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상표현주의 3

 

또 다른 오토마티즘의 유형으로는 벨기에계 프랑스 시인이며 화가 앙리 미쇼Henri Michaux(1899~1980)가 스스로 ‘유령주의’라고 명명한 방법이 있다. 1922년부터 글을 쓰기 시작하여 문학계에 명성을 쌓은 미쇼는 1924년 파리로 갔고, 1926 처음으로 회화와 소묘를 제작했다. 1937~40년에 본격적으로 회화에 매진하여 유령주의로 명명한 검정색 배경 위에 과슈로 그리는 독자적인 양식을 발전시켰다. 초현실주의 예술가들이 선호한 오토마티즘 기법으로 그린 이 서정적이면서도 꿈과 같은 추상 작품들은 심령 이미지, 신화, 유령이 존재하는 모호한 세계를 창출해냈다.
오토마티즘은 마타Matta(로베르토 세바스티안 마타 에차우렌Roberto Sebastian Matta Echaurren, 1911~)를 통해 추상 표현주의 화가들, 특히 고르키와 머더웰을 통해 미국에 알려졌다. 산티아고 태생의 칠레계 프랑스 화가 마타는 1931년 산티아고 카톨릭 대학에서 건축을 공부한 뒤 1933년 파리로 가서 2년 동안 간간이 르 코르뷔지에의 작업실에서 제도가로 일했다. 이탈리아와 러시아, 스페인을 여행했고, 1936년 스페인에서 시인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를 만나 살바도르 달리를 소개받았다. 마타는 달리를 통해 파리의 앙드레 브르통을 알게 되어 초현실주의 운동에 동참하게 되었으며 초현실주의의 오토마티즘에 의한 제작 원리를 실행한 선도적인 인물이 되었다. 1939년부터 초현실주의와 결별한 1948년까지 뉴욕에 거주하며 미국의 초현실주의, 특히 고르키에게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마타는 스스로 “심리학적 형태학” 혹은 “내면의 정경”이라 칭한 자신의 초기 초현실주의 작품에서 오토마티즘 기법을 이용하여 무의식적인 심상을 묘사하는 데 관심을 기울였는데, 가끔은 필적 같은 것으로 구성된 기묘하게 움직이는 아메바나 곤충 같은 형태가 나타났다. 1941년 멕시코 여행 후 이런 자각에 이르러 대지의 힘과 성적인 힘, 우주적인 힘이 만나 폭발적인 대격변을 일으키는 모습을 표현했다. 1940년대 초 작품에서는 광활한 우주 공간에서 떠다니고 충돌하는 유기적이고 기계적인 형태들로 인해 역동적인 측면이 점점 증가되었다. 이런 공간은 격렬하고 혼란스러운 움직임으로 가득 차 있기는 하지만 모든 것들은 우주 안에서 일체를 이룬다는 마타의 신비주의적인 믿음을 상징하는 것이다.
아르메니아계 미국 화가 아슐리 고르키Arshile Gorky(보스다니크 마노크 아도이안Vosdaning Manoog Adoian, 1905~48)는 1909년 터키인의 박해를 피해 아르메니아 연방의 수도 예리반으로 와서 인쇄공과 제본공으로 일했다. 1920년 미국으로 이주하여 보스턴의 로드 아일랜드 디자인 학교에서 공부했다. 1925년 뉴욕으로 이사하여 그랜드 센트럴 미술 학교에서 공부한 뒤 학생들을 가르쳤다. 그는 피카소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아 입체주의적 추상화를 많이 그렸다. 그러나 그는 기하적 추상에 안주하지 않고 입체주의 기법을 보다 회화적이고 표현적인 의도에 적합하게 만들려고 했다. 그는 1940년대 초에 뉴욕에 거주하던 유럽의 초현실주의 화가들과 친분을 쌓으면서 비로소 고유한 양식에 도달했다. 이런 영향 하에서 미로의 양식과 유사한 생물 형태적 형상이 있는 추상화를 그렸다. 고르키의 초기 작품은 여러 화가의 작품을 솜씨좋게 뒤섞어 모방한 것으로 평가된다. 그러나 말년의 작품에서는 미로와 칸딘스키의 영향을 보여주면서도 초현실주의와 생물 형태적 추상을 매우 독창적으로 융합함으로써 훌륭한 최후의 초현실주의자이자 최초의 추상 표현주의 화가로 인식되었다.
워싱턴 주 애버딘 태생의 로버트 머더웰Robert Motherwell(1915~91)은 유년 시절을 캘리포니아 주 샌프란시스코에서 보냈고, 잠시 샌프란시스코의 캘리포니아 미술 학교에서 회화를 공부하다가 1932년 스탠터드 대학에 입학하여 철학을 공부했다. 그의 졸업 논문은 정신분석 이론에 관한 것이었으며 평생 이 주제에 지속적인 관심을 기울였다. 1937년 하버드 대학 철학과에 입학하여 미학 과목을 수강하면서 들라크루아의 <일기 Journals>에 나오는 미학 개념에 관한 논문을 준비하기 시작했고, 1940년 뉴욕으로 와서 컬럼비아 대학 대학원에서 마이어 셔피로의 지도를 받았다. 이때부터 뉴욕의 초현실주의 화가들과 교류하면서 특히 오토마티즘 이론에 관심을 가졌다. 1941년 마타와 함께 멕시코를 여행한 후 본격적으로 회화에 몰두하기로 결심했다. 머더웰은 1951년 뉴욕의 헌터 칼리지의 부교수로 임용되었고 1959년까지 재직했다. 1958년에는 헬렌 프랭컨탤러와 결혼했고, 1962년부터 <파티잰 리뷰 Partisan Review>의 미술 편집장을 지냈다.
1940년대 초 머더웰이 회화와 콜라주 작품에서 표방한 기본적인 추상 이미지와 형태는 그의 작품 활동 기간 내내 지속적으로 나타났다. 1949년에는 유명한 연작 <스페인 공화국에 부치는 비가 Elegy to the Spanish Republic>를 제작하기 시작하여 1976년까지 150점에 달하는 회화 연작을 내놓았다. 스페인 동란에서 받은 감정적 충격이 계기가 된 이 작품들은 선명한 흑백 회화로 거칠게 그려진 수직 띠가 허공에 떠있는 달걀 형태를 양쪽에서 막고 있는 것이다. 이런 작품들을 통해 머더웰은 “이젤화의 전통에서 자신을 해방시키고 벽화로서의 회화 개념을 완성시켜 화면의 통일성을 간직한 채 끝없는 측면 확장을 가능하게 했다”고 한다. 1960년대 말 두 번째 주제인 ‘광활 Open’이 등장했는데 이 연작은 기하적 형태와 짙은 색채를 사용한 색면 회화로 대형 화면을 이용해 색채의 감각적 효과를 탐구했다. 같은 시기에 그는 판화가로도 특출한 재능을 보였다. 1970년대 중반에는 추상 표현주의 초기의 표현적인 강렬함과 장엄함을 바탕으로 1960년대 초의 작품 <아프리카>에서 이미지를 따온 세 번째 주제가 등장했다. 머더웰을 포함하여 추상 표현주의 화가들이 점차 자신감을 갖게 되면서 작품의 크기는 점점 거대해진 반면 초현실주의적 주제에 부여했던 중요성은 감소되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그림은 내용이 없는 것이 아니라 그림을 제작하는 과정 자체가 내용이라고 주장했고, 회화 재료의 감각적 성질과 그것을 다루는 기법에 더욱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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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토의 『일상적인 것들의 변용』 마지막장에서의


미술품에 대한 정의는 각 시대의 요구에 부응한다.
각 시대의 미적 판단은 그 시대 사람들의 취미와 미에 대한 관념에 근거하고 취미와 미에 대한 관념은 문화적 배경에 따라 다르다.
고급미술high art이냐 저급미술low art이냐 하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어떤 사람이 뮤지엄이나 화랑 혹은 전시장에서 “저것은 미술이 아니야!”라고 했다면 그 사람은 자신이 본 것이 미술품이 아니라고 주장하기보다는 고급 미술이 아니고 저급 미술임을 지적한 것으로 이해해야 될 것이다.
하지만 미술품이 반드시 고상해야 할 필요가 있을까?
미술은 고상한 미적 판단을 가진 사람들의 전유물이 아니다.
한때 모더니즘 이론가들은 고급 미술과 저급 미술이란 말로 미술품들을 구별했는데 어처구니없는 짓으로 “미술품이 왜 고급이어야만 하는가?”라고 물을 수 있기 때문이다.
미에는 미적 등급이 있을 수 없다. 다만 미적 판단의 척도가 있을 따름이다.
“미술은 표현이다 Art is expression”라는 말이 20세기 초 미적 판단의 척도로 제기되었다.
미술을 실재에 대한 모방으로 보지 않고 실재에 대한 느낌의 표현으로 보는 견해였다.
이런 미적 판단의 척도를 처음 제기한 사람은 앙리 마티스Henri Matisse(1869-1954)였다.
그는 에세이 『화가의 노트 Painter’s Note』에서 미술을 궁극적으로 표현이라고 주장했다.
표현은 ‘강조하다 pressing’ 혹은 ‘짜내다 squeezing out’란 뜻이지만 미술에서의 표현은 발랄한 은유를 뜻한다.
발랄한 은유가 미적 판단의 척도로 받아들여졌다.
찰스 로버트 다윈Charles Robert Darwin(1809-82)은 『인간과 동물의 감성의 표현 The Expression of the Emotions in Man and Animals』에서 인간은 자신의 감성적 상태를 표현한다고 했는데 이를 본능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인간은 외향적 습관으로 내적인 긴장감을 털어내는데 이를 표현이라 할 수 있다.
그런가 하면 표현은 욕망에 대한 만족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한 마디로 자아를 드러내는 것이다.
미적 경험과 관련해서 베네데토 크로체는 참다운 표현이란 오로지 미적 표현이라고 했는데 미적 표현이 아닌 것은 아예 표현으로 간주하지 않았다.
조지 산타야나는 『미의 느낌 The Sense of Beauty』에서 “표현이 아무것도 표현하지 않으면 이는 정녕 인상인 것이다”라고 했다.37)
미술이 표현임을 단토 역시 『일상적인 것들의 변용』에서 주장했고, 『미술의 종말 이후 After the End of Art』(1997)에서도 거듭 주장했다.
그는 대부분의 미술품들에는 해석할 만한 의미가 있게 마련이며 해석할 만한 의미가 없다거나 미처 발견되지 못하다면 그것들은 미술품이 아니거나 미술품임이 보류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해석될 수 있는 의미란 앞서 말한 예술가의 미적 관점이나 발랄한 은유의 형식으로 예술가 자신의 생각이나 느낌에 대한 표현을 말한다.
단토는 미술에 있어 흥미롭고 본질적인 것이란 예술가 자신이 갖고 있는 자발적 능력으로 우리로 하여금 그의 혹은 그녀의 눈을 통해 세계를 바라볼 수 있게 하는 것이라면서 “표현하는 것 -태도나 바라보는 방법- 에서 실패했다면 그 작품은 미술품이 될 수 없을 것이다”38)라고 했다.
단토는 또 “예술이 목적을 지니지 않았다고 상상하기란 어렵다. … 어떤 면에서 세계의 변용이나 확인은 경험하는 사람들에게 충분히 보여진다”39)고 했으며, “하나의 작품을 이해하는 것은 내가 생각하기에 늘 거기에 있는 그 은유(혹은 비유)를 포착하는 것이다”40)라고 했다.
단토의 주장은 매우 설득력이 있다.
노엘 캐롤Noel Carroll은 단토의 『일상적인 것들의 변용』 마지막장에서의 미술품에 대한 정의를 다섯 항목으로 요약했다.41)
1 미술품에는 주제가 있어야 한다.
2 미술품은 예술가의 태도나 견해를 제시해야 한다.
3 미술품은 수사적 생략들에 의한 것이다.
4 미술품은 역사적-이론적 미술세계 배경에서 오는 일부 생략추리적enthymematic 재료를 갖춘다.
5 미술품은 그것에 의해 수사적으로 제출된 생략추리적 간격들을 채우는 데 관람자들의 참여를 관여시킨다.
캐롤은 3의 경우 “생략들”보다는 비유들tropes이 더 적합하겠지만 1, 2, 3의 분류가 타당하다면서 단토가 미술품에 대한 이론적 기반들에 관해 7장에서 주로 언급했을지라도 4는 예증되지 못했다면서 5는 관람자들이 미술에 대한 단토의 개념을 받아들일 때만 타당할 수 있다고 보았다.
이에 대한 나의 의견은 다음과 같다.
1-3의 뜻은 미술품에는 반드시 어떤 의미가 있어야 하고, 그 의미는 예술가의 미적 태도나 세계를 바라보는 방식 혹은 견해를 표현한 것이다.
4와 5는 예술가와 관람자와의 관계를 위한 특징적 방법이다.
1-3만으로도 미술품을 위한 필요조건으로 충분하다고 생각되는데 모든 미술품이 예술가의 의도적 행위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뒤샹의 레디 메이드도 마찬가지로 여기에 속하는데 직접 생산하지 않았더라도 그것을 그의 의도적 행위의 산물로 보아야 한다.
그 이유는 그가 일상적인 것으로부터 미적 경험을 할 수 있는 미술품으로 변용시켰기 때문이다.
다만 한 가지 의문을 제기할 수는 있을 것이다.
모든 미술품이 예술가의 의도적 표현이라고 단정할 때 단토의 말대로 늘 일종의 미적 태도나 견해를 나타내야만 하는가 하는 문제다.
즉 미적 태도나 견해는 있더라도 예술가가 이를 표현하지 않으려는 대단히 겸손한? 미술품도 가능한가 하는 점이다.
나는 1-3에 해당하지 않는 그런 미술품을 머리에 떠올릴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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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상표현주의

  

<폴록과 친구들>(미술문화)에서

 다른 초현실주의자들은 마송과는 다른 오토마티즘 방법을 고안해냈는데, 그들 중 몇몇은 꿈의 이미지를 사용했다. 이는 기계적인 오토마티즘에 반대되는 심리적 오토마티즘의 한 종류로 살바도르 달리의 작품에서 볼 수 있다. 달리는 초현실주의의 오토마티즘 이론을 받아들여 보다 긍정적인 방법으로 변형시켰으며 이를 ‘편집증적 비평 방법’이라고 명명했다. 그의 이론에 따르면 예술가는 편집증 증상의 일종인 망상을 개발해야 하며 동시에 이성과 의지의 조절이 의도적으로 중지되었음을 의식할 수 있어야 한다고 한다. 그리고 이런 방식이 미술이나 시의 창작뿐만 아니라 일상생활에서도 사용되어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종종 라파엘 전파와 연결되는 섬세한 회화 기법을 사용하여 환각적 현실감을 창출했는데, 이것은 때때로 마술적 사실주의라고 불렸으며, 그가 묘사한 비현실적인 꿈의 공간, 이미지의 기이하고 환각적인 측면과 대조를 이루었다.
초현실주의자들은 때대로 엄격한 오토마티즘 방법보다는 우연을 이용하여 최초의 이미지를 얻는 방법으로 데칼코마니, 푸마주, 프로타주 등을 사용하기도 했다. 오토마티즘 회화에 사용된 데칼코마니decalcomanie는 1936년경 오스카르 도밍게스Oscar Dominguez(1906~58)에 의해 고안된 것으로 알려졌으며, 뒤에 막스 에른스트에 의해 유화에 적용되었다. 테네리페 태생의 스페인 화가이며 조각가 도밍게스는 1934년에 파리에 정착했고, 브르통과 엘뤼아르를 만났으며, 초현실주의 운동에 가담하여 1945년까지 몸담았다. 처음에는 달리의 화풍을 본떠 사실적인 그림을 그렸으나 1935년경부터 오토마티즘 기법을 채택했다. 그는 흰색의 얇은 종이 위에 넓은 붓으로 물감을 바른 다음 물감이 마르기 전에 다른 종이로 덮고 가볍게 문질러 물감이 아무렇게나 우연적으로 흐르도록 했다. 그 결과로 얻어진 작품에 호나상의 동굴, 밀림, 또는 바다 속의 생물이라는 제목을 붙였다. 브르통이 격찬한 이 기법의 핵심은 미리 주제나 형태를 구상하지 않고 그림을 만드는 데 있다. 도밍게스는 자신이 고안한 데칼코마니 오토마티즘 기법을 사용한 작품을 초현실주의 잡지 <미노토르 Minotaure>에 소개했다.
푸마주fumage는 1930년대 말 오스트리아계 멕시코 화가 볼프강 팔렌Wolfgang Paalen(1907~59)이 도입한 오토마티즘 기법으로 파렌은 종이 밑에 촛불을 대고 움직여 그을린 자국으로 기이하고 꿈과 같은 형상을 만들었다. 이는 무의식에 의한 자유로운 형상을 표현하기 위한 방법으로 초현실주의의 우연에 관한 이론의 좋은 예이다. 유화에 적용된 이 방법은 매우 유연한 리듬의 오토마티즘적인 붓질을 가능하게 했다. 팔렌은 1932~35년에 추상-창조 그룹의 회원으로 활동했고, 1936~40년에는 초현실주의 그룹에 가담했다. 그는 자신이 고안한 푸마주 기법을 ‘암울한 왕자들’이라고 불렀다. 그는 그림 속에 유성과 같은 줄무늬를 그려넣었으며 훗날 이를 숨겨진 신의 얼굴이라고 설명했다.
초현실주의자들이 개발한 오토마티즘 기법 중 하나인 프로타주frottage는 원칙적으로 놋쇠 기념패를 탁본하는 과정과 유사한 방법이며 이를 막스 에른스트가 고안했다. 에른스트는 1925년 8월 10일 숙소의 마룻바닥을 보다가 마루의 광택에 비치는 나무결에 주목하게 되었고 이로부터 생겨나는 불규칙한 패턴을 좇다가 이것을 종이 위에 옮겼다. 그는 이를 <자연사 Histoire naturelle>(1926)에서 밝혔다. 이후 나뭇잎의 잎맥, 마포의 결, 현대 회화의 붓자국 등으로 동일한 작업을 했으며 이런 우연적인 패턴을 회화 디자인의 기초로 이용했다. 이 방법은 나중에 유화에도 사용되었고 초현실주의자들은 이 방법을 잠재의식의 접근하기 위한 기법으로 채택했다.
초현실주의자들의 오토마티즘에 대한 관심은 추상 표현주의자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쳤으며 추상 표현주의 예술가 몇몇은 자신의 아이디어를 더욱 진전시켰다. 초현실주의자들은 일단 이미지가 오토마티즘적이거나 우연한 방법으로 형성되고 나면 그것을 완전히 의식적인 목적으로 신중하게 이용했지만, 폴록과 같은 액션 페인팅 화가의 경우는 원칙적으로 전체 창조 과정에 오토마티즘이 속속들이 배어들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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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상 표현주의와 오토마티즘 


추상 표현주의는 뉴욕 화파 예술가들의 작품을 가리키는 보편적인 명칭으로 뉴욕 화파에 속한 대부분의 예술가들은 1940년대 말에 이르러 성숙한 양식을 구사하게 되었고, 그때부터 1950년대 중반 사이에 이루어진 작품들이 가장 훌륭하다. 1965년 로스앤젤레스 카운티 미술관에서 열린 ‘뉴욕 화파-1940년대와 1950년대의 제1 세대 회화’ 전시회에 뉴욕 화파로 알려지게 된 예술가 15명의 작품이 전시되었는데 사실상 양식적인 일관성은 거의 없었다. 활동 시기와 장소가 우연히도 일치했다는 사실을 제외하면 미술사학자들과 평론가들이 그들을 하나의 화파로 묶을 이유는 없었다. 더구나 모든 작품이 추상적이거나 표현적인 것도 아니어서 추상 표현주의라는 명칭은 적절하지 않았다. 그들은 추상 표현주의 작품들을 일컫는 또 다른 명칭인 액션 페인팅의 특징으로 여겨지는 자기 표현적 붓놀림을 구사하지도 않았다.
추상 표현주의 화가들은 계획되지 않은 자발성을 통해 무의식 상태의 보편적인 창조력을 끌어내어 해방시킬 수 있다는 신념하에 초현실주의로부터 즉흥적으로 마음 속의 것을 끌어내는 원리와 오토마티즘automatism 기법을 주로 이어받았다. 오토마티즘은 무의식을 표현하기 위해 예술가가 손의 움직임에 대한 의식적 통제를 억제하는 방법으로 회화나 드로잉 또는 저술과 그 밖의 여러 작품의 제작에 사용되었다. 20세기에 두드러지게 나타난 현상으로서의 오토마티즘은 다다이스트들에 의해 우연의 효과를 노린 데서 확산되었다. 다다이스트들이 오토마티즘을 감정의 개입 없이 냉정하게 사용했던 데 반해 초현실주의자들은 오토마티즘을 통해 무의식을 탐험하여 철저하게 개인적 용도로 사용했다.
초현실주의의 교황 앙드레 브르통은 1924년에 발표한 제1차 <초현실주의 선언>에서 오토마티즘을 한 구절로 언급했는데, 문학 작품의 창작 방법에 대한 것이지만 드로잉과 회화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될 수 있다. “초현실주의자들의 마술적 예술의 비밀들 ... 다른 이들로 하여금 너에게 글을 쓸 수 있는 재료를 갖다 주게 하라. 마음을 그 자체에 집중시키기에 가장 좋은 상태로 돌입하라. 너를 가장 수동적이고 수용적으로 만들어라. 네 자신을 자신의 천재성, 자신의 재능으로부터, 그리고 다른 모든 사람의 재능과 천재성으로부터 떼어 놓아라.” 후에 브르통은 <초현실주의와 회화 Le Surrealisme et la peinture>(1928)에 적었다. “초현실주의의 근본적인 발견”은 “어떤 선입견적 의도도 없이 쓰기를 재촉하는 펜과 그리기를 재촉하는 연필이, 잠깐의 유행이 아니라 최소한 시인이 자신 안에 감추어 둔 감정적인 모든 것을 드러내줄 수 있는, 매우 고귀한 내용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르네 파스롱의 <간추린 초현실주의 백과사전>(1984)에 의하면 “오토마티즘적인 초현실주의 드로잉의 진정한 발명가”는 앙드레 마송Andre Masson(1896~1987)이다. “1923년 혹은 1924년경 마송의 드로잉들은 여기저기에 짐승이나 색의 윤곽선을 암시하는 듯한 ‘방황하는 선들’로 발전했다.” 마송은 곧 보다 정교한 오토마티즘 기법을 개발했는데 접착성 물질로 캔버스에 드로잉한 후 색 모래를 흩뿌려서 색을 입히는 방법이었다.
우아즈의 바라니 태생 프랑스 화가 앙드레 마송은 브뤼셀 아카데미에서 회화를 공부한 뒤 1912년 파리로 가서 에콜 데 보자르에 입학했다.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여 심한 부상을 입었다. 전쟁 중의 경험은 마송에게 커다란 영향을 끼쳐 인간의 본질과 운명에 대한 심오하고 난해한 호기심, 모든 사물의 상징적 통일에 대한 모호한 신념을 갖게 되었다. 하지만 이런 사고를 철학적으로 진전시킬 만한 지성이 부족했던 마송은 예술 활동을 통해 그런 사고를 통찰하고 표현하는 데 전념했다. 1950년에 쓴 <그린다는 기쁨 Le Plaisir de Peindre>에 적었다. “이것은 본능보다 사고가, 아니면 흔히 영감이라 불리는 것보다 지성이 우월하다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는 의미인가? 결코 그렇지 않다. 화가이자 시인들이 다루는 이질적인 요소들의 결합은 매우 빠른 시간 내에 이루어진다. 무의식과 의식, 직관과 이해는 초의식 상태에서 눈부신 일치를 이루도록 변화되는 것이 분명하다.”
마송은 1919년 파리로 돌아갔고 입체주의, 특히 후안 그리스의 영향을 받았고 동시에 앙드레 드랭의 영향도 받았다. 1922년부터는 초현실주의 운동의 창시자들인 미로, 에른스트, 시인 미셀 레리스, 조르주 랭부르와 친교했으며, 랭부르는 마송의 전시회 카탈로그 서문을 써주었다. 브르통의 주목을 받아 마송은 1924년에 초현실주의 운동에 동참했다. 특히 오토마티즘이라는 초현실주의적 실행에 깊은 인상을 받아 이를 ‘무의식의 힘에 대한 탐구’로 여기면서 1928년 브르통과의 의견 충돌 후 초현실주의 운동을 떠날 때까지 계속해서 이 기법으로 작업했다. 물감 대신 풀을 이용해 캔버스 위에 오토마티즘적인 그림을 그린 후 채색된 모래를 뿌려 색채를 입히는 방식으로 회화를 제작했다. 그의 작품은 즉흥적이고 암시적이며 상징적이었다.
1940년 미국으로 간 마송이 뉴욕 그룹의 피신해 온 초현실주의자들 중에서 아슐리 고르키와 함께 추상 표현주의의 초기 단계에 끼친 영향은 상당했다. 마송의 모래 회화에 나타난 오토마티즘과 잭슨 폴록이 실행한 미국 액션 페인팅 사이의 유사성은 여러 차례 지적되었다. 그는 1946년에 프랑스로 돌아가 이듬해 엑상프로방스에 정착했다. 마송은 매우 뛰어난 기법과 때로 모호하기는 하지만 독자적인 내적 시각, 외형을 날카롭게 포착하는 눈을 결합시켜 독창적인 작품을 제작했다. 그는 <그린다는 기쁨>에 적었다.
“상상력을 발휘하여 제작한 작품에서 놀라움의 효과가 사라진 뒤 나타나는 진정한 힘은 다음 세 가지 조건에서 나온 결과일 것이다. 첫째는 선행한 명상의 강도, 둘째는 외부 세계를 바라보는 신선한 시각, 셋째는 이 시대 미술에 걸맞는 회화적 수단을 알아내고자 하는 필요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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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창간호 잡지 <이모션 Emotion>에 기고한 글입니다.
제게 주어진 제목은 쿠르베와 마네의 작품에 나타난 에로스였습니다.


쿠르베와 마네의 에로스

고대미술에서 에로스는 등에 날개가 달려 있고, 활과 화살을 지니고 다니는 미남 청년으로 묘사되었지만, 갈수록 점점 어려지는 경향을 보여 헬레니즘 시대에는 마침내 어린아이가 되었다.
‘연애의 신’, 혹은 ‘사랑의 신’ 에로스에게는 동료가 둘 있었는데, 동경과 욕망이다.
에로스의 속성이기도 한 동경과 욕망은 지그문트 프로이트에 의해서 삶의 본능이면서 성적 에너지인 리비도libido가 되었다.
에로스가 후기 개념에서 성적 충동, 혹은 성욕으로 변질된 것이다. 따라서 근대 회화에서 에로스는 주로 성적 충동을 야기하는 누드 여성으로 등장한다.

19세기 중반 파리의 인구는 백만 명에 달했고 중심부에의 좁고 불결한 거리에 사람들이 밀집했다.
파리는 밤에 더 활기를 띄는 도시였는데, 카페, 술집, 홍등가, 서커스, 극장, 무도회장 등이 부쩍 늘었다.
파리의 근대화는 시민들에게 전통을 경시하는 태도를 취하게 했으며, 진보적인 것을 추구하는 취향을 갖게 했다.
프랑스 미술의 주도권은 살롱의 영향 밖에서 독자적으로 활동하던 미술가들에게도 옮겨지고 있었고, 구스타프 쿠르베(1819-77)와 에두아르 마네(1832-83) 두 사람의 활약이 돋보였다.
두 사람의 아방가르드 정신이 프랑스 미술에 불을 지폈는데, 당대의 삶을 진솔하게 반영한 데서 그의 회화는 유사해보이지만 저변에 깔린 의도는 사뭇 달랐다.

쿠르베가 새로운 사실주의의 창시자로 불리는 이유는 가공하지 않은 사실적 묘사가 현실의 인간을 이상화한 이전의 사실주의 예를 들면 티치아노의 것과는 달랐기 때문이다.
새로운 사실주의 대신에 리얼리즘이란 용어로 구별하지만 쿠르베의 회화를 그렇게 구분하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
Surrealism을 초사실주의라고 변역하지 않고 초현실주의라고 번역하듯 쿠르베의 realism을 현실주의로 번역하는 것이 본질에 근접한다.
그는 자신이 선택한 주제가 추하거나 저속하더라도 낭만적 과장이나 이국적 정서를 배제하는 가운데 오히려 장엄함, 혹은 위엄을 불어넣었으므로 오늘 날 우리는 그의 회화에서 당대 프랑스의 생생한 현실을 사진을 보듯 알 수 있다.
일화적인 주제를 반감정적으로 생생하게 재현하는 것으로 쿠르베는 회화의 새 지평을 열었다.

화가의 감정을 전달하지 않은 점에서 마네도 사실주의자로 불리지만 쿠르베와 달리 유지 안료를 캔버스에 직접 칠해 밝은 부분을 얻고 마르기 전에 중간 색조나 어두운 안료를 그 위에 덧칠하는 독창적인 기법을 통해 긴장과 동적인 점을 조장함으로써 마네는 쿠르베의 현실주의와는 거리가 있었다.
마네가 그린 「그리스도와 천사 Les Anges au Tombeau du Christ」를 보고 한 번도 천사를 본 적이 없는 마네가 어떻게 확신에 차서 천사를 자세히 묘사할 수 있느냐고 쿠르베가 비난 한 것이 두 사람 회화의 본질적 차이를 말해준다.
쿠르베는 마네와 달리 독창적 기법을 갖고 있지 못했으므로 현실을 더욱 생생하게 묘사할 수 있었는지 모른다.

「목욕하는 사람」은 1853년 살롱에 전시되어 대중의 야유를 불러일으켰는데, 쿠르베에 의하면 예비 전시에 참관한 나폴레옹 3세가 말채찍으로 캔버스를 내리쳤고, 황후는 관람자를 향한 여인의 등을 말 엉덩이에 비유했다고 한다.
전시가 시작되자 상당 수의 관람자들이 몰려들었으며 그들의 체면을 위해 경찰이 작품을 떼어낼 걸 고려했다.
과격한 그림을 그려 젊은 화가들의 리더가 된 낭만주의 화가 외젠 들라크루아조차도 쿠르베의 작품에서 인물이 저속하게 표현되고 의도가 불확실한 점을 비난했다.
쿠르베에 대한 비난은 당대 프랑스인의 취향이 반영된 것으로 에로스를 상징하는 누드 여성이 장-오귀스트-도미니크 앵그르의 작품에서처럼 제스처가 단정치 못하고, 고전적 순박한 모습에 반하기 때문이다.
“의도가 불확실”한 건 지적받을 만했는데, 여인들의 극적인 제스처를 뒷받침할 만한 암시가 화면에 전혀 없는 가운데 매우 부자연스럽기 때문이다.
여인이 물가에 왼발을 딛고 오른팔을 앞으로 죽 내밀며 의도적인 제스처를 취하는 중에 같은 방향으로 두 팔을 뻗은 하녀는 지나칠 정도로 몸을 꼬고 있다.
하지만 쿠르베는 이 작품을 파는 데 어려움이 없었는데, 부유한 수집가 알프레드 브뤼야스가 구입했으며 그는 훗날 쿠르베의 절친한 친구이자 후원자가 되었다.

누드가 사실적으로 묘사된 것으로 봐서 모델을 사용했거나 사진을 참조로 한 것으로 추정된다.
실재를 옮긴 누드의 뒷모습이 추한 인상을 심어주어 어느 비평가는 악어조차 입맛을 잃어버리게 했다고 혹평했다.
하녀의 오른발에 양말이 흘러내리고 왼발 양말은 진흙이 묻은 발아래 흩어져 있으며, 더러운 발이 관람자에게 적잖은 충격을 준다.
쿠르베는 길고 잘 휘어지는 팔레트 나이프를 사용하여 배경의 풍성한 잎들을 두터운 물감으로 쓱쓱 문질러 표현하면서 여인의 옷을 나뭇가지에 걸쳐 놓았다.

「잠」은 터키의 대사 칼릴 베이의 의뢰를 받아 그린 것으로 의뢰자가 에로틱한 회화를 선호하고 사치스러운 기호를 가졌으므로 그의 취향에 부응해 한 쌍 레즈비언의 자세를 과격하게 하고, 고급 물병과 잔, 진주목걸이, 동양풍의 테이블 위에 화병으로 화면을 장식하여 한 쌍이 부유층임을 암시한 작품이다.
금발 여인에게 오른발을 걸친 붉은 머리카락의 여인은 화가 제임스 맥닐 휘슬러의 정부 조안나 헤퍼난이다. 귀걸이와 머리핀이 여인들의 발 근처에 있는 걸로 미루어 두 여인이 격정의 몸부림을 쳤을 것으로 짐작되며, 조안나가 성욕에 사로잡혀 드레스를 서둘러 벗은 것으로 상상이 된다.
그가 일본 판화나 포르노 삽화에서 영감을 받아 그렸을 것으로 추정된다.

쿠르베는 1870년에 프랑스 최고훈장 레종 도뇌르를 거부했고, 이듬해 파리코뮌 때 나폴레옹 1세의 동상을 파괴한 혐의로 투옥되었으며, 1873년 7월에 스위스로 망명한 뒤 1877년 12월 31일에 그곳에서 객사했다.

인상주의를 연구한 미술사학자 존 르왈드는 “소심한 화가들이 카미유 코로의 영향을 받은 반면 대담한 화가들은 쿠르베와 마네의 영향을 받았다”고 했다.
마네가 아방가르드 화가들의 주목을 끈 건 「풀밭에서의 오찬 (피크닉)」을 그리고 나서였다.
묘한 분위기의 이 작품이 낙선전에 출품되었고, 나폴레옹 황제 3세가 “뻔뻔스런 그림”이라고 비난했으므로 사람들은 더욱 더 그 작품을 보려고 주말이면 전시장 밖에 줄을 섰다.
낙선전은 작품이 왜 살롱에 부적절한지를 대중에게 알리는 것이 목적이었지만 실험적 작품들이 무수한 여론을 조성했으며, 「풀밭에서의 오찬 (피크닉)」이 그 중심에 있었다.

황제의 말에 동조하면서 평론가 아메르통은 말했다.

“철면피 같은 프랑스 미술가 마네의 그림은 조르조네의 「페테 샴페트르」를 프랑스의 사실주의로 해석한 것이다.
비록 여인들이 벌거벗었지만 조르조네의 그림은 아름다운 색상으로 용서받을 만했다.
그러나 마네의 그림에는 사내들의 복장이 아주 해괴망측하고 다른 여인은 스미즈차림으로 냇가에서 나오고 있으며, 두 사내는 바보 같은 눈짓을 한다.”

평론가들은 도덕성에 초점을 두고 비난했지만, 그것 말고도 사람들을 당혹스럽게 한 문제가 있었다.
무릎 위에 올려진 누드의 팔꿈치가 너무 불안해보이고 다리는 어색하게 꼬여있다.
그녀의 자세는 부자연스러울 뿐만 아니라 불편해보이기까지 한다.
더욱이 심각한 구성은 중간 거리쯤에서 독특한 제스처로 목욕하는 여인의 모습이 오른편의 보트가 작게 보일 정도로 원근에 비해 크게 그려진 것이다.
마네는 화면의 공간을 평편하게 표현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그런 방식을 선택했지만 그의 의도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풀밭에서의 오찬 (피크닉)」은 스페인 의상을 한 두 중년 신사와 여인이 준비해온 오찬을 풀밭에 펼쳐놓고 한가로운 시간을 보내는 장면으로 주말이면 중산층이 센 강가로 피크닉 가서 오찬을 즐기는 건 흔한 일이지만, 여인이 누드로 앉아 있는 경우는 없다.
여인은 마네가 아끼던 모델 빅토린 뫼랑이다.
마네는 아틀리에에서 누드를 그린 뒤 피크닉 장소에 있는 것처럼 삽입했다.
두 사내는 마네의 동생과 여동생의 미래 남편이다.
센 강가에서 일광욕을 즐기는 여인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친구 프루스트에게 “나도 누드를 그려야 할 것 같아. 음, 내가 저들에게 누드를 보여주겠어!”라고 말한 적이 있는 대로 마네는 누드를 보여주기 위해 풀밭에서의 오찬을 연출했다.
기존 걸작의 사례를 좇아 그는 전경에 몇 가지 정물을 포함시켰는데, 술병과 황금색 빵 덩어리, 그 옆에는 체리, 무화과, 복숭아를 바구니 밖으로 굴러 나와 있게 했다.
바구니를 여인들이 벗어놓은 옷가지 위에 놓았다.
화면 꼭대기의 새와 왼편 하단 구석의 개구리만이 관람자에게 친근감을 준다.
뫼랑이 관람자를 빤히 응시하고 있어 그녀의 누드를 보는 관람자에게 수치심을 느끼게 만든다.

마네의 에로스는 「풀밭에서의 오찬 (피크닉)」보다 먼저 구성한 「올랭피아에서」두드러졌다.
모델은 역시 뫼랑이다.
티치아노의 「우르비노의 비너스」를 새롭게 해석하면서 미를 상징하는 여신 대신 창녀처럼 보이는 누드를 침대에 누이고 옆에 꽃다발을 배달하는 흑인 하녀를 세웠다.
올랭피아는 당시 프랑스 화류계에서 흔한 이름이었다.
마네가 이 그림을 그릴 때 역사적인 인물 올랭피아 말다치니 팜필리를 염두에 둔 것 같았다.
교황 이노켄티우스 10세 동생의 미망인이었던 이 여인은 교황의 연인이 되어 권력을 행사했다.
마네는 뫼랑 발끝에 보일 듯 말듯 고양이를 그려 넣어 에로틱한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고양이는 프랑스어로 여성의 음부를 뜻한다.
시인 샤를 보들레르의 “왕비의 발아래서 발기하고 있는 고양이처럼”이란 구절에서 마네가 영감을 받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사람들은 이 작품을 “비너스와 고양이”라고 불렀다.
놀라운 사실은 「풀밭에서의 오찬 (피크닉)」이 살롱에서 배척된 데 반해 이 작품이 2년 후의 살롱에 받아들여진 것이다.
에밀 졸라는 마네가 “파리 시민들을 그들 시대의 한 여인에게 소개했다”는 말로 「올랭피아」에 지지를 표명했다.
에로스가 창녀의 누드로 살롱에서 파리 시민들을 만났다.

도판
명화 223 구스타프 쿠르베, 「목욕하는 사람 The Bathers」, 캔버스에 유채, 227-193cm, 1853, Musée Fabre, Montpellier
파이돈 206 구스타프 쿠르베, 「잠 Sleep」, 캔버스에 유채, 135-200cm, 1866, Musée du Petit Palais, Paris
명화 235 에두아르 마네, 「풀밭에서의 오찬 (피크닉) Le Dejeuner sur l'herbe(Le Bain)」, 캔버스에 유채, 208-264.5cm, 1863, Musée d'Orsay, Paris
마네 82 에두아르 마네, 「올랭피아 Plympia」, 캔버스에 유채, 130.5-190cm, 1863, Musée d'Orsay, Par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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