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디 아트


사람의 몸을 재료로 이용하는 바디 아트Body art는 때때로 다른 사람의 신체를 이용하기도 하지만 대개는 자신의 신체를 사용한다. 처음 몇몇 작품의 경우 이벤트나 퍼포먼스에 가까웠고 1950년대 말부터 여러 해프닝 속에 바디 아트의 일종이랄 수 있는 것들이 현저하게 나타나기 시작했다. 1960년대 후반 바디 아트는 독립적인 예술의 한 형태로 부상하게 되었는데 이는 개념 미술에 대한 반작용으로 생긴 것이다. 그러나 바디 아트는 표현주의나 사실주의 노선을 취하지는 않았다. 바디 아트 작품은 예술가의 감정이나 개인적인 삶 속에서 일어난 사건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며 후기 회화적 추상이나 미니멀 아트만큼 비개성적이다. 윌러비 샤프가 말한 대로 바디 아트는 대체로 신체에 관한 진술이다. “그것은 자전적인 예술이라기보다 신체의 사용과 관련된 예술이다.”
바디 아트의 선구자는 이브 클랭이다. 클랭Yves Klein(1928~62)은 니스 태생으로 재즈 암악가이기도 했으며 1952~53년에 일본에 거주하면서 유도에서 유단자로 검은 띠를 땄고 유럽 챔피언으로 유도에 관한 지침서도 썼다. 1950년대 후반 클랭은 그 자신이 ‘클랭의 국제적인 푸른색(IKB)’이라고 부른 독특한 푸른색을 사용하여 모노크롬 회화, 조각된 형상, 캔버스 위의 스폰지 부조를 제작한 ‘푸른색 시기’를 맞이했다. 그는 화염방사기를 사용하여 <불 그림>을 제작했고, 인체의 흔적을 남기는 <인체 측정> 등 여러 가지 비정통적인 방법으로 작품을 제작하기도 했다. 1960년 처음으로 <인체 측정>을 일반인에게 공개했는데, <단음 교향곡>이 연주되는 가운데 몸에 푸른색 물감을 칠한 여성들이 바닥 위에 놓인 캔버스 위에서 서로를 끌고 다녔다. 에드워드 루시-스미스는 그의 저서 <1945년 이후의 미술 운동>(1969)에서 클랭의 작품이 지닌 성격을 요약했다. “유럽의 네오-다다이스트 중 가장 중요한 인물은 이브 클랭임이 틀림없다. 클랭이 무엇을 만들었는가 하는 것보다는 무엇을 했는가, 즉 그의 행위의 상징적 가치 때문에 중요한 의미를 갖는 예술가 중 하나이다. 그는 예술가는 단 하나의 진정하고 완전한 창조를 이루어내는 존재라고 생각하는 최근의 경향을 보여주는 예술가이다.”
바디 아트 작품은 개인적으로 만들어져 사진이나 영화를 통해 전달되기도 한다. 작품 제작 과정은 일반에게 공개되기도 하며, 길버트와 조지처럼 사전에 안무를 하기도 하고, 즉흥적으로 행해지기도 한다. 대체로 관람자의 참여는 배제되었다. 길버트Gilbert Proesch(1943~)는 이탈리아 태생이고 조지George Passmore(1942~)는 영국 태생이다. 1967년 런던의 세인트 마틴 미술학교에서 공부하는 동안에 만났다. 1968년부터 함께 살면서 자칭 ‘살아 있는 조각’으로서 공동작업을 했다. “살아 있는 조각이 된다는 것은 우리 생활의 활력의 근원이며, 우리의 운명이고, 우리의 로맨스이며, 우리의 불행이고, 우리의 빛이자 삶이다.” 길버트와 조지는 초기에는 퍼포먼스 예술가로 주목을 끌었는데, 이 시기의 가장 유명한 작품으로 <아치 아래서>(1969)가 있다. 이 작품에서 두 사람은 특유의 말쑥한 정장을 하고 얼굴과 손을 금색으로 칠한 채 동일한 제목의 1930년대 뮤직홀 음악에 맞추어 기계적으로 무언극을 공연했다. 그들은 1977년 ‘살아 있는 조각 퍼포먼스’를 그만두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삶 자체를 미술작품으로 여기면서 여전히 스스로를 살아 있는 조각으로 생각하고 있다. 1970년대 초반부터는 주로 사진으로 작업했다. 그것은 주로 흑백과 강렬한 빨강색의 사진을 장식적으로 배열한 거대한 구성작품으로 종종 폭력적이고 동성애적인 내용과 배설물을 의미하는 제목으로 붙이고 있다.
펑크 아트 시기를 거친 후 개념 미술, 특히 바디 아트를 주창한 브루스 나우먼Bruce Nauman(1941~)은 1965년 캘리포니아 대학 대학원 재학중에 자신의 첫 번째 바디 아트 작품을 시도했는데 미용체조와 유사한 퍼포먼스였다. 1971년 헤이워드 화랑에서 열린 ‘11인의 로스앤젤레스 예술가’ 전시회 카탈로그에 모리스 터치먼과 제인 리빙스턴은 나우먼에 관해 적었다. “나우먼의 작품에서 거의 일관되어 있는 사실은 자신의 신체를 묘사하거나 그와 관련된 것을 다루는 점이다. 혹은 관람자가 자신의 신체를 대면하거나 사용하는 상황을 ‘미적’ 행위로 만드는 것이다.” 1968년에 제작한 <얼굴 찌푸리기>라는 일련의 홀로그램에서 나우먼은 양손으로 얼굴을 최대한 잡아당겨 표정을 왜곡했다. 또 그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분수가 된 예술가의 초상>(1967)에서는 입에서 물을 뿜어내는 자신의 모습을 사진에 담았다.
베리 레바는 캘리포니아 주 샌디에이고의 러호이아 뮤지엄에서 열린 ‘투사: 반물질주의’ 전시회에서 뮤지엄의 한쪽으로 전속력으로 달려가는 작품을 시도했다. 존 밴 손은 이 개념을 더욱 발전시켜 뉴욕 모마 정원에서 행한 퍼포먼스 <돌파>에서 특별히 새워놓은 나무칸막이를 뚫고 달렸다. 테리 폭스, 데니스 오펜하임, 댄 그레이엄, 리처드 롱 등은 미리 세운 계획에 따라 걸어간 뒤 그 발자국을 사진으로 남기거나 석고상으로 떴다.
몇몇 바디 아트 예술가들은 신체의 평범한 기능을 찍은 사진이나 영화를 작품으로 제시했다. 브루스 멕레인은 이 분야의 전문가로 그의 <미소>(1969)는 예술가가 미소 짓는 과정을 찍은 3장의 사진을 수직으로 배열한 것이다. 가장 다재다능한 바디 아트 예술가로 꼽히는 비토 아콘치는 매우 격한 바디 아트 작품을 발표하곤 했는데, <들이마시기>(1969)는 숨을 크게 들이마신 뒤 버틸 수 있을 때까지 오랫동안 숨을 참는 것이었다.
신체를 학대하는 예술가들도 종종 있었다. 파리에서 지나 팡은 면도날로 자신의 신체를 베었으며 <식사>(1971)에서는 저민 고기 1근을 먹은 뒤 토했다. 윌리엄 웨그먼은 <11개의 이쑤시개 표정>(1970)에서 11개의 이쑤시개를 자신의 잇몸에 꽂고 있는 모습을 사진에 담았다. 레리 스미스는 자신의 팔에 6인치 길이의 상처를 내 <선 Line>이란 제목으로 소개했다. 아콘치는 <문지르기>에서 레스토랑에 앉아 한 시간 동안 자신의 오른손을 왼손으로 계속 문질러 피부가 까지는 과정을 5분마다 사진에 담았다. 또 <손과 입>에서는 구역질이 날 때까지 자신의 손을 목구멍 속으로 밀어넣었다. 오펜하임은 자신의 몸을 롱아일랜드 해변가의 햇빛에 노출시켜 햇볕에 그을리기 전과 후의 모습을 컬러사진에 담았다. 일부 예술가들은 손발이 불구가 되거나 팔 다리가 절단될 때까지 자해행위를 벌이기도 했다. 이런 작품들이 지닌 철학은 분명하지 않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