앵포르멜
앵포르멜Informel은 1945년경부터 10여 년 동안 미국의 추상표현주의에 상응하여 유럽에서 전개된 회화 운동으로 1950년 프랑스의 평론가 미셸 타피에가 본래 볼스를 염두에 두고 이 용어를 창안해내어 사용하기 시작했지만 1951년경에는 포트리에, 뒤비페, 미쇼, 리오펠 등의 작품을 언급할 때도 이 용어를 사용했다. 이 용어는 입체주의에서 나온 어느 정도 엄격한 추상 경향이나 몬드리안과 데 스테일 예술가들이 보여준 것 같은 다양한 기하 추상 형식과는 대조적으로 잠재의식의 환상을 직접 표현해내는 조르주 마티외가 창안해낸 영어인 ‘서정적 추상’ 작품에 일괄적으로 적용되었다.
앵포르멜의 선구자로 독일 출신 망명 예술가인 볼스Wols(알프레트 오토 볼프강 슐체-바트만Alfred Otto Wolfgang Schulze-Battmann, 1913~51)가 있다. 베를린 태생으로 드레스덴에서 성장한 독일계 프랑스 화가 볼스의 아버지는 작센의 대법원장이었다. 볼스는 처음에는 바이올리니스트가 되려고 공부하다가 프랑크푸르트 아프리카학 연구소에서 민족학과 원시 민족에 대한 인류학을 공부했다. 어렸을 때부터 소묘에 재능을 보였지만 모홀리-나기의 작품을 보고서야 회화에 대해 진지하게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고 잠시 동안 바우하우스에서 공부했다. 1932년 파리로 가서 볼스라는 이름으로 자신 작업을 하여 생계를 유지하며 1937년 만국 박람회에서 인정을 받았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파리로 돌아와 장-폴 사르트르, 시몬 드 보부아르와 가까이 교류하면서 그들의 저서에 삽화를 그렸다. 볼스는 불규칙한 생활과 가난, 과음으로 건강이 나빠져서 1951년에 사망했다. 볼스는 생전보다는 사후에 더 유명해져서 ‘엥포르멜의 원시인’, 표현적인 추상의 위대하고 독차적인 거장으로 여겨지게 되었다. 그의 작품은 1940년대 말과 1950년대에 타시즘 미술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그의 수채화는 ‘정신적으로 위축된’ 성격을 지니는데, 미셸 쇠포르는 이를 “조직된 정신착란”이라고 했다.
철학과 법학을 공부한 뒤 1942년부터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조르주 마티외Georges Mathieu(1921~)는 1944년에 비구상 추상을 그리기 시작했다. 당시 유행하던 기하 추상에 반대하고 표현적 추상을 내세운 에콜 드 파리의 창시자의 한 사람인 그는 1947년 파리에 정착했고, 볼스의 영향을 받아 앵포르멜 경향을 확립했다. 그의 작품은 또한 미국 추상표현주의와도 유사했다. 마티외는 서체 같은 요소를 이용하여 사전 계획 없이 영감에 고취된 듯이 매우 빠른 속도로 작업했다. 그의 명성은 빠른 시간 내에 국제적으로 확산되었고, 그의 작품은 표현적 추상과 제스처 회화가 인기를 더함에 따라 널리 전시되었다.
부유한 포도주 상인의 아들로 르 아브르에서 태어난 장 뒤비페Jean Dubuffet(1901~85)는 어린 시절부터 뛰어난 재능을 보여 일찍부터 그림을 배우기 시작했다. 사교계의 미술애호가로 지내며 조금씩 그림을 그리다가 1924년 그만두고 이듬해 르 아브르에서 아버지의 포도주 사업을 물려받았다. 1930년 파리에서 포도주 도매업을 시작했다. 1930년대에 다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지만 본격적으로 그린 것은 1942년 이후였다. 첫 전시회는 44살되던 해인 1945년이었고 이듬해 스스로 ‘오트 파트: 미로볼루스 마카담사’라고 명명한 전시회를 열었다. 여기에 전시된 작품들은 자갈, 깨진 병조각 등이 섞인 회반죽, 아교, 퍼티, 아스팔트 등으로 구성되었으며, 표면에 긁힌 자국과 낙서가 더해져 오래된 벽과 같은 느낌을 주었다. 뒤비페는 전통적인 미술 재료를 거부하고 1957년 자신이 말한 대로 “모든 버려진 가치들을 새롭게 주목받도록 이끌어낸” 여러 경향들의 선구자이자 대표적인 예술가로 부각되었다. 그는 아이들의 드로잉, 슬럼가 벽의 낙서, 교육을 받지 못한 사람이나 정신이상자의 그림 등 문화적 전통의 영향을 받지 않은 모든 종류의 개인적 경험의 즉각적인 기록에 관심을 기울였다. 에드워드 루시-스미스는 뒤비페가 “시점을 무시하고, 윤곽선을 단순화하며, 원시적이고 나이브한 작품처럼 성을 강조하면서 인물을 그렸으며, 이들을 두꺼운 반죽 위에 긁적였다”고 적었다.
1947년 뒤비페는 아르 브뤼트Art Brut라는 용어를 만들어내면서 아동, 정신장애자, 미술계와 동떨어진 사람들이 만든 작품들로 이루어진 전시회를 마련했다. 그는 이런 종류의 미술을 장려하기 위해 아르 브뤼트사Compagnie de l'Art Brut를 설립했다. 아르 브뤼트는 프랑스어로 ‘조야한 미술’이란 뜻이다. 영어로는 로저 카디널의 <아웃사이더 아트 Outsider Art>)1972)의 제목이 이런 유형의 작품들을 포괄하는 데 사용된다. 뒤비페는 “순수한 충동의 산물이며, 세련된 미술이 지속적으로 기반을 둔 카멜레온 같은 혹은 앵무새 같은 과정들에 전혀 의존하지 않는” 아르 브뤼트는 모든 사람이 가지고는 있지만 교육적 훈련과 사회적 통제에 의해 억압되어버린 독창성의 힘이 나타난 증거라고 주장했다.
뒤비페는 1954년 리브 고슈 화랑에서 신문, 벽돌, 금속 조각 등 버려진 물건들을 쌓아 만든 소형 작품들로 전시회를 열었다. 1956년 얇은 금속 조각, 나뭇잎, 말린 꽃, 나비 날개 등이 결합된 채색된 캔버스에서 잘라낸 작은 조각들로 이루어진 아상블라주 전시회를 열었다. 뒤비페는 매우 상반된 평가를 받는 예술가이다. 그가 1950년대와 1960년대의 보다 전위적인 여러 경향의 도래를 예고한 것은 사실이며 이런 점에서 G. H. 해밀턴의 다음과 같은 지적은 타당하다. “슈비터스보다 더욱 철저하게 ... 기존의 모든 예술적, 미학적 기준을 배격함으로써 뒤비페는 우리 주변의 모든 환경을 예술가들이 이용할 수 있는 길을 열었다. 그는 아름다움과 추함을 구분하는 어떤 가능성도 부정함으로써 1960년대 정크 문화와 팝아트가 나올 수 있는 미학적 조건을 마련했다.”
벨기에계 프랑스 시인이며 화가 앙리 미쇼Henri Michaux(1899~1980)는 의학을 공부하다가 그만둔 후 1922년부터 글을 쓰기 시작하여 문학계에서 명성을 쌓았고 1924년 파리로 갔다. 1927~37년 터키, 이탈리아, 포르투갈, 남아메리카를 여행하며 많은 글을 썼지만, 소묘는 거의 그리지 않다가 1937~40년에 본격적으로 그림에 매진하여 검은색 배경 위에 과슈로 그리는 독자적인 양식을 발전시켰으며, 이 양식을 스스로 유령주의라고 명명했다. 초현실주의 화가들의 자동주의 기법으로 그린 이 서정적이면서도 꿈 같은 추상 작품들은 “심령 이미지, 신화, 유령이 존재하는 모호한 세계“를 창출해냈다. 미쇼의 초기 과슈 작품은 회화를 정신적 즉흥성에서 비롯된 예술로 취급한 앵포르멜의 선구적인 역할을 했다.
1955년 프랑스 시민권을 받은 미쇼는 환각제 메스칼린을 복용한 상태에서 소묘를 하기 시작했다. 환각상태에서 제작한 소묘 작품에서는 달라진 기법과 정신상태의 변화가 나타났다. 새로운 기법은 펜을 이용한 소묘였는데 세부는 정교하고 꼼꼼하게 묘사되었으며, 화면 위에 관심을 집중시키는 특정한 중심 없이 전체적으로 균일한 올오버 양식을 보여주었다. 미쇼는 마약을 예술적인 목적으로 실험했다. 그는 메스칼린을 복용했을 때의 예민한 상태를 묘사했다. “자신과 모든 것을 넘어선 흥분상태이다. 즉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초자연적인 흥분상태이며 끊임없이 마음을 진정시키기도 하고 자극시키는 동시에 감정이 분출되며 해방된 상태로 명상에 잠긴 기분이다. ... 받는 것인지 주는 것인지 알 수 없는 큰 기쁨을 맛볼 수 있다. ... 형언할 수 없이 마음이 후련해지는 정신상태에서 점점 더 흥분하게 된다.” 1960년대에도 메스칼린 환각상태에서 그리는 소묘를 완전히 그만두지는 않았지만 과슈와 다색 크레용, 인디언 잉크를 혼합한 재료로 작업하면서 앵포르멜 회화의 과격한 비정형성과는 반대로 보다 통일된 구성과 구상적인 암시를 보여주었다. 실질적으로 약에 의한 환각상태에서 제작하지 않은 작품에서도 메스칼린을 복용하고 작업한 경험은 구성의 근간을 이루었다.
몬트리올 태생 캐나다 화가 장-폴 리오펠Jean-Paul Riopelle(1923~)은 6살 때부터 앙리 비송으로부터 미술 교육을 받고 1943년에 에콜 뒤 뫼블에 입학했다. 그곳에서 폴-에밀 보르뒤아스Paul-Emile Borduas(1905~60)를 중심으로 형성된 그룹의 회원이 되었으며 1946년 뉴욕에서 열린 이 그룹의 첫 전시회에 참가했다. 보르뒤아스는 1928~30년 파리에 체류하며 스테인드 글라스를 제작하고 몬트리올로 돌아온 뒤 1933년까지 교회 장식가로 활동했으며 1939년에 현대미술협회의 초대 부의장이 되었다.
거의 프랑스에 거주하면서 작업한 리오펠은 1947년 무렵 풍부하고 다양한 색채로 된 비늘 같은 형태들이 가득 찬 이미지를 만들었으며 이를 묽은 매체를 뿌리는 기법으로 완성했다. 1949~50년 무렵에는 튜브에서 짜낸 유화 물감처럼 보다 두터운 물감을 뿌리는 것이 아니라 실타래의 실처럼 서로 뒤엉키게 하는 기법으로 좀더 작은 형태들이 들어찬 이미지를 만들었다. 그 후 이런 고리 모양의 선들은 모든 방향에서 화면을 가로질러 서로 엇갈리면서 조밀한 막을 형성했고 화면은 더욱 빽빽해졌다. 1952~53년 이런 선들은 줄어들었으며 팔레트 나이프로 두껍게 겹쳐 칠함으로써 화면을 완전히 뒤덮은 작은 물감들과 결합되었다. 리오펠은 이런 회화로 처음 국제적인 주목을 받았다. 1960년대와 1970년대를 거치면서 기본적으로 분절된 형태와 두터운 매체를 사용하는 방식을 유지하면서 격렬하게 그은 선들과 그 형태들을 결합시켰다. 그는 많은 작품을 제작했으며 다양한 매체를 사용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독일계 프랑스 추상화가 한스 하르퉁Hans Hartung(1904~89)도 앵포르멜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라이프치히, 드레스덴, 뮌헨의 아카데미에서 수학하고 그곳에서 철학과 미술사도 공부한 하르퉁은 뮌헨에서 칸딘스키를 만났으며 마르크의 작품에 관심이 많았다. 1922년 추상회화를 시작했고 1931년 드레스덴에서 첫 개인전을 열었으며 1935년 망명하여 파리에 정착했다. 이후 스페인에서 투옥되었고 전쟁 기간 동안에는 프랑스 외인부대에서 복무했다. 전쟁 이후 파리로 돌아갔으며 1946년 프랑스인으로 귀화했다. 하르퉁은 에콜 드 파리의 중요한 구성원으로 활동했으며 추상화와 제스처 회화를 독창적으로 발전시켜 겉으로 보기에 서체를 연상시키는 검정색의 두터운 선과 커다란 얼룩들로 회면을 채우는 작품을 제작했다. 그는 앵포르멜과 타시즘의 선구자로 간주되고 있다.
이탈리아에서는 알베르토 부리Alberto Burri(1915~95)가 앵포르멜 운동에 가담했다. 처음에는 의사로 활동하다가 전쟁 중 미군에 붙잡혀 1944년 텍사스에서 전쟁 포로로 수용되어 있으면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1945년 로마로 돌아갔고 1948년 로마에 있는 마르게리타 화랑에서 첫 개인전을 열었다. 부리는 낡고 거친 삼베조각과 숯덩이, 찌그러지고 녹슨 금속 등을 이용한 개성적인 콜라주에 추상 기법을 결합시켜 낡고 폐기된 재료들을 우아하고 아름다운 구성물로 만들었다. 부리의 작품은 낡아빠지고 버려진 폐품 잡동사니와 쓰레기가 환기시키는 힘을 이용한 최초의 작품에 속하며, 미국의 정크 아트와 이탈리아의 아르테 포베라를 예고했다. 이탈리아의 저술가 피에로 바르젤리니는 부리의 작품에 관해 말했다. “부리의 작품은 비참한 동시에 세련되고 덧없으면서도 영원한 세계, 즉 그 비참함 덕택에 가장 혹독한 재앙까지도 견뎌내며 언제까지나 굳건히 버티어 나갈 잡동사니 쓰레기의 세계에 대한 폭로라고 할 수 있다.
스페인에서의 앵포르멜 운동에는 안토니 타피에스Antoni Tapies(1923~)가 단연 앞장 섰다. 어린 시절부터 회화와 소묘에 관심을 보인 타피에스에게 비극적인 스페인 내란의 체험은 작품에 지속적인 영향을 주었다. 1938년경부터 극동의 미술과 사상에 관심을 가졌으며 이런 관심은 시간이 갈수록 심화되었다. 1943~46년 바르셀로나 대학에서 법률을 공부했고 이후 회화에 전념했다. 1948~51년 다우 알 세트Dau al Set 그룹의 창립 회원으로 화동했으며 같은 이름의 잡지도 발행했다. 1948년 바르셀로나에서 결성된 예술협회인 다우 알 세트는 7개의 점이 찍힌 주사위라는 의미이며, 본래 주사위에서는 6이 최고의 숫자이므로 이 명칭은 일반적인 한계를 넘어선다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협회가 표방한 목적은 바르셀로나를 예술적, 정신적 침체 상태에서 일깨우는 것이었으며 회원들은 이런 목적을 추구하나가면서 스페인에서 국제 초현실주의를 적극 지지하여 초현실주의를 고취했을 뿐만 아니라 가우디와 미로와 같은 스페인 예술가들의 역량을 널리 알렸다. 이 그룹은 1950년대 중반 스페인에서 아방가르드가 자생적으로 생겨나고 앵포르멜이 도입되는 터전을 마련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타피에스는 다우 알 세트 그룹에 관계하고 있던 초현실주의 시기부터 자신만의 양식을 모색하여 1954년경 콜라주, 오트-파트, 가공되지 않은 일상용품, 낙서와 임의적 요소가 두드러지는 개성적인 양식을 완성했다. 1952~53년 집중적인 실험 시기를 거친 뒤에는 아르테 포베라의 개인적인 양식을 발전시켜나갔다. 찢어진 캔버스, 종이, 지푸라기, 실, 헝겊, 쓰레기, 낡은 스타킹 등 일상적인 폐기물을 가지고 작품을 구성했으며 그 위에 물감을 칠하거나 흘려 전체적으로 낙서로 뒤덮이거나 긁히고 손상된 벽처럼 보이게 했다. 타피에스는 많은 앵포르멜 화가들과 공통점을 갖고 있던 반면 작품에 대한 진지한 태도는 알베르토 부리와 유사했다.
장 폴랑은 1962년에 출간한 책에서 “앵포르멜이란 현실을 바라보는 새로운 방식으로 이성이나 직접적인 관찰로서는 알 수 없는 모호한 절반의 세계를 표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1954년 타시즘이 비기하적 추상에 보다 일반적으로 적용되기 시작했고 그 뒤 앵포르멜과 타시즘 두 명칭이 혼용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