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성적인 익살, 의도적인 우연, 레디메이드, 그리고 개념미술



개념미술은 마르셀 뒤샹으로부터 비롯되었다. 뒤샹의 익살, 우연의 선택, 레디메이드의 선정에서 개념미술이 예견되었다.
뒤샹은 1911년 10월에 <기차를 탄 슬픈 젊은이>를 그리기 시작했다.(워홀 60) 이는 그의 자화상으로 가족을 만나기 위해 파리로부터 루엥으로 가는 기차를 탄 모습이다. 뒤샹은 이 작품에서 젊은이가 충분히 나타나지 않았고 슬픔 또한 충분히 묘사되지 않은 채 입체주의의 영향만 두드러지게 나타났다고 했다. 제목을 슬픈 젊은이라고 한 것은 사랑하는 수잔이 8월에 결혼한 후 처음 가족을 만나기 위해 12월에 루엥으로 향하면서 자신을 슬픈 젊은이라고 생각했다.
뒤샹은 재담가였다. 그에게는 지성적인 익살이 있었으며, 삽화를 그린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해학적인 요소를 그림에 삽입할 줄 알았다. <기차를 탄 슬픈 젊은이>에서 이런 요소가 발견된다. 그는 말했다.
“<기차를 탄 슬픈 젊은이>에서 이미 유머를 그림에 삽입하려는 나의 의도가 드러났다. 아폴리네르가 그것을 ‘기차에 있는 우울함’이라고 부른 것으로 생각된다. 젊은이가 슬픈 이유는 기차가 뒤를 따라오기 때문이다.”
뒤샹은 곧이어 <계단을 내려가는 누드>를 그렸는데 마찬가지로 유머가 삽입된 작품이다. 누드가 계단을 내려간다는 것은 만화에서나 있을 법한 일이지만 순수미술에서는 가당치 않은 발상이었다. 뒤샹은 코믹 만화에서나 있을 법한 유머를 순수미술에 도입하며 이런 점이 문제를 야기했다. 그가 1912년에 그린 <처녀로부터 신부에 이르는 길>과 훗날 <큰 유리>로 완성시킬 <그녀의 독신자들에 의해조차 벌거벗겨진 신부>에 관한 드로잉도 유머를 삽입한 것들이다. <그녀의 독신자들에 의해조차 벌거벗겨진 신부>에서 ‘조차’란 말의 뜻이 무엇이냐고 묻는 질문에 뒤샹은 훗날 응답했다. “나는 제목에 관심이 많은 편인데 그 시기에는 특히 문학에 관심이 많았으며 단어들에 흥미를 느꼈다. 그래서 콤마를 찍은 후 ‘조차 even’라고 적었는데 부사 ‘조차’는 의미가 없으며, 제목 또한 무관하다.” 그는 ‘반감각적 antisense’ 언어를 사용함으로써 시적인 문장이 되게 한 것이며 특별히 작품에 의미를 부여하려고 한 것은 아니었다.
뒤샹은 1914년에 <정지들의 네트워크>(뒤샹 100)를 그렸다. 그는 많은 사람이 우연을 좀더 조직적으로 사용한다고 말한 적이 있었는데 이 작품에서 그가 우연을 사용했음을 본다. 그는 우연을 개인적인 것으로 말했다. “너의 우연은 나의 우연과 같지 않지 않느냐? 내가 던진 주사위와 네가 던진 주사위는 같지 않다. 그래서 주사위를 던지는 것과 같은 행위는 너의 잠재의식을 표현하는 데 매우 적절한 방법이 된다.”
뒤샹의 레디메이드는 개념미술을 가능하게 했다. 레디메이드ready-made는 뒤샹이 대량생산된 기성품을 임의적으로 선택하여 미술품으로 소개한 데서 비롯한 명칭이다. 기성품은 그의 선정에 의해 주변 환경으로부터 격리되고 동일한 종류의 대량생산품들로부터 분리되어 나와 그 기능을 박탈당함으로써 일종의 실존적 개성과 물신 숭배적 특질, 그리고 혼란스러운 위엄을 얻게 된다. 뒤샹이 처음 선정한 레디메이드는 1913년과 이듬해 제작된 <자전거 바퀴>와 병걸이>이다.(뒤샹 101) 그가 선정한 오브제는 놀랍게도 불안한 위엄, 대담한 고독을 지니게 되어 관람자는 두려움과 분노 혹은 웃음으로 반응하게 된다.
몇몇 팝아트 예술가와 누보 레알리즘 예술가들이 훗날 아상블라주에 사용한 기계 생산물과 폐기된 기계의 일부를 사용했는데, 이는 뒤샹의 레디메이드와는 그 미학이 다르다. 뒤샹의 레디메이드가 갖는 충격 효과는 그것들이 격리되었다는 점과 기능적으로 제작된 오브제에서 완벽하게 그 기능을 박탈했다는 점에서 생긴 것이다.
뒤샹 자신도 레디메이드와 발견된 오브제를 구별하면서, 발견된 오브제가 미적 특질이나 아름다움, 독특함으로 인해 선택되거나 발견된 데 비해 레디메이드는 개성이나 독특함이 없는 대량생산품 중 하나일 뿐이라는 점을 지적했다. 따라서 발견된 오브제를 선택하는 과정에서는 예술가의 취향이 개입되지만 레디메이드의 경우에는 그렇지 않다.
뒤샹의 지성적인 익살, 의도적인 우연, 그리고 레디메이드는 1960년대 말과 1970년대 초에 개념미술의 예견했다. 사상이나 개념을 미술품의 본질적인 구성요소로 간주하며 눈에 보이는 미술품이 아닌 기록의 형태를 우선적으로 완성품으로 보는 개념미술의 가능성은 뒤샹이 1917년 독립미술가협회에 출품한 소변기 <샘>에서 이미 드러났다. 그는 작품의 자기 지시성self-referentiality을 기록으로서 남겼다. 그가 선택한 오브제 소변기는 그의 해석을 통해 작품으로 변용되었다. 작품에 자기 지시성이 있어 평론가의 식견이 이를 미술품으로 규정하는 중요한 판단의 요소로 삼는 오늘날의 입장에서 볼 때 <샘>은 개념적인 작품이었다. 과거에는 작품을 성립하는 판단기준이 작품이 제작되기 전에 미리 존재했지만 뒤샹은 레디메이드를 통해서 작품을 규정하는 기준을 예술가 스스로 제시할 수 있음을 시위했다. <샘>은 최초의 개념미술 작품으로 꼽을 만하다.
로베르타 스미스는 1974년에 발간된 <현대미술의 개념>에 기고한 ‘개념미술’에 관한 글에서 적었다.
“뒤샹은 창조적인 행위를 여러 가지 오브제나 활동에 ‘미술’이라는 명칭을 부여하는, 극히 기본적인 행위로 바꾸어놓았다. 그에게 있어 창작은 단순하고 지적이며 많은 부분 임의적인 ‘결정’의 결과이다. 뒤샹은 다양한 방식의 언어적, 시각적 장난과 의도적인 우연, 평범하고 하찮은 사물, 타인과 자신의 미술을 겨냥한 도발적인 제스처, 그리고 심지어 자기 자신을 작품의 수단과 주제로 사용했다.”
인습 타파의 태도로 활약한 뒤샹을 따른 예술가들이 1950년대와 1960년대 초에 두드러졌다. 그들은 자신의 배설물을 담은 양철통을 미술품으로 전환시킨 피에로 만초니, 1958년 파리의 화랑에서 텅 빈 전시장을 소개한 이브 클랭 등이 있다. 그러나 개념미술이 인식 가능한 운동이 되어 그 명칭을 얻게 된 것은 1960년대 후반이었다. 1961년 반예술을 표방한 미국인 헨리 플린트(1940~)가 개념미술이라는 말을 사용했지만, 이 용어가 통용되기 시작한 것은 1967년 <아트포럼>에 솔 르윗의 ‘개념미술에 대한 단평’이 발표된 후부터였다. 르윗은 적었다. “개념미술에서 아이디어나 개념은 작품의 가장 중요한 측면이다. ... 모든 계획과 결정이 사전에 행해지며 작품의 제작은 형식적인 것이다. 아이디어는 미술을 제작하는 기계가 된다.”
개념미술의 첫 주요 전시회는 1969~70년 런던, 뉴욕 등지에서 열렸고, 1970년대 초에 당시 유행하던 아르테 포베라, 신체미술, 대지미술, 퍼포먼스 등의 미술운동과 종종 부분적으로 겹치면서 가장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이런 경향들은 모두 미니멀아트의 형식주의와 상업주의에 반대하여 일어난 포스트-미니멀리즘의 일부로서 등장한 것이다. 미국인 로버트 배리(1936~)의 <텔레파시에 의한 작품>(1969)은 “전시하는 동안 나는 언어 혹은 이미지로는 불가능한 일련의 사고로 이루어진 예술작품을 텔레파시에 의해 전달하려고 한다”는 진술로 이루어졌다. 배리는 적었다. “세계는 흥미로운 오브제들로 가득 차 있다. 따라서 나는 더 이상 오브제를 추가하고 싶지 않다. 나는 단순히 시간이나 공간에 의한 사물의 존재를 말하고 싶을 뿐이다.”
어떤 개념미술은 독일인 한스 하케(1936~)의 작품처럼 심각한 정치적 문제를 다루고 있으나, 많은 경우 개념미술작품은 언어에 대한 난해한 분석이나 로버트 배리의 작품처럼 예술가의 사적인 기이한 관심과 연관되어 있다. 개념미술의 대표자와 찬미자들은 이런 행위를 미술의 본질에 대한 문제 제시와 그 경계를 도발적으로 확장하려는 것으로 간주한다. 로버트 모리스는 1970년에 “지루한 오브제 생산기술로부터 미술의 힘을 분리하는 것은 ... 인식의 변화를 일으키는 힘으로서의 미술에 다시 초점을 맞추는 것이다”라고 했다. 그러나 키스 본은 1972년에 이런 인식에 반발하며 말했다. “개념미술이라는 용어 자체가 모순이다. 왜냐하면 미술은 단지 개념을 지니고 있는 것이 아니라 개념의 현실화이기 때문이다.”
1970년대 중반에 ‘후기-개념적인 Post-Conceptual’이란 용어가 등장함으로써 개념미술의 절정이 지나갔다. 1974년 혹은 1975년에 절정의 시기가 막을 내린 것이다. 개념미술은 1980년대 중반 네오-지오의 대표적인 작품을 통해 개념미술에 대한 흥미가 되살아날 때까지 산발적으로 계속되었다. 네오-지오Neo-Geo는 신기하적 개념주의Neo-Geometric Conceptualism를 줄인 말로 1980년대 중반 뉴욕에서 다양한 양식과 매체를 사용하여 신표현주의의 주정주의에 반발한 미국 예술가 그룹의 작품을 말한다. 제프 쿤스가 이 그룹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1980년대 중반의 새로운 관심에 대하여 ‘네오-개념’이라는 용어가 사용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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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미술 500년 - 모방에서 창조로
김광우 지음 / 미술문화 / 2006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프랑스 모더니즘의 시작

 <프랑스 미술 500년>(미술문화) 중에서


쿠르베의 스페인 지향주의는 특이했다.
그는 1840년대 후반에 자화상 열 점을 그렸는데, 렘브란트와 리베라로부터 영감을 받아 그린 것들이다.
쿠르베는 스페인의 자연주의와 벨라스케스가 일상을 모티브로 그리는 데 감동을 받았다.
쿠르베는 파리에서의 피곤한 생활을 벗어나 건강을 되찾기 위해 1849년 오르낭에 있는 가족을 방문했다.
그는 고향 마을에 감화되어 두 점의 뛰어난 그림 〈돌 깨는 사람들〉336과〈오르낭의 장례〉337를 그렸다.
〈돌 깨는 사람들〉은 비천한 노동을 하고 있는 두 인물을 황폐한 시골을 배경으로 사실적으로 묘사한 것이고, 〈오르낭의 장례〉는 농민의 장례식을 묘사한 대형 작품으로 실물 크기의 인물이 40명 이상 등장한다.
두 작품은 신고전주의나 낭만주의의 좀 더 절제되고 이상화된 작품들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그것들은 귀족적인 인물이 아닌 초라한 농민들의 삶과 정서를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쿠르베가 농민들을 미화하지 않고 대담하게 있는 그대로를 묘사한 사실은 화단에 격렬한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1851년 살롱전에 전시된 <오르낭의 장례>는 구성과 인물들의 배치에서 전통적인 구성을 완전히 깨는 작품으로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그는 벨라스케스의 작품에 정통하지는 못했지만 벨라스케스처럼 환영을 만드는 데 능숙했으며, 벨라스케스를 이해하는 사람만이 그를 이해할 수 있었다.
그의 친구 평론가는 쿠르베의 자화상 <첼로 연주자(자화상)>339와 <가죽 벨트를 쥔 남자(예술가의 초상)>340를 벨라스케스와 무리요의 작품과 나란히 전시한다면 매우 어울릴 것이라고 말했다.

시인 보들레르와 사회철학자 피에르 조제프 프루동 등 당대의 작가 및 철학자들과 가까이 지낸 쿠르베는 새로운 사실주의파를 이끌었으며, 이 운동은 동시대의 다른 운동들을 압도했다.
그가 사실주의를 발전시키게 된 결정적인 요인들 가운데 하나는 그가 태어난 지방인 프랑슈콩테와 이 지방에서 가장 아름다운 마을들 중 하나이자 자신이 태어난 마을 오르낭의 전통과 관습에 대한 일생 동안의 애착이었다.
그는 잠깐 스위스를 방문한 뒤 오르낭으로 돌아가서 1854년 후반에 거대한 캔버스화를 그리기 시작해 6주 만에 완성했는데, 그의 미술 생애에 미친 영향들을 온갖 사회 계층의 인물들로 묘사한 우의적인 회화〈화가의 화실〉341이 바로 그것이다.
화면에서 화가 자신은 자부심을 드러낸 채 모든 인물들을 주재하면서 누드모델에게는 등을 돌린 채 풍경화를 그리고 있다.

나폴레옹 3세는 1855년 “유럽을 한 가족으로 만드는 진정한 계기”라는 의미를 부여한 만국박람회를 파리에서 개최했다.
28개국이 참가한 이 축제에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도 참관했으며 런던 뉴스는 만국박람회 현장을 연신 삽화로 보도했다.
이 전시회에 앵그르의 작품이 41점, 들라크루아의 작품이 35점이나 받아들여졌으면서도 자신의 작품은 11점밖에 받아들이지 않자, 쿠르베는 “프랑스 미술의 재앙”이라고 낙담하여 박람회장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자비로 별관을 마련하고 그곳에서 개인전을 열면서 <화가의 화실>을 포함시켰다.
쿠르베는 카탈로그 서문에 회화가 사실을 전달하는 매체임을 선언했다.

나는 다른 사람들의 그림을 더 이상 모방하지 않을 것이다. …
살아서 숨 쉬는 예술을 창조하는 것이 나의 목표이다.

그의 「사실주의 선언」은 아방가르드 정신의 선언이라는 중요한 의미를 미술사에 남겼는데, 모더니즘이 이미 도래했음을 알리는 선언이기도 했다.
아방가르드 정신이란 순수미술, 즉 ‘예술을 위한 예술’을 추구하는 진보주의 예술가들의 정신을 말한다.
쿠르베의 사실주의는 과거에서 벗어나는 과격한 출발점이었다.
16세기와 17세기의 예술이론의 척도가 미켈란젤로와 푸생에 의해 규정되었다면 19세기 예술이론에서는 쿠르베의 작품이 중심에 놓여 있다.
화가로서 16세기와 17세기의 위대한 전통을 계승한 들라크루아에서 예술과 예술이론은 이미 통일되었다.
쿠르베의 저작에서는 현대적인 삶에 대한 집중을 통해 고전주의의 그리스 동경과 낭만주의의 중세 동경에 대한 단적인 거부가 나타난다.

오르낭에서 지주의 아들로 태어난 쿠르베는 독립적이고 완고하며 자기 확신에 차 있었다.
그는 스무 살 때 회화를 수학하기 위해 파리로 갔지만 공식적인 수업보다는 17세기 자연주의자인 카라바조와 스페인 화가 벨라스케스, 리베라, 수르바란의 작품을 모사하면서 그들의 양식을 익혔다.
그의 초기작은 낭만주의 경향이었지만 스물세 살 때 그린 <검은 개와 예술가의 초상>을 통해 사실주의로 전향했다.
그는 <오르낭의 장례>로 주목을 받았고 사실주의파의 선두자로 입지를 세웠다.
그는 낭만적 과장이나 이국적인 정서를 배제하고 제리코와 들라크루아의 사실적 요소를 지속시켰다.
그는 사소하거나 일화적인 것에 장엄함을 부여하고 색조를 부드럽게 하거나 이상화시키지 않고, 추하거나 혐오감을 불러일으키는 것에 위엄을 불어넣는 재능을 보였는데, 스페인 화가들 특히 벨라스케스의 영향이었다.
그는 “회화는 눈에 보이는 것이므로 보이는 대상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그리고 고전주의의 역사적 풍경과 낭만파가 좋아하는 괴테와 셰익스피어에서 따온 시적인 화제를 포기해야 만한다”고 했다.

<화가의 화실>에서 벨라스케스의 <시녀들>213에서와 같은 공간의 깊이를 느낄 수 있다.
이는 쿠르베가 벨라스케스로부터 받은 영향이다.
그는 스페인 대가들의 구성과 모티브를 직접적으로 사용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모티브에 양식의 특징을 적절하게 사용했다.
쿠르베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리베라, 수르바란, 그리고 특별히 벨라스케스에게 관심이 많았다. …
라파엘로로 말할 것 같으면 물론 그가 관심을 끌게 하는 초상화를 그렸지만, 그의 작품에서는 별로 배울 게 없다.
소위 말하는 이상주의자들이 그를 경모하기 때문에 내게는 관심사가 되지 못하는 것 같다.
이상이라.
하! 하! 하! 하! 하! 하!
얼마나 속임수적이냐!
호! 호! 호! 하! 하! 하!

쿠르베는 1868년 여름이 지나갈 무렵 마드리드를 방문했다.
근래 미술사학자들은 쿠르베의 양식이 루브르 뮤지엄의 스페인 전시관에 전시된 17세기 스페인 대가들의 양식과 관계가 있다는 걸 안다.
그렇지만 1860년대 프랑스 화단에서는 그가 독창적인 양식으로 새로운 미술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했다고 보았다.
쿠르베는 있는 그대로의 세계와 사회를 묘사하는 것을 이상으로 했으며 평범하고 일상적인 인간성을 애호했으며, 문학에서의 졸라에 비견된다.

1860년대 마네의 작품은 무리요로부터 수르바란, 벨라스케스로부터 고야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스페인 양식 하에서 제작한 것들이다.
그는 또 이탈리아의 대가들 조르조네와 티치아노 그리고 플랑드르의 루벤스로부터 영향을 받았다.
마네의 1861년 살롱전 데뷔작인 <스페인 가수(기타리스트)>344는 붓놀림이 대담하며 사실주의 색채가 강렬하다.
그가 탐구해온 대가들의 장점이 두루 나타난 그림으로 배경을 어둡게 하고 조명효과를 극적으로 살린 작품이다.
색과 색의 대비를 통해 인물에 강렬한 인상을 부여한다. 보들레르와 고티에는 <발렌시아의 롤라>321와 <스페인 가수> 등 사실주의 그림들을 매우 좋아했다.
이 작품을 보고 비평가 고티에는 벨라스케스와 고야가 매우 반길 만한 그림이라고 적었다.

보라!
오페라에서는 볼 수 없는 웃기는 기타리스트가 여기에 있다.
벨라스케스는 그에게 친근한 눈짓으로 인사할 것이고 고야는 담뱃불을 빌리러 그에게 다가갈 것이다.
이 자연스럽고도 매력적인 인물은 마네의 회화 솜씨를 돋보이게 한다.
물감을 입힌 형태 속에 과감한 붓놀림과 너무나도 사실적인 색감이 있다.

마네는 쿠르베의 전례를 따라서 공간에 대한 벨라스케스의 환영적인 묘사에 영향을 받았으며 이 작품의 경우 구성에 있어서는 프랑스 화가 조르주 드 라 투르의 <현악기 연주자>342에서도 영감을 받았다.
마네의 가까운 친구 드가도 마네의 작품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로렌조 파강과 오귀스트 드 가즈>343를 그렸는데, 자신의 아버지를 오른편에 배경으로 삽입한 가운데 기타리스트가 노래를 부르는 모습으로 묘사했다.
마네가 <스페인 가수(기타리스트)>를 살롱전에 소개한 이듬해, 여든두 살의 앵그르는 살롱전에 <율법학자들 가운데 예수>345를 소개했다.
쿠르베와 마네의 모더니즘이 미술사의 새로운 국면을 마련한 이 시기에 앵그르의 작품은 라파엘로의 영향이 더 이상 유효하지 못함을 보여준 예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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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톤의 광기는 천재성이란 의미로



미술품은 어떤 것을 위해 유용해 보이더라도 철학적 진실에서 보면 그렇지 못하며, 논리적 무목적성은 그것을 사용하는 어떤 것도 오용이나 왜곡될 것이므로 그것을 바라보는 관람자의 무관심과 관련 있었으므로 예술은 체계적으로 중립을 지켰던 것이다.
칸트는 분명 예술이 즐거움을 제공해야만 한다고 상상했는데 그것은 무관심한 즐거움이었다.
이를 단토는 실제 요구들의 만족이나 실제 목적들의 달성과 연고가 없는 이래 미온적인 만족감으로 보고 일종의 발작적인 즐거움, 즉 고통이 없는 가운데 존재하는 즐거움으로 본다.18)
칸트의 미학은 어느 특정한 본질이라도 가지지 않는 채 한 본질을 가지는 것인 양 보였으므로 바로 여기에 헤겔의 예술철학이 자리매김되었다는 것이 단토의 주요 견해이다.

역사를 그 자체 스스로 자각되는 변증적 계시로 본 헤겔은 정신이 스스로 자신의 정체가 정신임을 깨닫게 되었을 때 역사의 종말이 온다고 주장했는데,
이는 말하자면 칸트의 말로 특정한 본질에 대한 무지로 인해 그 자체에 소원하게 되었을 때가 아니라 그 자체를 통해 자체에 일치한 때 오는 것을 의미한다.
헤겔은 예술과 철학이 각각 상이한 단계로 존재한다고 보고 철학을 자유롭게 하는 것을 예술의 역사적 사명으로 간주했다.
철학이 자유롭게 되면 예술은 그 역사적 사명을 다한 것이다.
역사에 대한 엄청난 철학적 비전을 갖고 있던 헤겔은 예술의 그 완연한 형태 자체가 이미 철학임을 암시하는 것으로 확증을 갖고 예술의 철학적 본질을 드러냄으로써 정신적 사명에서 해방된 것으로 보았으며 그것은 예술철학으로 달성되었다.
예술에 대한 철학적 특권 박탈은 플라톤으로부터 시작되어 칸트로까지 이어졌지만 헤겔에 이르러 그 숙명적 특권 박탈이 비로소 예술철학을 통해 예술과 철학 모두가 자유로운 모습으로 구현된 것이다.
이 같은 내용이 스스로를 가리켜서 “거듭 태어난 헤겔리안”이라 칭하는 단토의 요지이다.
이는 플라톤의 모방론을 종식시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플라톤은 예술을 모방의 모방22)으로 간주했으므로 지식과 달라 예술이 영원한 형상을 포착할 수 없다고 보았다.
아리스토파네스가 『구름』에서 사람을 선동했기 때문에 그를 정치적으로 위험한 존재로 보고 자신의 이상적인 국가에서 배척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이는 단토가 파악한 플라톤의 의도였고, 플라톤이 겉으로 드러낸 이유는 시인이 비이성적인 방법으로 호메로스Homer(BC 9세기경)를 해석하기 때문이었다.
시인 자신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왜 자신이 옳거나 그른지 알지 못하기 때문에 지식의 낮은 수준인 여섯 번째 단계에 속하는 사람으로 보고 플라톤은 예술가를 경멸한 것이다.

플라톤의 사고에 혼돈이 생겼는데 시인을 얕잡아 본 그가 미를 지닌 작품이 하나의 형상과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음을 시사한 때문이다.
예술가가 뮤즈로부터 영감을 받아 스스로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지 못하는, 즉 무당처럼 신지핀 자가 된다면 그는 오히려 통찰력을 갖게 되어 일반지식 그 이상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보았다.23)
광기mania를 말한 것으로 그는 신성에 의해 광기를 갖게 된 자는 영감을 받아 신의 인도에 인해 진리로 나아갈 수 있다고 보았다.24)
광기는 그의 철학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데 바카스 종교에서 신성을 느끼는 환희에서 영향을 받은 개념인 듯 보인다.
그의 예술론은 앞뒤가 맞지 않아 정확하게 무엇을 말하려는지 가늠하기 어렵다.

광기를 인정했으므로 예술가가 직접 진리로 나아갈 수 있게 되었더라도 이런 경우를 소수에게만 일어나는 현상으로 한정했으므로 모든 사람이 진리로 나아갈 수 없는 한 일반적 의미로서의 예술에 대한 그의 정의는 미결로 남을 수밖에 없다.

플라톤의 광기는 천재성이란 의미로 칸트에게로까지 전수되었고, 칸트는 1790년에 출간한 『판단력 비판 Kritik der Urteilskraft』에서 미적 경험을 다섯 종류로 분류했는데 다음과 같다:
무관심성, 비개념성, 형식성, 심의 전체의 관여, 필연성과 보편성. 필연성은 주관적임을 뜻하고 보편성은 비규칙적인 것을 뜻한다.
미적 경험에 대한 칸트의 이론은 플라톤의 광기와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다.
칸트가 자신의 입장에서 미적 판단력에 대한 비판을 통해 정당화했고, 또 정당화하려 한 것은 대상의 어떤 인식도 없는 심미적 취미의 주관적 보편성이었으며, 순수 예술Schone Kunste 영역에서는 모든 규칙 미학Regelasthetik을 넘어서는 천재의 우월성이었다.
칸트는 순수 예술을 ‘천재의 솜씨 Kunst des Genies’로 보았다.
그는 『판단력 비판』에서 예술미에 관해 언급하면서 “그와 같은 대상을 평가하는 경우에 역시 고려되어야 할” 것은 예술미의 가능성, 곧 그 안에 깃들여 있는 천재성이라고 했다.
그는 또 예술뿐만 아니라 이것을 평가하는 특유의 올바른 취미 역시 천재성 없이는 불가능하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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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운 레디메이드

 

<뒤샹과 친구들>(미술문화) 중에서

뒤샹은 1913년 가을 새로운 장소로 작업실을 옮긴 후 자전거 앞바퀴를 부엌에서 사용하는 등받이 없이 걸터앉는 원형의자 위에 거꾸로 세워 조립했다.(뒤샹 101-1) 평론가들은 그것을 20세기의 첫 레디메이드 작품이라고 했고, 또는 움직이는 첫 조각이라고 극찬했다. 하지만 뒤샹은 평론가들이 말한 의도를 갖고 그것을 제작한 것은 아니었고, 그저 그렇게 제작하고 싶어서 만들었을 뿐이다. 그는 자전거 바퀴는 “즐거움처럼 그저 나타난 것”이라면서 말했다. “네가 불이나 연필깎기를 가진 것처럼 불필요한 것이 내 방에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운동을 행하는 즐거운 부속품이다.” 자전거 바퀴를 앞으로 혹은 뒤로 밀면 바퀴살은 보이지 않지만 바퀴가 천천히 돌면서 바퀴살이 불분명하게 보이다가 결국 분명해진다. 그는 <자전거 바퀴>를 “사람들에게 보여주려고 제작한 것이 아니라 단순히 내가 사용하려고 제작한 것이었다”고 했다.

레디메이드란 말은 2년 후부터 사용되기 시작하지만 이런 말이 통용되기 전 1914년 그는 레디메이드를 두 번 더 발견했다. 1월 어느 날 저녁 그는 가족이 사는 루엥으로 가려고 기차를 탔는데 멀리 떨어진 곳에 불이 켜진 진열장이 눈에 들어왔다. 그는 “불이 켜진 진열장은 약국 표지판처럼 빛에 색을 사용할 수 있다는 아이디어를 내게 주었다”고 했다. 그는 미술재료를 파는 상점에 가서 나무와 강이 그려진 무의미한 컬러 석판화를 프린트한 종이를 석 장 샀다.(뒤샹 121) 그는 약국 표지판처럼 그 종이에 과슈로 붉은색과 푸른색으로 동그란 점을 그렸는데, 여동생 수잔이 약사 남편과 1914년에 이혼한 것을 상징한 것이라면서 “지성적인 개념을 나타내기 위한 시각적인 개념의 이그러뜨림이었다”고 했다.

뒤샹이 말한 또 다른 레디메이드는 병을 말리는 데 사용하는 <병걸이>(뒤샹 101-2)로서, 이 경우 시각적 이그러뜨림과는 무관했다. 프랑스인은 포도주병을 계속해서 사용하는데 이와 같은 병걸이에 포도주병을 말린 후 그 빈 병을 포도주 상점에 가지고 가 포도주를 채운다. 그는 상점에서 병걸이를 구입했지만 포도주병을 말리는 데 사용하려는 의도는 없었다. “내가 병걸이를 구입한 것은 레디메이드 조각이란 생각 때문이었다”고 그는 2년 후 수잔에게 보낸 편지에 적었다. 하지만 병걸이는 그의 작업실에서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었지 레디메이드 작품으로 사람들에게 소개된 적은 없었다. 
 

뒤샹이 뉴욕에 도착한 것은 1915년 6월 15일이었다. 1913년 2월 17일에 개최된 대규모 아모리 쇼에 작품을 네 점 출품했고 언론을 통해 뒤샹의 작품이 알려졌으므로 미국에는 뒤샹을 환대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아모리 쇼를 기획했던 월터 패츠가 항구에서 뒤샹을 반가이 맞았고 월터 아렌스버그(뒤샹 108, 110, 109)가 경제적으로 후원했다. 뒤샹보다 아홉 살 많은 아렌스버그는 피츠버그의 커다란 스틸 회사 사장의 아들로 하버드대학에서 영문학과 철학을 공부하고 1900년에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후 이탈리아의 플로렌스로 가서 오래 머물면서 이탈리아어를 배웠으며, 단테의 <신곡>을 번역했다. 유럽의 모더니즘에 매료된 그는 미술품을 수집했고 뒤샹의 작품을 이해하고 있었다. 아렌스버그는 하버드대학에서 조교로 잠시 근무하다가 뉴욕으로 와 기자생활을 하면서 <이브닝 포스트>지에 이따금 미술평론을 기고했다. 현재 필라델피아 뮤지엄에 소장되어 있는 대부분의 뒤샹 작품은 그가 구입하여 수집한 것들로 타계하기 전 기증했다.

뒤샹은 또 다른 레디메이드를 선보였다. 그는 컬럼버스 애비뉴에 있는 철물점에서 눈을 치울 때 사용하는 눈삽을 구입했다.(뒤샹 116) 눈삽은 미국의 어느 철물점에서도 구입할 수 있는 흔한 것이다. 왜 뒤샹이 그것을 샀을까? 뒤샹은 그런 삽을 과거에 본 적이 없는데 프랑스에는 없기 때문이다. 그는 눈삽을 스튜디오로 가지고 와서 물감으로 <부러진 팔에 앞서서>라고 제목을 적은 후 ‘from Marcel Duchamo 1915’라고 서명했다. 그는 눈삽의 손잡이를 철사에 묶어 천장에 매달았다. 그에 의해서 평범한 물질이 하나의 작품으로 선정된 것이다. 뒤샹은 수잔에게 보낸 편지에 적었다.

“내 화실에 가면 자전거 바퀴와 병걸이를 볼 것이다. 병걸이는 레디메이드 조각으로 내가 구입한 것이다. 여기 뉴욕에서 나는 동일한 특성을 지닌 물건을 구입하여 레디메이드(처음으로 영어로 레디메이드란 말을 사용했다)로 취급하고 있단다. 네가 영어 ready made의 뜻을 이해할 줄 안다. 난 영어로 제목과 이름을 적어넣는다. 예를 들면 커다란 눈삽에 ‘부러진 팔에 앞서서’라고 적었는데 프랑스어로 En avance 여 bras casse가 될 것이다. 그것을 낭만주의나 인상주의 또는 입체주의적으로 이해하려고 애쓸 필요는 없다. 그것들과는 무관하단다. 다른 레디메이드 조각은 <두 번에 걸친 비상사태>인데 프랑스어로는 Danger (Crise) en faveur de 2 fois이다. 이런 머리말들은 실제로 말하기 위해서이다. 병걸이를 집으로 가져 가거라. 먼 이곳에서 난 그것을 레디메이드 조각으로 만들려고 한다. 병걸이 바닥 안쪽 둥근 곳에 은색과 흰색을 사용하여 작은 글씨로 다음과 같이 적어주기를 바란다.
From Marcel Duchamp"

수잔에게 준 뒤샹의 지침은 이미 때가 늦었다. 오빠의 화실을 청소하다가 자전가 바퀴와 병걸이를 발견하고 수잔은 쓰레기로 알고 내다버렸다. 현재 파리의 퐁피두센터와 미국의 필라델피아 뮤지엄 등에 있는 <자전거 바퀴>와 <병걸이>는 뒤샹이 제작한 본래의 것들이 아니고 나중에 재생한 것들이다. 뒤샹이 편지에 언급한 <두 번에 걸친 비상사태>는 눈삽과 마찬가지로 그가 구입한 것인데, 아무도 그것을 본 사람이 없고 현존하지도 않는다.

뒤샹은 레디메이드를 미술품으로 취급하여 그것에 서명했다. 그렇다면 과연 무엇이 미술인가? 사람이 만든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미술품이란 말인가? 레디메이드는 미술을 정의할 수 있는 가능성을 아예 부정하는 미술품이 되었다. 그가 어떤 사물을 선정하든지 그것에는 그의 특유의 아이러니와 유머가 있고, 미적 모호함이 있다. 그러나 그는 레디메이드를 평생 20개 이상 선정하지 않았는데 이는 모순이며, 뒤샹 자신도 이 점을 잘 알고 있었다. 레디메이드에 관한 그의 개념도 계속 달라졌으므로 모순은 더욱 극대화될 수밖에 없었는데 이 점을 훗날 카반느가 뒤샹에게 물었다.

카반느: 무엇이 선생님으로 하여금 레디메이드 사물들 중 하나를 선정하게 했습니까?

뒤샹: 사물에 달렸지. 보통 난 어떻게 보여지는가에 관심이 있었어. 사물을 선정하는 일은 어려운 이유는 보름만 지나면 그 사물을 좋아하든지 싫어하든지 하게 된단 말이야. 무관심한 마음으로 미학적 감성을 가지지 않은 채 사물을 보아야 하네. 레디메이드를 선정할 경우 시각적 무관심으로 그렇게 해야 하고, 동시에 좋고 나쁘다는 감각을 완전히 상실한 상태에서 선정해야 하네.

카반느: 감각이란 무엇입니까?

뒤샹: 습관이야. 이미 받아들인 어떤 것을 반복하는 것이지. 자네가 수차례에 걸쳐서 반복한다면 그것이 감각이 되는 것이지. 좋은 것이거나 나쁜 것이거나 같은 것일세. 감각일 뿐일세.

카반느: 무엇이 선생님으로 하여금 감각으로부터 자유로워지게 했습니까?

뒤샹: 기계적인 드로잉이었어. 그것은 모든 회화적 전통 밖의 것으로 감각을 가지지 않도록 하지.

카반느: 계속해서 인식하는 것에 대적하는 것으로 자신을 방어하시는군요.

뒤샹: 미학적 느낌이 있도록 형상 혹은 색을 만들며 ... 그리고 그것들을 반복하고 ...

카반느: 선생님은 반자연주의적인 태도를 취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연적인 사물로 그렇게 하시는군요.

뒤샹: 그래, 하지만 내게는 그것이 늘 같았어. 내 책이랄 수 없지. 그것은 그렇게 되어진 거야. 나 혼자 그렇게 만든 것은 아니란 말일세. 책임에 이의를 제기하는 것이 나의 방어가 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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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크아트

 

<워홀과 친구들>(미술문화) 중에서

정크아트는 전통적인 미술 재료를 무시하고 쓸모없는 재료, 폐품, 도시의 폐기물 등으로 구성된 미술로서, 미국에서 이 운동의 기원은 로버트 라우센버그(1925~)의 ‘콤바인 combines’ 혹은 결합시킨 회화로 거슬러 올라간다. 라우센버그는 1950년대 중반 캔버스에 천조각과 누더기, 찢긴 사진, 기타 버려진 사물들을 붙이기 시작했다. 일반적으로 쿠르트 슈비터스가 사용한 콜라주 기법을 급진적으로 발전시킨 것으로 간주되지만, 실제로 라우센버그는 존 케이지 철학의 영향으로 이를 시작했다. 존 케이지의 기본적인 사상은 이미지의 범람으로 관람자의 정신을 분산시켜 명상적 분위기를 야기해야 한다는 것이다. 많은 예술가들이 다양한 목적을 위해 이 기법을 활용하였으며 이후 타블로tableaux와 아상블라주Assembladge로 이어졌다. 타블로는 피카소와 브라크가 판지와 나무, 금속, 실 등을 모아 제작한 구성물과 1912년부터 종이를 풀로 붙이는 파피에 콜레에 붙인 명칭이다. 콤바인 회화에서 이루어진 사진의 활용은 멕 아트mec art의 개척자들에 의해서 다른 방향으로 진전되었다. 멕 아트는 기계미술mechanical art의 약칭으로 1964년 자케가 자신의 작품인 <풀밭 위의 점심식사>를 설명하면서, 파리에서 파리에서 사용되던 은어인 멕mec을 동음이의어로 사용한 데서 기인했다. 사진 기법을 이용하여 새로운 합성이미지를 기계적으로 생산하는 미술을 말한다.

라우센버그는 1950년대 중반 사진을 포함한 실제 사물을 채색된 화면에 붙이거나 결합시키는 작업을 했는데 콤바인 회화였다. 그는 콤바인 회화로 옮겨 가기 전 붉은색 콜라주 구성을 다수 제작했는데, 이런 작품에서 신문조각, 끈 사진, 녹슨 못 등과 같은 실제 사물들은 회화 표면을 형성하는 뿌려진 물감과 결합되었다. <샤를렌>은 콤바인 회화의 대표적인 작품이다. 라우센버그가 3차원적인 실제 오브제를 작품의 구성요소로 사용한 이유는 추상표현주의에서까지 계속 유지되어 온 환영적인 공간을 부수고, “예술과 삶 사이의 간격에서 활동하기” 위해서였다. 이런 태도는 작곡가 존 케이지의 철학과 유사하며 그가 케이지로부터 직접 받은 영향이었다. 또한 동시적이고 다원적인 암시성을 지닌 이미지로 “관람자의 주의를 산만하게 하는 것”을 원한 점에서도 케이지와 공통적이다.

1950년대 말 라우센버그는 잡지나 신문의 그림이나 사진을 전사하기 위해 프로타주 기법을 발전시켰다. 프로타주frottage는 초현실주의자들이 개발한 자동주의 기법 중 하나로 놋쇠 기념패를 탁본하는 과정과 유사한 이 방법은 막스 에른스트가 고안했다. 그에 의하면 1925년 8월 10일 숙소의 마룻바닥을 보다가 마루의 광택에 비치는 나뭇결에 주목하게 되었고 이로부터 생겨나는 불규칙한 패턴을 좇다가 이것을 종이 위에 옮겼다고 한다. 초현실주의자들은 이 방법을 잠재의식에 접근하기 위한 기법으로 채택했다. 라우센버그의 다양한 물질을 사용한 콤바인 회화와 3차원적 작품은 미술을 새로운 어휘, 새로운 문장 구성으로까지 발전시켰으며, 이는 입체주의가 가속화하고 확대시킨 전통의 일부로 볼 수 있고, 오브제 조각과 콜라주는 피카소의 초기 조각과 다다이스트, 뒤샹, 슈비터스의 작품에 의해 설정된 방향을 유지한 것이다.

라우센버그의 작품을 평론가 로렌스 앨러웨이가 정크아트라고 부른 후 존 체임벌린, 로버트 맬러리, 리처드 스탕키에비치, 마크 디 수베로, 리 반터쿠 등이 금속조각, 망가진 기계부품, 쓰다 남은 목재 등으로 제작한 조각에도 확대 적용되었다. 정크아트는 좋은 재료를 고집하는 전통에 대하여 반대하고 가장 보잘것없고 쓸모없는 사물들로 작품을 만들 수 있다는 점을 추구했다. 이런 태도는 1950년대에 전 세계적으로 공통된 것이었으며, 미국의 정크아트는 타피에스를 비롯한 여러 스페인 미술가들의 작업과, 부리, 아르테 포베라 등의 이탈리아 예술가들의 작업과 유사했다. 평론가 제르마노 첼란트가 1970년에 처음 사용한 아르테 포베라는 주로 미술 매체의 물질적인 속성 및 미술 재료의 변하기 쉬운 성질과 관계가 있는, 근본적으로 반상업적이고, 불안정하며, 평범하고, 반형식적인 미술을 표방했다. 이 명칭은 버려진 물질로 작품을 제작한 데서 비롯했다. 대부분의 유럽 국가 및 일본에서도 이와 유사한 운동이 있었는데, 이들 지역의 예술가들은 전쟁 후 버려진 폐품과 쓰레기로 작품을 제작했다. 라우센버그와 그 밖의 예술가들은 폐품과 쓰레기를 이용할 때 객관적이고 냉정한 태도를 유지했으며, 우유병이나 연재만화책과 같은 일상용품이 급속히 폐품이나 쓰레기로 바뀌게 되는 속도감을 암시하는 것 이외의 정서적 의미는 전혀 포함시키지 않았다. 캘리포니아의 정크조각이나 부리와 타피에스의 작품은 쓰다버린 기계부품, 못쓰게 된 들보 재목 및 녹슨 금속, 찢기고 더렵혀진 천 조각, 산업화된 도시 생활의 일반적인 파편들을 사용하여 향수를 불러일으켰다.

정크아트에서 체임벌린과 디 수베로의 작품은 유명한데, 두 사람 모두 산업용 재료를 사용한 입체주의 조각가 앤소니 카로로부터 영향을 받았다. 인디애나 주의 로체스터 태생 미국인 조각가 존 체임벌린은 원색 에나멜을 칠한 자동차의 몸체를 일그러뜨려서 추상 아상블라주 조각을 제작하여 유명해졌다. 일그러진 자동차 몸체는 얼어붙은 동력주의를 보여주었는데 라우센버그와 재스퍼 존스의 네오다다 미학과 다르지 않았다. 체임벌린의 조각은 마치 회화에서 빌렘 드 쿠닝의 충돌하는 붓질 같았으며 불안정하면서도 순간적인 정연함을 통해 에너지가 분출하도록 했다. 정트아트에 있어 도시와 관련된 주제는 드 쿠닝의 대중적인 이미지와 현대사회의 대량생산품에 대한 관심에서 그 가능성이 생겨났다고 할 수 있다.

체임벌린(1927~)은 시카고 아트 인스티튜트와 블랙 마운틴 칼리지에서 수학했다. 1957년 시카고의 웰스 스트리트 화랑에서 첫 번째 개인전을 열었는데 대부분 쇠 파이프로 제작된 초기 조각은 데이비드 스미스의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 1950년대 말 그는 버려진 자동차의 금속 부품을 구부리고 용접한 작품을 제작해 정트아트에 속하는 예술가로 분류되었다. 그가 이런 재료를 사용한 의도는 사회적인 논평보다는 완성된 작품의 형식적 특성과 관련되었지만, 재료의 원래 출처가 작품 속에 남아 있어서 전체적인 인상 형성에 영향을 주었다. 그의 작품의 표현적 에너지는 액션 페인팅과 비교되었다. 1960년대 중반에는 우레탄과 유리 섬유 같은 재료를 사용하기 시작했고 점차 아연 도금한 철과 알루미늄으로 재료를 바꾸었다. 1960년대에 그는 정크아트의 대표적인 금속 조각가 중 한 사람으로 알려졌으며 그의 작품은 미국과 유럽에 널리 전시되었다.

상하이 태생 미국 조각가 마크 디 수베로(1933~)는 쇠막대기, 자동차 타이어, 쇠 끈, 의자, 그리고 건축재료 등과 쓰레기장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물질들을 혼용하여 커다란 규모로 환경 아상블라주 조각을 제작했다. 디 수베로는 추상표현주의의 웅대한 에너지와 조형주의의 공학적인 원리를 반기하적인 균형으로 나타냈다. 1997년 퀸즈 뮤지엄은 개관 25주면 기념전을 성대하게 개최하면서 디 수베로의 작품을 포함시켰으며 정크아트에서의 그의 위치는 늘 당당했다.

디 수베로는 버클리에 있는 캘리포니아 대학에서 철학을 전공했고, 1957년 뉴욕으로 이주하여 그린 화랑에서 첫 번째 개인전을 열었다. 초기에는 강렬한 표현주의적 작품을 제작했지만 1960년대에 철거된 건물이나 쓰레기장에서 가져온 갖가지 물건들로 기념비적인 아상블라주를 제작하면서 정트아트의 선구자가 되었다. 디 수베로는 커다란 나무막대들과 거칠고 두꺼운 판자 주위로 불안하게 비대칭적으로 자리잡은 구조물에 종종 간이의자를 집어넣어 관람자를 작품의 공간과 긴장 상태 안에 참여하도록 유도했다. 1971년 미국의 베트남 전쟁 개입에 반발하여 베네치아로 이주했으며 이탈리아에서 대규모 야외 조각전을 개최했다.

이 시기에 정크아트 예술가라고 할 수 없는 사람들도 정크 조각을 선보였다. 짐 다인(1935~)도 목수가 사용하는 연장들을 캔버스에 매달았는데 그에게 연장은 “우리의 손”과 같았다. 일반적인 물질을 주제로 사용한 다인은 말했다. “내가 물질을 사용할 때 그것들을 느낌의 단어들처럼 여긴다. ... 나의 작품은 자전적이다.” 그에게 연장이 사람의 손을 대신하는 이유는 할아버지가 목수였기 때문에 어릴 적 할아버지의 연장을 갖고 놀던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며, 연장이 자전적 의미를 갖는 것은 아버지가 고향 신시내티에서 철물점을 경영했기 때문이다.

신시내티 대학, 보스턴 미술관학교, 오하이오 대학에서 수학한 다인은 1959년 저드슨 화랑에서 클래스 올덴버그와 함께 처음으로 전시회를 열었다. 다인은 미국 팝아트의 독보적인 존재였으며, 회화적 특성이 강조된 배경과 끈, 잔디 깎는 기계, 가전제품, 세면대 등의 실제 사물들을 대비적으로 결합시킨 작품으로 잘 알려져 있다. 1959~60년에 올덴버그와 공동으로 작업하면서 해프닝의 선구자 중 한 사람으로 부각되었다. 다인은 1960년대 말과 1970년대 초의 프로세스 아트 또는 퍼포먼스 아트의 선구자로 간주된다.

그리스계 미국 조각가이며 실험 예술가 루카스 사마라스(1936~)도 평범하지 않은 어지러운 쓰레기를 나무상자 안에 아상블라주하여 고전주의 감각에 일치하는 형태들로 제작했다. 사마라스는 상자 안에 물질을 채워넣기를 즐겨했다. 어려서부터 금지된 물질과 에로틱한 물질에 관심이 많았던 그의 상자들은 변태성욕적인 느낌을 주었다. 그는 예술이란 고요한 느낌을 깨뜨리는 것이며 어떤 방법이라도 사용 가능하다고 믿었다. 그의 작품에는 다다의 요소가 현저하게 나타났다.

사마라스는 1955년에 미국 시민권을 받았고, 1955~59년 럿거스 대학, 1959~62년 컬럼비아 대학원 미술사학과에서 공부했다. 예일 대학과 브루클린 칼리지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그는 1950년대 말 석고에 적신 넝마로 인물상을 제작했으며, 초현실주의적 환상과 팝아트의 도상을 결합한 파스텔화도 그렸다. 1960년대에는 수천 개의 핀, 털실, 못 등의 혼합매체를 사용한 독창적인 양식을 발전시켰다. 또한 다양한 오브제를 이용한 실험적인 아상블라주 작업을 선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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