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왕녀 마르가리타


<어린 왕녀 마르가리타>는 에스파냐 필리페 3세의 딸인 오스트리아의 앤이 벨라스케스(1599~1660)에게 주문한 작품이다. 네 살 난 공주가 초롱초롱한 눈으로 바라보는 장면으로 이 작품은 18세기에 프랑스 궁정의 수집품이 되었다. 벨라스케스는 타계하던 해인 1660년에 동일한 공주를 그렸는데 미완성으로 남겼고 이를 제자 마소가 완성시켰다. 마소는 1644~45년에 <어린 왕녀 마리아 테레사>를 그렸는데 시기적으로는 <어린 왕녀 마르가리타>보다 앞서 그린 것이지만 구성에 있어서는 스승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정된다. 마소가 이런 구성을 먼저 시도했다고 하더라도 색채를 밝게 사용한 벨라스케스의 작품과는 인물의 개성과 생동감에서 비교가 되지 않는다.
스페인의 세비야에서 1599년에 태어난 벨라스케스는 1610~16년에 매너리즘과 에스파냐 바로크의 과도기에 속한 프란시스코 파체코에게서 수학했고 그의 딸과 결혼했다. 파체코로부터 견고한 기술적 기반인 이탈리아와 북유럽 르네상스 대가들에 관한 지식을 습득했지만, 그는 조숙해서 18세에 오히려 스승에게 영향을 끼칠 정도가 되었다. 파체코의 양식은 아카데믹한 냉정하고 건조한 화풍이었지만, 벨라스케스는 특유의 냉정한 사실적 태도와 유연한 물감 처리로 스승의 차가운 양식에 생기를 불어넣었다. 말년에 벨라스케스의 붓질은 한층 활기차고 자유로워졌으며 <어린 왕녀 마르가리타>의 청록색, 진홍색, 은색에서부터 동일한 왕녀를 모델로 한 타계한 해인 1660년 작품(마소가 완성함)의 오렌지색과 은색에 이르기까지 은빛 내에서도 새로이 밝게 빛나는 색채가 나타났다.
<어린 왕녀 마르가리타>는 루브르 뮤지엄에 소장되어 훗날 프랑스 화가들에게 규범이 되었다. 화가 지망생이던 에드가 드가와 에두아르 마네는 루브르에서 대가들의 작품을 모사하면서 다양한 양식을 익혔으며 <어린 왕녀 마르가리타>를 모사하면서 벨라스케스의 양식을 익혔다.드가는 법률을 공부하다가 그만두고 1855년 에콜 데 보자르에 입학하여 앵그르의 제자이자 숭배자였던 루이 라모트에게서 소묘를 배웠다. 1856년 가족들이 살고 있던 나폴리와 이탈리아의 여러 도시를 방문했으며 3년 동안 로마에 머물렀다. 이탈리아에서 그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 화파를 비롯한 15세기와 16세기 화가들의 프레스코화를 모사하면서 기초를 닦았다. 이 훈련은 파리에 돌아온 이후에도 루브르에서 계속되었다. 드가는 1861년 루브르에서 벨라스케스의 작품을 모사하다 마네를 만났고 그를 통해 카페 게르부아에 모이던 젊은 인상주의 화가들을 소개받았다.
‘인상주의의 아버지’로 불리는 마네는 엄격한 법무관 관리의 아들로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는 1850년 고전주의 화가 쿠튀르의 아틀리에에 들어가 6년 동안 수학했다. 그러나 아카데믹한 스승의 고전적인 훈련보다는 루브르에 가서 대가들, 특히 벨라스케스, 무리요, 리베라 등 에스파냐 화파를 연구하고 그 영향을 받았다.
피에르-오귀스트 르누아르도 벨라스케스의 영향을 받았는데, 그가 1864년에 그린 <로마이느 라코>는 루브르에서 본 <어린 왕녀 마르가리타>에서 영감을 받아 그린 것이다. 열세 살 때 파리 도자기 공장에서 일을 하기 시작했기 때문인지 르누아르의 작품에는 늘 18세기의 경쾌한 장식기법과 로코코 화가 부세의 매력적인 색채가 남아 있다. 그는 1862년에 앵그르의 제자였던 스위스 화가 샤를 글레르의 아틀리에에 들어갔고 그곳에서 모네, 시슬레, 바지유 등과 지속적인 친분을 맺었다. 이들 가운데 르누아르는 가장 개성적인 인상주의 화가였다. 검정색을 배제한 강한 순색으로 한정되는 이른바 ‘무지개 색채’의 도입과 바토에서 유래된 색채의 분할주의 기법의 보다 완전한 사용, 윤곽선의 경시 등이 그의 특징이다. 인물상은 동료 화가들보다 그의 작품에서 더 큰 비중을 차지하는데, 사랑스런 여인과 어린이, 꽃과 아름다운 풍경을 주로 그렸다.
장-자크 엔네도 <어린 왕녀 마르가리타>에서 영감을 받아 <엔리에테 제르맹>을 그렸고, 제임스 애봇 맥네일 휘슬러도 영감을 받아 <회색과 초록색의 조화: 미스 시셀리 알렉산더>를 그렸다. 미국 화가 윌리엄 메릿 체이스도 1899년에 <어린이, 벨라스케스의 유산>을 그려 벨라스케스에 대한 존경심을 표했다.
미국에서 태어나 프랑스에서 공부하고 주로 영국에서 활약한 휘슬러는 처음부터 회화를 수학한 것은 아니다. 미국 육군사관학교에서 제적된 뒤 미국 연안측량부 제도원으로 에칭을 배운 것이 화가로서의 출발점이 되었다. 1855년 파리로 간 그는 마르크 샤를 가브리엘 글레르 문하에서 수학했으며 루브르에서 대가들의 작품을 모사하면서 평생 찬탄의 대상이 된 벨라스케스를 알게 되었다. 그리고 일본 판화와 동양의 미술품, 공예품 전반에 열정을 쏟았다.
엔네, 휘슬러, 체이스의 작품과 <어린 왕녀 마르가리타>를 나란히 놓고 보면 200년 전에 그려진 벨라스케스의 작품이 명암의 대비와 은은하면서도 밝은 색상에 의해 더욱 생동감이 있으며 붓질이 자유롭고 활기차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오른손을 의자에 올려놓은 것은 벨라스케스의 회화적인 의도로 어리지만 공주의 의젓함을 나타내기 위해서였다.
벨라스케스는 리베라로부터 신속하고 섬세한 붓놀림과 프리마 묘법(밑그림 없이 바탕에 직접 그리는 화법)을 사용하여 200년 후에야 나타날 인상주의적인 색의 분할을 보여주었는데, 이런 방법을 마네와 피렌체 태생의 미국 화가 존 싱거 사전트로 대표되는 대담한 붓놀림을 소유한 화가들에게 계승되었다.
벨라스케스는 1622년에 마드리드를 잠시 방문했고 이듬해 재상 올리바레스 백작의 초대를 받아 다시 그곳으로 가서 펠리페 4세의 궁정화가가 되어 여생을 마드리드에서 보냈다. 궁정화가로서의 그의 임무는 에스파냐 궁정 초상화의 경직되고 의례적인 양식의 전통에 개성을 부여하는 것이었다. 벨라스케스는 모델들로 하여금 자연스러운 포즈를 취하게 했으며 장신구를 생략하여 인물에 특성을 부여했다. 궁정 컬렉션 중 티치아노의 초상화를 보고 영감을 받았지만 벨라스케스의 작품은 티치아노를 훨씬 뛰어넘어 자연스러움과 단순함을 좀더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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