엥을 선두로 한 그룹에 끼어서 로마로 향했는데 비엥은 로마의 코르소에 있는 프랑스 아카데미의 원장에 부임하기 위해 제자들을 인솔하고 갔다.
일행이 로마에 도착한 것은 파리를 떠난 지 한 달 남짓 후였는데 볼로냐와 피렌체에 잠시 체류하면서 주요 대가들의 작품을 습작했기 때문이다.

18세기 중반부터 로마는 다시금 유럽 예술의 중심지가 되고 있었다.
1738년 고고학자들이 헤르쿨라네움을 발굴했고 10년 후에는 폼페이를 발굴했으므로 고대 우적과 유물을 보기 위해 유럽 각지에서 사람들이 이탈리아로 대여행길에 올랐다.
그들은 고대 번영의 수도 로마에 오래 머물면서 이탈리아 각지를 두루 여행했다.
헤르쿨라네움(현재 이탈리아 명칭으로 에르콜라노)은 나폴리 동쪽 베수바우스 산 서쪽 기슭에 위치한 오래된 도시로서 기원전 79년 8월 24일 베수바우스 산 분화 때 폼페이와 함께 매몰되었지만 폼페이와 달리 용암이 응회암으로 변했으므로 근대에 이르기까지 매몰 당시의 모습으로 남아 있었다.

독일의 고고학자이자 미술사학자 요한 요아힘 빙켈만의 고대 그리스 미술에 대한 찬양으로 로마에 대한 유럽인의 관심은 더욱 커졌다.
1755년 5월에 출간한 <회화와 조각에서 그리스 작품의 모방에 관한 고찰>에서 빙켈만은 "이상적 예술에 도달하는 지름길은 고대의 모방"이라고 주장했다.
이 책은 여러 나라 말로 번역되었으며 유럽인의 애독서가 되었다.
신고전주의 이론의 독보적인 존재가 된 빙켈만은 이 책을 출간한 후 이탈리아로 가서 1759~64년에 걸쳐 <헤르쿨라네움 발굴에 관한 비안코니 서한>(사후 간행), <헤르쿨라네움 발굴에 관한 브륄 서한>(1762년 간행), <최근의 헤르쿨라네옴 발굴에 관한 퓌슬리 보고>(1764년 간행) 세 편의 보고서를 집필했다.

빙켈만은 아테네의 황금기였던 기원전 5세기 고대 그리스인의 조각을 찬양하는 가운데 제스처와 표정의 특징으로 "고귀한 단순과 고요한 위대"를 꼽았다.
이 말은 날개가 달린 말이 되어 유럽 전역으로 퍼졌으며 고대 그리스인의 미를 규정짓는 말이 되었다.

<라오콘>을 고대의 걸작으로 꼽은 빙켈만은 이 작품을 찬양하면서 다음과 같이 적었다.

"그리스 걸작들의 일반적이며 탁월한 특징은 결국 제스처와 표현에서의 고귀한 단순과 고요한 위대이다.
바다의 수면이 사납게 날뛰어도 그 심해는 늘 평온한 것처럼 그리스 조상들은 휘몰아치는 격정 속에서도 침착함을 잃지 않는 위대한 영혼을 나타냈다.
이 영혼은 격렬한 고통 속에 있는 <라오콘 군상>의 얼굴에 잘 묘사되어 있다.
그 고통은 얼굴뿐 아니라 육체의 모든 근육과 힘줄에도 나타나 있어서, 우리는 얼굴이나 육체의 다른 부분을 보지 않고 고통으로 움츠러든 하복부를 보는 것만으로도 이런 고통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얼굴이나 전체 자세에서는 전혀 고통에 찬 격정이 드러나 있지 않다.
그의 고통은 우리의 영혼에까지 스며들어 온다.
그러나 우리는 이 위대한 이처럼 그 고통을 견딜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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