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비니 여인들의 중재

 

(교수신문에 기고한 글)


플루타르크는 고대 로마에서 일어난 사비니 여인들에 관한 역사적 사건을 전래했다. 이 사건은 회화의 주제로는 드물게 나타났는데 니콜라 푸생(1593/4~1665), 자크-루이 다비드(1748~1825), 파블로 피카소(1881~1973) 세 사람이 각자의 독특한 양식으로 묘사했다. 고대의 사건을 모티프로 한 데서 세 사람은 고전을 규범으로 삼는 고전주의라는 이념으로 한데 묶을 수 있다. 푸생과 피카소는 로마인이 사비니 여인들을 약탈하는 장면을 묘사한 데 비해 다비드는 약탈이 발생한 지 3년 후 여인들을 구출하기 위한 사비니 부족의 반격을 묘사했다. 푸생과 피카소가 약탈의 비극적 장면을 모티프로 삼은 데 반해 다비드는 여인들이 전쟁이 일어나지 않도록 두 부족 사이에 중재의 역할을 하는 장면을 묘사했는데 다분히 의도적이었다. 그의 의도는 당시 프랑스의 혁명적 상황에서의 좌파와 우파의 첨예한 대립을 염두에 두고 자신의 평화의 제스처를 작품을 통해 간접적으로 나타내려고 한 것이다. 그러므로 푸생과 피카소의 작품은 순수 고전주의에 속하는 데 반해 다비드의 작품에는 고전주의 양식은 취했으나 정치에 이용하려는 불순한 동기가 내재해 있다.  


프랑스 고전주의 회화의 창시자인 푸생은 당시 유행하던 매너리즘 양식을 취했지만, 고대 로마의 조각상, 부조 등 고전적 작품에 관심이 많았고 1624년부터 로마에서 본격적으로 고대 로마의 조각을 연구한 뒤 매너리즘 양식에서 벗어나 고전적인 양식을 추구하게 되었으며 표현을 절제하게 되었다. 이후 10년 동안 독자적인 창조성으로 평가받게 된 양식을 진전시키면서 종교적 주제에서 벗어나 고대의 신화적 세계를 목가적, 시적인 분위기로 묘사했다. 이때 그린 것이 <사비니 여인들의 약탈>(푸생 84)이다. 그는 인물의 몸짓, 자세, 얼굴 표정 등을 통해 감정을 표현하는 데 열중했고, 회화에서의 문학적, 심리적 묘사에 신중을 기했다. 이런 감정 표현은 나중에 미술아카데미의 교칙으로 명문화되기에 이른다. 17세기 후반 푸생의 이름은 색채의 중요성을 주장한 루벤스에 대해서, 회화에서 소묘의 우월성을 믿었던 푸생주의자들을 지지하기 위해 아카데미에서 거론되었다. 처음에는 루벤스파가 우세했지만, 푸생은 19세기 초까지 고전적 정신을 가진 예술가들에게 끊임없는 영감의 원천이 되었다. 존 러스킨이 푸생을 가리켜서 감수성이 결여되었으며 지적으로 부패한 “진실에서 벗어난 화가”라고 비난했지만, 세잔을 비롯한 근대 프랑스 예술가들은 푸생이 창시한 고전주의 전통으로부터 영향을 받았다.  


다비드가 1799년 <사비니 여인들의 중재>를 그릴 때 그는 프랑스 최고의 화가로 인정받고 있었다. 1790년 9월에 쟈코뱅 당원이 된 이래 다비드는 정치에 깊이 관여하여 루이 16세의 처형에 찬동하고 로베스피에르를 존경하며 추종했다. 1793년 9월 17일부터 이듬해 7월 28일까지 10개월 이상 지속된 ‘공포정치’의 시기에 3, 4만 명이 목숨을 잃었는데, 공화당 내 우파와 좌파의 충돌로 로베스피에르와 그의 추종자들도 실각과 더불어 단두대에서 처형되었다. 다비드는 로베스피에르와 가까운 사이였기 때문에 테르미도르 9일, 즉 7월 27일의 반동으로 처형의 위기에 처했다. 하지만 운이 좋게도 로베스피에르가 체포되던 날 그는 국민공회 전당대회에 출석하지 않았다. 그날 병중이었다고 변명했지만 매우 건강한 상태였다. 그는 비겁하게도 로베스피에르의 강렬한 개성과 혁명적 열정에 자신이 속았던 것이라고 변명한 후 처형을 면하고 약 5개월 동안 투옥되었다. 자유로운 몸이 된 다비드는 평화를 위한 제스처로 <사비니 여인들의 중재>를 그렸다.  


플루타르크가 전한 이야기는 이렇다. 고대 로마에 남자의 인구는 많지만 여자의 수가 부족하자 이런 불균형을 해결하여 인구를 증가시키기 위해 로물루스는 이웃나라 부족들을 페스티발에 초대한 후 자신의 신호를 따라 젊은이들이 결혼하지 않은 여인들을 유괴하고 약탈하게 했다. 다비드가 묘사한 장면은 여인들이 강탈되어간 지 3년 후, 사비니 남자들이 타티우스의 주도 하에 반격에 나서 대치하는 순간이다.(다비드 163/134) 당시에는 두 리더가 결투를 벌이는 것이 전투의 관례였으므로 화면 중앙에 로물루스와 타티우스가 대결을 벌이고 있다. 헤르실리아가 오른쪽의 남편 로물루스와 왼쪽의 아버지 타티우스 사이에 뛰어들어 아버지에게 전쟁을 중단할 것을 간청한다.  


헤르실리아는 사비니인으로 로마의 로물루스와 결혼하여 두 아이를 낳았다. 이제는 로마인도 되고 사비니인도 되는 여인들은 적으로 맞서 싸우는 아버지, 오빠, 남편의 이름을 부르며 전투를 중단하라고 호소한다. 헤르실리아는 자신의 오른쪽에 있는 아버지 타티우스에게 말한다.  


“아버님이 부모에게 데려다 주기 위해 구해낼 딸들이 더이상 없으며 아버님이 벌을 가해야 할 강탈자 역시 없습니다. … 아버님은 이제 남편에게서 아내를, 아이들에게서 어미를 갈라놓고 있는 것입니다.”  


이 말을 들은 로물루스는 타티우스에게 덤벼들려다 창을 뒤로 제끼며 물러났고 타티우스 또한 방패를 위로 올리고 칼을 아래로 내리며 머뭇거린다. 뒤에 군인들은 자신들의 헬멧을 벗어 위로 던졌는데 평화를 원하는 제스처이다. 로마인과 사비니인들은 서로 껴안고 그 후 한 민족이 되었다.  


다비드는 <사비니 여인들의 중재>를 고대 그리스 미술을 닮게 하려고 했다. 로물루스와 타티우스의 몸을 매끈하게 묘사했는데 그리스 조각을 보고 그렇게 한 것이다. 그는 의도적으로 드라마의 한 장면처럼 그리려고 했다. 배경에 타르펠리 바위를 그려넣었는데 로마의 캐피톨린 언덕(옛 로마의 일곱 언덕 중 하나) 남서쪽에 있는 바위와 닮았다. 역사적 사건이 발발할 때 이 언덕은 사비니에 속했다. 사비니가 이 언덕을 차지할 수 있었던 것은 한 로마 여인의 어리석은 반역 때문이었는데, 캐피톨의 사령관 딸 타르페이아가 사비니인이 차는 금팔찌를 자기에게 주면 성채에 들어갈 수 있도록 해주겠다고 제안해서 그녀의 반역으로 사비니인이 성채를 점령할 수 있었다. 사비니인은 성채에 들어서자마자 그녀를 죽였다. 바위는 반역을 상징해 그녀의 이름을 따 부르게 되었고 훗날 살인자와 배신자들을 바위 위에서 아래로 던져 죽이는 처형지로 사용되었다. 다비드는 사비니 여인들의 중재를 반역자 여인을 상징하는 바위를 배경으로 비교가 되게 구성했다.  


그림에 등장하는 전사들은 다비드의 제자와 친구들이고 중앙의 검은 머리를 하고 젖가슴을 드러낸 채 무릎을 꿇고 아이들을 보호하는 사비니 여인의 모델은 다비드의 아이들을 돌보던 아델레이다. 그녀는 그림에 모델로 참여한 것을 자랑스럽게 여겨 사람들이 자신을 알아보도록 그림에서의 헤어스타일을 하고 다녔다고 한다.  


다비드는 로마의 주제를 그리스 양식으로 표현했는데 로마 미술보다는 그리스 미술이 도덕적으로 그리고 미학적으로 우월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림에서 전사들이 누드로 묘사된 것에 대해 많은 사람이 의아해 했다. 로물루스와 타티우스의 완전한 도덕성을 나타내기 위해 육체적으로 온전한 누드로 상징한 것이라고 했는데 많은 사람이 그의 설명을 납득하지 못했다. 실제에 있어 누드로 전투를 벌이는 일이란 없었기 때문에 도덕적·미학적 설명이 납득되지 않았던 것이다.  


미적으로 새로운 것을 추구하기 위해 이 그림을 그린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이 작품은 그에게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지금까지 그린 것들과는 달리 그는 여인을 중앙에 구성하면서 남자들을 누드로 에로틱하게 묘사했다. 그는 영웅적 누드로 고대의 신·영웅·보편적 남성을 나타내려고 했다.  


또한 영국 판화에서 아이디어를 얻기도 했는데 존 플랙스맨이 『일이아드』에서 모티프를 얻어 그린 <파트로클로스의 죽음을 위한 전투>(다비드 168)와 <아레스를 향해 창을 던지는 디오메데스>, 그리고 제임스 길레이의 <죄, 죽음과 마귀>(다비드 169)를 참조했다. 왕립미술아카데미에서 윌리엄 블레이크를 만나 평생 우정을 나눈 존 플랙스맨은 영국 조각가, 제도가, 디자이너로 신고전주의 운동의 중요한 인물이고, 제임스 길레이는 당대 영국의 가장 유명한 캐리커처였다.  


다비드는 <사비니 여인들의 중재>를 주문을 받아 그린 것이 아니었으므로 작품을 통해 이익을 창출하기 위해 루브르에 위치한 과거 건축아카데미로 사용된 강당을 빌려 전시한 후 입장료를 받았다. 파리에서는 돈을 받고 작품을 관람하게 한 적이 없었고 아카데미가 그런 행위를 금해온 터라서 이는 새로운 사건이 되었다. 따라서 입장료를 받는 전시에 대해 비난이 거세었다. 입장료 1프랑 80센팀은 적은 돈이 아니었으므로 전시회는 결국 상류층 인사와 외국 방문객들을 위한 것이 되었다. 당시 숙련공 일당이 1프랑 미만이었으므로 입장료는 적은 돈이 아니었다. <사비니 여인들의 중재>를 보기 위한 입장료는 당시 고급 음식물인 버터 450g의 값이었고, 아스파라거스 한 다발 혹은 햄을 700g 살 수 있는 돈이었다.  


이 작품은 1799년 12월 21일부터 5년 동안 전시되었고 약 5만 명이 입장료를 내고 관람했다. 다비드는 제자들에게 입장료가 2만 4천 프랑에 이를 때마다 그들에게 저녁식사를 제공하겠다고 했으며 모두 세 차례에 걸쳐 식사를 제공했다. 다비드는 입장료가 자신이 원하는 작품값에 이르게 되면 작품을 정부에 기증하겠다고 제의했지만 막상 입장료가 원하는 액수에 이르렀을 때는 악속을 지키지 않았다. 전시회가 계속되던 1801년 10월 그는 파리로부터 남동쪽으로 48km 떨어진 퐁텐블로 근처 오조우에 르 불지에 별장을 구입했다. 이 전시회는 개인전의 효시가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피카소는 여전히 활기차고 다채로운 그림을 그리면서 새로운 문제에 부딪힐 때마다 끊임없이 새로운 해법을 찾았다. 1950년대 중반부터 그는 대가들의 작품을 변형하는 작품을 연작으로 제작하기 시작했다. 그는 들라크루아와 벨라스케스의 걸작을 변형시켜 무려 58점을 제작했다. 이런 경향은 1960년대에도 계속되어 마네의 <풀밭 위의 점심식사>를 변형시켜 <식사> 연작을 제작했고, 들라크루아를 연상시키는 <약탈> 연작, 푸생의 <유아 대학살>과 다비드의 <사비니 여인들의 중재>를 모델로 한 연작을 제작했다.(다비드 167/202) 뛰어난 기초 소묘능력, 시각적 독창성, 그리고 구상능력에서 인정받은 피카소는 고전적 주제도 새로운 양식으로 소화해냈다. 그가 20세기 회화에 끼친 영향은 감정을 전달하는 매체로서의 미술의 개념을 강화한 것이며 형식적, 추상적 완성도보다는 역동적인 힘과 활기를 강조한 것이다.


푸생 85 <사비니 여인들의 약탈 The Rape of the Sabine Women>
푸생 63 <사비니 여인들의 중재 The Intervention of the Sabine Women>
푸생 84 <사비니 여인들의 약탈 The Rape of the Sabine Women>, 캔버스에 유채, 154-206cm. Metropolitan Museum of Art, New Yo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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잭슨 폴록, 사랑의 불장난



순서대로 루스는 잭슨 폴록의 집으로 이사했다.
그녀는 핑크 드레스를 가방에서 꺼내어 정돈했다.
그녀는 부엌에 가서 구리로 된 집기들이 있는 것을 보았고, 많은 화초들을 보았으며, 벽에는 폴록의 대단한 그림들이 여기저기에 걸려 있는 것을 보았다.
“이십일 년 동안 중산층 가정에서 살면서 구질구질한 아파트를 자매와 함께 썼는데 이제 새 환경은 새롭기만 했다”고 그녀는 적었다.
그녀는 폴록이 유명한 화가들인 뉴먼과 로드코에게 전화를 걸고 또 그들이 그에게 전화를 거는 것에 흥분할 정도로 만족했다.

폴록은 루스에게 친구들을 소개했고, 그녀는 저녁을 지었으며, 두 사람은 극장에 갔고 술을 마셨다.
두 사람이 침실로 갈 때면 폴록은 만취해 인사불성이 되었거나 엉엉 울고 있었다.
폴록은 그녀에게 자신을 알아보는 사람들이 없는 먼 곳으로 가자고 말하기도 했다.
“잭슨이 울면서 감성을 모두 드러낼 때면 그가 아름답게 보였어요”라고 그녀가 회상했다.

그러나 신혼은 짧고 여자는 예외없이 달콤한 신혼생활 끝에 매력을 상실하고는 왈가닥이 되는 게 보통이다.
그녀는 리가 되어버렸다.
파티에 가려고 그녀는 몇 시간 동안 준비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폴록으로부터 안 가겠다는 말을 들었으며, 폴록을 나무라며 파티에 가도록 강요하자 파티 도중에 폴록이 그녀를 끌어냈다.
폴록은 리를 대하듯이 그녀를 대했으며, 그녀를 ‘하얀 고양이 새끼’라고 불렀다.

폴록은 그녀가 너무 화려한 의상을 걸친다고 투덜거렸고, 화장이 진하다고 소리를 질렀으며, 그녀가 재즈를 듣고 있으면 “난 그런 음악이 싫다!”고 소리를 쳤다.
두 사람이 바닷가에 가게 되면 폴록은 사람들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자고 말했고, 그녀는 반항했으며, 폴록은 그녀를 밀기도 했다.
두 사람은 친구들이 있는 데서도 잘 다투었다.
루스가 리의 화실로 가서 그림을 그리고 있을 때면 폴록은 “웬 빌어먹을 화가가 되려고 하느냐?”고 소리를 질렀다.
그는 술을 자주 마시면서 일찌감치 잠에 떨어지기도 했다.
아무래도 두 사람의 관계가 순풍을 타기는 그른 것 같았다.
폴록은 모든 여자들에게 리를 대하듯 해야 직성이 풀리는데, 리는 한 사람뿐 모든 여자가 다 폴록의 투정을 받아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폴록을 다루는 데는 폴록에게 어울리는 방법이 따로 있었는데 리만이 그것을 알고 있었다.

루스가 스프링스로 이사온 지 일 주일 후 폴록은 리가 머물고 있는 호텔로 장미 한 다발을 보냈다.
리는 세느 강과 루브르 박물관이 내려다보이는 호텔에 홀로 있는 것이 싫어서 자주 외출했다.
그녀는 박물관과 레프트 뱅크 화랑에 가서는 그곳에 있는 그림들이 놀라울 정도로 형편없었다고 나중에 소감을 말하기도 했다.
리는 공원과 정원들을 산책했고, 싸구려 상점을 둘러보았으며, 밤에는 나이트클럽을 전전하면서 미친 사람처럼 춤을 추었다.

리는 파리에서 베티 파슨즈와 벤 헬러를 만났는데 헬러는 근래에 그가 구입한 그림 <울림 Echo>의 금액을 그때 리에게 지불했다.
리는 또 헬렌 프랭큰텔러, 미셸 타피에, 김펠 부부, 존 그래엄 등을 만났다.
리는 그들에게 폴록에 관한 말을 별로 하지 않았으나 그들을 만나자 폴록이 더욱 생각났다.

7월 22일 리는 폴록에게 엽서를 보내면서 김펠이 자신을 초대한 것과 페기를 만나러 갈 것임을 적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리가 알리고 싶었던 것은 장미꽃을 잘 받았다는 것과 그녀가 폴록을 보고 싶어 한다는 것, 또 폴록도 자신이 보고 싶은가를 묻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리는 엽서에서 “장미는 짙은 붉은색인데 … 당신이 글을 써서 보냈더라면 더 좋았을 텐데”라고 하면서 엽서 끝에 “사랑하는 리로부터”라고 적고 마지막으로 엽서 아래에 “어떻게 지내세요?”하고 물었다.

그 엽서를 읽고 루스는 당연히 무엇인가가 잘못되어가고 있다고 판단했다.
나중에 그녀는 “처음부터 악마 같은 게임이었다”고 기술했다.
그녀는 폴록의 곁에 붙어 있는 것은 자신이지만 리의 귀신이 아직도 이 집에 남아 있으며 그 귀신이 여전히 폴록을 쥐고 있음을 알고서 어떤 날은 우울했고 어떤 날은 두렵기조차 했다.
그녀는 사람들이 있을 때 폴록이 자신을 대하는 태도와 때로는 자신을 부재하듯 취급하는 것에 반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니콜라스 카론의 집에 초대받아 갔을 때에 그가 자신을 그냥 차에 남겨두었다면서 “왜 나를 적대시하는 것이냐?”고 따졌더니 폴록은 그녀에게 “넌 정신병자냐?”고 되물었다고 한다.

무엇보다도 그녀를 괴롭힌 것은 폴록의 친구들이 그녀를 대하는 태도였는데, 대부분의 친구들이 그녀를 아예 보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들은 모두 리의 편에 섰다. 폴 브라크는 그 점에 대해 “리에 대한 아내들의 단결”이라고 말하면서 그들은 폴록이 그녀를 데리고 다니는 것을 꼴불견으로 생각했다고 말했다.
“잭슨의 친구들은 분명히 나를 아무 것도 아닌 듯이 취급했다”고 그녀는 투덜거렸다.

스프링스에 집을 세 얻어 여름을 지내고 있던 그린버그와 그의 새 아내 제니가 폴록과 루스를 초대했다.
제니도 재혼한 처지이지만 그녀는 그린버그의 친구들에게 전폭적인 지원을 받고 재혼했으므로 루스와는 달랐다.
제니는 노골적으로 루스를 냉대했으며 폴록도 그녀를 마치 가구처럼 취급했다.

그녀를 더욱 괴롭힌 것은 그린버그의 태도였다.
그린버그는 폴록에게 그녀에 관한 계획을 물었는데 루스는 “그린버그는 우리를 죄인처럼 다루었다”고 투덜거렸다.
나중에 그녀가 화가 나서 폴록에게 왜 그린버그와 대화할 때에 리를 변호했느냐고 따지자 폴록은 “그것은 아주 미묘하다”고 적당히 얼버무렸다.
이쯤 되면 감각이 예민한 여러분은 벌써 두 사람이 곧 헤어지겠구나 하고 판단할 것이다.

루스는 그외에도 폴록의 예고할 수 없는 괴팍한 언행에 불안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 그가 사소한 일에도 흥분해서 화를 낼 때에는 더욱 그러했다.
폴록은 그녀가 하는 모든 것들에 화가 나는지 그녀가 커다란 로스트 구이를 식탁에 차려놓으면 안 먹겠다고 투정을 부렸다.
폴록의 그러한 투정은 리에게도 마찬가지였지만 루스는 자존심을 몹시 상했다.
그녀는 리가 유럽에서 돌아오는 날 이 집을 집주인에게 내주어야 한다는 생각까지도 하게 되었다.

그녀는 폴록이 자신과 함께 있을 때 지루해 하는 것을 알 수 있었으며, 그가 하루에 맥주를 한 상자나 마시는 것도 참기가 어려웠다.
파티에서 폴록이 루스에게 “시팔년!”이라고 말하자 파티의 분위기가 한동안 어색해졌는데 그녀가 “허풍떨지 마라!”고 대꾸하자 분위기는 더욱 살벌해지고 말았다.
그린버그는 그녀가 근래에 그린 그림들을 보고 “매우 형편없다”고 말했다.

어느 날은 그녀가 폴록에게 복수하는 방법으로 폴록보다 더욱 술을 마셨는데, 그가 그녀를 함부로 대하자 루스는 찬장에 있는 컵들을 벽에 던지기 시작했다.
찬장에는 컵이 남아 있지 않았다. 폴록이 그녀의 뺨을 한 대 갈기자 그녀는 폴록의 발아래 미끄러졌는데 “그 모습은 부서진 인형 같았다”고 그곳에 있었던 사람이 말했다.
폴록이 그녀를 때린 것은 이때가 처음이 아니었다.
루스는 술집에서 테리 리스에게 폴록이 자신을 아주 과격하게 때렸다고 털어놓았다.
리스는 그녀의 말을 듣고 “내 집에 방이 하나 있으니 내게 와서 지내도록 해라. 바보처럼 네가 그렇게 당할 필요가 뭐 있냐?”고 충고했다.
그녀는 곰곰이 생각하다가 정신과 의사를 만나야 한다고 거짓말하고 아예 스프링스를 떠났다.
그때가 8월 2일이었는데 그녀가 폴록과 함께 지낸 기간은 겨우 삼 주일에 불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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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디오 아트




비디오와 TV 장비 그리고 기술을 사용해 다양한 방식으로 제작하는 비디오 아트를 프랭크 포퍼는 여섯 가지 유형으로 분류했다. 첫째, 새로운 시각적 이미지의 창출을 위해 기술적 수단을 사용하는 것, 둘째, 퍼포먼스를 영구적인 형태로 만들기 위해 비디오를 사용하는 것, 셋째, 비디오를 사용해 지배체제에 의해 억압받기 쉬운 이미지와 정보들을 배포하는 것으로 이를 포퍼는 ‘게릴라 비디오’라 칭했다. 넷째, 비디오 카메라와 모니터를 조각적인 설치작업에 이용하는 것, 다섯째, 비디오를 현장 퍼포먼스에 즉흥적으로 사용하는 것, 마지막으로 비디오를 주로 컴퓨터와 함께 사용하는 것과 관련하여 진보적인 기술적 선언을 하는 것이다.
1959년 볼프 포스텔이 작동 중인 TV 수상기로 아상블라주 작업을 한 바 있으나 하나의 장르로서 비디오 아트를 탄생시킨 사람은 한국의 음악가이자 행위예술가 그리고 조각가인 백남준이다. 1950~53년 쾰른에서 사진 석판을 비롯한 판화 기법을 배운 후 1954~55년에 부퍼탈에서 회화와 실험적인 타이포그래피를 공부한 독일 예술가 볼프 포스텔Wolf Vostell(1932~98)은 1955~56년 파리의 에콜 데 보자르, 1956~57년 뒤셀도르프 아카데미에서 공부했다. 포스텔은 찢긴 포스터 조각으로 콜라주를 구성하고 이를 콜라주의 반대어 데콜라주라고 칭했는데, 이들 작품이 이미 붙여진 포스터와 인쇄물을 찢어내어 구성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종종 밑에 있는 재료들을 식별할 수 없도록 표면에 채색하고 선으로 낙서하기도 했다. 1958년부터 울름, 부퍼탈, 베를린, 뉴욕에서 해프닝을 기획하여 유명해졌으며, 일상생활로부터 가져온 임의적이거나 파괴적인 파편들이 모여 하나의 전체적인 작품을 구성한다는 의미로 포스텔은 이를 ‘데콜라주-해프닝’이라고 불렀다.
백남준(1932~)은 1964년에 뉴욕에 정착했고, 이듬해 소니사의 휴대용 비디오 녹화기가 뉴욕에서 판매되자마자 이를 구입했다. 이 새로운 장치인 녹화기를 구입한 바로 그 날 첫 녹화작업을 하여 그 날 저녁 녹화한 비디오 테이프를 카페 고고Cafe-a-Go-Go라는 예술가 클럽에서 선보였다. 백남준은 존 케이지의 <조합 피아노>에서 영감을 받아 TV 스크린 위에 자석을 놓아서 방송되는 이미지를 일그러뜨리는 실험을 했다. 엔지니어이자 발명가의 아들 존 케이지John Cage(1912~92)는 1935~37년 아르놀트 쇤베르크로부터 음악 교육을 받았고, 주로 작곡가로 유명해졌는데, <뉴 그로브 음악 음악가 사전>(1980)에는 그를 가리켜 “20세기의 다른 어떤 미국 작곡가보다도 세계 음악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는” 역할을 했다고 적고 있다. 그러나 케이지는 시각예술에 관심이 많았으며, 많은 친구들과 공동작업을 하고 그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으며, 말년에는 판화 제작자로서 명성을 얻었다. 케이지는 1943년 뉴욕의 모마에서 자신의 작품 3곡을 포함한 연주회를 지휘했고, 이로써 더욱 확고한 명성을 쌓았다. 임의성과 우연의 효과를 탐닉하고, 피아노 줄 사이에 여러 가지 물체를 삽입하여 타악기고 변형시킨 발명품인 <조합 피아노>와 전자장치의 기이한 소리로 실험하면서 극히 비정통적인 작품을 만들었다.
백남준은 비디오 작업으로 전환한 후 종종 첼리스트 샬럿 무어먼Charlotte Moorman(1940~94)과 공동으로 작업했으며, 특히 무어먼은 두 개의 축소된 TV 스크린으로 된 브라를 착용하고 첼로를 연주하는 <살아 있는 조각을 위한 브라>(1969)로 유명하다. 무어먼은 백남준의 다른 퍼포먼스 작업에서 우발적인 노출이 문제가 되어 체포된 적도 있다. 백남준은 1972년에 말했다. “1950년대의 자유주의자들과 1960년대의 극단주의자들의 차이는 전자가 심각하고 염세주의적인 데 비해 후자는 낙관적이며 재미를 추구한다는 점이다. 누가 사회변혁에 더 기여했는가? 극단주의자들이다. 심각한 대륙 미학을 거부하는 존 케이지와 해프닝, 팝아트, 플럭서스 운동의 출현은 1960년대를 예견했다. 1970년대를 무엇이 예견할 것인가? 말할 것도 없이 비디오이다.”
백남준은 1956년 동경 대학을 마치고 독일에 도착하여 1958년 다름슈타트의 하기강좌에서 강의를 맡고 있던 케이지를 만났다. 케이지와의 만남은 전통 음악에 회의를 갖고 있던 백남준에게 새로운 돌팔구를 마련하는 계기가 되었다. 백남준은 기상천외한 해프닝을 행위 했는데 케이지의 새로운 음악과 선불교 사상에 영향을 받은 다다적 돌출행동이었다. 백남준은 말했다. “나는 존재하지 않는 소리를 찾고 있다. 나의 스승은 내가 원하는 음이 음표들 사이에 있다고 말해주었다. 그래서 나는 피아노 두 대를 사서 음이 서로 어긋나게 조율했다.” 실험음악을 추구한 그에게 우연, 침묵, 비경정성 등의 새로운 음악 이론과 연극적 음악 혹은 음악적 연극이라는 새로운 복합매체 공연을 제시한 케이지는 그의 운명을 바꾸어놓은 스승이었다. 백남준은 1959년 11월 장 피에르 빌헬름의 뒤셀도르프 22번가 화랑에서 <케이지에게 바침: 테이프 레코더와 피아노를 위한 음악>을 발표했다.
1963년 부퍼탈 파르나스 화랑에서 열린 ‘음악의 전시회 - 전자 텔레비전’ 전시회는 백남준의 첫 개인전이자 비디오 아트가 시작된 의미 있는 사건이었다. 그는 13대의 장치된 TV와 장치된 피아노를 선보였는데 이것들은 기존의 미학적 가치에 대한 반예술적 도전이면서 동시에 장치된 TV는 가해 대상인 TV가 지닌 다원성으로 인해 공격적 제스추어일 뿐 아니라 그 자체가 새로운 시각예술의 장르가 되는 미술사에 구두점을 찍는 전시회였다. 장치된 TV는 TV 내부 회로를 변경시켜 방송 이미지를 왜곡시키거나 브라운관을 조작하여 스크린에 추상적 선묘를 창출하는 기능을 지녔다. 백남준은 조작과정에서 예술적 의도나 기술을 배제하고 순전히 기계적 과정에만 의존하여 우연적이며 무작위적인 이미지를 얻어냈다. 무작위적으로 얻어진 이미지는 예측할 수 없는 시각적 비결정성과 다양성을 보여주었다. 13대의 TV 수상기들은 생방송 이미지를 왜곡시켜 일그러진 저명 인사의 얼굴을 만들거나 흑백 이미지의 명암을 도치시키거나 혹은 내부 회로를 변경시켜 화면에 추상적 주사선을 만들었다. 백남준은 ‘비디오 아트의 황제’라는 명예로운 칭호를 받았다.
또 한 명의 잘 알려진 비디오 아티스트는 미국의 빌 비올라Bill Viola(1951~)로서 현학적이라는 비난을 받기도 하지만 좀더 진지한 성격을 띤다. 비올라의 대표작은 <멈추지 않고 기도하기>(1992)이며, 이 작품에 대해 그는 설명했다. “현대의 성무일과서이며 영원의 날까지 밤을 세워 비는 이미지로 도시를 위해 그치지 않고 계속 기도하는 역할을 한다. 이미지들은 12시간을 주기로 거리에 면해 있는 창문에 설치된 스크린에 계속 상영된다. 이 이미지들은 하루 24시간, 주 7일 동안 계속해서 영사되며, 창문의 안쪽, 위, 아래에 설치된 스피커를 통해 윌트 휘트먼의 <나의 노래> 중에서 발췌한 글을 읽는 목소리가 유리창 밖과 안으로 조용히 들려 온다. 낮에는 햇빛 때문에 이미지들은 보이지 않고 목소리만 들린다. 비디오 재생기는 컴퓨터에 의해 하루의 시간과 일치되게 되어 있다. ... 작품을 구성하는 12개의 부분들, 즉 각 기도의 길이는 15분에서 2시간까지 다양하며 개인적이고 보편적인 삶의 주기를 묘사한다.”
비올라의 작품은 많은 평론가들의 찬사를 받았다. 1993년 런던의 왕립 아카데미에서 열린 ‘20세기의 미국 미술’ 전시회 도록에는 비올라를 ‘설치의 기술적인 거장’으로 지칭했다. 그러나 같은 해 브라이언 슈얼은 비올라의 작품을 “아마추어적이며 무능력한” 것으로 비하하면서 “예술가로서 그의 주장은 변명의 여지없이 현학적이며 그를 지지하는 이들의 변호는 너무나 어처구니 없다. 그의 불쾌한 비디오 작품은 화화나 조각의 기법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고 했다. 비디오를 순수하게 시각적 매체로 보느냐 그렇지 않느냐 하는 논란의 여지는 있지만 비올라는 백남준을 이어 차세대의 가장 유명한 비디오 아티스트로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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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크 루이 다비드와 브루투스


1774년 로마대상을 수상하고 로마로 유학 간 자크-루이 다비드는 그곳에서 고대 미술에 탐닉했고 스코틀랜드 출신 화가 개빈 해밀턴을 포함한 새로운 고전부흥의 선구자들과 교류했다. 다비드는 안톤 라파엘 멩스의 견해에 공감했는데, 멩스는 완벽한 미를 얻기 위해서는 그리스의 전통적인 구상 위에 라파엘로의 표현성과 코레조의 명암법에 의한 우아미 그리고 티치아노의 색채를 결합시켜야 한다는 절충주의를 주장했다.
멩스의 아버지 이스마엘 멩스(1764년에 사망)는 드레스덴 궁정화가였다. 아버지는 멩스를 훌륭한 화가로 만들기 위해 혹독한 훈련을 시켰으며 코레조와 라파엘로의 작품을 주로 모사하게 했다. 멩스의 기독교 이름은 대가 라파엘로의 것을 가져온 것이다. 멩스는 1741년 로마로 가서 수학한 후 1744년에 돌아와 이듬해 27살 때 드레스덴의 작센 궁전의 화가로 선발되었다. 그는 빙켈만의 친구이며 그로부터 이론적 영향을 많이 받아 작품에 적용했다. <페르세우스와 안드로메다>(다비드 65)는 코레지오, 라파엘로, 티치아노의 양식을 혼용한 절충주의 양식이며 그가 신고전주의의 선두자임을 확인시켜준다.
다비드는 1789년에 <브루투스 아들들의 시신을 운반하는 릭토르들>을 그렸는데 왕이 주문한 것이다. 다비드에 앞서 자크-앙트완 비포르와 개빈 해밀턴이 <브루투스의 맹세>를 그렸는데 신고전주의자들에게 유명한 고대의 사건은 선호하는 주제였다. 다비드와 교류한 해밀턴은 화가, 고고학자, 화상으로 1755년경 로마로 이주한 후 주로 이탈리아에서 활약했다. 멩스와 빙켈만을 중심으로 한 신고전주의 그룹의 주요 구성원이다. 그가 로마 주변에서 이룩한 고고학적 발굴은 당대의 여러 컬렉션이 중요한 유물을 소장할 수 있도록 했다. 또한 고대에 대한 그의 관심은 젊은 시절의 안토니오 카노바에게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1781년에 로마에 정착한 이탈리아의 조각가 카노바는 조각의 신고전주의 양식을 발전시켜, 18세기 말에서 19세기 초의 유럽 조각계에서 큰 비중을 차지했다.
해밀턴은 역사화를 그릴 때 대부분 호메로스에서 주제를 얻었으며 고대 미술뿐 아니라 푸생에게서도 영향을 받았다. 이런 작품은 복제 판화를 통해 널리 알려졌고, 동시대 화가들과 다비드를 포함한 젊은 세대에게 영향을 미쳐 신고전주의 양식이 발전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영국에서는 화가로서보다는 고전주의 조각을 영국의 컬렉터들에게 판매한 인물로 더 잘 알려졌다. 그러나 해밀턴은 제임스 배리, 영국계 미국인 벤저민 웨스트, 존 싱글턴 코플리 등과 함께 영국의 역사화 발전에 큰 공헌을 한 몇 안 되는 화가 중 한 사람이다.
브루투스는 그보다 500년 후 율리우스 시저를 살해한 마르쿠스 브루투스와는 다른 인물이다. 브루투스는 로마의 마지막 전제군주 타르퀴니우스에 맞서 로마를 구하는 데 공헌한 인물이다. 사건은 타르퀴니우스의 아들 섹스투스가 브루투스의 동료 콜라티누스의 정숙한 아내 루크레티아를 강간하는 데서 시작된다. 루크레티아가 남편과 브루투스가 보는 앞에서 자살하자 브루투스는 그녀의 그녀의 몸에 꽂힌 칼을 뽑아낸 후 그녀의 피에 대한 복수와 더불어서 부패한 독재자를 몰아내겠다고 맹세했다. 결국 타르퀴니우스는 추방되고 브루투스와 콜라티누스는 기원전 508년에 세워진 첫 로마공화국의 집정관으로 선출되었다. 그런데 브루투스의 두 아들 티투스와 티베리우스는 타르퀴니우스의 복귀에 가담했다가 아버지에 의해 사형에 처해졌다. 다비드는 브루투스가 비정한 아비로 아들의 처형에 참석한 모습을 드로잉하며 습작했다. 그러나 그는 공식석상에서의 브루투스의 모습보다는 자신의 가정에서의 아비의 모습을 그리기로 했다.
이 작품은 가족에 대한 사랑과 국가에 대한 의무 사이에서 국가를 선택하는 남자와 이에 처절하게 반응하는 여자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다비드는 브루투스가 관람자를 바라보도록 정면으로 구성함으로써 그가 과연 두 아들을 죽이면서까지 조국에 충성을 다 한 위대한 이물인지 아니면 가정을 파탄으로 몰고간 괴물과도 같은 존재인지를 관람자 스스로 판단하게 했다. 플루타르크는 브루투스의 행위가 가장 칭찬받을 만하거나 아니면 가장 비난받을 만하다면서 그는 신과 같은 존재인 동시에 야수와도 같은 존재라고 했다.
스케치에는 바느질 바구니가 없지만 완성작의 테이블 위에 바구니를 그려넣음으로써 어머니와 딸들이 함께 바느질을 하다가 두 아들의 시신이 운반되어 오는 것을 보고 경악하는 장면으로 각색되었음을 알 수 있다. 맏딸은 슬픔을 이기지 못해 실신하여 어머니의 왼팔에 매달려 있다. 맏딸의 헤어스타일은 로마에 있는 위카의 자문을 받아 묘사한 것이다. 위카는 디오니소스(바쿠스) 신을 섬기는 여사제들의 조각에서 본 헤어스타일을 나타내라고 다비드에게 권했다. 고대 디오니소스 신을 섬긴 여사제들은 의식을 행하던 중 곧잘 이런 모습으로 황홀경에 빠지곤 했는데 로마 미술에서 이런 모습은 히스테리컬하고 비탄에 빠진 모습으로 종종 사용되었다. 다비드 역시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실신하는 모습을 이런 형식으로 표현했다. 화면에 보이는 가구들은 다비드가 로마의 유명한 가구제작자 야곱에게 주문 제작한 것들이다.
이 작품은 1789년 8월 말에 완성되었고 살롱전에 소개된 후 문제의 작품이 되었으며 이듬해 11월 19일 볼테르의 작품 <브루투스>가 공연되자 사람들의 전폭적인 갈채를 받았는데 배우들은 다비드 작품에서의 구성을 따라 그룹을 지어 연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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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4월 12일 kbs라디오 생방송 라디오 인터뷰를 위해 준비한 글입니다.
실제로 말하려고 하는 것은 브루스 노먼과 알베르토 자코메티와 베케트와의 관계이지만, 기록으로 남기기 위해 정리된 하나의 글로 쓴 것입니다.
세 가지 질문에 관해 준비한 간략한 답변도 함께 아래에 첨가합니다.
이 내용은 4월 12일 밤 10시 10분부터 11시까지 생방송으로 진행되는 '이주향의 문화포커스' 중 중간에 전화로 이루어지는 인터뷰입니다.


새무엘 베케트의 탄생 100주년을 맞이하여
 

새무엘 베케트의 탄생 100주년을 맞이하여 자코메티와 사르트르의 사상을 함께 살펴보는 이유는 베케트의 사상이 전후 소수 유럽 지식인들에게서 발생한 사상과 일치하며, 그런 사상이 세계대전이란 인류의 집단적 참혹한 경험을 바탕으로 나타난 것임을 지적하기 위해서입니다.

일찍이 1차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그들 세 사람은 8-13살의 어린 나이였겠습니다만) 유럽의 지식인들은 집단적 유럽적 병든 이성에 매우 낙담하여 각성을 촉구하는 운동이 일어났었습니다. 2차 세계대전은 과거의 전쟁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대량살상을 통해 공포적이었습니다. 따라서 유럽 지식인들이 인간 존재에 대해 새로운 생각을 일으킨 것은 당연했습니다. 집단적으로 억압당하고 부단히 생명의 위협을 느껴야 하는 상황에서 인간 존재의 본질적 의미와 가치에 대해 자문하게 된 것입니다. 인간은 사색과 행동으로 시대와 상황에 맞게 자아를 형성하고 역사를 만들어나가야 한다는 근본적인 가치관 아래 당면한 시대를 파악하고, 상황을 포착하며, 인간 존재의 의미를 고찰하게 되었는데, 베케트, 자코메티, 사르트르 모두 인간은 자기가 원하는 대로 삶을 만들어나가는 선택의 자유를 가지고 있으므로 여러 조건과 상황 속에서 행동을 자신의 의지대로 결정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모든 관례에서 벗어나 자기를 진정으로 표현하는 행위를 자발적으로 선택하는 것이 중요한데, 가장 중요한 과제는 자발성 혹은 자유를 어떻게 획득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실존이 본질에 선행한다는 실존주의 사고가 전후 가장 유력했으며 이는 베케트, 자코메티, 사르트르의 문학, 미술, 철학의 공통된 내용입니다.

베케트를 먼저 그리고 자코메티와 사르트르의 사상을 함께 살펴보려고 하는데, 참고로 베케트에 비해 자코메티는 5살이 많고 사르트르는 1살이 많습니다.

새무엘 바클레이 베케트는 아일랜드 태생으로 아일랜드는 조지 버나드 쇼, 오스카 와일드,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 제임스 조이스 등을 배출한 문학의 나라입니다. 프로테스탄트 가정에서 태어난 그는 트리니티 칼리지에서 로망스어를 배운 후 잠시 파리 고등사범학교 강사가 되었습니다. 그가 영어, 라틴어, 프랑스어에 능통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파리에서 〈율리시스 Ulysses〉의 저자 제임스 조이스를 만나 그의 서클의 일원이 되었고, 훗날 조이스에 관한 평론을 쓴 것으로 봐서 조이스의 영향을 받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1941년 지하 저항단체에 가입하고 1942년 동료들이 게슈타포에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프랑스의 정복되지 않은 지방으로 피신한 것은 사르트르와 동일한 행보였습니다. 그는 프랑스가 해방될 때까지 농업노동자로 일하면서 생계를 꾸려나갔습니다.

조이스 외에 그에게 영향을 준 사람으로 프랑스 철학자이며 근대 철학의 아버지로 칭송받는 르네 데카르트를 꼽을 수 있습니다. 그가 데카르트에 관한 시집을 두 권 쓴 것은 그 영향이 컸음을 의미합니다. 베케트는 1946~49년 파리에서 왕성하게 저술했는데 희곡 〈고도를 기다리며 Waiting for Godot〉로 포함됩니다. 이 희곡은 1951년에 출간되었지만, 1953년 1월 파리에 있는 소극장 '테아트르 드 바빌론'에서 공연되고부터 유명해졌습니다. 그는 라디오나 텔레비전 출연, 언론 인터뷰 등을 차단했고, 1969년 노벨 문학상을 받았을 때도 수상식에는 가지 않았습니다.

베케트가 다룬 것은 한계상황에 처한 인간으로 전후 유럽 지식인이 풀어야 할 당면과제였으며, 인간 경험의 본질을 분석하는 것이 그의 작업이었습니다. 과거 세계문학에서 주로 다루어진 주제들, 즉 사람들의 사회적 관계, 그들의 태도와 재산, 신분과 지위를 향상시키기 위한 투쟁, 성적 대상들을 정복하는 것 등은 베케트에게 존재의 단순한 겉치레에 불과했고, 그것은 인간 조건의 기본 문제와 근본적 고뇌를 가리는 우연적 피상적 측면에 불과한 것으로 보았습니다. 베케트는 인간은 누구이고, 인간의 참된 본성은 무엇이며, 인간이 '나'라고 말할 때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에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고도를 기다리며〉에 등장하는 두 주인공은 왜 존재하는지를 알지 못하는 가장 일반적인 인간상황에 처한 사람들입니다. 인간은 이성적 존재이기 때문에 자신이 처한 상황이 전적으로 무의미하거나 무의미할지도 모른다고 막연히 상상해서는 안 된다고 그는 말합니다. 두 주인공은 나무 한 그루와 텅 빈 무대로 표현되는 쓸쓸한 세상에서 자신들이 존재하는 까닭은 누군가를 기다리는 사실 때문임이 틀림없다고 막연히 추측합니다. 그러나 두 사람은 ‘고도’라는 사람이 자신들에게 오겠다는 약속했다거나 '고도'가 실제로 존재한다는 객관적인 증거조차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베케트는 두 사람의 끈기 있고 소극적인 기다림을 또 다른 두 등장인물의 삶에서 대부분을 차지하는 까닭 없고 목적 없기는 마찬가지인 여행과 대비시켰습니다.

베케트의 작품은 내부에서 발생하는 자아의 정체성에 문제를 제기하는 것입니다. "내가 쓰고 있다"고 말할 때 나는 자신에 관해 말하고 있는 것이며, 이때 나의 일부는 다른 일부가 행동하고 있는 것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셈이 됩니다. 즉 나는 관찰자이자 동시에 관찰의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두 모습 가운데 진정한 '나'는 어느 쪽인가 하는 문제를 제기합니다. 데카르트의 <성찰>을 읽어본 사람은 베케트가 제기하는 문제가 바로 데카르트가 이미 제기한 것으로 그때까지도 풀수 없는 수수께끼 같은 포착하기 어려운 자아의 본질을 추적하는 일이라는 것을 알 것입니다. 데카르트는 꿈과 의식에 차이가 없음을 깨달았는데 관찰자이자 관찰의 대상이 되는 두 모습의 관계를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유명한 말로 생각 혹은 이성적 판단이 존재에 선행한다고 믿었습니다. 작품을 통해서 인간의 노력 대부분이 사소하며 궁극적으로 무의미하다는 베케트의 견해는 관객으로 하여금 무의미하며 헛된 대상에 관심을 두지 않게 함으로써 사람을 자유롭게 하려는 효과를 알려주려는 것입니다.

알베르토 자코메티(1901-66)는 1963년 <고도를 기다리며〉의 무대장치를 설계했다. 1963년 이전의 자코메티의 작업은 상상의 공간 속에 마술처럼 현실성을 불러일으키는 것으로 그의 모델들은 회색 캔버스나 조각 받침대 위에 유령처럼 묘사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작품이란 실제 공간에 현실감을 배가시킨 것이어야 한다고 생각했으며, 실재가 관람자의 지각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임을 보여주려고 했습니다. 베케트의 소설과 희곡에 등장하는 인물들과 마찬가지로 자코메티의 인물상들은 각각의 존재 속에 공간과 시간의 기원을 가지고 있다는 세계관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자코메티는 자신의 작업 목적을 현상의 재생이 아닌 현상 이면에 있는 실재 자체에 대한 불가사의한 반복으로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그의 목적은 상상적 공간 속에서 참된 현존의 충격이라고 할 수 있는 형이상학적 존재에 대한 신비로움을 환기시키는 것이었습니다. 미술작품의 물리적인 실재는 현상 이면의 만질 수 없는 실재를 암시하기 위해 더욱 뒤로 물러났습니다. 그래서 관람자는 아주 멀리에 가물거리는 대상을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장 폴 사르트르는 1954년에 쓴 소논문 <자토메티의 회화>에서 “자코메티가 인물을 물질적 존재의 힘으로 우리를 감동시킬 때 과거 어느 화가도 성취하지 못한 것에 더 가까이 다가갈 것이다”라고 적었습니다. 이런 점을 자코메티의 말년의 작품에서 발견할 수 있는데 그는 단순히 유사한 모습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실제 공간 속에서 인물의 본질과 일치하는 하나의 실재를 창조한 것입니다. 그의 작품은 물질성에 대한 가장 기본적인 재현이며 동시에 존재의 핵심이며 침묵이 주변 공간을 지배합니다. 그의 작품은 <고도를 기다리며〉에서 두 주인공을 연상하게 합니다. 베케트와 유사한 점은 식물의 줄기처럼 가늘고 시각적 거리가 중요한 요소로 작용하는 그의 인물이 인간의 정신적 소외를 나타내는 것이며, 또한 일시적이고 덧없는 세계 안에 갇힌 인간의 상태를 은유하는 것입니다. 그는 실존주의 철학으로 구체화되는 당대의 정신적 분위기에 가장 잘 부응한 예술가였습니다. 그는 1966년에 타계했습니다.

사르트르에게 인간은 그 자체로 존재하는 무의 실존이기 때문에 인간은 행동을 통해서 자기 자신을 형성해 나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행동의 주체이며 선택의 주체인 것입니다. 자신이 선택한 이상 그 책임을 자신이 져야 하고 그 책임은 인류에 대한 책임으로 연대의 문제로까지 이어집니다. 그는 실존의 자유 안에서 주체적 행동적 휴머니즘을 주장합니다. 그는 인간이 행동과 노력으로 사회를 초극하고 변혁할 수 있다고 믿었는데, 이런 사상은 베케트의 사상과 일치합니다.




베케트와 시각예술의 관계

베케트가 1969년에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으므로 그때부터 그에 대한 관심이 보편적으로 생겼습니다. 물론 <고도를 기다리며>가 단연 대표적인 작품으로 많이 읽혔고 저도 읽었습니다. 1969년은 개념미술이 성행할 때라서 특히 개념미술 예술가들이 베케트에 대한 관심이 많았으며 브루스 노먼과 제니 홀처가 가장 많은 영향을 받았습니다. 베케트가 자아 성찰의 문제를 다룬 것이 개념미술 예술가들이 다룬 예술가란 무엇인가 혹은 미술이란 무엇인가 하는 물음과 일치했기 때문에 그의 영향 혹은 가르침을 받아들이게 된 것입니다. 미술에서는 비물질화를 통해 성찰을 모색했는데 헛된 대상을 제거함으로써 본질에 다가갈 수 있다는 믿음으로 내부에서 발생하는 자아의 정체성에 문제를 제기한 베케트와 일치하는 점입니다.

알베르토 자코메티(1901-66)
베케트보다 5살 많은 알베르토 자코메티는 1963년 <고도를 기다리며〉의 무대장치를 설계했습니다. 그는 실재가 관람자의 지각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임을 보여주려고 했습니다. 베케트의 소설과 희곡에 등장하는 인물들과 마찬가지로 자코메티의 인물상들은 각각의 존재 속에 공간과 시간의 기원을 가지고 있다는 세계관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자코메티는 자신의 작업 목적을 현상의 재생이 아닌 현상 이면에 있는 실재 자체에 대한 불가사의한 반복으로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미술작품의 물리적인 실재는 현상 이면의 만질 수 없는 실재를 암시하기 위해 더욱 뒤로 물러났습니다. 그래서 관람자는 아주 멀리에 가물거리는 대상을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는 마치 <고도를 기다리며〉의 무대를 바라보는 것과 같은 효과입니다. 장 폴 사르트르는 1954년에 쓴 소논문 <자토메티의 회화>에서 “자코메티가 인물을 물질적 존재의 힘으로 우리를 감동시킬 때 과거 어느 화가도 성취하지 못한 것에 더 가까이 다가갈 것이다”라고 적었습니다. 자코메티의 작품은 물질성에 대한 가장 기본적인 재현이고 동시에 존재의 핵심이며 침묵이 주변 공간을 지배합니다. <고도를 기다리며〉에서 무대의 넓은 공간이 침묵으로 흐르는 것에 비유할 수 있을 것입니다. 베케트와 유사한 점은 식물의 줄기처럼 가늘고 시각적 거리가 중요한 요소로 작용하는 그의 인물이 인간의 정신적 소외를 나타내는 것이며, 또한 일시적이고 덧없는 세계 안에 갇힌 인간의 상태를 은유하는 것입니다. 자코메티는 실존주의 철학으로 구체화된 당대의 정신적 분위기에 가장 잘 부응한 예술가였습니다.


브루스 노먼(1941-)
브루스 노먼은 서부에서 유행한 펑크아트의 시기를 거친 후 개념미술, 특히 바디아트를 주창했습니다. 노먼의 바디아트는 표현주의나 사실주의 노선을 취하지는 않았으므로 예술가의 감정이나 개인적인 삶 속에서 일어난 사건을 표현하는 자전적인 것이 아니라 비개성적이었습니다. 비단 노먼에 한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를 포함한 일부 예술가들이 신체를 사용하여 행위자의 자의식과 관람자의 자의식을 다뤘는데, 행위자는 자신의 행위에 대한 관찰자가 되도록 거울과 비디오 기구를 끌어들이기도 했습니다. 이는 베케트가 추구한 관찰자이자 동시에 관찰의 대상이 되는 가운데 진정한 '나'는 어느 쪽인가 하는 문제를 다루는 것과 일치하는 것입니다. 거슬러 올라가면 베케트가 영향을 받은 르네 데카르트의 <성찰>과 관련이 있는 것입니다. 베케트가 작품을 통해서 인간의 노력 대부분이 사소하며 궁극적으로 무의미하므로 관객으로 하여금 무의미하며 헛된 대상에 관심을 두지 않게 함으로써 사람을 자유롭게 하려고 한 것을 노먼의 작품에서 발견할 수 있으며 이는 그가 베케트에게서 받은 영향입니다. 자기를 진정으로 표현하는 행위를 자발적으로 선택하는 것이 중요한데, 가장 중요한 과제는 자발성 혹은 자유를 어떻게 획득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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