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수주의
아카데미의 공식 미술에 대한 반발로 시작된 비자연적인 색채를 사용한 회화운동으로서의 야수주의는 당시 인상주의에 대한 반동으로 일어난 운동 가운데 가장 격렬했다. 1905년경부터 함께 작업하던 프랑스 화가들을 중심으로 전개되었고, 귀스타브 모로의 아틀리에에서 수학하던 마티스, 마르케, 망갱, 카무앵과 르아브르 출신 뒤피, 프리에스, 브라크와 샤투 지방 출신 드랭, 블라맹크, 그리고 장 퓌와 네덜란드 출신의 반 동겐이 이 운동에 참여했다. 이들은 폴 시냐크 및 신인상주의자들과 의견을 같이하며 인상주의는 피상적인 회화이며, 빛과 대기를 포함하면서 시각적인 인상을 단순히 캔버스에 담는 데 그쳤다고 생각했다. 이들은 주로 폴 고갱과 빈센트 반 고흐의 영향을 받아 색채를 표현수단으로 삼았으며, 회화를 단순히 눈으로 본 현실을 옯기는 것이 아니라 또 하나의 새로운 현실로 인식하고 과거 화가들보다 색채를 자의적으로 사용했다. 이들은 순수한 색채 사이의 균형을 유지하는 동시에 거칠고 충격적인 부조화를 의도적으로 추구했다.
야수주의가 공식적으로 알려진 것은 1905년 제3회 가을전을 통해서였다. 그해 10월 18일부터 11월 25일까지 열린 도톤(가을전)에는 앵그르, 마네, 르누아르 등 지난 30년 동안 프랑스 예술가들이 제작한 작품 1,636점이 소개된 대규모의 전시회였다. 따로 마련된 전시장에는 마티스를 중심으로 모이는 드랭, 블라맹크 등의 화가들의 작품이 소개되었다. 마티스의 밝은 색을 사용하여 그린 <모자를 쓴 여인>과 <선원>, 드랭의 경쾌한 그림 <콜리우르의 항구>, 블라맹크의 아름다운 신기루 같은 <말리의 세느 계곡>이 다른 작품들과 함께 전시되었다. 그곳에는 망갱의 <시에스타>와 발타가 보라색을 주로 사용하여 그린 <선원>도 있었다.(뒤샹 26) 젊은 화가들은 나이 많은 마티스를 ‘박사님’이라고 부르면서 그의 주위에 모였다.
1887~88년 파리에서 법률가의 자격을 얻은 뒤 생캉탱의 한 법률사무소에서 서기로 일하다가 1890년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앙리 마티스(1869~1954)는 처음에는 아카데미 줄리앙에서 수학하다가 1892년 자신의 취향에 더 잘 맞는 귀스타브 모로의 지도를 받기 위해 에콜 데 보자르로 옮겼다. 모로는 고답파의 몇몇 시인들과 마찬가지로 오래 전에 사라진 문명과 신화 같은 낭만적 수단을 이용하여 인공적으로 고대 세계의 환영을 창조한 화가였다. 15세기 이탈리아 거장들을 연상시키는 정교하고 화려한 양식을 구사했으며, 시각적인 이미지보다는 문학적 관념을 중시한 모로의 회화는 당대 문인들의 상상력을 자극했다. 모로는 작품을 통해서는 그러하지 못했으나 교육자로서 20세기 화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 마티스는 에콜 데 보자르에서 마르케, 망갱, 카무앵, 루오 등과 함께 공부했다.
마티스가 인상주의를 처음 접한 것은 1897년 룩셈부르크에서 열린 카유보트의 유작 전시회에서였으며, 이때부터 색채는 그의 회화에서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고갱, 반 고흐, 세잔의 작품을 접하면서 마티스는 자신만의 독자적인 양식을 진전시키기 시작했다. 아카데미 카리에르에서 작업 중이던 1899년 드랭을 알게 되었고, 드랭은 1901년 마티스를 블라맹크에게 소개했다. 후에 야수주의자로 불리게 되는 젊은 화가들 사이에서 이미 지도자로 여겨지고 있던 마티스는 1903년 살롱 도톤의 창설에 참여했고, 다른 야수주의 화가들과 함께 1905년 살롱 도톤에서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마티스를 비롯하여 드랭과 블라맹크는 자연주의에 바탕을 둔 인생과 느낌에 대한 재발견에 심취했는데, 이같은 경향은 자연주의 회화에서, 그리고 많은 작가의 문학작품에서 20세기 전부터 나타난 적이 있었다. 모리스 드 블롱드는 1895년에 발표한 <자연주의에 관한 에세이>에서 상징주의와 낭만적 퇴폐주의에 반발하면서 적었다. “우리의 선조들은 비실제의 문화, 꿈의 예술, 새 떨림의 탐구 등을 가르쳤다. 선조들은 맥이 있는 꽃, 암흑, 그리고 유령을 좋아했고, 그들은 논리에 맞지 않는 영지주의자들이었다. 우리에게 그들의 거대한 범신론적 예술은 아무런 추진력을 주지 못한다.” 소설가 찰스 루이 필립은 1897년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 적었다. “이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야만적이며 ... 사람들은 자연적 인생의 영상을 가져야만 한다. ... 오늘날은 열정의 시대이다.”
‘야수’라는 명칭은 1905년 <질 블라스 Gil Blas> 지에 실린 평론가 루이 보셀의 1905년 살롱 도톤에 대한 평문에서 비롯했다. 보셀은 야수주의 회화들 가운데에 함께 전시된 알베르 마르크의 조각 <어린이의 토르소>에 대해 적었다. “이 흉상의 순수성은 순수한 색채의 소란 가운데서 놀라움으로 다가온다. 그것은 마치 야수들에 둘러싸인 도나텔로와 같다.” 이 명칭은 당시 평론가와 미술품 감식가들 사이에서 지배적이던 견해, 즉 야수주의 회화는 유능하고 재능은 풍부하지만 균형 감각을 상실한 채 제멋대로 날뛰는 화가들의 그림이라는 시각을 단적으로 드러낸다. 1909년에 이르러 이 운동은 종착점에 도달했다. 그룹의 화가들은 대부분 야수주의에서 벗어나 다른 방향으로 나아갔다.
야수주의는 한마디로 조직적으로 나타난 프랑스의 첫 표현주의였다. 20세기 회화의 영역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야수주의는 그 영향력이 유럽 전역에까지 미쳤는데, 특히 독일에서는 순수한 색채를 사용하는 야수주의의 새로운 기법이 드레스덴의 브뤼케(다리) 그룹 화가들과 바실리 칸딘스키를 중심으로 한 뮌헨의 블라우에 라이터(청기사) 그룹 화가들에게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 브뤼케는 같은 해인 1905년에 결성된 그룹으로 독일의 첫 표현주의 운동을 주도했다. 프랑스 표현주의와 독일 표현주의의 다른 점은 브뤼케 그룹 화가들도 밝은 색을 선호했지만 라틴족과는 달리 원시적 요소가 물신 풍기는 튜튼족 특유의 그림을 그렸다.
야수주의자들은 회화의 표현성을 강조하기 위해 대상의 형태를 왜곡하면서 의도적으로 기법상의 서투름과 부주의함을 추구했다. 그러나 야수주의는 독일 표현주의 정신과는 대비되는, 엄격한 고전적 프랑스 전통의 테두리 안에 늘 머물러 있었다. 독일 표현주의에서는 대개 대상과 이에 대한 화가의 반응이 가장 중요하게 고려되었지만, 야수주의자들은 균형적이고 통일성 있는 구도를 창출하려고 했다.
표현주의는 일시적인 현상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조각, 음악, 댄스, 영화 등 모든 시각예술에서 주류를 이루었다. ‘표현’이란 말을 처음 사용한 사람은 마티스였다. 그는 1908년 선언문 형식의 에세이 <화가의 노트>에서 회화를 궁극적으로 표현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화가의 노트>에 적었다. “나의 가장 큰 목적은 내 자신을 표현하는 것이다. ... 내게 있어 표현은 그림의 총체적인 배열이다. 신체가 차지할 공간, 그 주변 공간, 그 비율 등의 모든 것이 여기에 포함된다. 구성은 화가의 감정을 표현할 수 있는 요소들을 장식적으로 배열하는 기술이다.”
야수주의의 주요 화가 앙드레 드랭(1880~1954)은 1895년부터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여 1898년부터 아카데미 카미요에서 공부했으며 그곳에서 마티스를 만났다. 1900년에 블라맹크를 만나 그와 함께 작업실을 사용했다. 1901년 베르냉-죈 화랑에서 열린 반 고흐 전시회를 보고 강렬한 인상을 받았으며 군복무를 마친 후 1904년 다시 붓을 잡았을 때 야수주의 양식을 채택했다. 그 해 살롱 데 쟁데팡당에 작품을 출품했고, 여름에는 콜리우르에서 마티스와 함께 그림을 그렸으며, 살롱 도톤에서 열린 유명한 야수주의 전시회에 참가했다.
모리스 드 블라맹크(1876~1958)는 1893년부터 기계공으로 일하면서 자전거 경주를 했고, 정식 미술교육을 받지 않았다. 부모는 음악가였고 블라맹크도 생계를 위해 카페의 오케스트라에서 바이올린을 연주하면서 한편으로 부정부주의 신문에 글을 기고하거나 포르노 소설을 썼다. 1900년 드랭을 만나 샤투에서 작업실을 함께 사용하면서 어두운색을 사용하며 개성적인 그림을 그렸다. 1901년 베르냉-죈 화랑에서 열린 반 고흐 전시회를 보고 깊은 감명을 받은 그는 어두운 색보다는 격렬함을 지닌 밝은 색을 사용하기 시작했으며 반 고흐의 표현적인 방식을 극단으로 몰아가며 표현적인 작품을 그렸다. 드랭을 통해 알게 된 마티스는 블라맹크를 설득하여 1905년 살롱 데 쟁데팡당과 도톤에 야수주의 화가들과 함께 참여하도록 했다. 1906년 화상 볼라르는 그의 작품 전부 구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