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크 루이 다비드와 브루투스
1774년 로마대상을 수상하고 로마로 유학 간 자크-루이 다비드는 그곳에서 고대 미술에 탐닉했고 스코틀랜드 출신 화가 개빈 해밀턴을 포함한 새로운 고전부흥의 선구자들과 교류했다. 다비드는 안톤 라파엘 멩스의 견해에 공감했는데, 멩스는 완벽한 미를 얻기 위해서는 그리스의 전통적인 구상 위에 라파엘로의 표현성과 코레조의 명암법에 의한 우아미 그리고 티치아노의 색채를 결합시켜야 한다는 절충주의를 주장했다.
멩스의 아버지 이스마엘 멩스(1764년에 사망)는 드레스덴 궁정화가였다. 아버지는 멩스를 훌륭한 화가로 만들기 위해 혹독한 훈련을 시켰으며 코레조와 라파엘로의 작품을 주로 모사하게 했다. 멩스의 기독교 이름은 대가 라파엘로의 것을 가져온 것이다. 멩스는 1741년 로마로 가서 수학한 후 1744년에 돌아와 이듬해 27살 때 드레스덴의 작센 궁전의 화가로 선발되었다. 그는 빙켈만의 친구이며 그로부터 이론적 영향을 많이 받아 작품에 적용했다. <페르세우스와 안드로메다>(다비드 65)는 코레지오, 라파엘로, 티치아노의 양식을 혼용한 절충주의 양식이며 그가 신고전주의의 선두자임을 확인시켜준다.
다비드는 1789년에 <브루투스 아들들의 시신을 운반하는 릭토르들>을 그렸는데 왕이 주문한 것이다. 다비드에 앞서 자크-앙트완 비포르와 개빈 해밀턴이 <브루투스의 맹세>를 그렸는데 신고전주의자들에게 유명한 고대의 사건은 선호하는 주제였다. 다비드와 교류한 해밀턴은 화가, 고고학자, 화상으로 1755년경 로마로 이주한 후 주로 이탈리아에서 활약했다. 멩스와 빙켈만을 중심으로 한 신고전주의 그룹의 주요 구성원이다. 그가 로마 주변에서 이룩한 고고학적 발굴은 당대의 여러 컬렉션이 중요한 유물을 소장할 수 있도록 했다. 또한 고대에 대한 그의 관심은 젊은 시절의 안토니오 카노바에게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1781년에 로마에 정착한 이탈리아의 조각가 카노바는 조각의 신고전주의 양식을 발전시켜, 18세기 말에서 19세기 초의 유럽 조각계에서 큰 비중을 차지했다.
해밀턴은 역사화를 그릴 때 대부분 호메로스에서 주제를 얻었으며 고대 미술뿐 아니라 푸생에게서도 영향을 받았다. 이런 작품은 복제 판화를 통해 널리 알려졌고, 동시대 화가들과 다비드를 포함한 젊은 세대에게 영향을 미쳐 신고전주의 양식이 발전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영국에서는 화가로서보다는 고전주의 조각을 영국의 컬렉터들에게 판매한 인물로 더 잘 알려졌다. 그러나 해밀턴은 제임스 배리, 영국계 미국인 벤저민 웨스트, 존 싱글턴 코플리 등과 함께 영국의 역사화 발전에 큰 공헌을 한 몇 안 되는 화가 중 한 사람이다.
브루투스는 그보다 500년 후 율리우스 시저를 살해한 마르쿠스 브루투스와는 다른 인물이다. 브루투스는 로마의 마지막 전제군주 타르퀴니우스에 맞서 로마를 구하는 데 공헌한 인물이다. 사건은 타르퀴니우스의 아들 섹스투스가 브루투스의 동료 콜라티누스의 정숙한 아내 루크레티아를 강간하는 데서 시작된다. 루크레티아가 남편과 브루투스가 보는 앞에서 자살하자 브루투스는 그녀의 그녀의 몸에 꽂힌 칼을 뽑아낸 후 그녀의 피에 대한 복수와 더불어서 부패한 독재자를 몰아내겠다고 맹세했다. 결국 타르퀴니우스는 추방되고 브루투스와 콜라티누스는 기원전 508년에 세워진 첫 로마공화국의 집정관으로 선출되었다. 그런데 브루투스의 두 아들 티투스와 티베리우스는 타르퀴니우스의 복귀에 가담했다가 아버지에 의해 사형에 처해졌다. 다비드는 브루투스가 비정한 아비로 아들의 처형에 참석한 모습을 드로잉하며 습작했다. 그러나 그는 공식석상에서의 브루투스의 모습보다는 자신의 가정에서의 아비의 모습을 그리기로 했다.
이 작품은 가족에 대한 사랑과 국가에 대한 의무 사이에서 국가를 선택하는 남자와 이에 처절하게 반응하는 여자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다비드는 브루투스가 관람자를 바라보도록 정면으로 구성함으로써 그가 과연 두 아들을 죽이면서까지 조국에 충성을 다 한 위대한 이물인지 아니면 가정을 파탄으로 몰고간 괴물과도 같은 존재인지를 관람자 스스로 판단하게 했다. 플루타르크는 브루투스의 행위가 가장 칭찬받을 만하거나 아니면 가장 비난받을 만하다면서 그는 신과 같은 존재인 동시에 야수와도 같은 존재라고 했다.
스케치에는 바느질 바구니가 없지만 완성작의 테이블 위에 바구니를 그려넣음으로써 어머니와 딸들이 함께 바느질을 하다가 두 아들의 시신이 운반되어 오는 것을 보고 경악하는 장면으로 각색되었음을 알 수 있다. 맏딸은 슬픔을 이기지 못해 실신하여 어머니의 왼팔에 매달려 있다. 맏딸의 헤어스타일은 로마에 있는 위카의 자문을 받아 묘사한 것이다. 위카는 디오니소스(바쿠스) 신을 섬기는 여사제들의 조각에서 본 헤어스타일을 나타내라고 다비드에게 권했다. 고대 디오니소스 신을 섬긴 여사제들은 의식을 행하던 중 곧잘 이런 모습으로 황홀경에 빠지곤 했는데 로마 미술에서 이런 모습은 히스테리컬하고 비탄에 빠진 모습으로 종종 사용되었다. 다비드 역시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실신하는 모습을 이런 형식으로 표현했다. 화면에 보이는 가구들은 다비드가 로마의 유명한 가구제작자 야곱에게 주문 제작한 것들이다.
이 작품은 1789년 8월 말에 완성되었고 살롱전에 소개된 후 문제의 작품이 되었으며 이듬해 11월 19일 볼테르의 작품 <브루투스>가 공연되자 사람들의 전폭적인 갈채를 받았는데 배우들은 다비드 작품에서의 구성을 따라 그룹을 지어 연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