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성적인 익살, 의도적인 우연, 레디메이드, 그리고 개념미술
개념미술은 마르셀 뒤샹으로부터 비롯되었다. 뒤샹의 익살, 우연의 선택, 레디메이드의 선정에서 개념미술이 예견되었다.
뒤샹은 1911년 10월에 <기차를 탄 슬픈 젊은이>를 그리기 시작했다.(워홀 60) 이는 그의 자화상으로 가족을 만나기 위해 파리로부터 루엥으로 가는 기차를 탄 모습이다. 뒤샹은 이 작품에서 젊은이가 충분히 나타나지 않았고 슬픔 또한 충분히 묘사되지 않은 채 입체주의의 영향만 두드러지게 나타났다고 했다. 제목을 슬픈 젊은이라고 한 것은 사랑하는 수잔이 8월에 결혼한 후 처음 가족을 만나기 위해 12월에 루엥으로 향하면서 자신을 슬픈 젊은이라고 생각했다.
뒤샹은 재담가였다. 그에게는 지성적인 익살이 있었으며, 삽화를 그린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해학적인 요소를 그림에 삽입할 줄 알았다. <기차를 탄 슬픈 젊은이>에서 이런 요소가 발견된다. 그는 말했다.
“<기차를 탄 슬픈 젊은이>에서 이미 유머를 그림에 삽입하려는 나의 의도가 드러났다. 아폴리네르가 그것을 ‘기차에 있는 우울함’이라고 부른 것으로 생각된다. 젊은이가 슬픈 이유는 기차가 뒤를 따라오기 때문이다.”
뒤샹은 곧이어 <계단을 내려가는 누드>를 그렸는데 마찬가지로 유머가 삽입된 작품이다. 누드가 계단을 내려간다는 것은 만화에서나 있을 법한 일이지만 순수미술에서는 가당치 않은 발상이었다. 뒤샹은 코믹 만화에서나 있을 법한 유머를 순수미술에 도입하며 이런 점이 문제를 야기했다. 그가 1912년에 그린 <처녀로부터 신부에 이르는 길>과 훗날 <큰 유리>로 완성시킬 <그녀의 독신자들에 의해조차 벌거벗겨진 신부>에 관한 드로잉도 유머를 삽입한 것들이다. <그녀의 독신자들에 의해조차 벌거벗겨진 신부>에서 ‘조차’란 말의 뜻이 무엇이냐고 묻는 질문에 뒤샹은 훗날 응답했다. “나는 제목에 관심이 많은 편인데 그 시기에는 특히 문학에 관심이 많았으며 단어들에 흥미를 느꼈다. 그래서 콤마를 찍은 후 ‘조차 even’라고 적었는데 부사 ‘조차’는 의미가 없으며, 제목 또한 무관하다.” 그는 ‘반감각적 antisense’ 언어를 사용함으로써 시적인 문장이 되게 한 것이며 특별히 작품에 의미를 부여하려고 한 것은 아니었다.
뒤샹은 1914년에 <정지들의 네트워크>(뒤샹 100)를 그렸다. 그는 많은 사람이 우연을 좀더 조직적으로 사용한다고 말한 적이 있었는데 이 작품에서 그가 우연을 사용했음을 본다. 그는 우연을 개인적인 것으로 말했다. “너의 우연은 나의 우연과 같지 않지 않느냐? 내가 던진 주사위와 네가 던진 주사위는 같지 않다. 그래서 주사위를 던지는 것과 같은 행위는 너의 잠재의식을 표현하는 데 매우 적절한 방법이 된다.”
뒤샹의 레디메이드는 개념미술을 가능하게 했다. 레디메이드ready-made는 뒤샹이 대량생산된 기성품을 임의적으로 선택하여 미술품으로 소개한 데서 비롯한 명칭이다. 기성품은 그의 선정에 의해 주변 환경으로부터 격리되고 동일한 종류의 대량생산품들로부터 분리되어 나와 그 기능을 박탈당함으로써 일종의 실존적 개성과 물신 숭배적 특질, 그리고 혼란스러운 위엄을 얻게 된다. 뒤샹이 처음 선정한 레디메이드는 1913년과 이듬해 제작된 <자전거 바퀴>와 병걸이>이다.(뒤샹 101) 그가 선정한 오브제는 놀랍게도 불안한 위엄, 대담한 고독을 지니게 되어 관람자는 두려움과 분노 혹은 웃음으로 반응하게 된다.
몇몇 팝아트 예술가와 누보 레알리즘 예술가들이 훗날 아상블라주에 사용한 기계 생산물과 폐기된 기계의 일부를 사용했는데, 이는 뒤샹의 레디메이드와는 그 미학이 다르다. 뒤샹의 레디메이드가 갖는 충격 효과는 그것들이 격리되었다는 점과 기능적으로 제작된 오브제에서 완벽하게 그 기능을 박탈했다는 점에서 생긴 것이다.
뒤샹 자신도 레디메이드와 발견된 오브제를 구별하면서, 발견된 오브제가 미적 특질이나 아름다움, 독특함으로 인해 선택되거나 발견된 데 비해 레디메이드는 개성이나 독특함이 없는 대량생산품 중 하나일 뿐이라는 점을 지적했다. 따라서 발견된 오브제를 선택하는 과정에서는 예술가의 취향이 개입되지만 레디메이드의 경우에는 그렇지 않다.
뒤샹의 지성적인 익살, 의도적인 우연, 그리고 레디메이드는 1960년대 말과 1970년대 초에 개념미술의 예견했다. 사상이나 개념을 미술품의 본질적인 구성요소로 간주하며 눈에 보이는 미술품이 아닌 기록의 형태를 우선적으로 완성품으로 보는 개념미술의 가능성은 뒤샹이 1917년 독립미술가협회에 출품한 소변기 <샘>에서 이미 드러났다. 그는 작품의 자기 지시성self-referentiality을 기록으로서 남겼다. 그가 선택한 오브제 소변기는 그의 해석을 통해 작품으로 변용되었다. 작품에 자기 지시성이 있어 평론가의 식견이 이를 미술품으로 규정하는 중요한 판단의 요소로 삼는 오늘날의 입장에서 볼 때 <샘>은 개념적인 작품이었다. 과거에는 작품을 성립하는 판단기준이 작품이 제작되기 전에 미리 존재했지만 뒤샹은 레디메이드를 통해서 작품을 규정하는 기준을 예술가 스스로 제시할 수 있음을 시위했다. <샘>은 최초의 개념미술 작품으로 꼽을 만하다.
로베르타 스미스는 1974년에 발간된 <현대미술의 개념>에 기고한 ‘개념미술’에 관한 글에서 적었다.
“뒤샹은 창조적인 행위를 여러 가지 오브제나 활동에 ‘미술’이라는 명칭을 부여하는, 극히 기본적인 행위로 바꾸어놓았다. 그에게 있어 창작은 단순하고 지적이며 많은 부분 임의적인 ‘결정’의 결과이다. 뒤샹은 다양한 방식의 언어적, 시각적 장난과 의도적인 우연, 평범하고 하찮은 사물, 타인과 자신의 미술을 겨냥한 도발적인 제스처, 그리고 심지어 자기 자신을 작품의 수단과 주제로 사용했다.”
인습 타파의 태도로 활약한 뒤샹을 따른 예술가들이 1950년대와 1960년대 초에 두드러졌다. 그들은 자신의 배설물을 담은 양철통을 미술품으로 전환시킨 피에로 만초니, 1958년 파리의 화랑에서 텅 빈 전시장을 소개한 이브 클랭 등이 있다. 그러나 개념미술이 인식 가능한 운동이 되어 그 명칭을 얻게 된 것은 1960년대 후반이었다. 1961년 반예술을 표방한 미국인 헨리 플린트(1940~)가 개념미술이라는 말을 사용했지만, 이 용어가 통용되기 시작한 것은 1967년 <아트포럼>에 솔 르윗의 ‘개념미술에 대한 단평’이 발표된 후부터였다. 르윗은 적었다. “개념미술에서 아이디어나 개념은 작품의 가장 중요한 측면이다. ... 모든 계획과 결정이 사전에 행해지며 작품의 제작은 형식적인 것이다. 아이디어는 미술을 제작하는 기계가 된다.”
개념미술의 첫 주요 전시회는 1969~70년 런던, 뉴욕 등지에서 열렸고, 1970년대 초에 당시 유행하던 아르테 포베라, 신체미술, 대지미술, 퍼포먼스 등의 미술운동과 종종 부분적으로 겹치면서 가장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이런 경향들은 모두 미니멀아트의 형식주의와 상업주의에 반대하여 일어난 포스트-미니멀리즘의 일부로서 등장한 것이다. 미국인 로버트 배리(1936~)의 <텔레파시에 의한 작품>(1969)은 “전시하는 동안 나는 언어 혹은 이미지로는 불가능한 일련의 사고로 이루어진 예술작품을 텔레파시에 의해 전달하려고 한다”는 진술로 이루어졌다. 배리는 적었다. “세계는 흥미로운 오브제들로 가득 차 있다. 따라서 나는 더 이상 오브제를 추가하고 싶지 않다. 나는 단순히 시간이나 공간에 의한 사물의 존재를 말하고 싶을 뿐이다.”
어떤 개념미술은 독일인 한스 하케(1936~)의 작품처럼 심각한 정치적 문제를 다루고 있으나, 많은 경우 개념미술작품은 언어에 대한 난해한 분석이나 로버트 배리의 작품처럼 예술가의 사적인 기이한 관심과 연관되어 있다. 개념미술의 대표자와 찬미자들은 이런 행위를 미술의 본질에 대한 문제 제시와 그 경계를 도발적으로 확장하려는 것으로 간주한다. 로버트 모리스는 1970년에 “지루한 오브제 생산기술로부터 미술의 힘을 분리하는 것은 ... 인식의 변화를 일으키는 힘으로서의 미술에 다시 초점을 맞추는 것이다”라고 했다. 그러나 키스 본은 1972년에 이런 인식에 반발하며 말했다. “개념미술이라는 용어 자체가 모순이다. 왜냐하면 미술은 단지 개념을 지니고 있는 것이 아니라 개념의 현실화이기 때문이다.”
1970년대 중반에 ‘후기-개념적인 Post-Conceptual’이란 용어가 등장함으로써 개념미술의 절정이 지나갔다. 1974년 혹은 1975년에 절정의 시기가 막을 내린 것이다. 개념미술은 1980년대 중반 네오-지오의 대표적인 작품을 통해 개념미술에 대한 흥미가 되살아날 때까지 산발적으로 계속되었다. 네오-지오Neo-Geo는 신기하적 개념주의Neo-Geometric Conceptualism를 줄인 말로 1980년대 중반 뉴욕에서 다양한 양식과 매체를 사용하여 신표현주의의 주정주의에 반발한 미국 예술가 그룹의 작품을 말한다. 제프 쿤스가 이 그룹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1980년대 중반의 새로운 관심에 대하여 ‘네오-개념’이라는 용어가 사용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