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콜 드 파리



에콜 드 파리Ecole de Paris는 일반적으로 인상주의 이후 세계 각지로부터 온 예술가들에 의해 파리를 중심으로 전개된 미술 사조들, 즉 후기 인상주의, 나비 그룹, 야수주의, 입체주의, 퓨리즘, 초현실주의, 표현적이고 시적인 사실주의를 포괄적으로 지칭하는 말이다. 후기인상주의는 1880년경부터 1905년경까지의 다양한 회화 경향을 지칭한 용어로 로저 프라이가 1910~11년 런던의 그래프턴 화랑에서 자신의 기획으로 연 '마네와 후기 인상주의 전시회'에 이 명칭을 처음 사용했다. 이 전시회에서 주요 후기 인상주의 화가들 세잔, 고갱, 그리고 반 고흐의 작품이 소개되었다. 나비Nabis는 1888년 상징주의 운동 내부에서 주로 고갱의 영향을 받은 젊은 예술가들이 결성한 그룹이다. 나비는 예언자라는 히브리어에서 비롯된 것으로 이 그룹의 창시자 폴 세뤼지에는 퐁타방에 머물 때 고갱으로부터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았다. 이 그룹의 주도적인 인물들로 피에르 보나르, 모리스 드니, 에두아르 뷔야르가 있고 툴루즈-로트레크와 조각가 마욜이 그룹의 일원으로 동참했다. 아메데 오장팡과 스위스 화가이며 건축가 르 코르뷔지에(샤를-에두아르 잔레)가 주도한 퓨리즘Purism은 1918년부터 1925년까지 파리에서 일어난 미술 운동으로 기계 미술과 관련이 있다. 1917년 오장팡은 입체주의가 방향을 잃고 장식미술로 퇴보하고 있음을 지적했다.

에콜 드 파리란 명칭은 평론가, 화상, 미술품 감식가들에 의해서 널리 통용되었으며 이로 인해 파리는 20세기 초 약 40년 동안 혁신적인 미술의 중심지가 되었다. 1951년 런던의 벌링턴 화랑에서 1900~1950년의 에콜 드 파리의 작품들로 이루어진 전시회가 열렸다. 프랭크 매큐언은 전시회 카탈로그 서문에서 당시 다른 도시들에는 30개 정도의 뮤지엄이 있는 것에 비해 파리에는 무려 130개의 뮤지엄이 있어 2만여 명의 외국인을 포함하여 6만 명에 이르는 예술가들의 작품을 전시하고 있으며 20개 이상의 대형 살롱에서는 매년 평균 각각 1천 명의 화가들의 작품이 전시되고 있음을 알렸다. 에콜 드 파리의 가장 주목할 점은 국제적인 면모였다.

좁은 의미에서 에콜 드 파리는 프랑스 표현주의를 말하며 대부분 외국 태생의 표현적 사실주의자들, 즉 ‘저주받은 화가들’을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되었다. G. H. 해밀턴은 이 점을 지적했다. “이 용어는 나비 그룹과 야수주의 후계자들에 의해 구현된 프랑스 미술의 지속이라기보다는 1900년 이후 전 세계의 문명국가에서 온 화가와 조각가들이 파리에서 벌인 미술 활동을 지칭한다. 그들이 파리로 몰려온 이유는 파리가 먹고 살기에 그리고 자신들의 작품을 전시하고 토론하기에 가장 적합한 조건을 제공해주기 때문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전 파리의 미술은 몽마르트르를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었으며 외국인 예술가들이 이 동네에 모여살고 있었다. 에콜 드 파리의 대표적인 화가들로 수틴, 모딜리아니, 샤갈, 파생, 리바크, 키슬링 등이 있다.

러시아 출신 화가 샤임 수틴Chaim Soutine(1894~1943)은 에콜 드 파리의 표현주의 화가들 가운데 가장 급진적이며 뛰어난 영감을 지닌 인물이었다. 가난한 유태인 가문의 열 번째 자식으로 태어난 수틴은 구두제작자의 견습공이 되기를 거부하고 그림을 배우기 위해 가출했다. 1910년 사진관에서 일하면서 빌나의 에콜 데 보자르에서 공부했고, 1913년 후원자의 도움을 받아 파리로 가서 라 뤼슈La Ruche에 있는 코르몽의 아틀리에에서 수학했다. 라 뤼슈는 1900년경 보기라르 도살장과 인접한 단치히 가에 ‘뒤부아 아저씨’로 알려진 나이 많은 조각가가 예술가들의 사회주의적 공동체를 세우려는 생각으로 세운 둥근 원형 건물이었다. 1905년 무렵부터 물과 가스 같은 편의시설도 없이 조악하게 만들어진 라 뤼슈의 작업실을 싼값에 얻을 수 있었다. 파리에 처음 온 외국 예술가들이 이 건물에 정착했으며 그들 중에는 수틴 외에도 모딜리아니, 샤갈, 아르치펜코, 립시츠 등이 있었으며, 프랑스 화가들로는 레제, 들로네, 로랑스 등이 잠시 이 건물에 아틀리에를 얻고 작업했다. 블레즈 상드라르, 기욤 아폴리네르, 막스 자코브 등 몇몇 시인과 작가들도 이곳에 묵었다. 정치적 망명자들이 이곳을 은신처로 삼기도 했다.

수틴은 파리에서 분노를 표현한 작품과 드라마틱한 실제 삶으로 인해 소위 ‘저주받은 화가들 peintres maudits’로 불린 일군의 망명 화가들인 샤갈, 모딜리아니와 친분을 맺었다. 특히 1917년에 모딜리아니가 그린 <수틴의 초상화>는 모딜리아니의 작품 중 가장 표현적인 작품으로 꼽힌다. 모딜리아니를 통해 소개받은 화상 레오폴드 즈보로브스키는 수틴에게 프로방스의 세레에서 1919~22년 3년 동안 그림을 그릴 수 있도록 해주었다. 세레에서 수틴은 반 고흐의 말기 작품보다도 더욱 극렬한 감정 표현을 담은 환상적인 풍경화를 연속적으로 그렸다. 그러나 즈보로브스키는 당시 제작된 200여 점의 진가를 인정하지 않았고, 이 작품들은 1923년 미국 콜렉터 A. C. 반스에 의해 인정받아 반스는 100점을 구입한 후 몽수리 공원 근처에 있는 작업실을 수틴에게 제공했다. 그 후 수틴은 카뉴에 잠시 머물다가 네덜란드를 방문한 후 렘브란트의 말기 작품에 감동을 받았으며 1926년 파리로 돌아와 가죽을 벗긴 사체를 그리기 시작했다. 1920년대에는 심리적으로 비정상임을 나타내는 기이하고 과장되게 왜곡시킨 인물뿐 아니라 성가대 소년, 시중드는 소년, 과자 제조인과 같은 세심하고 온화한 일련의 그림을 그렸다.

매우 극단적이기는 했으나 수틴의 표현주의는 독일 표현주의의 주요 관심사와는 거의 공통점이 없으며 그를 코코슈카 및 놀데와 유사하다고 보는 것은 과장된 시각이다. 그의 표현주의는 추방된 많은 그의 동포들과 공유하던 비극적이며 묵시록적인 기질에 대한 억제할 수 없는 표출이었다. 수틴은 주기적인 우울증에 시달렸고 자신의 작품에 대해 확신을 가지지 못하고 늘 불안감으로 고통을 겪었다. 자신이 그린 작품에 만족해하지 못하고 과거에 그린 그림들을 파기하곤 했으며 전시회 개최도 꺼려서 생존에는 대중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다. 1929년 수틴은 자신의 작품을 여러 점 소장하고 있던 카스탱 부부와 함께 샤텔기용에 은거했다. 1940년 독일의 프랑스 점령 이후 미국으로 갈 수 있는 기회를 포기하고 투렌의 샹피니쉬르뵈드라는 마을에서 방해받지 않고 풍경화를 그리는 데 전념했다. 궤양 수술을 받은 후 사망했다.

쇠락한 유태인 은행가 집안에서 태어난 이탈리아 화가, 조각가 아메데오 모딜리아니Amedeo Modigliani(1884~1920)는 학창시절이던 1895년 늑막염을 심하게 앓았으며 후에 결핵으로 진행되어 요절했다. 1906년 파리로 간 그는 바토-라부아르Bateau-Lavoir와 여러 아틀리에에서 열린 예술가 모임에 참여하면서 예술가들이 모이는 지역의 카페에서 시간을 보내고 밤을 지새곤 했으나 극도로 빈곤한 생활을 했다. 바토-라부아르는 시인 막스 자코브가 파리 북부 몽마르트르 라비냥 가의 가난한 예술가들이 모여든 지역에 붙인 명칭으로 1904년경 반 동겐, 그 후 피카소, 또 그 후에는 후안 그리스, 파블로 가르가요를 비롯한 예술가들이 모여 살며 작업했다. 앙드레 살몽, 막스 자코브, 피에르 르베르디 등 당대의 뛰어난 작가들도 이곳에 거주했다.

모딜리아니는 수틴과 키슬링을 비롯한 외국에서 파리로 이주한 프랑스 표현주의 예술가들과 주로 어울렸다. 1909년에 그린 <첼리스트>를 이듬해 살롱 데 쟁데팡당에 출품하여 어느 정도 인정을 받았지만 생애에 거의 작품을 전시하지 않았다. 1910년의 살롱 데 쟁데팡당과 7점의 조각을 출품한 1912년의 살롱 도톤을 제외하고 주목할 만한 유일한 전시회로는 1919년 서세버럴 싯웰과 오즈버트 싯웰 형제가 기획한 런던 힐스 화랑의 전시회를 들 수 있다. 모딜리아니는 1909년경에 브란쿠시를 만났고 브란쿠시의 영향을 받아 더욱 더 조각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모딜리아니는 다락방에서 굶주린 채 마약과 술 그리고 결핵에 시달리면서도 회화와 조각에 몰두한 것으로 알려졌지만 전형적인 낭만적 천재로 묘사된 이런 이야기에 대한 신뢰할 만한 증거는 없다. G. H. 해밀턴은 모딜리아니의 짧은 생애가 자멸한 천재의 극적인 이야기로 전래되면서부터 그의 작품을 평가하는 데 방해가 되었음을 지적했다. 이런 점은 그의 회화와 조각 전반에 나타난 독자적이며 양식화된 점과 절충적인 특징으로 더욱 설득력이 있다. 모딜리아니는 20세기 초 20년 동안 파리 미술계에 속해 있었지만 당대의 미술 운동이 그에게 끼친 영향은 미미했다. H. H. 에너슨은 다음과 같이 적었다. “모딜리아니는 당시 파리의 예술가들과 관련이 있었으나 20세기의 예술가는 아니다. 그는 우첼로 혹은 보티첼리 시대의 피렌체에서 태어났더라면 더 어울렸을 것이다.” 그의 작품은 양식화되었고 일정한 경향을 보여주지 못했다는 평가도 있다. 그러나 이런 평가에도 불구하고 모딜리아니는 여전히 뛰어난 독창성을 지닌 당대의 예술가 중 하나로 확고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 길게 늘어나 양식화된 그의 인체 표현은 회화와 조각 모두에서 특징이 되었으며 매너리즘에 빠지기는 했지만 그는 인물의 개성 표현에 빼어난 재능을 갖고 있었다. 모딜리아니는 삶에서와 미술 모두에서 절충주의자이며 개인주의자였다. 그의 재능은 충분히 성숙되지 못했으나 양식화된 독특함을 통해 발휘되었다.

서부 러시아 드리나 강 유역의 지방 중심지인 비텝스크에서 하시디즘 계열의 유태교 가정에서 태어난 마르크 샤갈Marc Chagall(1887~1985)은 학창시절 초기부터 화가로서의 재능과 적성을 나타냈다. 샤갈은 정규 교육의 영향을 거의 받지 않았고 그의 작품은 교육에 의하지 않은 민속 미술의 자발성과 야수주의의 보다 세련된 천진난만함을 연상시킨다. 1914년 샤갈은 후원자 비나베르의 도움으로 파리를 방문할 수 있었으며 처음에 라 뤼슈에 살았는데, 그곳에는 수틴, 모딜리아니, 레제, 아르치펜코의 아틀리에가 있었다. 그의 작품은 블레즈 상드라르, 기욤 아폴리네르, 막스 자코브, 앙드레 살몽 등과 같은 아방가르드 작가들의 주목을 받았다. 비텝스크 방문 중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고향에 체류하면서 1915년 벨라 로젠펠트와 결혼했다. 1917년 10월 혁명 후 샤갈은 지방의 미술학교를 재조직하는 임무를 맡으면서 비텝스크의 미술인민위원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현대적인 프랑스의 기법과 개인적인 환상을 결합시킨 화풍이 지방 당국에 의해 받아들여지지 않으면서 모스크바로부터 공식적인 브후테마스VKHUTEMAS(Vysshie Khudozhestvenno-Tekhnicheskiye Masterskiye 고등 기술-미술 작업소) 교육을 도입한 말레비치에 의해 자리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브후테마스는 러시아 혁명 후 모스크바에 설립된 미술학교로 이전의 회화 조각 건축 학교와 스트로가노프 미술학교가 합쳐져 이루어졌다. 1918년 설립 당시에는 스보마스Svomas(Svobodniye gosudarstvenniye khudozhestvenniye masterskiye 자유 정부 미술 작업소)로 불렸으나 1920년에 브후테마스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나움 가보는 브후테마스를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브후테마스는 학교이기도 하고 자유로운 아카데미이기도 하다. 그곳에서는 회화, 조각, 건축, 도예, 금속 세공과 목공 작업, 직물, 타이포그래피를 가르치는 7개의 과가 있어 특수한 직업교육이 이루어졌을 뿐만 아니라 일반적인 토론이 행해졌고, 다양한 문제에 관해 학생들이 주도하는 세미나가 열렸다. 이 세미나에는 일반인들도 참여할 수 있었으며 공식적인 교수가 아닌 예술가라도 강연을 하거나 수업을 할 수 있었다.” 1925년 명칭이 브후테마스에서 브후테인(고등 기술 연구소)으로 변경되었으며 1931년에 중앙당의 통제 하에 학교가 재조직되었다.

샤갈은 1919년 비텝스크를 떠나 모스크바로 갔고 그곳에서 새로 건립된 국립유태극장을 위한 벽화와 무대디자인 작업을 하면서 자서전을 쓰기 시작했다. 그러나 러시아의 예술적 분위기가 자신과 맞지 않다고 생각한 샤갈은 1922년 베를린으로 돌아갔으며 폴 카시레가 의뢰한 자신의 독일어판 자서전을 위한 삽화를 그렸다. 1923년 파리로 간 샤갈은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할 때까지 프랑스를 제2의 고향으로 삼았다. 그는 돔 카페에서 만난 망명 유태계 예술가들의 중심이 되었는데, 그들은 러시아 출신 수틴, 불가리아 출신 쥘 파생, 폴란드 출신 모이즈 키슬링, 이탈리아 출신 아메데오 모딜리아니 등이었다. 이 시기에 샤갈은 앙브루아즈 볼라르를 위해 많은 그래픽 작품도 제작했는데, 고골리의 <죽은 영혼>을 위한 118점의 동판화(1923~25), 라 퐁텐의 <우화>를 위한 100점의 삽화(1927~30), <구약성서>를 위한 105점의 삽화(1930~39)를 그렸다. 그의 자서전 <나의 인생 Ma vie>이 1931년에 출간되었고, 1949년에는 <죽은 영혼>을 위한 삽화가 출간되었으며, 1952년 테리아드 출판사에 의해 라 퐁텐의 <우화>가 출간되었고, 성서의 삽화는 1956년에 출간되었다. 1941년 샤갈은 독일군이 점령한 프랑스를 떠나 미국으로 갔고 1944년 아내 벨라가 미국에서 타계했다. 1946년 뉴욕의 모마에서 대규모 회고전을 가졌고, 이듬해 파리의 국립현대미술관에서 개최된 전시회 개막으로 인해 파리에 돌아와 1948년 이후 프랑스에 정착했다.

샤갈은 두 번의 세계대전 사이 파리에서 꽃피웠던 에콜 드 파리의 유파로 막연하게 분류되고 있지만, 그는 당대의 가장 독창적인 화가들 중 하나였다. 그는 고향의 유태인 마을에서 기억나는 이미지들을 풍부하게 사용하여 비현실적 신화 세계를 창조했는데, 사실적으로 묘사한 대상들을 비자연주의적인 구성 속에 배치했으며 단편적인 장면에 일화적이지 않은 회화적 상징주의를 담았다. 그의 회화는 문학적 해석의 가능성을 배제하는데, 샤갈은 1946년 자신의 회화에 관해 언급했다. “나는 나의 그림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 나의 그림은 문학이 아니다. 나를 사로잡은 이미지를 회화적으로 배열한 것일 뿐이다.” 샤갈은 자신에게 유용한 여러 가르침을 받아들였지만 20세기 초에 널리 확산된 많은 운동이나 사조 중 어느 것도 추종하지 않았다. 아폴리네르는 샤갈의 작품을 초자연적 작품으로 분류하면서 초현실주의를 예고했고, 앙드레 브르통은 샤갈로 인해 은유가 현대 회화에 당당하게 진출했음을 지적했다. 그러나 샤갈은 초현실주의에 동조하지 않았고 무의식적인 상상력을 회화적 표현으로 발산하는 초현실주의 화가들의 교리를 부인했다. 입체주의에 대한 관심은 그의 다수의 작품에서 나타났지만 그는 입체주의자는 아니었다. 색채에 있어서는 입체주의의 한 부분인 오르피즘 화가들의 발견을 도입했으며 로베르 들로네의 ‘동시성’ 개념도 받아들였다. 그는 외부의 영향을 받았으나 작품 모두 독창적이었다. 독일 표현주의 화가들이 그의 작품을 반겼지만 샤갈은 브뤼케 그룹 화가들의 대담한 왜곡보다는 프랑스 회화의 고전적인 자제와 고갱의 장식적인 서정주의와 더욱 공통점을 지녔다.

샤갈은 최고의 하시디즘 유태교 화가였으며, 동시대 화가들 중 정신적으로 그와 가장 근접한 작품을 보여준 사람은 러시아 태생의 이사차르 리바크Issachar Ryback(1897~1934)였다. 1921년 베를린으로 가서 베를린 분리파와 함께 전시하며 노벰버그루페Novembergruppe의 일원이 된 그는 1925년 러시아에 머물렀고 이듬해 마침내 파리에 정착했다. 1918년 11월 베를린에서 결성된 급진적 독일 예술가들의 그룹 노벰버그루페는 진보적인 예술가와 대중 사이의 밀접한 관계를 바탕으로 국민 생활을 새롭게 만들 것을 공언했다. 이 그룹을 주도한 인물은 막스 페히슈타인, 세자르 클라인이었고 후에 하인리히 캄펜동크, 루돌프 벨링, 에리히 부흐홀츠, 오토 뮐러, 한스 푸르만 등이 가담했다. 리바크는 꽃과 동물 그리고 초상화를 그린 예민하고 서정적인 화가로서 그의 작품은 18세기 폴란드에서 일어난 신비주의의 한 분파인 하시디즘의 신비주의를 바탕으로 했으며, 그와 고향이 같았던 샤갈과 마찬가지로 어린 시절을 보낸 유태계 리투아니아인들의 환경에 대한 기억이 작품의 근간을 이루었다. 평론가 발데마르 게오르게는 리바트를 “누더기나 넝마를 비단으로 변형시키는 유태인 구역의 공상가”라고 평했다. 1933년 영국을 방문하여 케임브리지 대학 미술협회의 후원으로 전시회를 개최한 후 얼마 안 되서 척추질환으로 사망했다.

폴란드계 프랑스 화가 모이즈 키슬링Moise Kisling(1891~1953)은 크라쿠프 미술 아카데미에서 요세프 판키에비치의 지도를 받았으며 그를 통해 인상주의자들, 특히 보나르와 뷔야르의 작품을 알게 되었다. 키슬링은 1910년 몽파르나스에 정착했고 그곳에서 유명 인물이 되어 모딜리아니, 샤갈의 친구가 되었다. 1911~12년 세레에 있는 예술가 그룹의 일원이 되었는데 여기에는 피카소, 브라크, 후안 그리스, 시인 막스 자코브가 참여하고 있었다. 이 시기에 그는 입체주의와 앙드레 드랭의 영향을 받았다. 제1차 세계대전 동안 외인부대에 자원했고 이로 인해 프랑스 시민권을 취득했다. 성숙기의 그의 양식은 매끈하고 우아한 소묘, 그리고 섬세하게 조율된 색채를 특징으로 하며, 그는 초상화가로서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다.

에콜 드 파리의 활동은 다양했지만 1940년대까지는 기본적으로 구상 미술을 추구했다. 1930년대 초 추상-창조협회가 결성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때까지도 프랑스에서 비재현적 추상은 확고한 기반을 구축하지 못하고 있었다. 1950년대에 에콜 드 파리, 또는 누벨 에콜 드 파리라는 용어가 부활하면서 제1회 비엔날레 드 파리가 개최될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되었다. 이 용어는 1940년대 후반부터 유행하기 시작한 표현적 추상이나 살롱 데 레알리티 누벨과 관련되어 부활한 구성주의를 의미하는 말로 사용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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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왕녀 마르가리타


<어린 왕녀 마르가리타>는 에스파냐 필리페 3세의 딸인 오스트리아의 앤이 벨라스케스(1599~1660)에게 주문한 작품이다. 네 살 난 공주가 초롱초롱한 눈으로 바라보는 장면으로 이 작품은 18세기에 프랑스 궁정의 수집품이 되었다. 벨라스케스는 타계하던 해인 1660년에 동일한 공주를 그렸는데 미완성으로 남겼고 이를 제자 마소가 완성시켰다. 마소는 1644~45년에 <어린 왕녀 마리아 테레사>를 그렸는데 시기적으로는 <어린 왕녀 마르가리타>보다 앞서 그린 것이지만 구성에 있어서는 스승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정된다. 마소가 이런 구성을 먼저 시도했다고 하더라도 색채를 밝게 사용한 벨라스케스의 작품과는 인물의 개성과 생동감에서 비교가 되지 않는다.
스페인의 세비야에서 1599년에 태어난 벨라스케스는 1610~16년에 매너리즘과 에스파냐 바로크의 과도기에 속한 프란시스코 파체코에게서 수학했고 그의 딸과 결혼했다. 파체코로부터 견고한 기술적 기반인 이탈리아와 북유럽 르네상스 대가들에 관한 지식을 습득했지만, 그는 조숙해서 18세에 오히려 스승에게 영향을 끼칠 정도가 되었다. 파체코의 양식은 아카데믹한 냉정하고 건조한 화풍이었지만, 벨라스케스는 특유의 냉정한 사실적 태도와 유연한 물감 처리로 스승의 차가운 양식에 생기를 불어넣었다. 말년에 벨라스케스의 붓질은 한층 활기차고 자유로워졌으며 <어린 왕녀 마르가리타>의 청록색, 진홍색, 은색에서부터 동일한 왕녀를 모델로 한 타계한 해인 1660년 작품(마소가 완성함)의 오렌지색과 은색에 이르기까지 은빛 내에서도 새로이 밝게 빛나는 색채가 나타났다.
<어린 왕녀 마르가리타>는 루브르 뮤지엄에 소장되어 훗날 프랑스 화가들에게 규범이 되었다. 화가 지망생이던 에드가 드가와 에두아르 마네는 루브르에서 대가들의 작품을 모사하면서 다양한 양식을 익혔으며 <어린 왕녀 마르가리타>를 모사하면서 벨라스케스의 양식을 익혔다.드가는 법률을 공부하다가 그만두고 1855년 에콜 데 보자르에 입학하여 앵그르의 제자이자 숭배자였던 루이 라모트에게서 소묘를 배웠다. 1856년 가족들이 살고 있던 나폴리와 이탈리아의 여러 도시를 방문했으며 3년 동안 로마에 머물렀다. 이탈리아에서 그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 화파를 비롯한 15세기와 16세기 화가들의 프레스코화를 모사하면서 기초를 닦았다. 이 훈련은 파리에 돌아온 이후에도 루브르에서 계속되었다. 드가는 1861년 루브르에서 벨라스케스의 작품을 모사하다 마네를 만났고 그를 통해 카페 게르부아에 모이던 젊은 인상주의 화가들을 소개받았다.
‘인상주의의 아버지’로 불리는 마네는 엄격한 법무관 관리의 아들로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는 1850년 고전주의 화가 쿠튀르의 아틀리에에 들어가 6년 동안 수학했다. 그러나 아카데믹한 스승의 고전적인 훈련보다는 루브르에 가서 대가들, 특히 벨라스케스, 무리요, 리베라 등 에스파냐 화파를 연구하고 그 영향을 받았다.
피에르-오귀스트 르누아르도 벨라스케스의 영향을 받았는데, 그가 1864년에 그린 <로마이느 라코>는 루브르에서 본 <어린 왕녀 마르가리타>에서 영감을 받아 그린 것이다. 열세 살 때 파리 도자기 공장에서 일을 하기 시작했기 때문인지 르누아르의 작품에는 늘 18세기의 경쾌한 장식기법과 로코코 화가 부세의 매력적인 색채가 남아 있다. 그는 1862년에 앵그르의 제자였던 스위스 화가 샤를 글레르의 아틀리에에 들어갔고 그곳에서 모네, 시슬레, 바지유 등과 지속적인 친분을 맺었다. 이들 가운데 르누아르는 가장 개성적인 인상주의 화가였다. 검정색을 배제한 강한 순색으로 한정되는 이른바 ‘무지개 색채’의 도입과 바토에서 유래된 색채의 분할주의 기법의 보다 완전한 사용, 윤곽선의 경시 등이 그의 특징이다. 인물상은 동료 화가들보다 그의 작품에서 더 큰 비중을 차지하는데, 사랑스런 여인과 어린이, 꽃과 아름다운 풍경을 주로 그렸다.
장-자크 엔네도 <어린 왕녀 마르가리타>에서 영감을 받아 <엔리에테 제르맹>을 그렸고, 제임스 애봇 맥네일 휘슬러도 영감을 받아 <회색과 초록색의 조화: 미스 시셀리 알렉산더>를 그렸다. 미국 화가 윌리엄 메릿 체이스도 1899년에 <어린이, 벨라스케스의 유산>을 그려 벨라스케스에 대한 존경심을 표했다.
미국에서 태어나 프랑스에서 공부하고 주로 영국에서 활약한 휘슬러는 처음부터 회화를 수학한 것은 아니다. 미국 육군사관학교에서 제적된 뒤 미국 연안측량부 제도원으로 에칭을 배운 것이 화가로서의 출발점이 되었다. 1855년 파리로 간 그는 마르크 샤를 가브리엘 글레르 문하에서 수학했으며 루브르에서 대가들의 작품을 모사하면서 평생 찬탄의 대상이 된 벨라스케스를 알게 되었다. 그리고 일본 판화와 동양의 미술품, 공예품 전반에 열정을 쏟았다.
엔네, 휘슬러, 체이스의 작품과 <어린 왕녀 마르가리타>를 나란히 놓고 보면 200년 전에 그려진 벨라스케스의 작품이 명암의 대비와 은은하면서도 밝은 색상에 의해 더욱 생동감이 있으며 붓질이 자유롭고 활기차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오른손을 의자에 올려놓은 것은 벨라스케스의 회화적인 의도로 어리지만 공주의 의젓함을 나타내기 위해서였다.
벨라스케스는 리베라로부터 신속하고 섬세한 붓놀림과 프리마 묘법(밑그림 없이 바탕에 직접 그리는 화법)을 사용하여 200년 후에야 나타날 인상주의적인 색의 분할을 보여주었는데, 이런 방법을 마네와 피렌체 태생의 미국 화가 존 싱거 사전트로 대표되는 대담한 붓놀림을 소유한 화가들에게 계승되었다.
벨라스케스는 1622년에 마드리드를 잠시 방문했고 이듬해 재상 올리바레스 백작의 초대를 받아 다시 그곳으로 가서 펠리페 4세의 궁정화가가 되어 여생을 마드리드에서 보냈다. 궁정화가로서의 그의 임무는 에스파냐 궁정 초상화의 경직되고 의례적인 양식의 전통에 개성을 부여하는 것이었다. 벨라스케스는 모델들로 하여금 자연스러운 포즈를 취하게 했으며 장신구를 생략하여 인물에 특성을 부여했다. 궁정 컬렉션 중 티치아노의 초상화를 보고 영감을 받았지만 벨라스케스의 작품은 티치아노를 훨씬 뛰어넘어 자연스러움과 단순함을 좀더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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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메시스에는 거의 같은eikon 것도 있을 수 있지만

 

 플라톤이 『소피스트 Sophists』에서 아름다움은 단순한 모방으로만 성취되는 것이 아니라 실재를 왜곡할 때도 나타나는 것임을 밝히고 있어 흥미롭다.
미메시스에는 거의 같은eikon 것도 있을 수 있지만 유사한phantasma 것도 있을 수 있으므로 모방을 참되기도 하나 동시에 그렇지 않다고도 본 것이다.
왜곡된 모방도 미적 판단에 작용한다는 사실을 플라톤이 알고 있었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대목이다.7)

“만약 그들 - 조각가와 화가들 - 이 아름다운 건물의 참 비례를 나타낸다면, 아다시피 우리가 먼 거리에서 봤을 때 윗부분은 아주 작고 아랫부분은 우리 가까이 있으므로 크기 때문에 예술가들은 진실을 떠나 실제 비례들이 아닌 그들이 만들고자 하는 이미지들로 작업하게 되는데 그것들은 아름답게 보일 것이다.”


‘아름답게’란 말은 미적 판단으로 모방이 미의 본질이라는 이론에 기초한 평가이며 동시에 주관적인 주장이다.
플라톤의 말은 실재와는 다르게 모방되었더라도 그 오브제의 가치를 미에 둘 수 있음을 시사한 것으로 “아름답게 보일 것”이란 그의 말을 “비교적 아름답다”란 말로 바꿔 이해할 수도 있다.

플라톤은 예술가의 상상력을 인정했는데 상상력은 심리적 감성들과 관련 있다.
미에 대한 사랑은 실재에 대한 것이 아니라 미적 기쁨을 느낄 수 있는 형이상학적 모방에 대한 것이다.
플라톤은 기본적으로 사물의 구성 성분이나 특성을 본래의 아름다움으로 보고 이를 ‘본질미 intrinsic beauty’라고 했다.
미의 특성이 실재의 특성에 의해 정의되거나 그것에 의해 예증된다고 보며, 실재에 대한 미메시스에는 결정적인 순서와 측정이 있다고 믿고8) 미 자체는 정의되지 않더라도 실재의 특성과 존재 조건이 되는 부분들의 통일에 의해 생기는 것으로 보았다.9)

플라톤은 어떤 사물이 아름답다는 것은 뚜렷한 특성을 지녔느냐 그렇지 않느냐 하는 점을 발견하는 데서 결정된다고 보았으므로 정신에 불명료한 것과는 달리 물질의 고유한 혹은 구조적 특성을 지성의 본질과 같은 종류로 간주했다.10)
사물이 본질적으로 아름다운 이유는 “늘 그것의 참 본질 속에서만 아름답기”11) 때문으로 보았으며, 본질미의 특유함이 곧 관람자에게 일종의 즐거움이 되는 것12)으로 보았다.
『필레부스』에서 플라톤은 본질미에 대한 이해를 고통이 없는 “순수한 pure” 즐거움으로 확실시 하면서 판단을 편벽되게 하거나 왜곡시키는13) 고통은 본질미와 결코 함께 할 수 없다고 보았다.
상호 관련된 ‘본질’과 ‘순수’의 개념들을 미적 경험의 안전성을 보증하는 데 사용했는데 이런 개념들이 아름다운 사물 과class에 대한 엄격한 한계 결정으로 이끈다.

플라톤은 『향연 Symposium』(BC 384경)에서 절대미에 관해 장황하게 언급했는데 비교적 아름다운 것들과는 달리 본질적으로 아름다운 것들은 절대미를 닮았다면서,19) 절대미는 견해에 따라서 공정하거나 그렇지 않게 될 수 없는 성질의 것임을 분명히 했다.20)
에로스에 의해 인간이 소유하게 된 것이 형체미로부터 정신미로, 관례, 법, 과학 자체들의 미로, 그리고 최종적으로 절대미 자체로 발달되는 것으로 보았다.
“에로스에 의해”라는 그의 수동형 표현을 주의 깊게 봐야 한다.
그의 이데아나 형상에는 절대선, 절대정의, 절대미 등이 있는데 그것들은 눈으로 볼 수 있는 성질의 것들이 아니라 단지 지적 직관에 의해서만 볼 수 있는 것들이다.
직관으로 본다는 표현은 물론 깨달음을 뜻하며 플라톤에게 이런 정신 활동은 오로지 수학과 신비적 통찰 두 가지 뿐이었다.

플라톤은 모든 아름다운 사물이 끊임없이 변하더라도 절대미만큼은 한결같다고 보았기 때문에 눈에 보이는 사물들은 일시적인 것들에 불과하고 보이지 않는 사물들의 형상들을 영원한 것들로 간주했다.
수학적 측정에 의해 부분들이 비례 있게 모방된 것을 아름다운 오브제로 간주했는데 미에 대한 그의 견해를 다음의 말에서 알 수 있다.21)

“측정metron과 비례symmetron의 특색들은 필수적으로 … 미와 탁월함을 구성한다.
플라톤은 절대미의 구현을 대상에 대한 측정과 비례의 특색을 얼마만큼이나 나타냈느냐에 따라서 미적 판단이 적용되는 것으로 보았다.
시각적 대상은 이데아 세계의 유일한 절대적인 관념을 닮은 것이므로 플라톤에게 예술품은 모방의 모방imitations of imitations이었다.
절대미를 닮은 대상을 눈으로 파악할 수 있는 데까지 모사하는 데서 미적 탁월함이 드러난다고 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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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수주의



아카데미의 공식 미술에 대한 반발로 시작된 비자연적인 색채를 사용한 회화운동으로서의 야수주의는 당시 인상주의에 대한 반동으로 일어난 운동 가운데 가장 격렬했다. 1905년경부터 함께 작업하던 프랑스 화가들을 중심으로 전개되었고, 귀스타브 모로의 아틀리에에서 수학하던 마티스, 마르케, 망갱, 카무앵과 르아브르 출신 뒤피, 프리에스, 브라크와 샤투 지방 출신 드랭, 블라맹크, 그리고 장 퓌와 네덜란드 출신의 반 동겐이 이 운동에 참여했다. 이들은 폴 시냐크 및 신인상주의자들과 의견을 같이하며 인상주의는 피상적인 회화이며, 빛과 대기를 포함하면서 시각적인 인상을 단순히 캔버스에 담는 데 그쳤다고 생각했다. 이들은 주로 폴 고갱과 빈센트 반 고흐의 영향을 받아 색채를 표현수단으로 삼았으며, 회화를 단순히 눈으로 본 현실을 옯기는 것이 아니라 또 하나의 새로운 현실로 인식하고 과거 화가들보다 색채를 자의적으로 사용했다. 이들은 순수한 색채 사이의 균형을 유지하는 동시에 거칠고 충격적인 부조화를 의도적으로 추구했다.




야수주의가 공식적으로 알려진 것은 1905년 제3회 가을전을 통해서였다. 그해 10월 18일부터 11월 25일까지 열린 도톤(가을전)에는 앵그르, 마네, 르누아르 등 지난 30년 동안 프랑스 예술가들이 제작한 작품 1,636점이 소개된 대규모의 전시회였다. 따로 마련된 전시장에는 마티스를 중심으로 모이는 드랭, 블라맹크 등의 화가들의 작품이 소개되었다. 마티스의 밝은 색을 사용하여 그린 <모자를 쓴 여인>과 <선원>, 드랭의 경쾌한 그림 <콜리우르의 항구>, 블라맹크의 아름다운 신기루 같은 <말리의 세느 계곡>이 다른 작품들과 함께 전시되었다. 그곳에는 망갱의 <시에스타>와 발타가 보라색을 주로 사용하여 그린 <선원>도 있었다.(뒤샹 26) 젊은 화가들은 나이 많은 마티스를 ‘박사님’이라고 부르면서 그의 주위에 모였다.




1887~88년 파리에서 법률가의 자격을 얻은 뒤 생캉탱의 한 법률사무소에서 서기로 일하다가 1890년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앙리 마티스(1869~1954)는 처음에는 아카데미 줄리앙에서 수학하다가 1892년 자신의 취향에 더 잘 맞는 귀스타브 모로의 지도를 받기 위해 에콜 데 보자르로 옮겼다. 모로는 고답파의 몇몇 시인들과 마찬가지로 오래 전에 사라진 문명과 신화 같은 낭만적 수단을 이용하여 인공적으로 고대 세계의 환영을 창조한 화가였다. 15세기 이탈리아 거장들을 연상시키는 정교하고 화려한 양식을 구사했으며, 시각적인 이미지보다는 문학적 관념을 중시한 모로의 회화는 당대 문인들의 상상력을 자극했다. 모로는 작품을 통해서는 그러하지 못했으나 교육자로서 20세기 화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 마티스는 에콜 데 보자르에서 마르케, 망갱, 카무앵, 루오 등과 함께 공부했다.




마티스가 인상주의를 처음 접한 것은 1897년 룩셈부르크에서 열린 카유보트의 유작 전시회에서였으며, 이때부터 색채는 그의 회화에서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고갱, 반 고흐, 세잔의 작품을 접하면서 마티스는 자신만의 독자적인 양식을 진전시키기 시작했다. 아카데미 카리에르에서 작업 중이던 1899년 드랭을 알게 되었고, 드랭은 1901년 마티스를 블라맹크에게 소개했다. 후에 야수주의자로 불리게 되는 젊은 화가들 사이에서 이미 지도자로 여겨지고 있던 마티스는 1903년 살롱 도톤의 창설에 참여했고, 다른 야수주의 화가들과 함께 1905년 살롱 도톤에서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마티스를 비롯하여 드랭과 블라맹크는 자연주의에 바탕을 둔 인생과 느낌에 대한 재발견에 심취했는데, 이같은 경향은 자연주의 회화에서, 그리고 많은 작가의 문학작품에서 20세기 전부터 나타난 적이 있었다. 모리스 드 블롱드는 1895년에 발표한 <자연주의에 관한 에세이>에서 상징주의와 낭만적 퇴폐주의에 반발하면서 적었다. “우리의 선조들은 비실제의 문화, 꿈의 예술, 새 떨림의 탐구 등을 가르쳤다. 선조들은 맥이 있는 꽃, 암흑, 그리고 유령을 좋아했고, 그들은 논리에 맞지 않는 영지주의자들이었다. 우리에게 그들의 거대한 범신론적 예술은 아무런 추진력을 주지 못한다.” 소설가 찰스 루이 필립은 1897년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 적었다. “이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야만적이며 ... 사람들은 자연적 인생의 영상을 가져야만 한다. ... 오늘날은 열정의 시대이다.”




‘야수’라는 명칭은 1905년 <질 블라스 Gil Blas> 지에 실린 평론가 루이 보셀의 1905년 살롱 도톤에 대한 평문에서 비롯했다. 보셀은 야수주의 회화들 가운데에 함께 전시된 알베르 마르크의 조각 <어린이의 토르소>에 대해 적었다. “이 흉상의 순수성은 순수한 색채의 소란 가운데서 놀라움으로 다가온다. 그것은 마치 야수들에 둘러싸인 도나텔로와 같다.” 이 명칭은 당시 평론가와 미술품 감식가들 사이에서 지배적이던 견해, 즉 야수주의 회화는 유능하고 재능은 풍부하지만 균형 감각을 상실한 채 제멋대로 날뛰는 화가들의 그림이라는 시각을 단적으로 드러낸다. 1909년에 이르러 이 운동은 종착점에 도달했다. 그룹의 화가들은 대부분 야수주의에서 벗어나 다른 방향으로 나아갔다.




야수주의는 한마디로 조직적으로 나타난 프랑스의 첫 표현주의였다. 20세기 회화의 영역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야수주의는 그 영향력이 유럽 전역에까지 미쳤는데, 특히 독일에서는 순수한 색채를 사용하는 야수주의의 새로운 기법이 드레스덴의 브뤼케(다리) 그룹 화가들과 바실리 칸딘스키를 중심으로 한 뮌헨의 블라우에 라이터(청기사) 그룹 화가들에게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 브뤼케는 같은 해인 1905년에 결성된 그룹으로 독일의 첫 표현주의 운동을 주도했다. 프랑스 표현주의와 독일 표현주의의 다른 점은 브뤼케 그룹 화가들도 밝은 색을 선호했지만 라틴족과는 달리 원시적 요소가 물신 풍기는 튜튼족 특유의 그림을 그렸다.




야수주의자들은 회화의 표현성을 강조하기 위해 대상의 형태를 왜곡하면서 의도적으로 기법상의 서투름과 부주의함을 추구했다. 그러나 야수주의는 독일 표현주의 정신과는 대비되는, 엄격한 고전적 프랑스 전통의 테두리 안에 늘 머물러 있었다. 독일 표현주의에서는 대개 대상과 이에 대한 화가의 반응이 가장 중요하게 고려되었지만, 야수주의자들은 균형적이고 통일성 있는 구도를 창출하려고 했다.




표현주의는 일시적인 현상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조각, 음악, 댄스, 영화 등 모든 시각예술에서 주류를 이루었다. ‘표현’이란 말을 처음 사용한 사람은 마티스였다. 그는 1908년 선언문 형식의 에세이 <화가의 노트>에서 회화를 궁극적으로 표현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화가의 노트>에 적었다. “나의 가장 큰 목적은 내 자신을 표현하는 것이다. ... 내게 있어 표현은 그림의 총체적인 배열이다. 신체가 차지할 공간, 그 주변 공간, 그 비율 등의 모든 것이 여기에 포함된다. 구성은 화가의 감정을 표현할 수 있는 요소들을 장식적으로 배열하는 기술이다.”




야수주의의 주요 화가 앙드레 드랭(1880~1954)은 1895년부터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여 1898년부터 아카데미 카미요에서 공부했으며 그곳에서 마티스를 만났다. 1900년에 블라맹크를 만나 그와 함께 작업실을 사용했다. 1901년 베르냉-죈 화랑에서 열린 반 고흐 전시회를 보고 강렬한 인상을 받았으며 군복무를 마친 후 1904년 다시 붓을 잡았을 때 야수주의 양식을 채택했다. 그 해 살롱 데 쟁데팡당에 작품을 출품했고, 여름에는 콜리우르에서 마티스와 함께 그림을 그렸으며, 살롱 도톤에서 열린 유명한 야수주의 전시회에 참가했다.




모리스 드 블라맹크(1876~1958)는 1893년부터 기계공으로 일하면서 자전거 경주를 했고, 정식 미술교육을 받지 않았다. 부모는 음악가였고 블라맹크도 생계를 위해 카페의 오케스트라에서 바이올린을 연주하면서 한편으로 부정부주의 신문에 글을 기고하거나 포르노 소설을 썼다. 1900년 드랭을 만나 샤투에서 작업실을 함께 사용하면서 어두운색을 사용하며 개성적인 그림을 그렸다. 1901년 베르냉-죈 화랑에서 열린 반 고흐 전시회를 보고 깊은 감명을 받은 그는 어두운 색보다는 격렬함을 지닌 밝은 색을 사용하기 시작했으며 반 고흐의 표현적인 방식을 극단으로 몰아가며 표현적인 작품을 그렸다. 드랭을 통해 알게 된 마티스는 블라맹크를 설득하여 1905년 살롱 데 쟁데팡당과 도톤에 야수주의 화가들과 함께 참여하도록 했다. 1906년 화상 볼라르는 그의 작품 전부 구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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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포르멜




앵포르멜Informel은 1945년경부터 10여 년 동안 미국의 추상표현주의에 상응하여 유럽에서 전개된 회화 운동으로 1950년 프랑스의 평론가 미셸 타피에가 본래 볼스를 염두에 두고 이 용어를 창안해내어 사용하기 시작했지만 1951년경에는 포트리에, 뒤비페, 미쇼, 리오펠 등의 작품을 언급할 때도 이 용어를 사용했다. 이 용어는 입체주의에서 나온 어느 정도 엄격한 추상 경향이나 몬드리안과 데 스테일 예술가들이 보여준 것 같은 다양한 기하 추상 형식과는 대조적으로 잠재의식의 환상을 직접 표현해내는 조르주 마티외가 창안해낸 영어인 ‘서정적 추상’ 작품에 일괄적으로 적용되었다.




앵포르멜의 선구자로 독일 출신 망명 예술가인 볼스Wols(알프레트 오토 볼프강 슐체-바트만Alfred Otto Wolfgang Schulze-Battmann, 1913~51)가 있다. 베를린 태생으로 드레스덴에서 성장한 독일계 프랑스 화가 볼스의 아버지는 작센의 대법원장이었다. 볼스는 처음에는 바이올리니스트가 되려고 공부하다가 프랑크푸르트 아프리카학 연구소에서 민족학과 원시 민족에 대한 인류학을 공부했다. 어렸을 때부터 소묘에 재능을 보였지만 모홀리-나기의 작품을 보고서야 회화에 대해 진지하게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고 잠시 동안 바우하우스에서 공부했다. 1932년 파리로 가서 볼스라는 이름으로 자신 작업을 하여 생계를 유지하며 1937년 만국 박람회에서 인정을 받았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파리로 돌아와 장-폴 사르트르, 시몬 드 보부아르와 가까이 교류하면서 그들의 저서에 삽화를 그렸다. 볼스는 불규칙한 생활과 가난, 과음으로 건강이 나빠져서 1951년에 사망했다. 볼스는 생전보다는 사후에 더 유명해져서 ‘엥포르멜의 원시인’, 표현적인 추상의 위대하고 독차적인 거장으로 여겨지게 되었다. 그의 작품은 1940년대 말과 1950년대에 타시즘 미술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그의 수채화는 ‘정신적으로 위축된’ 성격을 지니는데, 미셸 쇠포르는 이를 “조직된 정신착란”이라고 했다.




철학과 법학을 공부한 뒤 1942년부터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조르주 마티외Georges Mathieu(1921~)는 1944년에 비구상 추상을 그리기 시작했다. 당시 유행하던 기하 추상에 반대하고 표현적 추상을 내세운 에콜 드 파리의 창시자의 한 사람인 그는 1947년 파리에 정착했고, 볼스의 영향을 받아 앵포르멜 경향을 확립했다. 그의 작품은 또한 미국 추상표현주의와도 유사했다. 마티외는 서체 같은 요소를 이용하여 사전 계획 없이 영감에 고취된 듯이 매우 빠른 속도로 작업했다. 그의 명성은 빠른 시간 내에 국제적으로 확산되었고, 그의 작품은 표현적 추상과 제스처 회화가 인기를 더함에 따라 널리 전시되었다.




부유한 포도주 상인의 아들로 르 아브르에서 태어난 장 뒤비페Jean Dubuffet(1901~85)는 어린 시절부터 뛰어난 재능을 보여 일찍부터 그림을 배우기 시작했다. 사교계의 미술애호가로 지내며 조금씩 그림을 그리다가 1924년 그만두고 이듬해 르 아브르에서 아버지의 포도주 사업을 물려받았다. 1930년 파리에서 포도주 도매업을 시작했다. 1930년대에 다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지만 본격적으로 그린 것은 1942년 이후였다. 첫 전시회는 44살되던 해인 1945년이었고 이듬해 스스로 ‘오트 파트: 미로볼루스 마카담사’라고 명명한 전시회를 열었다. 여기에 전시된 작품들은 자갈, 깨진 병조각 등이 섞인 회반죽, 아교, 퍼티, 아스팔트 등으로 구성되었으며, 표면에 긁힌 자국과 낙서가 더해져 오래된 벽과 같은 느낌을 주었다. 뒤비페는 전통적인 미술 재료를 거부하고 1957년 자신이 말한 대로 “모든 버려진 가치들을 새롭게 주목받도록 이끌어낸” 여러 경향들의 선구자이자 대표적인 예술가로 부각되었다. 그는 아이들의 드로잉, 슬럼가 벽의 낙서, 교육을 받지 못한 사람이나 정신이상자의 그림 등 문화적 전통의 영향을 받지 않은 모든 종류의 개인적 경험의 즉각적인 기록에 관심을 기울였다. 에드워드 루시-스미스는 뒤비페가 “시점을 무시하고, 윤곽선을 단순화하며, 원시적이고 나이브한 작품처럼 성을 강조하면서 인물을 그렸으며, 이들을 두꺼운 반죽 위에 긁적였다”고 적었다.




1947년 뒤비페는 아르 브뤼트Art Brut라는 용어를 만들어내면서 아동, 정신장애자, 미술계와 동떨어진 사람들이 만든 작품들로 이루어진 전시회를 마련했다. 그는 이런 종류의 미술을 장려하기 위해 아르 브뤼트사Compagnie de l'Art Brut를 설립했다. 아르 브뤼트는 프랑스어로 ‘조야한 미술’이란 뜻이다. 영어로는 로저 카디널의 <아웃사이더 아트 Outsider Art>)1972)의 제목이 이런 유형의 작품들을 포괄하는 데 사용된다. 뒤비페는 “순수한 충동의 산물이며, 세련된 미술이 지속적으로 기반을 둔 카멜레온 같은 혹은 앵무새 같은 과정들에 전혀 의존하지 않는” 아르 브뤼트는 모든 사람이 가지고는 있지만 교육적 훈련과 사회적 통제에 의해 억압되어버린 독창성의 힘이 나타난 증거라고 주장했다.




뒤비페는 1954년 리브 고슈 화랑에서 신문, 벽돌, 금속 조각 등 버려진 물건들을 쌓아 만든 소형 작품들로 전시회를 열었다. 1956년 얇은 금속 조각, 나뭇잎, 말린 꽃, 나비 날개 등이 결합된 채색된 캔버스에서 잘라낸 작은 조각들로 이루어진 아상블라주 전시회를 열었다. 뒤비페는 매우 상반된 평가를 받는 예술가이다. 그가 1950년대와 1960년대의 보다 전위적인 여러 경향의 도래를 예고한 것은 사실이며 이런 점에서 G. H. 해밀턴의 다음과 같은 지적은 타당하다. “슈비터스보다 더욱 철저하게 ... 기존의 모든 예술적, 미학적 기준을 배격함으로써 뒤비페는 우리 주변의 모든 환경을 예술가들이 이용할 수 있는 길을 열었다. 그는 아름다움과 추함을 구분하는 어떤 가능성도 부정함으로써 1960년대 정크 문화와 팝아트가 나올 수 있는 미학적 조건을 마련했다.”




벨기에계 프랑스 시인이며 화가 앙리 미쇼Henri Michaux(1899~1980)는 의학을 공부하다가 그만둔 후 1922년부터 글을 쓰기 시작하여 문학계에서 명성을 쌓았고 1924년 파리로 갔다. 1927~37년 터키, 이탈리아, 포르투갈, 남아메리카를 여행하며 많은 글을 썼지만, 소묘는 거의 그리지 않다가 1937~40년에 본격적으로 그림에 매진하여 검은색 배경 위에 과슈로 그리는 독자적인 양식을 발전시켰으며, 이 양식을 스스로 유령주의라고 명명했다. 초현실주의 화가들의 자동주의 기법으로 그린 이 서정적이면서도 꿈 같은 추상 작품들은 “심령 이미지, 신화, 유령이 존재하는 모호한 세계“를 창출해냈다. 미쇼의 초기 과슈 작품은 회화를 정신적 즉흥성에서 비롯된 예술로 취급한 앵포르멜의 선구적인 역할을 했다.




1955년 프랑스 시민권을 받은 미쇼는 환각제 메스칼린을 복용한 상태에서 소묘를 하기 시작했다. 환각상태에서 제작한 소묘 작품에서는 달라진 기법과 정신상태의 변화가 나타났다. 새로운 기법은 펜을 이용한 소묘였는데 세부는 정교하고 꼼꼼하게 묘사되었으며, 화면 위에 관심을 집중시키는 특정한 중심 없이 전체적으로 균일한 올오버 양식을 보여주었다. 미쇼는 마약을 예술적인 목적으로 실험했다. 그는 메스칼린을 복용했을 때의 예민한 상태를 묘사했다. “자신과 모든 것을 넘어선 흥분상태이다. 즉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초자연적인 흥분상태이며 끊임없이 마음을 진정시키기도 하고 자극시키는 동시에 감정이 분출되며 해방된 상태로 명상에 잠긴 기분이다. ... 받는 것인지 주는 것인지 알 수 없는 큰 기쁨을 맛볼 수 있다. ... 형언할 수 없이 마음이 후련해지는 정신상태에서 점점 더 흥분하게 된다.” 1960년대에도 메스칼린 환각상태에서 그리는 소묘를 완전히 그만두지는 않았지만 과슈와 다색 크레용, 인디언 잉크를 혼합한 재료로 작업하면서 앵포르멜 회화의 과격한 비정형성과는 반대로 보다 통일된 구성과 구상적인 암시를 보여주었다. 실질적으로 약에 의한 환각상태에서 제작하지 않은 작품에서도 메스칼린을 복용하고 작업한 경험은 구성의 근간을 이루었다.




몬트리올 태생 캐나다 화가 장-폴 리오펠Jean-Paul Riopelle(1923~)은 6살 때부터 앙리 비송으로부터 미술 교육을 받고 1943년에 에콜 뒤 뫼블에 입학했다. 그곳에서 폴-에밀 보르뒤아스Paul-Emile Borduas(1905~60)를 중심으로 형성된 그룹의 회원이 되었으며 1946년 뉴욕에서 열린 이 그룹의 첫 전시회에 참가했다. 보르뒤아스는 1928~30년 파리에 체류하며 스테인드 글라스를 제작하고 몬트리올로 돌아온 뒤 1933년까지 교회 장식가로 활동했으며 1939년에 현대미술협회의 초대 부의장이 되었다.




거의 프랑스에 거주하면서 작업한 리오펠은 1947년 무렵 풍부하고 다양한 색채로 된 비늘 같은 형태들이 가득 찬 이미지를 만들었으며 이를 묽은 매체를 뿌리는 기법으로 완성했다. 1949~50년 무렵에는 튜브에서 짜낸 유화 물감처럼 보다 두터운 물감을 뿌리는 것이 아니라 실타래의 실처럼 서로 뒤엉키게 하는 기법으로 좀더 작은 형태들이 들어찬 이미지를 만들었다. 그 후 이런 고리 모양의 선들은 모든 방향에서 화면을 가로질러 서로 엇갈리면서 조밀한 막을 형성했고 화면은 더욱 빽빽해졌다. 1952~53년 이런 선들은 줄어들었으며 팔레트 나이프로 두껍게 겹쳐 칠함으로써 화면을 완전히 뒤덮은 작은 물감들과 결합되었다. 리오펠은 이런 회화로 처음 국제적인 주목을 받았다. 1960년대와 1970년대를 거치면서 기본적으로 분절된 형태와 두터운 매체를 사용하는 방식을 유지하면서 격렬하게 그은 선들과 그 형태들을 결합시켰다. 그는 많은 작품을 제작했으며 다양한 매체를 사용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독일계 프랑스 추상화가 한스 하르퉁Hans Hartung(1904~89)도 앵포르멜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라이프치히, 드레스덴, 뮌헨의 아카데미에서 수학하고 그곳에서 철학과 미술사도 공부한 하르퉁은 뮌헨에서 칸딘스키를 만났으며 마르크의 작품에 관심이 많았다. 1922년 추상회화를 시작했고 1931년 드레스덴에서 첫 개인전을 열었으며 1935년 망명하여 파리에 정착했다. 이후 스페인에서 투옥되었고 전쟁 기간 동안에는 프랑스 외인부대에서 복무했다. 전쟁 이후 파리로 돌아갔으며 1946년 프랑스인으로 귀화했다. 하르퉁은 에콜 드 파리의 중요한 구성원으로 활동했으며 추상화와 제스처 회화를 독창적으로 발전시켜 겉으로 보기에 서체를 연상시키는 검정색의 두터운 선과 커다란 얼룩들로 회면을 채우는 작품을 제작했다. 그는 앵포르멜과 타시즘의 선구자로 간주되고 있다.




이탈리아에서는 알베르토 부리Alberto Burri(1915~95)가 앵포르멜 운동에 가담했다. 처음에는 의사로 활동하다가 전쟁 중 미군에 붙잡혀 1944년 텍사스에서 전쟁 포로로 수용되어 있으면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1945년 로마로 돌아갔고 1948년 로마에 있는 마르게리타 화랑에서 첫 개인전을 열었다. 부리는 낡고 거친 삼베조각과 숯덩이, 찌그러지고 녹슨 금속 등을 이용한 개성적인 콜라주에 추상 기법을 결합시켜 낡고 폐기된 재료들을 우아하고 아름다운 구성물로 만들었다. 부리의 작품은 낡아빠지고 버려진 폐품 잡동사니와 쓰레기가 환기시키는 힘을 이용한 최초의 작품에 속하며, 미국의 정크 아트와 이탈리아의 아르테 포베라를 예고했다. 이탈리아의 저술가 피에로 바르젤리니는 부리의 작품에 관해 말했다. “부리의 작품은 비참한 동시에 세련되고 덧없으면서도 영원한 세계, 즉 그 비참함 덕택에 가장 혹독한 재앙까지도 견뎌내며 언제까지나 굳건히 버티어 나갈 잡동사니 쓰레기의 세계에 대한 폭로라고 할 수 있다.




스페인에서의 앵포르멜 운동에는 안토니 타피에스Antoni Tapies(1923~)가 단연 앞장 섰다. 어린 시절부터 회화와 소묘에 관심을 보인 타피에스에게 비극적인 스페인 내란의 체험은 작품에 지속적인 영향을 주었다. 1938년경부터 극동의 미술과 사상에 관심을 가졌으며 이런 관심은 시간이 갈수록 심화되었다. 1943~46년 바르셀로나 대학에서 법률을 공부했고 이후 회화에 전념했다. 1948~51년 다우 알 세트Dau al Set 그룹의 창립 회원으로 화동했으며 같은 이름의 잡지도 발행했다. 1948년 바르셀로나에서 결성된 예술협회인 다우 알 세트는 7개의 점이 찍힌 주사위라는 의미이며, 본래 주사위에서는 6이 최고의 숫자이므로 이 명칭은 일반적인 한계를 넘어선다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협회가 표방한 목적은 바르셀로나를 예술적, 정신적 침체 상태에서 일깨우는 것이었으며 회원들은 이런 목적을 추구하나가면서 스페인에서 국제 초현실주의를 적극 지지하여 초현실주의를 고취했을 뿐만 아니라 가우디와 미로와 같은 스페인 예술가들의 역량을 널리 알렸다. 이 그룹은 1950년대 중반 스페인에서 아방가르드가 자생적으로 생겨나고 앵포르멜이 도입되는 터전을 마련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타피에스는 다우 알 세트 그룹에 관계하고 있던 초현실주의 시기부터 자신만의 양식을 모색하여 1954년경 콜라주, 오트-파트, 가공되지 않은 일상용품, 낙서와 임의적 요소가 두드러지는 개성적인 양식을 완성했다. 1952~53년 집중적인 실험 시기를 거친 뒤에는 아르테 포베라의 개인적인 양식을 발전시켜나갔다. 찢어진 캔버스, 종이, 지푸라기, 실, 헝겊, 쓰레기, 낡은 스타킹 등 일상적인 폐기물을 가지고 작품을 구성했으며 그 위에 물감을 칠하거나 흘려 전체적으로 낙서로 뒤덮이거나 긁히고 손상된 벽처럼 보이게 했다. 타피에스는 많은 앵포르멜 화가들과 공통점을 갖고 있던 반면 작품에 대한 진지한 태도는 알베르토 부리와 유사했다.




장 폴랑은 1962년에 출간한 책에서 “앵포르멜이란 현실을 바라보는 새로운 방식으로 이성이나 직접적인 관찰로서는 알 수 없는 모호한 절반의 세계를 표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1954년 타시즘이 비기하적 추상에 보다 일반적으로 적용되기 시작했고 그 뒤 앵포르멜과 타시즘 두 명칭이 혼용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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