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콜 드 파리



에콜 드 파리Ecole de Paris는 일반적으로 인상주의 이후 세계 각지로부터 온 예술가들에 의해 파리를 중심으로 전개된 미술 사조들, 즉 후기 인상주의, 나비 그룹, 야수주의, 입체주의, 퓨리즘, 초현실주의, 표현적이고 시적인 사실주의를 포괄적으로 지칭하는 말이다. 후기인상주의는 1880년경부터 1905년경까지의 다양한 회화 경향을 지칭한 용어로 로저 프라이가 1910~11년 런던의 그래프턴 화랑에서 자신의 기획으로 연 '마네와 후기 인상주의 전시회'에 이 명칭을 처음 사용했다. 이 전시회에서 주요 후기 인상주의 화가들 세잔, 고갱, 그리고 반 고흐의 작품이 소개되었다. 나비Nabis는 1888년 상징주의 운동 내부에서 주로 고갱의 영향을 받은 젊은 예술가들이 결성한 그룹이다. 나비는 예언자라는 히브리어에서 비롯된 것으로 이 그룹의 창시자 폴 세뤼지에는 퐁타방에 머물 때 고갱으로부터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았다. 이 그룹의 주도적인 인물들로 피에르 보나르, 모리스 드니, 에두아르 뷔야르가 있고 툴루즈-로트레크와 조각가 마욜이 그룹의 일원으로 동참했다. 아메데 오장팡과 스위스 화가이며 건축가 르 코르뷔지에(샤를-에두아르 잔레)가 주도한 퓨리즘Purism은 1918년부터 1925년까지 파리에서 일어난 미술 운동으로 기계 미술과 관련이 있다. 1917년 오장팡은 입체주의가 방향을 잃고 장식미술로 퇴보하고 있음을 지적했다.

에콜 드 파리란 명칭은 평론가, 화상, 미술품 감식가들에 의해서 널리 통용되었으며 이로 인해 파리는 20세기 초 약 40년 동안 혁신적인 미술의 중심지가 되었다. 1951년 런던의 벌링턴 화랑에서 1900~1950년의 에콜 드 파리의 작품들로 이루어진 전시회가 열렸다. 프랭크 매큐언은 전시회 카탈로그 서문에서 당시 다른 도시들에는 30개 정도의 뮤지엄이 있는 것에 비해 파리에는 무려 130개의 뮤지엄이 있어 2만여 명의 외국인을 포함하여 6만 명에 이르는 예술가들의 작품을 전시하고 있으며 20개 이상의 대형 살롱에서는 매년 평균 각각 1천 명의 화가들의 작품이 전시되고 있음을 알렸다. 에콜 드 파리의 가장 주목할 점은 국제적인 면모였다.

좁은 의미에서 에콜 드 파리는 프랑스 표현주의를 말하며 대부분 외국 태생의 표현적 사실주의자들, 즉 ‘저주받은 화가들’을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되었다. G. H. 해밀턴은 이 점을 지적했다. “이 용어는 나비 그룹과 야수주의 후계자들에 의해 구현된 프랑스 미술의 지속이라기보다는 1900년 이후 전 세계의 문명국가에서 온 화가와 조각가들이 파리에서 벌인 미술 활동을 지칭한다. 그들이 파리로 몰려온 이유는 파리가 먹고 살기에 그리고 자신들의 작품을 전시하고 토론하기에 가장 적합한 조건을 제공해주기 때문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전 파리의 미술은 몽마르트르를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었으며 외국인 예술가들이 이 동네에 모여살고 있었다. 에콜 드 파리의 대표적인 화가들로 수틴, 모딜리아니, 샤갈, 파생, 리바크, 키슬링 등이 있다.

러시아 출신 화가 샤임 수틴Chaim Soutine(1894~1943)은 에콜 드 파리의 표현주의 화가들 가운데 가장 급진적이며 뛰어난 영감을 지닌 인물이었다. 가난한 유태인 가문의 열 번째 자식으로 태어난 수틴은 구두제작자의 견습공이 되기를 거부하고 그림을 배우기 위해 가출했다. 1910년 사진관에서 일하면서 빌나의 에콜 데 보자르에서 공부했고, 1913년 후원자의 도움을 받아 파리로 가서 라 뤼슈La Ruche에 있는 코르몽의 아틀리에에서 수학했다. 라 뤼슈는 1900년경 보기라르 도살장과 인접한 단치히 가에 ‘뒤부아 아저씨’로 알려진 나이 많은 조각가가 예술가들의 사회주의적 공동체를 세우려는 생각으로 세운 둥근 원형 건물이었다. 1905년 무렵부터 물과 가스 같은 편의시설도 없이 조악하게 만들어진 라 뤼슈의 작업실을 싼값에 얻을 수 있었다. 파리에 처음 온 외국 예술가들이 이 건물에 정착했으며 그들 중에는 수틴 외에도 모딜리아니, 샤갈, 아르치펜코, 립시츠 등이 있었으며, 프랑스 화가들로는 레제, 들로네, 로랑스 등이 잠시 이 건물에 아틀리에를 얻고 작업했다. 블레즈 상드라르, 기욤 아폴리네르, 막스 자코브 등 몇몇 시인과 작가들도 이곳에 묵었다. 정치적 망명자들이 이곳을 은신처로 삼기도 했다.

수틴은 파리에서 분노를 표현한 작품과 드라마틱한 실제 삶으로 인해 소위 ‘저주받은 화가들 peintres maudits’로 불린 일군의 망명 화가들인 샤갈, 모딜리아니와 친분을 맺었다. 특히 1917년에 모딜리아니가 그린 <수틴의 초상화>는 모딜리아니의 작품 중 가장 표현적인 작품으로 꼽힌다. 모딜리아니를 통해 소개받은 화상 레오폴드 즈보로브스키는 수틴에게 프로방스의 세레에서 1919~22년 3년 동안 그림을 그릴 수 있도록 해주었다. 세레에서 수틴은 반 고흐의 말기 작품보다도 더욱 극렬한 감정 표현을 담은 환상적인 풍경화를 연속적으로 그렸다. 그러나 즈보로브스키는 당시 제작된 200여 점의 진가를 인정하지 않았고, 이 작품들은 1923년 미국 콜렉터 A. C. 반스에 의해 인정받아 반스는 100점을 구입한 후 몽수리 공원 근처에 있는 작업실을 수틴에게 제공했다. 그 후 수틴은 카뉴에 잠시 머물다가 네덜란드를 방문한 후 렘브란트의 말기 작품에 감동을 받았으며 1926년 파리로 돌아와 가죽을 벗긴 사체를 그리기 시작했다. 1920년대에는 심리적으로 비정상임을 나타내는 기이하고 과장되게 왜곡시킨 인물뿐 아니라 성가대 소년, 시중드는 소년, 과자 제조인과 같은 세심하고 온화한 일련의 그림을 그렸다.

매우 극단적이기는 했으나 수틴의 표현주의는 독일 표현주의의 주요 관심사와는 거의 공통점이 없으며 그를 코코슈카 및 놀데와 유사하다고 보는 것은 과장된 시각이다. 그의 표현주의는 추방된 많은 그의 동포들과 공유하던 비극적이며 묵시록적인 기질에 대한 억제할 수 없는 표출이었다. 수틴은 주기적인 우울증에 시달렸고 자신의 작품에 대해 확신을 가지지 못하고 늘 불안감으로 고통을 겪었다. 자신이 그린 작품에 만족해하지 못하고 과거에 그린 그림들을 파기하곤 했으며 전시회 개최도 꺼려서 생존에는 대중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다. 1929년 수틴은 자신의 작품을 여러 점 소장하고 있던 카스탱 부부와 함께 샤텔기용에 은거했다. 1940년 독일의 프랑스 점령 이후 미국으로 갈 수 있는 기회를 포기하고 투렌의 샹피니쉬르뵈드라는 마을에서 방해받지 않고 풍경화를 그리는 데 전념했다. 궤양 수술을 받은 후 사망했다.

쇠락한 유태인 은행가 집안에서 태어난 이탈리아 화가, 조각가 아메데오 모딜리아니Amedeo Modigliani(1884~1920)는 학창시절이던 1895년 늑막염을 심하게 앓았으며 후에 결핵으로 진행되어 요절했다. 1906년 파리로 간 그는 바토-라부아르Bateau-Lavoir와 여러 아틀리에에서 열린 예술가 모임에 참여하면서 예술가들이 모이는 지역의 카페에서 시간을 보내고 밤을 지새곤 했으나 극도로 빈곤한 생활을 했다. 바토-라부아르는 시인 막스 자코브가 파리 북부 몽마르트르 라비냥 가의 가난한 예술가들이 모여든 지역에 붙인 명칭으로 1904년경 반 동겐, 그 후 피카소, 또 그 후에는 후안 그리스, 파블로 가르가요를 비롯한 예술가들이 모여 살며 작업했다. 앙드레 살몽, 막스 자코브, 피에르 르베르디 등 당대의 뛰어난 작가들도 이곳에 거주했다.

모딜리아니는 수틴과 키슬링을 비롯한 외국에서 파리로 이주한 프랑스 표현주의 예술가들과 주로 어울렸다. 1909년에 그린 <첼리스트>를 이듬해 살롱 데 쟁데팡당에 출품하여 어느 정도 인정을 받았지만 생애에 거의 작품을 전시하지 않았다. 1910년의 살롱 데 쟁데팡당과 7점의 조각을 출품한 1912년의 살롱 도톤을 제외하고 주목할 만한 유일한 전시회로는 1919년 서세버럴 싯웰과 오즈버트 싯웰 형제가 기획한 런던 힐스 화랑의 전시회를 들 수 있다. 모딜리아니는 1909년경에 브란쿠시를 만났고 브란쿠시의 영향을 받아 더욱 더 조각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모딜리아니는 다락방에서 굶주린 채 마약과 술 그리고 결핵에 시달리면서도 회화와 조각에 몰두한 것으로 알려졌지만 전형적인 낭만적 천재로 묘사된 이런 이야기에 대한 신뢰할 만한 증거는 없다. G. H. 해밀턴은 모딜리아니의 짧은 생애가 자멸한 천재의 극적인 이야기로 전래되면서부터 그의 작품을 평가하는 데 방해가 되었음을 지적했다. 이런 점은 그의 회화와 조각 전반에 나타난 독자적이며 양식화된 점과 절충적인 특징으로 더욱 설득력이 있다. 모딜리아니는 20세기 초 20년 동안 파리 미술계에 속해 있었지만 당대의 미술 운동이 그에게 끼친 영향은 미미했다. H. H. 에너슨은 다음과 같이 적었다. “모딜리아니는 당시 파리의 예술가들과 관련이 있었으나 20세기의 예술가는 아니다. 그는 우첼로 혹은 보티첼리 시대의 피렌체에서 태어났더라면 더 어울렸을 것이다.” 그의 작품은 양식화되었고 일정한 경향을 보여주지 못했다는 평가도 있다. 그러나 이런 평가에도 불구하고 모딜리아니는 여전히 뛰어난 독창성을 지닌 당대의 예술가 중 하나로 확고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 길게 늘어나 양식화된 그의 인체 표현은 회화와 조각 모두에서 특징이 되었으며 매너리즘에 빠지기는 했지만 그는 인물의 개성 표현에 빼어난 재능을 갖고 있었다. 모딜리아니는 삶에서와 미술 모두에서 절충주의자이며 개인주의자였다. 그의 재능은 충분히 성숙되지 못했으나 양식화된 독특함을 통해 발휘되었다.

서부 러시아 드리나 강 유역의 지방 중심지인 비텝스크에서 하시디즘 계열의 유태교 가정에서 태어난 마르크 샤갈Marc Chagall(1887~1985)은 학창시절 초기부터 화가로서의 재능과 적성을 나타냈다. 샤갈은 정규 교육의 영향을 거의 받지 않았고 그의 작품은 교육에 의하지 않은 민속 미술의 자발성과 야수주의의 보다 세련된 천진난만함을 연상시킨다. 1914년 샤갈은 후원자 비나베르의 도움으로 파리를 방문할 수 있었으며 처음에 라 뤼슈에 살았는데, 그곳에는 수틴, 모딜리아니, 레제, 아르치펜코의 아틀리에가 있었다. 그의 작품은 블레즈 상드라르, 기욤 아폴리네르, 막스 자코브, 앙드레 살몽 등과 같은 아방가르드 작가들의 주목을 받았다. 비텝스크 방문 중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고향에 체류하면서 1915년 벨라 로젠펠트와 결혼했다. 1917년 10월 혁명 후 샤갈은 지방의 미술학교를 재조직하는 임무를 맡으면서 비텝스크의 미술인민위원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현대적인 프랑스의 기법과 개인적인 환상을 결합시킨 화풍이 지방 당국에 의해 받아들여지지 않으면서 모스크바로부터 공식적인 브후테마스VKHUTEMAS(Vysshie Khudozhestvenno-Tekhnicheskiye Masterskiye 고등 기술-미술 작업소) 교육을 도입한 말레비치에 의해 자리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브후테마스는 러시아 혁명 후 모스크바에 설립된 미술학교로 이전의 회화 조각 건축 학교와 스트로가노프 미술학교가 합쳐져 이루어졌다. 1918년 설립 당시에는 스보마스Svomas(Svobodniye gosudarstvenniye khudozhestvenniye masterskiye 자유 정부 미술 작업소)로 불렸으나 1920년에 브후테마스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나움 가보는 브후테마스를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브후테마스는 학교이기도 하고 자유로운 아카데미이기도 하다. 그곳에서는 회화, 조각, 건축, 도예, 금속 세공과 목공 작업, 직물, 타이포그래피를 가르치는 7개의 과가 있어 특수한 직업교육이 이루어졌을 뿐만 아니라 일반적인 토론이 행해졌고, 다양한 문제에 관해 학생들이 주도하는 세미나가 열렸다. 이 세미나에는 일반인들도 참여할 수 있었으며 공식적인 교수가 아닌 예술가라도 강연을 하거나 수업을 할 수 있었다.” 1925년 명칭이 브후테마스에서 브후테인(고등 기술 연구소)으로 변경되었으며 1931년에 중앙당의 통제 하에 학교가 재조직되었다.

샤갈은 1919년 비텝스크를 떠나 모스크바로 갔고 그곳에서 새로 건립된 국립유태극장을 위한 벽화와 무대디자인 작업을 하면서 자서전을 쓰기 시작했다. 그러나 러시아의 예술적 분위기가 자신과 맞지 않다고 생각한 샤갈은 1922년 베를린으로 돌아갔으며 폴 카시레가 의뢰한 자신의 독일어판 자서전을 위한 삽화를 그렸다. 1923년 파리로 간 샤갈은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할 때까지 프랑스를 제2의 고향으로 삼았다. 그는 돔 카페에서 만난 망명 유태계 예술가들의 중심이 되었는데, 그들은 러시아 출신 수틴, 불가리아 출신 쥘 파생, 폴란드 출신 모이즈 키슬링, 이탈리아 출신 아메데오 모딜리아니 등이었다. 이 시기에 샤갈은 앙브루아즈 볼라르를 위해 많은 그래픽 작품도 제작했는데, 고골리의 <죽은 영혼>을 위한 118점의 동판화(1923~25), 라 퐁텐의 <우화>를 위한 100점의 삽화(1927~30), <구약성서>를 위한 105점의 삽화(1930~39)를 그렸다. 그의 자서전 <나의 인생 Ma vie>이 1931년에 출간되었고, 1949년에는 <죽은 영혼>을 위한 삽화가 출간되었으며, 1952년 테리아드 출판사에 의해 라 퐁텐의 <우화>가 출간되었고, 성서의 삽화는 1956년에 출간되었다. 1941년 샤갈은 독일군이 점령한 프랑스를 떠나 미국으로 갔고 1944년 아내 벨라가 미국에서 타계했다. 1946년 뉴욕의 모마에서 대규모 회고전을 가졌고, 이듬해 파리의 국립현대미술관에서 개최된 전시회 개막으로 인해 파리에 돌아와 1948년 이후 프랑스에 정착했다.

샤갈은 두 번의 세계대전 사이 파리에서 꽃피웠던 에콜 드 파리의 유파로 막연하게 분류되고 있지만, 그는 당대의 가장 독창적인 화가들 중 하나였다. 그는 고향의 유태인 마을에서 기억나는 이미지들을 풍부하게 사용하여 비현실적 신화 세계를 창조했는데, 사실적으로 묘사한 대상들을 비자연주의적인 구성 속에 배치했으며 단편적인 장면에 일화적이지 않은 회화적 상징주의를 담았다. 그의 회화는 문학적 해석의 가능성을 배제하는데, 샤갈은 1946년 자신의 회화에 관해 언급했다. “나는 나의 그림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 나의 그림은 문학이 아니다. 나를 사로잡은 이미지를 회화적으로 배열한 것일 뿐이다.” 샤갈은 자신에게 유용한 여러 가르침을 받아들였지만 20세기 초에 널리 확산된 많은 운동이나 사조 중 어느 것도 추종하지 않았다. 아폴리네르는 샤갈의 작품을 초자연적 작품으로 분류하면서 초현실주의를 예고했고, 앙드레 브르통은 샤갈로 인해 은유가 현대 회화에 당당하게 진출했음을 지적했다. 그러나 샤갈은 초현실주의에 동조하지 않았고 무의식적인 상상력을 회화적 표현으로 발산하는 초현실주의 화가들의 교리를 부인했다. 입체주의에 대한 관심은 그의 다수의 작품에서 나타났지만 그는 입체주의자는 아니었다. 색채에 있어서는 입체주의의 한 부분인 오르피즘 화가들의 발견을 도입했으며 로베르 들로네의 ‘동시성’ 개념도 받아들였다. 그는 외부의 영향을 받았으나 작품 모두 독창적이었다. 독일 표현주의 화가들이 그의 작품을 반겼지만 샤갈은 브뤼케 그룹 화가들의 대담한 왜곡보다는 프랑스 회화의 고전적인 자제와 고갱의 장식적인 서정주의와 더욱 공통점을 지녔다.

샤갈은 최고의 하시디즘 유태교 화가였으며, 동시대 화가들 중 정신적으로 그와 가장 근접한 작품을 보여준 사람은 러시아 태생의 이사차르 리바크Issachar Ryback(1897~1934)였다. 1921년 베를린으로 가서 베를린 분리파와 함께 전시하며 노벰버그루페Novembergruppe의 일원이 된 그는 1925년 러시아에 머물렀고 이듬해 마침내 파리에 정착했다. 1918년 11월 베를린에서 결성된 급진적 독일 예술가들의 그룹 노벰버그루페는 진보적인 예술가와 대중 사이의 밀접한 관계를 바탕으로 국민 생활을 새롭게 만들 것을 공언했다. 이 그룹을 주도한 인물은 막스 페히슈타인, 세자르 클라인이었고 후에 하인리히 캄펜동크, 루돌프 벨링, 에리히 부흐홀츠, 오토 뮐러, 한스 푸르만 등이 가담했다. 리바크는 꽃과 동물 그리고 초상화를 그린 예민하고 서정적인 화가로서 그의 작품은 18세기 폴란드에서 일어난 신비주의의 한 분파인 하시디즘의 신비주의를 바탕으로 했으며, 그와 고향이 같았던 샤갈과 마찬가지로 어린 시절을 보낸 유태계 리투아니아인들의 환경에 대한 기억이 작품의 근간을 이루었다. 평론가 발데마르 게오르게는 리바트를 “누더기나 넝마를 비단으로 변형시키는 유태인 구역의 공상가”라고 평했다. 1933년 영국을 방문하여 케임브리지 대학 미술협회의 후원으로 전시회를 개최한 후 얼마 안 되서 척추질환으로 사망했다.

폴란드계 프랑스 화가 모이즈 키슬링Moise Kisling(1891~1953)은 크라쿠프 미술 아카데미에서 요세프 판키에비치의 지도를 받았으며 그를 통해 인상주의자들, 특히 보나르와 뷔야르의 작품을 알게 되었다. 키슬링은 1910년 몽파르나스에 정착했고 그곳에서 유명 인물이 되어 모딜리아니, 샤갈의 친구가 되었다. 1911~12년 세레에 있는 예술가 그룹의 일원이 되었는데 여기에는 피카소, 브라크, 후안 그리스, 시인 막스 자코브가 참여하고 있었다. 이 시기에 그는 입체주의와 앙드레 드랭의 영향을 받았다. 제1차 세계대전 동안 외인부대에 자원했고 이로 인해 프랑스 시민권을 취득했다. 성숙기의 그의 양식은 매끈하고 우아한 소묘, 그리고 섬세하게 조율된 색채를 특징으로 하며, 그는 초상화가로서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다.

에콜 드 파리의 활동은 다양했지만 1940년대까지는 기본적으로 구상 미술을 추구했다. 1930년대 초 추상-창조협회가 결성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때까지도 프랑스에서 비재현적 추상은 확고한 기반을 구축하지 못하고 있었다. 1950년대에 에콜 드 파리, 또는 누벨 에콜 드 파리라는 용어가 부활하면서 제1회 비엔날레 드 파리가 개최될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되었다. 이 용어는 1940년대 후반부터 유행하기 시작한 표현적 추상이나 살롱 데 레알리티 누벨과 관련되어 부활한 구성주의를 의미하는 말로 사용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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