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고 예쁜 새 애인 루스 클리그먼



1956년 모마는 ‘진전하는 작품들 Works in Progress’이라는 명제로 당대 작가들을 위한 개인전을 연속적으로 열기로 했다.
잭슨 폴록이 첫 번째 예술가로 결정됐다.
원래 관장 앤드류 릿치는 드 쿠닝을 첫번째 예술가로 결정했는데 알프레드 바가 반대하면서 “폴록이 먼저 전람회를 가질 만한 예술가”라고 주장하여 결정을 번복했다.
1955년 휘트니 미술관에서 개최된 ‘새로운 십 년 The New Decade’이란 명제의 그룹전에도 폴록의 그림을 세 점 포함시켰다.
그런데 이 전시회 카탈로그에는 폴록이 “한스 호프만과 함께 한때 작업한 적이 있었다”고 적혀 있었는데 폴록은 이것을 보고 관장에게 전화를 걸어 욕설을 퍼부었으며, 책임자 존 바우어는 폴록에게 서둘러 사과의 편지를 발송하여 그의 화를 가라앉혔다.

이 시기에 리는 폴록과 인연이 다했음을 감지하고 있었다.
누가 언제 먼저 떠나느냐는 것만이 문제가 되었다.
리는 완강해졌고 그럴수록 폴록은 불안정해졌다.
폴록은 어느 날 리를 구타했고 경찰이 출동했다.
폴록이 리를 떠나겠다고 말하면 리는 그를 정신병원에 가두겠다고 위협했다.
리는 자신이 폴록을 떠날 생각을 하면서도 폴록이 자기를 버리겠다고 말하면 참을 수가 없었는데 그거야말로 여자들의 기막힌 이기심이 아니겠는가.
폴록이 “내가 너를 죽이겠다”고 소리치면 리는 “죽여라 죽여”라고 소리를 질렀다.

그때 잘생긴 매력적인 젊은 여인이 나타났다.
폴록이 어찌 그녀를 마다하겠는가. 게다가 여자가 먼저 집요하게 사랑해오는데 무슨 방패로 그 파도를 막는단 말인가.
폴록이 자신보다 열아홉 살이나 어린 스물다섯 살의 루스 클리그먼을 사랑한 것은 그녀의 피부가 사기로 만든 인형처럼 매끄러웠고 젖가슴이 컸으며 감각적인 입술을 가진 데다가 유혹적인 목소리로 정감 있게 말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것은 자연의 섭리이기도 했다.
그러나 여러분은 왜 루스같이 생긴 여자가 폴록 같은 중늙은이를 좋아할 수 있었느냐를 궁금해 할 것이다.
그녀의 말로는 단순히 자신이 젊은 화가로서 ‘위대한 예술가’를 사랑하게 되었다는데, 여러분은 그녀의 말을 납득할 수 있겠는가?
그렇지 못할 것 같아서 필자는 이제 그녀의 내력을 소개한다.

루스 클리그먼도 리 크래스너와 마찬가지로 학대가 곧 사랑인 줄 아는 가정에서 성장했다.
그녀의 아버지는 어머니를 열여덟 살 때 아내로 맞이했다가 곧 버렸다. 어머니인 메리 클리그먼은 쌍둥이 딸 루스와 아이리스를 가난 속에서 길렀다.
“어머니가 울었고 내가 울었으며 아이리스가 울었고 우리 모두는 함께 울었다. 난 무엇이 문제인지 모르고 그저 울었다. 그러나 바깥세상은 공포를 대신했다”고 적었다.
루스가 도피할 수 있었던 곳은 극장뿐이었다.
영화에서 펼쳐지는 환상의 세계는 그녀가 도피하기에 화려하고 안성마춤인 곳이었다.
이렇듯 루스는 어려서부터 예술과 남자에게 도피해야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는 일곱 살 때 베토벤에 관한 드로잉을 보았는데 “베토벤의 눈은 야성적이었으며 앞이마가 나와 있고 에너지가 가득한 모습이었다.
난 예술가가 되어야겠다고 결심했고, 만일 그렇지 못하면 천재의 아내가 되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가능하면 둘 모두를 욕망했다”고 그녀는 말했다.

루스는 열 살 때 홀로 메트로폴리탄 뮤지엄에 가서 현대조각의 선구자 로댕의 조각들과 베르미어의 그림을 보고 감명을 받았다.
학교에서 그녀는 리와 마찬가지로 남학생들에게 두려움을 느꼈으며, 역시 리처럼 가출하여 도시로 나가려고 결심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루스는 맨해턴 7애비뉴에 있는 옷 도매상에서 모델로 돈을 벌었다.
그녀는 시가를 항상 입에 물고 다니던 사장에게서 “루스는 세련되었다”는 말을 자주 들었다.
루스는 늙은 남자들과 성관계가 많았지만 그녀가 사랑할 수 있는 남자는 마음속 멀리에 두고 있었는데 그들은 바로 위대한 프랑스 시인들인 보들레르, 아폴리네르, 그리고 랭보였다.

스무 살 때 그녀는 나이 많은 유부남을 만났다.
그는 그녀에게 돈을 잘 썼고 루스는 그를 “나의 부자 아버지”라고 불렀다.
그들은 리무진을 타고 경마장에 갔고, 코파카바나와 21클럽에도 갔다.
그녀는 그때 예술을 잠시 잊고 있었다.
“나는 그를 이용했는데 내가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울기도 했고 술도 마셨다. 그가 나를 버릇없게 만들었다”고 루스는 술회했다.
하지만 환상의 세계에 오래 머물 수가 없었다.
그녀는 스물두 살 때 정신질환을 일으켰고, 부자 아버지와는 헤어져야 했다.

그녀는 뉴스쿨에 입학하여 회화를 수학하기 시작했다.
시다에서 폴록을 만났던 오드리 플랙의 말에 의하면 “그녀는 미술에 대한 이해가 남달랐다.
또 그녀는 영화에 관한 잡지들을 구독했으며, 미장원에 가서 몇 시간을 소비했고, 거울 앞에서 포즈 취하기를 좋아했다.
나중에는 정신과 의사를 찾아갔다”고 한다.
루스는 프랙에게 중요한 화가들을 소개해달라고 부탁했고 프랙은 폴록, 드 쿠닝, 그리고 프란츠 클라인을 거명했는데, 루스는 그들의 이름을 들어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루스는 세 사람의 이름을 모두 적은 후 “누가 가장 훌륭하냐?”고 물었고 프랙은 폴록이라고 대답했다.
프랙의 대답은 폴록의 운명을 바꾸어놓는 결과를 초래했다.
만일 그때 그녀가 ‘드 쿠닝’이라고 대답했더라면 드 쿠닝의 운명은 어떠했을까를 생각해보고 필자는 혼자 웃었다.

플랙은 시다에 루스와 함께 가는 것은 거절하면서 그곳의 약도를 그려주었다.
거기서 예술가들이 하는 짓들에 실망이 컸기 때문이었다.
루스는 처음으로 시다에 갔던 날 폴록을 만났다고 말했지만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그녀가 술집에 자주 왔으며 항상 핑크 드레스를 입고 폴록이 오기를 기다렸다고 했다.
그녀는 재니스 화랑에 가서 폴록의 그림들을 보고는 “에너지가 내게로 쏟아지는 것만 같았으며 그것들을 완전히 이해할 수가 있었다”고 말했다.

그녀는 어쩌면 이스트 햄프턴에 있는 술집에 가서도 폴록의 눈길을 받으려고 시도했었는지 모르겠다.
왜냐하면 에름나무 술집의 리스가 지난 여름에 그녀를 몇 번이나 보았던 적이 있다고 기억했기 때문이다.
로저 윌콕스는 바닷가에서 루스가 쌍둥이 자매 아이리스와 함께 있는 것을 보았다고 증언하면서 “똑같이 생긴 쌍둥이, 마치 초현실주의의 사건과도 같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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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디 아트


사람의 몸을 재료로 이용하는 바디 아트Body art는 때때로 다른 사람의 신체를 이용하기도 하지만 대개는 자신의 신체를 사용한다. 처음 몇몇 작품의 경우 이벤트나 퍼포먼스에 가까웠고 1950년대 말부터 여러 해프닝 속에 바디 아트의 일종이랄 수 있는 것들이 현저하게 나타나기 시작했다. 1960년대 후반 바디 아트는 독립적인 예술의 한 형태로 부상하게 되었는데 이는 개념 미술에 대한 반작용으로 생긴 것이다. 그러나 바디 아트는 표현주의나 사실주의 노선을 취하지는 않았다. 바디 아트 작품은 예술가의 감정이나 개인적인 삶 속에서 일어난 사건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며 후기 회화적 추상이나 미니멀 아트만큼 비개성적이다. 윌러비 샤프가 말한 대로 바디 아트는 대체로 신체에 관한 진술이다. “그것은 자전적인 예술이라기보다 신체의 사용과 관련된 예술이다.”
바디 아트의 선구자는 이브 클랭이다. 클랭Yves Klein(1928~62)은 니스 태생으로 재즈 암악가이기도 했으며 1952~53년에 일본에 거주하면서 유도에서 유단자로 검은 띠를 땄고 유럽 챔피언으로 유도에 관한 지침서도 썼다. 1950년대 후반 클랭은 그 자신이 ‘클랭의 국제적인 푸른색(IKB)’이라고 부른 독특한 푸른색을 사용하여 모노크롬 회화, 조각된 형상, 캔버스 위의 스폰지 부조를 제작한 ‘푸른색 시기’를 맞이했다. 그는 화염방사기를 사용하여 <불 그림>을 제작했고, 인체의 흔적을 남기는 <인체 측정> 등 여러 가지 비정통적인 방법으로 작품을 제작하기도 했다. 1960년 처음으로 <인체 측정>을 일반인에게 공개했는데, <단음 교향곡>이 연주되는 가운데 몸에 푸른색 물감을 칠한 여성들이 바닥 위에 놓인 캔버스 위에서 서로를 끌고 다녔다. 에드워드 루시-스미스는 그의 저서 <1945년 이후의 미술 운동>(1969)에서 클랭의 작품이 지닌 성격을 요약했다. “유럽의 네오-다다이스트 중 가장 중요한 인물은 이브 클랭임이 틀림없다. 클랭이 무엇을 만들었는가 하는 것보다는 무엇을 했는가, 즉 그의 행위의 상징적 가치 때문에 중요한 의미를 갖는 예술가 중 하나이다. 그는 예술가는 단 하나의 진정하고 완전한 창조를 이루어내는 존재라고 생각하는 최근의 경향을 보여주는 예술가이다.”
바디 아트 작품은 개인적으로 만들어져 사진이나 영화를 통해 전달되기도 한다. 작품 제작 과정은 일반에게 공개되기도 하며, 길버트와 조지처럼 사전에 안무를 하기도 하고, 즉흥적으로 행해지기도 한다. 대체로 관람자의 참여는 배제되었다. 길버트Gilbert Proesch(1943~)는 이탈리아 태생이고 조지George Passmore(1942~)는 영국 태생이다. 1967년 런던의 세인트 마틴 미술학교에서 공부하는 동안에 만났다. 1968년부터 함께 살면서 자칭 ‘살아 있는 조각’으로서 공동작업을 했다. “살아 있는 조각이 된다는 것은 우리 생활의 활력의 근원이며, 우리의 운명이고, 우리의 로맨스이며, 우리의 불행이고, 우리의 빛이자 삶이다.” 길버트와 조지는 초기에는 퍼포먼스 예술가로 주목을 끌었는데, 이 시기의 가장 유명한 작품으로 <아치 아래서>(1969)가 있다. 이 작품에서 두 사람은 특유의 말쑥한 정장을 하고 얼굴과 손을 금색으로 칠한 채 동일한 제목의 1930년대 뮤직홀 음악에 맞추어 기계적으로 무언극을 공연했다. 그들은 1977년 ‘살아 있는 조각 퍼포먼스’를 그만두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삶 자체를 미술작품으로 여기면서 여전히 스스로를 살아 있는 조각으로 생각하고 있다. 1970년대 초반부터는 주로 사진으로 작업했다. 그것은 주로 흑백과 강렬한 빨강색의 사진을 장식적으로 배열한 거대한 구성작품으로 종종 폭력적이고 동성애적인 내용과 배설물을 의미하는 제목으로 붙이고 있다.
펑크 아트 시기를 거친 후 개념 미술, 특히 바디 아트를 주창한 브루스 나우먼Bruce Nauman(1941~)은 1965년 캘리포니아 대학 대학원 재학중에 자신의 첫 번째 바디 아트 작품을 시도했는데 미용체조와 유사한 퍼포먼스였다. 1971년 헤이워드 화랑에서 열린 ‘11인의 로스앤젤레스 예술가’ 전시회 카탈로그에 모리스 터치먼과 제인 리빙스턴은 나우먼에 관해 적었다. “나우먼의 작품에서 거의 일관되어 있는 사실은 자신의 신체를 묘사하거나 그와 관련된 것을 다루는 점이다. 혹은 관람자가 자신의 신체를 대면하거나 사용하는 상황을 ‘미적’ 행위로 만드는 것이다.” 1968년에 제작한 <얼굴 찌푸리기>라는 일련의 홀로그램에서 나우먼은 양손으로 얼굴을 최대한 잡아당겨 표정을 왜곡했다. 또 그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분수가 된 예술가의 초상>(1967)에서는 입에서 물을 뿜어내는 자신의 모습을 사진에 담았다.
베리 레바는 캘리포니아 주 샌디에이고의 러호이아 뮤지엄에서 열린 ‘투사: 반물질주의’ 전시회에서 뮤지엄의 한쪽으로 전속력으로 달려가는 작품을 시도했다. 존 밴 손은 이 개념을 더욱 발전시켜 뉴욕 모마 정원에서 행한 퍼포먼스 <돌파>에서 특별히 새워놓은 나무칸막이를 뚫고 달렸다. 테리 폭스, 데니스 오펜하임, 댄 그레이엄, 리처드 롱 등은 미리 세운 계획에 따라 걸어간 뒤 그 발자국을 사진으로 남기거나 석고상으로 떴다.
몇몇 바디 아트 예술가들은 신체의 평범한 기능을 찍은 사진이나 영화를 작품으로 제시했다. 브루스 멕레인은 이 분야의 전문가로 그의 <미소>(1969)는 예술가가 미소 짓는 과정을 찍은 3장의 사진을 수직으로 배열한 것이다. 가장 다재다능한 바디 아트 예술가로 꼽히는 비토 아콘치는 매우 격한 바디 아트 작품을 발표하곤 했는데, <들이마시기>(1969)는 숨을 크게 들이마신 뒤 버틸 수 있을 때까지 오랫동안 숨을 참는 것이었다.
신체를 학대하는 예술가들도 종종 있었다. 파리에서 지나 팡은 면도날로 자신의 신체를 베었으며 <식사>(1971)에서는 저민 고기 1근을 먹은 뒤 토했다. 윌리엄 웨그먼은 <11개의 이쑤시개 표정>(1970)에서 11개의 이쑤시개를 자신의 잇몸에 꽂고 있는 모습을 사진에 담았다. 레리 스미스는 자신의 팔에 6인치 길이의 상처를 내 <선 Line>이란 제목으로 소개했다. 아콘치는 <문지르기>에서 레스토랑에 앉아 한 시간 동안 자신의 오른손을 왼손으로 계속 문질러 피부가 까지는 과정을 5분마다 사진에 담았다. 또 <손과 입>에서는 구역질이 날 때까지 자신의 손을 목구멍 속으로 밀어넣었다. 오펜하임은 자신의 몸을 롱아일랜드 해변가의 햇빛에 노출시켜 햇볕에 그을리기 전과 후의 모습을 컬러사진에 담았다. 일부 예술가들은 손발이 불구가 되거나 팔 다리가 절단될 때까지 자해행위를 벌이기도 했다. 이런 작품들이 지닌 철학은 분명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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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넷 뉴먼과 숭고



바넷 뉴먼의 부모는 미국으로 이민온 폴란드계 유대인이다. 1905년 맨해튼에서 태어나 1922~26년에 아트 스튜던츠 리그에서 회화를 수학했고, 1927년 뉴욕 시티 칼리지를 졸업했다. 아버지가 그에게 2년 동안 자신과 함께 의류사업에 종사한다면 동업자로 대우해주며 10만 달러에 상당하는 주식을 주겠다고 제의했다. 그의 아버지는 무일푼으로 뉴욕에 와 의류공장을 경영하는 성공한 인물이었다. 뉴먼은 아버지의 사업에 참여했는데 불행하게도 1929년 10월 말에 주식가격이 폭락하면서 경제공황이 시작되었고 아버지의 사업은 파산지경에 이르렀다. 뉴먼은 1937년까지 어렵게 경영을 계속했다. 1930년대에는 임시 고등학교 미술교사로 근무했다. 그는 대화하기를 즐겼고 정치학, 조류학, 지질학, 어학 등에 많은 지식이 있었다.
뉴먼은 1933년에 탁월한 행정가 라 구아르디아에 대적하여 뉴욕 시장에 출마했다. 뉴먼이 선거유세에서 언급한 공약은 진지하면서도 코믹했는데, 그의 네 가지 공약은 대중을 위한 화랑과 카페를 늘이는 것, 뉴욕 시를 위한 오페라단을 구성하는 것, 어른을 위한 놀이터를 만드는 것, 대기오염을 방지하기 위해 부서를 만드는 것이었다. 뉴먼은 낙선했고 라 구아르디아는 능력 있는 3선 시장으로 오늘날까지 뉴욕 시민들의 존경을 받고 있다.
뉴먼은 회화에 있어 미국의 지방주의와 사회적 사실주의뿐만 아니라 유럽의 입체주의, 구성주의, 초현실주의의 자연스러운 발전 과정은 끝났으므로 급진적인 변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으며, 이런 신념으로 1930년대와 1940년대 초반에 제작한 자신의 작품을 거의 모두 폐기했다. 새롭게 출발한 뉴먼은 1940년대 후반 점차 신비적 추상이라는 독자적인 양식을 찾아갔는데, 1948년 1월 단색조의 어두운 붉은색 화면에 밝은 오렌지색 선 하나가 화면 중앙을 가로지르는 <합일>을 제작하여 비약적인 발전을 성취했다. 그가 화가로 인정받게 된 것은 <합일>을 발표하고부터였다. 사람들은 웃기는 그림이라고 했지만 평론가들은 그의 작품을 진지하게 받아들였다. 미술사학자 로버트 로젠블럼은 그의 작품을 ‘낭만적 고상함’이라고 했으며, 붉은색은 ‘바다’로서 우리를 이기심의 중심으로부터 밖으로 움직여 나오게 만든다고 기술했다.(폴록 81, 107, 97, 108) 로젠브럼이 설명한 작품이 관람자에게 제공하는 미학적 경험은 동시에 지성적으로 도전하게 했는데, 예를 들면 그의 커다랗고 평편한 붉은색은 조절하는 힘이 없이 치솟는데 집zip이 그것을 억누르는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그의 작품에서 수직선들은 기하학적 조직으로서 관람자에게 심리적으로 작용하여 화면 전체에 안정감을 주었다.
뉴먼이 붙인 제목은 독특했는데 1950~51년에 그린 그림을 <숭고한 영웅>이라고 했고, 1960년대 초 처음 조각품을 세 점 제작한 후 제목을 <여기 I>, <여기 II>, <여기 III>이라고 했다. 이 조각은 가늘고 수직으로 긴 집zip이었다. 그가 그림에 붙인 제목은 <저기가 아니라 여기>, <지금>, <존재> 등이었다. 뉴먼은 화가라기보다는 이론가였는데 1948년 12월에 에세이 <숭고한 것은 지금이다>를 발표했고, 이듬해 말에는 <새로운 미학을 위한 서설>이라는 미완성 에세이를 발표하면서 자신은 그림을 그릴 때 “공간의 조작이나 이미지가 아니라 시간감각”에 관심을 기울인다고 했다. 이때 그는 향수의 감정, 각본, 연상, 역사에 의해 부담을 느끼는 시간 그리고 통상적인 회화의 주제가 된 그런 시간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고 했다. 뉴먼이 염두에 둔 시간은 과연 어떤 것이며 ‘지금 now’이란 말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뉴먼의 친구이자 미술평론가 헤스는 뉴먼의 시간을 히브리 전통에서의 그곳, 그 위치, 그 장소라는 의미를 지닌 ‘마콤 makom’ 혹은 ‘하마콤 hamakom’이며, 그래서 그것은 신성한 모세의 율법, 즉 명명될 수 없는 것에 부여하는 명칭 중 하나로 보았다. 뉴먼이 말하는 ‘지금’이란 미래와 과거 속으로 흡수되는 ‘바로 지금의 순간’을 의미하는 것은 분명하다.
장-프랑수아 리오타르는 <지시인의 종언>(1984)에서 뉴먼의 ‘지금’을 ‘현재 Jetzt’로 보고 시간성의 ‘무아경’ 중 하나로 아우구스티누스와 후설 이후 의식에 의해 시간을 구성하려는 사유전통으로부터 분석된 것으로 보았다. 그는 뉴먼의 ‘지금’을 발생occurence으로 보았다. 의식으로 구성되기보다는 오히려 의식을 분해시켜 즉위해제시키는 것으로 의식이 정립할 수 없고 의식이 스스로를 구성하기 위해 잊어버려야 하는 우리가 정립할 수 없는 무엇인가가 ‘일어나고 있다’ 혹은 ‘단지 일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큰 사건도 작은 사건도 아닌 단순한 ‘발생’으로 보았다. ‘무엇 quid’ 이전에 우선 일어나고 있는 ‘사태 quod’를 말한다.
뉴먼은 <숭고한 것은 지금이다>에서 미학적, 철학적 의미로서의 숭고를 사유했다. 리오타르는 뉴먼이 말하는 ‘숭고한 것은 지금이다’는 ‘지금, 이것이 숭고한 것이다’라는 말로 대체될 수 있다고 보았다. 숭고는 갑자기 다가와서 흔들어놓고 느끼게 하는 어떤 경이로운 것이다. 뉴먼의 숭고의 효과는 관람자의 시야를 압도하는 커다란 화면의 사용으로 한층 더 했는데 그는 화면 크기의 질적 중요성을 부여한 선구자이기도 했다. 그의 영향을 레리 푼스와 프랭크 스텔라를 비롯하여 추상표현주의 이후에 출현한 여러 새로운 양식을 창안한 젊은 예술가들이 받았다. 그가 색을 평편하게 넓게 칠한 것은 모노크롬의 컬러필드의 선구적인 행위였고, 재스퍼 존스의 전체적인 회화 혹은 비관계적인 회화의 선구적인 모범이기도 했다.
1950년과 1951년 베티 파슨스 화랑에서 열린 뉴먼의 첫 개인전은 적대감과 몰이해만 불러일으켰으며, 그는 1952년 모마에서 열린 ‘15인의 미국인전’에도 초대되지 않았다. 그러나 1950년대 후반 로스코, 라인하르트, 스틸 등에게 직접적으로 영향을 끼쳤으며 1958년 모마에서 열린 ‘새로운 미국 회화전’에 네 점을 출품했다. 이 전시회는 2년 동안 유럽을 순회했다. 1955년 초 평론가 클레먼트 그린버그는 뉴먼의 작품을 극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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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록, 이제 회화에는 흥미가 없고 오로지 여자에게만



어느 날 폴록은 로드라는 친구에게 “난 여인들의 몸을 발견했다.
그들은 아주 아름답다.
여인의 젖가슴, 어깨, 귀, 발목, 코, 손목은 아름답다”고, 로드가 웃음을 참지 못하고 폭소할 때까지 계속 말했다.
또 다른 친구에게는 “난 아주 여러 번이나 여자와 성관계를 가지지 않고 그저 여자를 안고서 눕기만 했었다”고 말하기도 했다.
어느 날 폴록은 토니와 함께 길을 가다가 그레타 가르보가 그들 옆을 지나자 “난 성관계에 대해 모르고 있다. … 난 오직 세 번밖에는 경험이 없다. … 한 번은 우리가 저 여자 옆을 지날 때였다”고 말했다.

어느 날 폴록은 조앤 와드라는 여인과 데이트하면서 그녀를 낭만적인 이탈리아 레스토랑으로 데리고 갔다.
그런데 폴록이 너무 말없이 앉아 있었기 때문에 조앤은 침묵이 답답하기만 했는데 폴록이 다른 테이블에 친구들이 있는 것을 보고 그들에게로 가서 오랫동안 돌아오지 않자 성이 나서 집으로 가버린 일도 있다.

파티에서 폴록은 버드 홉킨스라는 친구에게 젊고 매력 있는 여자를 소개해달라고 졸랐으며, 홉킨스는 폴록에게 조시 윌킨슨이라는 여자를 소개해주었다.
폴록은 그녀와 대화 도중 지퍼를 내렸다 올렸다하는 통에 그녀가 대경실색하는 일이 있었다.
홉킨스는 또 어느 날 폴록이 술집에서 두 여자와 함께 대화하는 것을 보았는데 그의 눈에는 눈물이 고여 있었으며 그녀들에게 자신이 얼마나 사기꾼이었으며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해보지 못했는지를 말하고 있었다고 했다.
폴록은 술에 취한 채 미리엄이라는 여인과 함께 여러 사람들 틈에 끼어 춤을 추었는데 막 음악이 끝나자 미리엄이 소리를 질렀다.

“그만두지 못해? 잭슨, 그렇지 않으면 너의 불알을 차버리겠어!”

시다에서 폴록은 어떤 여자에게로 가더니 “너는 젖가슴이 크구나. 나와 씹하러 가자”고 말하자 그 여자는 얼른 그곳에서 달아나버렸는데 그녀의 등에 대고 폴록은 “뭐가 그리도 급해?”하고 소리쳤다.
폴록은 술집에서 여자와 대화하다가 강제로 키스하려고 한 적도 있었다.
폴록은 친구 루벤 카디시에게 자신은 이제 회화에는 흥미가 없고 오로지 여자에게만 흥미가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폴록의 술주정과 음담패설에 진력이 난 프란츠 클라인과 친구들은 어느 날 창녀 한 사람을 데리고 폴록이 나타나기만 기다리고 있었다.
폴록이 나타나 그 여자에게 “너 나하고 씹할래?”라고 말하자 그 여자는 얼른 일어서면서 폴록의 옷자락을 잡고 “그래, 가자!”고 말했다.
폴록은 그만 놀라고 말았다고 한다.
어느 날 홉킨스가 여자친구와 함께 시다에 있었는데 폴록은 그 여자에게 가서도 “자, 나의 집으로 가서 나와 씹하자”고 말했다.
그 여자는 폴록에게 눈총을 주지도 않고 편안한 태도로 “지금은 안 돼요. 전 시간이 없거든요”라고 말한 후 대화를 계속하니까 폴록은 일어서면서 “나도 시간 없어”라고 말한 후 가버렸다.
프란츠 클라인과 홉킨스는 폴록의 태도와 말버릇은 그의 느낌과 상관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것은 술에 취해 아무렇게나 말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만일 여자와의 성관계에 대한 번뇌로부터 벗어나려고 술을 마셨다면 그가 술을 마시지 않았을 때 성관계에 대한 그의 번뇌는 얼마나 컸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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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주의  

 <뒤샹과 친구들>(미술문화) 중에서


미래주의의 선동가이며 지도자는 시인 필리포 톰마소 마리네티(1876~1944)였다. 이집트 알렉산드리아 태생의 이탈리아인 마리네티는 소르본 대학에서 수학한 후 1899년 제노바에서 법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893년 파리에 오면서 아방가르드 문학에 관심이 생겼고 상징주의에 반대하여 ‘본연주의적 naturiste’ 움직임에 동참했다. 1912년 무렵까지 거의 프랑스어로만 시를 썼다. 그는 1905년 밀라노에 거점을 둔 문학 잡지 <포에시아 Poesia>를 창간했는데, 이 문학지는 예술의 자유, 형식의 혁신, 전통의 거부를 표방했다. 마리네티는 이 잡지에 시를 발표했는데, 특히 <속도의 신>과 <자동차에 바침>(1905)에서는 자동차로 대표되는 속도에 중독되고 현대적인 것을 찬양하는 미래주의의 주요한 특징을 예고했다. 미래주의는 1909년 2월 20일 <르 피가로> 지에 마리네티가 작성한 ‘미래주의 선언문’이 게재됨으로써 출범했다. 미래주의 예술가들은 <르 피가로> 지를 수백 장 구입하여 이탈리아에 있는 예술가들에게 일일이 발송했다. 격렬한 무정부주의적 어조의 이 선언문은 매우 선동적인 언어로 새로운 문학 및 사회운동의 탄생을 알렸으며, 젊은이들에게 미래주의의 기치 아래 모일 것을 호소했다. 폭력과 투쟁이 만연한 이 선언문의 전반적인 어조 “아름다움은 오직 투쟁 속에서만 존재한다”는 니체의 영향을 크게 반영하고 있으며, 후에 그 영향은 단절되지만 움베르토 보초니(1882~1916)와 다른 젊은 미래주의자들은 니체에게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마리네티는 사상의 지휘자였으며, 그의 현대성에 대한 찬미는 당시 이탈리아에서 즉각적인 지지를 얻었다. 
 

화가이며 조각가 보초니는 1910년에 미래주의 선언문에 서명했고 그 후 미래주의 그룹에서 가장 활동적인 예술가가 되었다. 시인 기욤 아폴리네르는 1912년 2월 7일자 <강경파 L'Intransigeant>에서 보초니를 미래주의 예술가 중 가장 재능 있는 화가로 평가했다. 보초니는 산업화된 밀라노와 마리네티의 사상에서 깊은 감명을 받아 “산업화된 우리 시대의 결실”을 그리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보초니, 발라, 카라, 루솔로, 세베리니가 서명한 화가들의 선언문은 1910년 2월 11일에 씌어진 것으로 3월 8일 토라노에 있는 키아렐라 극장에서 보초니에 의해 낭독되었다. “우리에게 있어서 동작은 더 이상 보편적 역동성의 멈춰진 어느 순간이 아닐 것이다. 정확히 말해서 그것은 그 자체가 영원한 끊임없는 역동적 감각일 것이다”라는 구절에서 나타나듯이 이 선언문의 중심 주제는 ‘보편적 역동성’이었다. 그들이 1910년 4월 11일에 발표한 ‘미학 선언문’의 9개 조항에는 운동에 대한 강조가 담겨 있다. 
 

1. 모방된 형태들은 무가치하며, 본래 형태들만이 찬양받아야 한다.
2. 쉽게 무너질 수 있는 렘브란트, 고야, 로댕의 도움으로부터, 그리고 지나치게 융통성 있는 표현들처럼 ‘좋은 감각’과 ‘조화’라는 말의 폭정에 근원적으로 반발해야 한다.
3. 미술평론가들은 무가치하거나 해를 입히는 사람들이다.
4. 이미 사용한 적이 있는 주제들은 우리의 무쇠, 자긍심, 열정, 그리고 속력의 소용돌이치는 인생을 표현하기 위해 깨끗이 일소되어야 한다.
5. ‘미친 놈’이라는 말로 탄압받는 모든 발명가를 우리는 영광스러운 이름으로 우러러보아야 한다.
6. 시에서 운율이 자유롭고 음악에서 대위법이 자유로운 것과 마찬가지로 회화에서도 고유한 보충적인 것이 절대로 필요하다.
7. 우주적 동력주의는 회화에서의 동력적 감각처럼 묘사되어야 한다.
8. 자연을 묘사하는 방법에서 가장 근원적인 점은 성실하고 순수해야 하는 것이다.
9. 운동과 빛이 사물의 물질적인 요소들을 파괴한다.  

 미래주의는 2단계로 나누어지는데, 첫 번째 단계는 1909년의 발단에서부터 1916년 보초니의 사망으로 인해 사실상 그룹이 해체될 때까지이며, 두 번째 단계는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무솔리니 정권 하에서 마리네티가 시도한 재건의 시기이다. 20세기 미술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 첫 번째 시기에서 예술가들은 선언문에서 제안된, 과장된 공식적 표명을 합리화할 수 있는 회화 언어를 성취하고자 했다. 그들은 가에타노 프레비아티(1852~1920)의 분할주의 기법으로 작업하면서 움직임과 변화에 대한 감각을 부여하려고 했다. 프레비아티는 쇠라나 시냐크와 마찬가지로 과학적인 색채 이론이야말로 현대 화가들에게 꼭 필요한 것이며, “현대인의 사고와 감정을 표현하는 데 가장 접합”한 것이라고 믿었다. 그는 화가들에게 지침을 제공하기 위해 <회화 기법>(1905)과 <분할주의의 과학적 원칙>(1906)을 출간했으며, 1913년에는 <회화에 관하여: 기술과 기교>를 출간했다. 
 

밀라노의 미래주의자들은 1911년에 8월 24일자 <라 보체> 지에 실린 소피치의 글 ‘피카소와 브라크’와 세베리니의 밀라노 방문을 통해 입체주의를 간접적으로 접하게 되었다. 소피치는 입체주의는 인상주의 혁명의 확장이며, 인지된 사실을 보다 통합적으로 평면에 투사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피카소에 대해 “대상 자체의 주위를 돌면서 그것을 모든 각도에서 시적으로 고찰하고, 여기에서 받은 연속적 인상에 충실하면서 이를 묘사한다. 결국 그는 인상주의자들이 오직 한 순간의 한 측면만을 표현한 것과 같이 자유롭게, 대상의 총체성과 감정적 영속성을 보여준다”고 했다. 미래주의자들은 이런 면은 수용하면서도 입체주의자들이 대상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고 순수한 회화적 가치에만 관심을 둔다고 비난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전시회 카탈로그에서 입체주의를 단지 은폐된 아카데미즘으로 묘사했다. 미래주의자들은 입체주의의 정물 대신 그들 특유의 이미지와 표현을 통해 현대생활의 역동적인 에너지와, 현대성 및 기계 시대에 대한 그들의 열정을 표현했다. 또한 입체주의와는 다르게 그림의 중심으로 관람자를 끌어들이고자 했다. 
 

루솔로는 1913년 자신의 선언문 <소음 미술 L'arte dei rumori>을 출간했는데, 여기에서 음악은 전적으로 자연의 소음으로 만들어진다고 주장하여 슈토크하우젠과 존 케이지를 예견했다. 카를로 카라도 1912년 자신의 선언문 <소리, 소음, 냄새 회화 La Pittura dei suoni, rumori, odori>에서 이전의 많은 선언문들보다 격렬한 어조로 비시각적인 여러 감각들이 색채와 형태의 추상적 조합으로 표현될 수 있는 회화를 옹호했다. 한편 발라는 색채, 움직임, 소리까지도 포함하는 다양한 재료의 조각으로 이후의 키네틱 조각의 몇몇 양상을 예고했다.
이 시기 동안 미래주의 예술가들은 점점 더 입체주의적인 언어로 움직임의 종합적 표현을 계속해서 실험했다. 그러나 이들은 개인주의적 성향이 강하여 점차 분열되어 갔으며, 1914년에 이르러서는 더 이상 결속력 있는 미학 그룹을 구성한다고 보기 어렵게 되었다. 이후 미래주의의 역사는 그룹의 역사라기보다는 개별적인 예술가들의 역사이며, 그룹은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주된 추진력을 상실했다.

미래주의는 이탈리아의 문화현상으로 기존의 확립된 체제에 대한 공격과 이탈리아를 유럽 문화 발전의 주류 속으로 되돌려놓으려는 독창적인 개혁안을 추구했다. 미래주의는 야수주의, 입체주의와 같은 다른 혁신적인 운동과 어느 정도 공통점을 지니고 있지만, 민족주의에 기반을 두고 시작되었다는 점에서 그것들과 달랐다. 또한 미래주의는 전적으로 미술과 관련된 것이 아니며, 진정한 미학적 운동이 아니라는 점에서도 차이가 있다. 미래주의는 처음에는 문학개혁운동으로 시작되었지만 빠른 속도로 확장되어 회화, 조각, 건축, 연극, 음악, 영화와 같은 다른 예술 분야까지 수용하기에 이르렀다. 미래주의가 호전적인 민족주의 및 과도한 주장에도 불구하고 20세기 유럽 미술에서 중요한 진보적인 운동의 하나로 평가되는 이유는 수준 높은 회화작품이 제작되었고 미래주의가 다른 예술 분야의 운동에 영향을 끼쳤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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