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은 창간호 잡지 <이모션 Emotion>에 기고한 글입니다.
제게 주어진 제목은 쿠르베와 마네의 작품에 나타난 에로스였습니다.
쿠르베와 마네의 에로스
고대미술에서 에로스는 등에 날개가 달려 있고, 활과 화살을 지니고 다니는 미남 청년으로 묘사되었지만, 갈수록 점점 어려지는 경향을 보여 헬레니즘 시대에는 마침내 어린아이가 되었다.
‘연애의 신’, 혹은 ‘사랑의 신’ 에로스에게는 동료가 둘 있었는데, 동경과 욕망이다.
에로스의 속성이기도 한 동경과 욕망은 지그문트 프로이트에 의해서 삶의 본능이면서 성적 에너지인 리비도libido가 되었다.
에로스가 후기 개념에서 성적 충동, 혹은 성욕으로 변질된 것이다. 따라서 근대 회화에서 에로스는 주로 성적 충동을 야기하는 누드 여성으로 등장한다.
19세기 중반 파리의 인구는 백만 명에 달했고 중심부에의 좁고 불결한 거리에 사람들이 밀집했다.
파리는 밤에 더 활기를 띄는 도시였는데, 카페, 술집, 홍등가, 서커스, 극장, 무도회장 등이 부쩍 늘었다.
파리의 근대화는 시민들에게 전통을 경시하는 태도를 취하게 했으며, 진보적인 것을 추구하는 취향을 갖게 했다.
프랑스 미술의 주도권은 살롱의 영향 밖에서 독자적으로 활동하던 미술가들에게도 옮겨지고 있었고, 구스타프 쿠르베(1819-77)와 에두아르 마네(1832-83) 두 사람의 활약이 돋보였다.
두 사람의 아방가르드 정신이 프랑스 미술에 불을 지폈는데, 당대의 삶을 진솔하게 반영한 데서 그의 회화는 유사해보이지만 저변에 깔린 의도는 사뭇 달랐다.
쿠르베가 새로운 사실주의의 창시자로 불리는 이유는 가공하지 않은 사실적 묘사가 현실의 인간을 이상화한 이전의 사실주의 예를 들면 티치아노의 것과는 달랐기 때문이다.
새로운 사실주의 대신에 리얼리즘이란 용어로 구별하지만 쿠르베의 회화를 그렇게 구분하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
Surrealism을 초사실주의라고 변역하지 않고 초현실주의라고 번역하듯 쿠르베의 realism을 현실주의로 번역하는 것이 본질에 근접한다.
그는 자신이 선택한 주제가 추하거나 저속하더라도 낭만적 과장이나 이국적 정서를 배제하는 가운데 오히려 장엄함, 혹은 위엄을 불어넣었으므로 오늘 날 우리는 그의 회화에서 당대 프랑스의 생생한 현실을 사진을 보듯 알 수 있다.
일화적인 주제를 반감정적으로 생생하게 재현하는 것으로 쿠르베는 회화의 새 지평을 열었다.
화가의 감정을 전달하지 않은 점에서 마네도 사실주의자로 불리지만 쿠르베와 달리 유지 안료를 캔버스에 직접 칠해 밝은 부분을 얻고 마르기 전에 중간 색조나 어두운 안료를 그 위에 덧칠하는 독창적인 기법을 통해 긴장과 동적인 점을 조장함으로써 마네는 쿠르베의 현실주의와는 거리가 있었다.
마네가 그린 「그리스도와 천사 Les Anges au Tombeau du Christ」를 보고 한 번도 천사를 본 적이 없는 마네가 어떻게 확신에 차서 천사를 자세히 묘사할 수 있느냐고 쿠르베가 비난 한 것이 두 사람 회화의 본질적 차이를 말해준다.
쿠르베는 마네와 달리 독창적 기법을 갖고 있지 못했으므로 현실을 더욱 생생하게 묘사할 수 있었는지 모른다.
「목욕하는 사람」은 1853년 살롱에 전시되어 대중의 야유를 불러일으켰는데, 쿠르베에 의하면 예비 전시에 참관한 나폴레옹 3세가 말채찍으로 캔버스를 내리쳤고, 황후는 관람자를 향한 여인의 등을 말 엉덩이에 비유했다고 한다.
전시가 시작되자 상당 수의 관람자들이 몰려들었으며 그들의 체면을 위해 경찰이 작품을 떼어낼 걸 고려했다.
과격한 그림을 그려 젊은 화가들의 리더가 된 낭만주의 화가 외젠 들라크루아조차도 쿠르베의 작품에서 인물이 저속하게 표현되고 의도가 불확실한 점을 비난했다.
쿠르베에 대한 비난은 당대 프랑스인의 취향이 반영된 것으로 에로스를 상징하는 누드 여성이 장-오귀스트-도미니크 앵그르의 작품에서처럼 제스처가 단정치 못하고, 고전적 순박한 모습에 반하기 때문이다.
“의도가 불확실”한 건 지적받을 만했는데, 여인들의 극적인 제스처를 뒷받침할 만한 암시가 화면에 전혀 없는 가운데 매우 부자연스럽기 때문이다.
여인이 물가에 왼발을 딛고 오른팔을 앞으로 죽 내밀며 의도적인 제스처를 취하는 중에 같은 방향으로 두 팔을 뻗은 하녀는 지나칠 정도로 몸을 꼬고 있다.
하지만 쿠르베는 이 작품을 파는 데 어려움이 없었는데, 부유한 수집가 알프레드 브뤼야스가 구입했으며 그는 훗날 쿠르베의 절친한 친구이자 후원자가 되었다.
누드가 사실적으로 묘사된 것으로 봐서 모델을 사용했거나 사진을 참조로 한 것으로 추정된다.
실재를 옮긴 누드의 뒷모습이 추한 인상을 심어주어 어느 비평가는 악어조차 입맛을 잃어버리게 했다고 혹평했다.
하녀의 오른발에 양말이 흘러내리고 왼발 양말은 진흙이 묻은 발아래 흩어져 있으며, 더러운 발이 관람자에게 적잖은 충격을 준다.
쿠르베는 길고 잘 휘어지는 팔레트 나이프를 사용하여 배경의 풍성한 잎들을 두터운 물감으로 쓱쓱 문질러 표현하면서 여인의 옷을 나뭇가지에 걸쳐 놓았다.
「잠」은 터키의 대사 칼릴 베이의 의뢰를 받아 그린 것으로 의뢰자가 에로틱한 회화를 선호하고 사치스러운 기호를 가졌으므로 그의 취향에 부응해 한 쌍 레즈비언의 자세를 과격하게 하고, 고급 물병과 잔, 진주목걸이, 동양풍의 테이블 위에 화병으로 화면을 장식하여 한 쌍이 부유층임을 암시한 작품이다.
금발 여인에게 오른발을 걸친 붉은 머리카락의 여인은 화가 제임스 맥닐 휘슬러의 정부 조안나 헤퍼난이다. 귀걸이와 머리핀이 여인들의 발 근처에 있는 걸로 미루어 두 여인이 격정의 몸부림을 쳤을 것으로 짐작되며, 조안나가 성욕에 사로잡혀 드레스를 서둘러 벗은 것으로 상상이 된다.
그가 일본 판화나 포르노 삽화에서 영감을 받아 그렸을 것으로 추정된다.
쿠르베는 1870년에 프랑스 최고훈장 레종 도뇌르를 거부했고, 이듬해 파리코뮌 때 나폴레옹 1세의 동상을 파괴한 혐의로 투옥되었으며, 1873년 7월에 스위스로 망명한 뒤 1877년 12월 31일에 그곳에서 객사했다.
인상주의를 연구한 미술사학자 존 르왈드는 “소심한 화가들이 카미유 코로의 영향을 받은 반면 대담한 화가들은 쿠르베와 마네의 영향을 받았다”고 했다.
마네가 아방가르드 화가들의 주목을 끈 건 「풀밭에서의 오찬 (피크닉)」을 그리고 나서였다.
묘한 분위기의 이 작품이 낙선전에 출품되었고, 나폴레옹 황제 3세가 “뻔뻔스런 그림”이라고 비난했으므로 사람들은 더욱 더 그 작품을 보려고 주말이면 전시장 밖에 줄을 섰다.
낙선전은 작품이 왜 살롱에 부적절한지를 대중에게 알리는 것이 목적이었지만 실험적 작품들이 무수한 여론을 조성했으며, 「풀밭에서의 오찬 (피크닉)」이 그 중심에 있었다.
황제의 말에 동조하면서 평론가 아메르통은 말했다.
“철면피 같은 프랑스 미술가 마네의 그림은 조르조네의 「페테 샴페트르」를 프랑스의 사실주의로 해석한 것이다.
비록 여인들이 벌거벗었지만 조르조네의 그림은 아름다운 색상으로 용서받을 만했다.
그러나 마네의 그림에는 사내들의 복장이 아주 해괴망측하고 다른 여인은 스미즈차림으로 냇가에서 나오고 있으며, 두 사내는 바보 같은 눈짓을 한다.”
평론가들은 도덕성에 초점을 두고 비난했지만, 그것 말고도 사람들을 당혹스럽게 한 문제가 있었다.
무릎 위에 올려진 누드의 팔꿈치가 너무 불안해보이고 다리는 어색하게 꼬여있다.
그녀의 자세는 부자연스러울 뿐만 아니라 불편해보이기까지 한다.
더욱이 심각한 구성은 중간 거리쯤에서 독특한 제스처로 목욕하는 여인의 모습이 오른편의 보트가 작게 보일 정도로 원근에 비해 크게 그려진 것이다.
마네는 화면의 공간을 평편하게 표현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그런 방식을 선택했지만 그의 의도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풀밭에서의 오찬 (피크닉)」은 스페인 의상을 한 두 중년 신사와 여인이 준비해온 오찬을 풀밭에 펼쳐놓고 한가로운 시간을 보내는 장면으로 주말이면 중산층이 센 강가로 피크닉 가서 오찬을 즐기는 건 흔한 일이지만, 여인이 누드로 앉아 있는 경우는 없다.
여인은 마네가 아끼던 모델 빅토린 뫼랑이다.
마네는 아틀리에에서 누드를 그린 뒤 피크닉 장소에 있는 것처럼 삽입했다.
두 사내는 마네의 동생과 여동생의 미래 남편이다.
센 강가에서 일광욕을 즐기는 여인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친구 프루스트에게 “나도 누드를 그려야 할 것 같아. 음, 내가 저들에게 누드를 보여주겠어!”라고 말한 적이 있는 대로 마네는 누드를 보여주기 위해 풀밭에서의 오찬을 연출했다.
기존 걸작의 사례를 좇아 그는 전경에 몇 가지 정물을 포함시켰는데, 술병과 황금색 빵 덩어리, 그 옆에는 체리, 무화과, 복숭아를 바구니 밖으로 굴러 나와 있게 했다.
바구니를 여인들이 벗어놓은 옷가지 위에 놓았다.
화면 꼭대기의 새와 왼편 하단 구석의 개구리만이 관람자에게 친근감을 준다.
뫼랑이 관람자를 빤히 응시하고 있어 그녀의 누드를 보는 관람자에게 수치심을 느끼게 만든다.
마네의 에로스는 「풀밭에서의 오찬 (피크닉)」보다 먼저 구성한 「올랭피아에서」두드러졌다.
모델은 역시 뫼랑이다.
티치아노의 「우르비노의 비너스」를 새롭게 해석하면서 미를 상징하는 여신 대신 창녀처럼 보이는 누드를 침대에 누이고 옆에 꽃다발을 배달하는 흑인 하녀를 세웠다.
올랭피아는 당시 프랑스 화류계에서 흔한 이름이었다.
마네가 이 그림을 그릴 때 역사적인 인물 올랭피아 말다치니 팜필리를 염두에 둔 것 같았다.
교황 이노켄티우스 10세 동생의 미망인이었던 이 여인은 교황의 연인이 되어 권력을 행사했다.
마네는 뫼랑 발끝에 보일 듯 말듯 고양이를 그려 넣어 에로틱한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고양이는 프랑스어로 여성의 음부를 뜻한다.
시인 샤를 보들레르의 “왕비의 발아래서 발기하고 있는 고양이처럼”이란 구절에서 마네가 영감을 받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사람들은 이 작품을 “비너스와 고양이”라고 불렀다.
놀라운 사실은 「풀밭에서의 오찬 (피크닉)」이 살롱에서 배척된 데 반해 이 작품이 2년 후의 살롱에 받아들여진 것이다.
에밀 졸라는 마네가 “파리 시민들을 그들 시대의 한 여인에게 소개했다”는 말로 「올랭피아」에 지지를 표명했다.
에로스가 창녀의 누드로 살롱에서 파리 시민들을 만났다.
도판
명화 223 구스타프 쿠르베, 「목욕하는 사람 The Bathers」, 캔버스에 유채, 227-193cm, 1853, Musée Fabre, Montpellier
파이돈 206 구스타프 쿠르베, 「잠 Sleep」, 캔버스에 유채, 135-200cm, 1866, Musée du Petit Palais, Paris
명화 235 에두아르 마네, 「풀밭에서의 오찬 (피크닉) Le Dejeuner sur l'herbe(Le Bain)」, 캔버스에 유채, 208-264.5cm, 1863, Musée d'Orsay, Paris
마네 82 에두아르 마네, 「올랭피아 Plympia」, 캔버스에 유채, 130.5-190cm, 1863, Musée d'Orsay, Paris