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디오 아트




비디오와 TV 장비 그리고 기술을 사용해 다양한 방식으로 제작하는 비디오 아트를 프랭크 포퍼는 여섯 가지 유형으로 분류했다. 첫째, 새로운 시각적 이미지의 창출을 위해 기술적 수단을 사용하는 것, 둘째, 퍼포먼스를 영구적인 형태로 만들기 위해 비디오를 사용하는 것, 셋째, 비디오를 사용해 지배체제에 의해 억압받기 쉬운 이미지와 정보들을 배포하는 것으로 이를 포퍼는 ‘게릴라 비디오’라 칭했다. 넷째, 비디오 카메라와 모니터를 조각적인 설치작업에 이용하는 것, 다섯째, 비디오를 현장 퍼포먼스에 즉흥적으로 사용하는 것, 마지막으로 비디오를 주로 컴퓨터와 함께 사용하는 것과 관련하여 진보적인 기술적 선언을 하는 것이다.
1959년 볼프 포스텔이 작동 중인 TV 수상기로 아상블라주 작업을 한 바 있으나 하나의 장르로서 비디오 아트를 탄생시킨 사람은 한국의 음악가이자 행위예술가 그리고 조각가인 백남준이다. 1950~53년 쾰른에서 사진 석판을 비롯한 판화 기법을 배운 후 1954~55년에 부퍼탈에서 회화와 실험적인 타이포그래피를 공부한 독일 예술가 볼프 포스텔Wolf Vostell(1932~98)은 1955~56년 파리의 에콜 데 보자르, 1956~57년 뒤셀도르프 아카데미에서 공부했다. 포스텔은 찢긴 포스터 조각으로 콜라주를 구성하고 이를 콜라주의 반대어 데콜라주라고 칭했는데, 이들 작품이 이미 붙여진 포스터와 인쇄물을 찢어내어 구성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종종 밑에 있는 재료들을 식별할 수 없도록 표면에 채색하고 선으로 낙서하기도 했다. 1958년부터 울름, 부퍼탈, 베를린, 뉴욕에서 해프닝을 기획하여 유명해졌으며, 일상생활로부터 가져온 임의적이거나 파괴적인 파편들이 모여 하나의 전체적인 작품을 구성한다는 의미로 포스텔은 이를 ‘데콜라주-해프닝’이라고 불렀다.
백남준(1932~)은 1964년에 뉴욕에 정착했고, 이듬해 소니사의 휴대용 비디오 녹화기가 뉴욕에서 판매되자마자 이를 구입했다. 이 새로운 장치인 녹화기를 구입한 바로 그 날 첫 녹화작업을 하여 그 날 저녁 녹화한 비디오 테이프를 카페 고고Cafe-a-Go-Go라는 예술가 클럽에서 선보였다. 백남준은 존 케이지의 <조합 피아노>에서 영감을 받아 TV 스크린 위에 자석을 놓아서 방송되는 이미지를 일그러뜨리는 실험을 했다. 엔지니어이자 발명가의 아들 존 케이지John Cage(1912~92)는 1935~37년 아르놀트 쇤베르크로부터 음악 교육을 받았고, 주로 작곡가로 유명해졌는데, <뉴 그로브 음악 음악가 사전>(1980)에는 그를 가리켜 “20세기의 다른 어떤 미국 작곡가보다도 세계 음악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는” 역할을 했다고 적고 있다. 그러나 케이지는 시각예술에 관심이 많았으며, 많은 친구들과 공동작업을 하고 그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으며, 말년에는 판화 제작자로서 명성을 얻었다. 케이지는 1943년 뉴욕의 모마에서 자신의 작품 3곡을 포함한 연주회를 지휘했고, 이로써 더욱 확고한 명성을 쌓았다. 임의성과 우연의 효과를 탐닉하고, 피아노 줄 사이에 여러 가지 물체를 삽입하여 타악기고 변형시킨 발명품인 <조합 피아노>와 전자장치의 기이한 소리로 실험하면서 극히 비정통적인 작품을 만들었다.
백남준은 비디오 작업으로 전환한 후 종종 첼리스트 샬럿 무어먼Charlotte Moorman(1940~94)과 공동으로 작업했으며, 특히 무어먼은 두 개의 축소된 TV 스크린으로 된 브라를 착용하고 첼로를 연주하는 <살아 있는 조각을 위한 브라>(1969)로 유명하다. 무어먼은 백남준의 다른 퍼포먼스 작업에서 우발적인 노출이 문제가 되어 체포된 적도 있다. 백남준은 1972년에 말했다. “1950년대의 자유주의자들과 1960년대의 극단주의자들의 차이는 전자가 심각하고 염세주의적인 데 비해 후자는 낙관적이며 재미를 추구한다는 점이다. 누가 사회변혁에 더 기여했는가? 극단주의자들이다. 심각한 대륙 미학을 거부하는 존 케이지와 해프닝, 팝아트, 플럭서스 운동의 출현은 1960년대를 예견했다. 1970년대를 무엇이 예견할 것인가? 말할 것도 없이 비디오이다.”
백남준은 1956년 동경 대학을 마치고 독일에 도착하여 1958년 다름슈타트의 하기강좌에서 강의를 맡고 있던 케이지를 만났다. 케이지와의 만남은 전통 음악에 회의를 갖고 있던 백남준에게 새로운 돌팔구를 마련하는 계기가 되었다. 백남준은 기상천외한 해프닝을 행위 했는데 케이지의 새로운 음악과 선불교 사상에 영향을 받은 다다적 돌출행동이었다. 백남준은 말했다. “나는 존재하지 않는 소리를 찾고 있다. 나의 스승은 내가 원하는 음이 음표들 사이에 있다고 말해주었다. 그래서 나는 피아노 두 대를 사서 음이 서로 어긋나게 조율했다.” 실험음악을 추구한 그에게 우연, 침묵, 비경정성 등의 새로운 음악 이론과 연극적 음악 혹은 음악적 연극이라는 새로운 복합매체 공연을 제시한 케이지는 그의 운명을 바꾸어놓은 스승이었다. 백남준은 1959년 11월 장 피에르 빌헬름의 뒤셀도르프 22번가 화랑에서 <케이지에게 바침: 테이프 레코더와 피아노를 위한 음악>을 발표했다.
1963년 부퍼탈 파르나스 화랑에서 열린 ‘음악의 전시회 - 전자 텔레비전’ 전시회는 백남준의 첫 개인전이자 비디오 아트가 시작된 의미 있는 사건이었다. 그는 13대의 장치된 TV와 장치된 피아노를 선보였는데 이것들은 기존의 미학적 가치에 대한 반예술적 도전이면서 동시에 장치된 TV는 가해 대상인 TV가 지닌 다원성으로 인해 공격적 제스추어일 뿐 아니라 그 자체가 새로운 시각예술의 장르가 되는 미술사에 구두점을 찍는 전시회였다. 장치된 TV는 TV 내부 회로를 변경시켜 방송 이미지를 왜곡시키거나 브라운관을 조작하여 스크린에 추상적 선묘를 창출하는 기능을 지녔다. 백남준은 조작과정에서 예술적 의도나 기술을 배제하고 순전히 기계적 과정에만 의존하여 우연적이며 무작위적인 이미지를 얻어냈다. 무작위적으로 얻어진 이미지는 예측할 수 없는 시각적 비결정성과 다양성을 보여주었다. 13대의 TV 수상기들은 생방송 이미지를 왜곡시켜 일그러진 저명 인사의 얼굴을 만들거나 흑백 이미지의 명암을 도치시키거나 혹은 내부 회로를 변경시켜 화면에 추상적 주사선을 만들었다. 백남준은 ‘비디오 아트의 황제’라는 명예로운 칭호를 받았다.
또 한 명의 잘 알려진 비디오 아티스트는 미국의 빌 비올라Bill Viola(1951~)로서 현학적이라는 비난을 받기도 하지만 좀더 진지한 성격을 띤다. 비올라의 대표작은 <멈추지 않고 기도하기>(1992)이며, 이 작품에 대해 그는 설명했다. “현대의 성무일과서이며 영원의 날까지 밤을 세워 비는 이미지로 도시를 위해 그치지 않고 계속 기도하는 역할을 한다. 이미지들은 12시간을 주기로 거리에 면해 있는 창문에 설치된 스크린에 계속 상영된다. 이 이미지들은 하루 24시간, 주 7일 동안 계속해서 영사되며, 창문의 안쪽, 위, 아래에 설치된 스피커를 통해 윌트 휘트먼의 <나의 노래> 중에서 발췌한 글을 읽는 목소리가 유리창 밖과 안으로 조용히 들려 온다. 낮에는 햇빛 때문에 이미지들은 보이지 않고 목소리만 들린다. 비디오 재생기는 컴퓨터에 의해 하루의 시간과 일치되게 되어 있다. ... 작품을 구성하는 12개의 부분들, 즉 각 기도의 길이는 15분에서 2시간까지 다양하며 개인적이고 보편적인 삶의 주기를 묘사한다.”
비올라의 작품은 많은 평론가들의 찬사를 받았다. 1993년 런던의 왕립 아카데미에서 열린 ‘20세기의 미국 미술’ 전시회 도록에는 비올라를 ‘설치의 기술적인 거장’으로 지칭했다. 그러나 같은 해 브라이언 슈얼은 비올라의 작품을 “아마추어적이며 무능력한” 것으로 비하하면서 “예술가로서 그의 주장은 변명의 여지없이 현학적이며 그를 지지하는 이들의 변호는 너무나 어처구니 없다. 그의 불쾌한 비디오 작품은 화화나 조각의 기법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고 했다. 비디오를 순수하게 시각적 매체로 보느냐 그렇지 않느냐 하는 논란의 여지는 있지만 비올라는 백남준을 이어 차세대의 가장 유명한 비디오 아티스트로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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